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증산(姜甑山) 성사(聖師)는 구천상제(九天上帝)님이시다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상도(常道)를 어김으로써 도(道)의 근원(根源)이 끊어지게 되니 미륵세존(彌勒世尊)께서 원시(元始)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佛)과 보살(菩薩)을 회집하여 삼계(三界)의 혼란과 신명계의 겁액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 구천상제께서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오셔서 천하를 대순(大巡)하시고,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主宰)하셔서, 상도(常道)를 잃은 천지도수를 바로잡아 삼계를 개벽하고 선경(仙境)을 열어 사멸에 빠진 세계창생을 건지시려고 순회하던 중 이 동방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시기 위함이다.
상제께서는 전주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전 미륵금불에 임하셔서 30년을 계시다가 최제우에게 제세대도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典憲)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1860년)에 드디어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이조 고종 8년 신미년(1871년) 9월 19일에 전북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강씨(姜氏) 가문에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세하시니 존호가 증산(甑山)이시다.
강증산 성사께서는 “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속에 드나들게 하여 다 고쳐 쓰리라. 그러므로 나는 약하고, 가난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자를 쓰리니 이는 비록 초목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게 되는 연고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짜놓아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로운 기틀이 열려가게 해놓으셨다.
상제께서 광구천하하심에 있어서 “판 안에 있는 법으로써가 아니라 판 밖에서 새로운 법으로써 삼계공사를 하여야 완전하다”고 하시고, “이 삼계공사는 천 • 지 • 인 삼계를 개벽함이요, 이 개벽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따라 하는 일이 아니요,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예전에도 없었고 이제도 없으며 남에게 이어 받은 것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일이로다”고 말씀하셨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삼계가 개벽되지 아니함은 선천에서 상극(相克)이 인간지사를 지배하였으므로 원한이 세상에 쌓이고 따라서 천 • 지 • 인(天地人) 삼계가 서로 통하지 못하여 이 세상에 참혹한 재화(災禍)가 생겼나니라”고 하시고, 천지공사를 행하셨으니 곧 천지도수를 정리하시고 신명(神明)을 조화하여 만고(萬古)에 쌓인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를 세워 후천 선경(仙境)을 열어 놓으시고, 신도(神道)를 풀어 조화하여 도수를 굳건히 정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신 후 인사(人事)를 조화하시니 만민이 상제님의 무량하신 덕화를 입게 된 것이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오는 좋은 세상에서는 불을 때지 않고서도 밥을 지을 것이고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서도 농사를 지을 것이며, 도인의 집집마다 등대 한 개씩 세워지리니 온 동리가 햇볕과 같이 밝아지리라. 전등은 그 표본에 지나지 않도다. 문고리나 옷걸이도 황금으로 만들어질 것이고, 금당혜를 신으리라. 