2019년 무천문학(8편) 마음으로 읽는 시/신작시 2019-10-01 09:33:06 낫 낫자루 꼬나 쥐고 풀 머리채를 잡는다 기역자로 등이 굽지 않았으면 하지 못했을 일을 낫은 제 임무라는 듯 풀들을 쳐낸다 쳐낼수록 봉두난발로 저항하는 풀들 앞에서 하늘도 새파랗게 질렸다 머리끝에 아득히 뜬 손톱달이 등 굽은 낫날처럼 뭉게구름 설겅설겅 쳐내며 흘러간다 절도범들 아무리 주인의 감시가 없다 해도 저렇게 여유로울 수 없다 원래 정직하다고 믿었던 놈들인데 세상에나, 세상에나 꽃 앞에서 보초를 서면서 뒤로 꽃가루를 빼돌리는 벌들의 낯짝이 저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노모의 금고 문맹인 노모도 금고 하나쯤 꿰차고 있었다 금고가 열리는 날은 노모의 생일이나 명절날 이 때 손주들이 오면 노모는 기다렸다는 듯 긴 치마를 훌렁 걷어 부치고 속주머니를 열어 옜다, 손주들이 배춧잎 한 장씩 쥐고 소리 지르며 뛰어다닐 때 궁금증은 더해갔다 아무리 돈이 탐이 나도 훔칠 수 없고 아이디나 비밀번호 없어도 노모의 기분에 따라 금고가 척척 열리고 닫히기에 스위스 비밀계좌보다 더 안전했다 자식들이 떠나면서 노모에게 용돈 몇 장을 쥐어주었다 노모는 치마 속 금고를 열어 방금 자식들에게서 받은 지폐 몇 장을 입금시켰다 구멍 창고 문짝에 낡은 자물통 매달려 있다 녹슨 살결만 봐도 그의 과거는 순탄치 않았다 허구한 날 열쇠만 기다리다 그림자처럼 벽에 걸린 지도 여러 해 노름에 미친 주인장이 한순간에 말아 먹은 집 가족들은 낙엽처럼 흩어지고 빈집에는 풀들만 아우성쳤다 창고지기를 자처했던 자물통이 열쇠와 생이별한 것도 이때다 그리움은 컸지만 주인이 없으니 자물통의 몰골은 초췌해지고 구멍 속엔 잔뜩 허무만 쌓였다 주인이 찾아와 창고 문짝이 열리기를 바라며 굳건히 창고를 지키는 자물통 비바람에 맞아도 오매불망 주인만을 기다리는 일편단심으로 그의 살결은 불그죽죽 녹슬어갔다 제비 그는 밤이면 룸살롱으로 간다. 그를 기다리는 여자들은 낮부터 술에 취해 흔들거리고 립스틱 입술을 흰 와이셔츠에 문대며 손을 내민다. 쑥스럽게 잡은 손들이 붉은 조명발에 황홀한 물결처럼 출렁인다. 날렵한 꽁지로 물을 찍어 날아오르듯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찍어 날렵하게 춤을 춘다. 촌사람들은 그가 춤바람으로 강남을 주름잡았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가끔 그의 엄마가 룸살롱에 찾아와 시골에서 살자고 애걸복걸했지만 되레 둥지를 없앤 아버지를 탓했다. 돌아갈 둥지가 없다며 제비처럼 재잘거렸다. 팽이 맞지 않으면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의 몸은 채찍질로 부서졌다 등짝을 맞아야 살판났다 둥근 엉덩이 빙판에 대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춤이 그의 삶이었다 춤으로 세월을 보낸 그의 등짝엔 채찍으로 맞은 흔적이 연륜처럼 아로 새겨져 있었다 빙판을 황홀한 무대로 선보일 땐 휘날리는 눈발의 숫자만큼 채찍의 숫자도 늘어났다 주범 둑길에 고이 모셔 놓은 고무신에서 수상한 냄새가 난다 묵은 들풀 냄새 솔솔 피어오르듯 알 수 없는 이별 냄새가 피어오른다 풀벌레가 신발 속을 수시로 드나들고 새들이 제 집처럼 둥지 튼 걸 보면 아마도 신발의 임자는 오래전에 가출한 농부였을 것이다 형사들이 밤낮으로 저수지를 뒤졌지만 익사체는 찾지 못했다 저수지가 주범 같지만 물증이 없어 둑길의 풀들도 답답하다고 머리채를 흔들었다 아마도 주인은 둑에 고무신 한 짝 벗어 놓고 생전처럼 쟁기로 뭉게구름을 갈고 있을지 모른다 장미다방 앞에서 장미다방 담벼락에 오토바이가 넘어져 있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쉬는 줄 알았지만 낡은 몸체 위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다 어깨만큼 넓은 손잡이는 부러져 있고 타이어는 터져 내장이 널브러져 있다 지금까지 달려 왔던 길을 기억하기 싫다는 듯 타이어의 지문은 말끔히 지워져 있다 아마도 장미다방의 레지를 싣고 달렸을 오토바이 운전대를 잡은 노랑머리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강변도로를 달릴 때 타올랐을 저녁놀처럼 담벼락은 온통 피칠갑이다 레지가 노랑머리의 허리를 끌어안듯 장미 넝쿨이 오토바이를 끌어안고 있다 오토바이는 저런 모습으로 길을 달려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바람처럼 사라진 레지를 그리워하듯 장미 넝쿨은 오토바이를 휘감으며 저녁놀처럼 달아오르고 있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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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천문학
2019년 무천문학(8편)
총알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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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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