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좌도시 동인시
마음으로 읽는 시/신작시
2018-03-08 16:04:08
(테마 시)
기일
늙은 아버지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고갯마루를 넘어간다
나비가 흰 날개를 펄럭이듯
넘어가는 길 끝에 고향이 있다
두루마기 차림의 아버지 뒤를 따라 가면
밭둑마다 자운영들이
주단처럼 깔려 길손을 반긴다
자운영 무리 속에서
흐느끼는 풀벌레도 호곡 소리를 낸다
누가 죽어 저렇게 애닯은가
소리 없이 떠오르는
보름달마저 조등 같다
(테마 산문)
중학교 때 이웃 마을로 이사를 간 후로 고향에 가는 날은 한해 두세 번이다
명절이나 기일이면 아버지는 흰 두루마기에 망건차림으로 고향 땅을 밟는다
그것도 고향 어귀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가면 좋으련만
한 승강장 못 미쳐 내려 고갯마루를 넘어간다
고갯마루를 타고 내려가면 골짝에는 자운영들이 주단을 깔아 길손들을 반기고
여치도 발자국 소리에 놀라 갈갈거리며 운다
아버지 세상 뜨신지 아득하지만 기일이 되면 아버지와 동행했던 고향길이
추억 속에서 보름달처럼 떠오른다
(동인시)
백일홍 연가
혁명의 시대가 갔다고 말하지 마라
꽃밭을 뒤덮은 백일홍 속에
아직도 혁명의 기운은 남아 있다
백일홍에서 혁명을 떠올리는 것은
러시아 여행 때 보았던 붉은 광장 때문이다
그 때 거리를 휩쓸었던 노동자들의 붉은 깃발이
백일홍처럼 무리무리 고개 쳐들고
다른 세상을 꿈꾸었으리라
연약한 백일홍이 어떻게 백일을 견디나 걱정도 했지만
붉은 기질로 핏대 세워 서 있으면
거뜬히 백일을 견디고도 남으리라
혁명의 시대가 갔다고 말하지 마라
불꽃 튀는 여름을 견디는 백일홍을 보면 안다
얼마나 혁명이 힘들고 무서운지를 안다
코스모스 시위대
시골 들판에 시위대들이 운집했다
가을이면 몸살 나는 시위에
구경꾼들의 마음도 심란했다
눈물 많은 사내들과
바람 든 여인네들이
싱숭생숭하는 마음을
들판에 풀어놓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연분홍 깃발을 든 시위대들의 구호는
아름다운 가을을 보장하라는 것
그러나 시위 행렬이 생각보다 질서정연해서
전경들은 이미 철수를 했고
벌들만 꽃 침을 쏘며 행렬을 막았다
시위대가 홍수처럼 불어나자
벌들도 무장해제
구경꾼과 뒤섞여 휴대폰 세례를 받기도 했다
구호도 함성도 분노도 없는 이곳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위대가 있을까
박주가리
산에 갔다 온 아이가
엄마 신발을 닮았다며 박주가리 한 개를 따왔다
엄마는 옛날에 집을 나갔다
아이가 철들 무렵
엄마가 부엉새처럼 집에 찾아와
옆집 문틈에 귀를 대고 훌쩍이는 날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주정뱅이 아버지는
엄마를 땅에 내동댕이치곤 했다
그때 벗겨졌던 엄마의 신발이
아직도 마루 밑에서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보쌈 이야기
보쌈 먹는 여자의 몸뻬바지가 잘 어울렸다
몸빼바지만 보면 여자는 영락없는 촌부
그녀가 부잣집 딸에서 촌부가 된 데는
말 못할 사연이 있었다
전직이 도둑이었던 남편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구레나룻 성성하던 남편
쳐다만 봐도 오금 저리는 얼굴로
여자의 집 담장을 넘는데
사납다는 불독도 짖지 않았다
귀금속을 훔치다가
잠자는 여자의 미모에 반해 그만
여자를 자루 속에 집어넣고 보쌈을 해 온 날이 삽 십년
여자는 가끔 뒤웅박 팔자가 된 것을 탓했지만
꽃 같은 아들딸이 있어 참고 살았다
보쌈을 먹으면서 듣는 여자의 얘기가
한 편의 동화 같았지만
사람 된 남편은 들소처럼 웃기만 할 뿐이었다
붉은 오지
빚쟁이가 오지 산속으로 도망을 갔다
길조차 희미해서
일단 들어 갔다하면 나올 수 없는 곳
갓난아기까지 달고 갔지만 툭 하면 갸릉갸릉 울었다
바람소리에 놀라고 달빛 소리에 놀라고
벌들의 날갯짓소리에도 놀라더니만
이마가 절절 끓었다
안개 낀 산마루 너머에 병원이 있었지만
아득한 꿈길 같아 산속만 헤맸다
예전에 달여 먹은 적 있었던 붉은 열매
그것이 치자라는 걸 알고
미친년처럼 숲속을 헤맸지만 그런 열매는 없었다
엄마가 젖을 물려도
오물거리며 우는 아가의 얼굴 위로
호롱불 그림자가 치잣빛 열매처럼 너울거렸다