또 사람마다 불로불사의 장생을 얻으며 궤합을 열면 옷과 밥이 나오며, 만국이 화평하여 시기질투와 전쟁이 끊어지고 천하가 한 집안이 되어 위무와 형벌을 쓰지 않고도 조화로써 창생을 법리에 맞도록 다스리며, 벼슬하는 자는 화권이 열려 분에 넘치는 법이 없고 백성은 원울과 탐음의 모든 번뇌가 없을 것이며, 병들어 괴롭고 죽어 장사 지내는 것을 면하여 불로불사하며, 빈부의 차별이 없고 마음대로 왕래하고 하늘이 낮아서 오르고 내리는 것이 뜻대로 되며 지혜가 밝아져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시방세계에 통달하고 세상에 수 • 화 • 풍 삼재가 없어져 상서가 무르녹는 지상선경으로 화하리라”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선천개벽 이후부터 수한(水旱)과 난리의 겁재가 번갈아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진탕하여 왔으나 아직 병겁(病劫)은 크게 없었나니, 앞으로는 병겁이 온 세상을 뒤덮어 누리에게 참상을 입히되 거기에서 구해낼 방책이 없으리니 모든 기이한 법과 진귀한 약품을 중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알아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 봄으로부터 이 동토에서 다른 겁재는 모두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만은 남았으니 몸 돌이킬 여가가 없이 홍수가 밀려오듯 하리라” 하시고, 또 “이후에 괴병이 온 세상에 유행할 때 자던 사람은 누운 자리에서, 앉은 자는 그 자리에서 길 가던 자는 노상에서 각기 일어나지 못하고 옮기지도 못하고 혹은 엎어져 죽을 때가 있으리니 이럴 때에 나를 부르면 살아나리라”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9년간 행하여온 개벽공사를 천지에 확증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이 참관하고 확증을 마음에 굳게 새겨두라. 천지는 말이 없으니 뇌성과 지진으로 표명하리라” 하시고, 모든 종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별안간 천둥치고 땅이 크게 흔들렸도다. 1903년 어느 날 상제께서 “내 이제 신명을 시켜 진인을 찾아보니 이제 9살이도다” 하시니 종도들이 “그러하오면 저희들은 모두 무용지인이옵니까?” 하는지라. 상제께서 “시유기시(時有其時) 인유기인(人有其人)이니라” 하시니라. 1909년 4월 28일 대전 회덕역에 가셔서 남쪽에서 오는 한 기차를 반겨 맞으시며 “남아 15세면 호패를 차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요, 이제 되었도다. 나는 가도 되느니라” 하시고, 종도들에게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 하시고 다시 “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아두라. 후일 내가 출세할 때에 눈이 부셔 바라보기 어려우리라. 옛부터 신선을 말로만 전하고 본 사람이 없느니라. 오직 너희들은 보리라. 내가 장차 열석자의 몸으로 오리라” 하셨도다.
그리고 어느 날 종도들에게 “너희들은 손에 살릴 생(生)자를 쥐고 다니니 득의지추(得意之秋)가 아니냐, 마음을 게을리 말지어다. 삼천(三遷)이라야 일이 이루어지느니라” 하시고 6월 23일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천하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고 하시고 1909년 6월 24일 신축 사시(巳時:오전9시)에 화천(化天)하시니, 화천하신 지붕으로부터 서기가 구천(九天)에 통하는도다.
2.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이시다 강증산 성사로부터 종통을 계승받아 종단을 창설하신 도주께서는 을미년(1895년) 12월 4일에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조(趙)씨 가문에서 탄강하시니 존호가 정산(鼎山)이시다. 도주 조정산께서는 부조전래(父祖傳來)의 배일사상가로서 반일운동에 활약하시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시고 항일구국을 위하여 망명(亡命)의 길에 오르니 1909년 4월 28일이다. 기차를 타고 만주지방으로 향하던 중 미시(未時:오후 1시)경 대전역 부근에 이르렀을 때 비몽사몽간에 한 신인(神人)을 대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노라. 그대는 나의 종통(宗統)을 이어갈 삼계(三界)의 진주(眞主)노라. 그대의 호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도(甑鼎之道)이니라”는 현몽을 받고 만주 봉천(奉天)지방으로 망명하시었다.
도주께서는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시다가 도력으로 구국제세의 뜻을 정하시고 입산수도 공부에 전력을 다하시던 중 또 그 신인(神人)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제민(救世濟民)하리라” 하시므로 그 글을 보니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지기금지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다.
