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
진짜와 가짜
며칠째 가뭄이 계속되자 여기저기서 목이 탄다고 아우성이다. 장사꾼들은 불황이라고 난리고, 농부들은 쩍쩍 갈라지는 논바닥을 부여잡고 가슴을 친다. 쉴 새 없이 불벼락이 쏟아져 내리는 날에도 꽃들은 옷을 바꿔 입으며 피고진다. 우리 집 뜰에도 탐스러운 꽃이 피었다.
몇 해 전 묘목시장에서 구입해 심었던 수국이다. 수국은 특이한 꽃이다. 진짜 꽃과 가짜 꽃(헛꽃)이 어울려 피며 꽃송이를 만든다. 벌들을 불러 모을 때는 가짜 꽃을 내세운다. 진짜 꽃이 좁쌀처럼 작아 크고 화려한 가짜 꽃으로 벌들을 유혹해 수정을 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가짜 꽃이 호객꾼 노릇을 한다. 벌들이 진짜 꽃에 수정을 하고 나면 가짜 꽃은 임무를 다했다는 듯 꽃잎을 발랑 뒤집어 늘어진다.
감추고 속이는 것이 모든 범죄의 시작이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은 뱀이 아담과 이브를 속여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혹한데서 출발한다. 죄의 시작은 뱀의 달콤한 거짓말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성경적인 사건이라고 제쳐 두더라도 세상에는 사람을 속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중국산 짝퉁, 사이비 종교, 가짜 정보 등은 늘 존재해 왔지만 올 대선에서 쏟아진 가짜 뉴스는 국민들을 철저하게 속인 케이스였다.
가짜들이 아주 치밀하고 섬세하다 보니 매의 눈으로도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예 ‘페이크슈머(Fakesumer)’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가짜를 뜻하는 ‘페이크(fake)’와 소비자를 뜻하는 ‘컨슈머(consumer)’의 합성어가 단어로 굳어졌다. 개성적이고 합리적인 소비를 원하는 계층에서는 가짜인줄 알면서도 구매를 하는 심리가 생겨났다.
가짜들이 경제를 갉아먹고 시장 질서를 교란하지만 수국의 가짜 꽃은 도덕적이다. 가짜 꽃은 벌들을 유혹하지만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벌들은 진짜 꽃에 수정을 하게 해준 가짜 꽃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언젠가 시내의 예식장에서 수국을 부케로 던지는 신부를 보았다. 그것도 하필 하얀 수국이다. 그녀는 수국의 꽃말이 ‘변덕’이라는 사실을 알까. 수정을 하지 못하는 가짜 꽃이 핀다는 사실을 알까. 안 그래도 결혼, 취업, 출산을 포기하는 세상에 ‘변덕’이란 꽃말을 단 수국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라고 신신당부하는 주례사를 듣고 있는 신부의 낯빛이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