폐공
느티나무 아래 평상이 부산하다
쉴 날도 아닌 데
할마씨들 죄다 느린 손 내려놓았다
느티나무를 쓸고 오는 바람조차 끈적거려
할마씨들 늙은 닭처럼 퍼들고 앉아 수다를 떤다
노모는 외따로 돌아 앉아 설레설레 부채질이다
부채바람이 홑적삼 펄럭일 때마다
메마른 젖꼭지가 홑적삼 빤히 열고 내다본다
황무지에 박힌 폐공처럼
젖줄이 마를 나이
팔십 줄 노모에게 어떤 자식들이 반겨주랴
자식 많아봐야 소용없다는 것 알면서도
눈길이 닿는 곳은 동구 밖 신작로길
뿌연 먼지 날리며 버스가 설 때마다
외아들 놈 내리는지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나비 1
한때 자유자재로 활강하는 너의 날개를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너는 무슨 복을 타고나 멀고 먼 협곡까지 단숨에 날아갈 수 있는가
꽃에 앉아서 종잇장처럼 팔락이는 너의 여린 날개를 무시한 적이 있었다
코흘리개 시절이라고 변명하지 않겠다
꽃과 밀월을 줄기는 너를 채집망으로 포획했던 나의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도 하지 않겠다
너는 날개를 가진 것만으로도 자유지만 날개가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속박인지 모른다
나비 2
한 평생 독서삼매에 빠진 그를 존경한다
책과 담쌓고 사는 세월에
책장 활짝 펼쳐든 그를 보면 희망이 생긴다
그가 독서를 하기 위해
날아온 곳은 꽃들이 만개한 꽃밭
독서삼매에 빠지려면 꿀샘을 빨듯이 해야 한다며
눈은 찬찬히 분홍 꽃술을 읽는다
책장은 단 두 장이지만 달콤한 내용이라
한번 빠지면 좀체 헤어 나올 수 없다
개구쟁이의 손길에 깜짝 놀라
책장을 펄럭이며 날아가는
그의 목적지는 또 다른 꽃밭이다
사랑과 흑심 사이
거미가 그물망을 새벽 숲에 펼쳐놓는다
밤새도록 짠 노고가 이슬에 묻어 있다
도망가는 나비는 저 그물망이
거미가 쳐놓은 덫이라는 걸 알고 있다
꽁무니에서 하염없이 줄을 빼내며
나비에 대한 사랑을 온몸으로 맹세했던 그것 또한
흑심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공중 그물에 몸을 돌돌 말아놓고
매일 집착하는 것이 어찌 사랑이겠는가
일방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며
거미를 피해 다닌 세월이 몇 년이다
도망 다니느라 제대로 꽃과 밀월 한 번 즐기지도 못했다
세월이 흘러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거미의 집착에 나비의 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선풍기
나는 그의 일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서른 살이 되어서도 희미한 바람을 뿜어내는 그를 누가 함부로 다루겠는가
한세월 가족의 사랑을 먹은 만큼
가족을 위해 비뚜름 고개 돌리고 제 할 일을 하는 그를 누가 욕하겠는가
아버지 이미 가셨지만 불구가 된 몸으로도 가족을 지켰던 그에게
성형에다 목 수술까지 해주었지만 결국 숨이 끊어졌다
고운 정 미운 정 다 든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고물상에 보내주는 일이었다
봄날
노인회관 마당에서 합죽 할매가 호랑이콩을 깐다
두꺼운 껍질을 뚫고 얼룩덜룩한 콩들이 빠져나온다
할매는 느린 손으로 호랑이 새끼를 받듯이
소쿠리에 콩을 주워 담는다
난 옛적부터 저 할매의 손이 콩밭을 헤매던 손이라는 것을 안다
부잣집에서 시집온 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무수한 세월 콩밭을 헤매다보니
이제는 호랑이도 때려잡을 수 있는 거친 손이 되었다
가냘픈 손이 거친 손이 될 때까지
할매의 가슴엔 얼마나 덧없는 세월이 흘러갔을까
그래도 합죽하니 웃기만 하는 할매의 잇몸엔
꼭 호랑이콩 같은 이빨 두 개가 박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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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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