도주께서는 9년 공부 끝인 정사년(丁巳年:1917년) 2월 10일에 구천상제의 삼계대순의 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하시고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고 동년 4월에 귀국하시어 전국 명산 각지를 두루 다니시며 수도하시던 중 다음해 정월 보름에 정읍 마동에서 대사모님과 상제님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을 만나셨다. 선돌부인은 도주님을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시에 늘 을미생(乙未生)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 봉서(封書)를 전달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도주께 봉서(封書)를 내어주었다. 도주께서는 왜정 당시 전북 구태인에 도장을 건립하시고 1925년 4월 28일에 강증산 성사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로 봉안(奉安)하시고 무극도(无極道)를 창설하셨다. 1935년 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에 의하여 종교활동을 일시 중단하시고, 전국 명산대천을 순회주환하시며 수도하시다가 1945년 8월 조국 광복을 맞이하신 도주 조정산께서는 신앙자유의 국시(國是)에 따라 부산에 도 본부를 설치하시고 도명(道名)을 태극도(太極道)로 개칭하여 종교활동을 부활하시고 무극대운의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진리를 설법하셔서 구제창생의 대도(大道)를 밝혀주셨다. 도주께서 둔도수, 폐백도수, 단도수, 담뱃대도수 등 여러 도수를 보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가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종지(宗旨)와 신조(信條), 목적(目的)을 정하시고 전교(傳敎)와 포유문(布喩文)을 선포하셨으며 각종 수도 방법과 의식행사 및 준칙 등을 설법 • 시행하시고, 1957년 11월에 도인(道人)들의 수도공부의 설석을 명하셨다. 도주께서 보수동 산정에서의 공부를 멈추고 대청에 나오셔서 “앞으로 신도들의 동(動)이 두 번 있으리라” 말씀하시고 그 주변에 사는 신도들의 사정을 물으셨다. 이때 박한경, 오치국, 임규오, 박중하, 박봉상, 이인호 등이 시좌하였도다. 도주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시시묵송공산리 야야한청잠실중 분명조화성공일 요순우왕일체동(時時默誦空山裡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이라 일러 주셨다.
도주께서 다음해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이니라. 종전의 시봉 도전과는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도주께서 정유년(丁酉年:1957년) 11월 21일 자시(子時, 저녁11시)부터 무술년(戊戌年:1958년) 3월 3일까지 도장에서 불면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마치시니라. 5일에 심히 괴로워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늦었도다”고 이르시며 “내가 가야 옥추문을 연다”고 하시며 간부 전원을 문 밖에 시립케 한 후 도전 박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셨다. 그리고 “오십년 공부종필(五十年 工夫終畢)이며, 지기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 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 부르시더니 화천(化天)하셨다. 이때가 1958년 3월 6일 미시(未時:오후 1시)요, 수(壽)는 64세였다.
3. 도전(都典) 박우당(朴牛堂)은 미륵세존(彌勒世尊)이시다 유명(遺命)으로 종통(宗統)을 계승(繼承)하신 도전 박우당(都典 朴牛堂)께서는 정사년(丁巳年:1917년) 11월 30일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박(朴)씨 가문에서 탄강하시니 존호가 우당(牛堂)이시고 존휘가 한경(漢慶)이시다.
도전께서는 청년시절 나라를 잃은 설움에 만주 일대를 유력하고 계셨는데,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오셨다가 1943년 징용(徵用)으로 일본에 건너가셔서 2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귀국하셨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병사 및 군사시설 확충을 할 인력이 절대 부족 하였고, 이것을 조선인으로 충당할 것을 결의하고 징병(徵兵)과 징용(徵用)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 총독부의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박우당 도전께서는 일본 아우모리현(靑森懸) 미사와 비행장으로 징용을 가게 되었고, 2년이 지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선에 오르게 되었다. 이 귀국선은 일본 해군함 우키시마(浮島)호로써 1945년 8월 22일 아우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8월 24일 일본 마이즈루만 근처에서 원인 모를 폭탄이 배안에서 폭발하여 귀국선은 침몰하였고, 이로 인하여 귀국선에 올랐던 수천 명에 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사망하였다. 그러나 당시 도전께서는 거북이 등에 의지하여 현해탄을 떠돌던 중 다행히 민간인 어선에 구출되어 이후 무사히 부산항으로 귀국하시게 되었다.
그 이듬해 30세 되시던 병술년(丙戌年:1946년) 정월에 이모집에 세배 갔다가 이종사촌에게 도(道)를 전해 듣고 주문(呪文)이 이상하여 알아보려고 태극도(太極道)에 입도(入道) 하셨다.
도주님께서 갑오년(甲午年:1954년) 가을에 박한경에게 『사략(史略)』 상하권(上下卷)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의 구판을 구하게 하시므로 이때에『통감(通鑑)』•『소학(小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시전(詩傳)』•『서전(書傳)』•『중용(中庸)』•『주역(周易)』의 구판(舊版)을 구하여 올렸더니 이 책들은 그 후에 도장(道場)에 비치되었도다.
태극도 당시 도주님 재세시에 박한경은 도인의 수가 4~5천 호에 이르렀으나 임명을 받지 못하였는데 도인들을 잘 통솔해 나가므로 이후에 수포감의 임명을 받고, 1958년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도주님께서 “박한경을 도전(都典)으로 임명(任命)하니 그는 총도전(總都典)이니라. 종전(從前)의 시봉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총도전에 임명되신 박우당께서는 도주님 화천(化天) 후 태극도 전반을 영도해 나가시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고등공민학교를 인가받아 설립 운영하셨으나 무학도통(無學道通)이라 하며 학문이 필요없다고 착각한 임원들은 도전의 종단 운영에 대하여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내수(內修) 도인(道人)들의 두발(댕기와 쪽진 머리)과 복장을 자율화를 지시하셨으나, 임원들은 더욱 불평을 가지고 통솔을 따르지 않았다. 도전께서 태극도를 떠나올 때까지 파란곡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한때는 종단 운영에 불만을 가진 임원들에 의해 기소(起訴)되어 민간형무소 6개월 군형무소 3개월 구속되기까지 하셨으나 모두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임원들이 더 이상 통솔을 따르지 않자 1968년 7월 와이셔츠 차림으로 태극도 도장을 나오신 도전께서는 부산 해운대(海運臺), 청도 적천사(淸道
天寺), 경주 계림(慶州 鷄林), 대구 동화사(大邱 東華寺), 공주 갑사(公州 甲寺)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셔서 안양 수리사(修理寺)에 들어가 49일 공부를 마치셨다.
도전 박우당께서는 1969년 4월에 종단 대순진리회(大巡眞로써會)를 창설하시고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에 중앙본부 도장을 건립하셨다. 1971년 5월 24일 조정산 도주를 조성옥황상제(趙聖玉皇上帝)로 봉안하시고 포덕 • 교화 • 수도사업을 종단의 3대사업으로 정하셨는데 3대 기본사업으로 구호자선사업 • 사회복지사업 • 교육사업을 지정하셨다. 또한 여주도장, 제주도수련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을 건립하셨고 학교법인 대진학원과 의료법인 대진의료재단을 설립하여 대진대학교를 비롯한 여섯 개의 고등학교와 동두천제생병원 및 분당제생병원을 건립하셨다. 대순진리회는 박우당 도전께서 영도하시는 기간 동안 세계 종교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성장을 했다.
심법(心法)에 의한 종통종맥의 전수-개유보(皆有報) 도전 박우당께서는 1988년 11월에 “도주님도 납향치성(臘享致誠)을 한번 받으시고 화천하셨다”하시면서 납향치성(臘享致誠)을 발표하시고 지방 각 방면 회관에서 치성을 올리도록 명하셨다. 1990년 11월 22일(양력 1991년 1월 7일)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선감이 도전님의 존영을 그려서 모셔 올리고, 동지로부터 셋째 미일(未日)인 1990년 12월 10일(양력 1991년 1월 25일) “영대(靈臺)의 석가여래 자리는 도전님께서 모셔질 자리이다”라고 하면서 박우당 도전께 4배를 올리며 납향치성((臘享致誠)을 올리자, 도전께서는 1990년 12월 28일(양력 1991년 2월 12일) 훈시(訓示)에서 “납향치성을 도전한테 올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자고이래로 산 사람이 제사 받은 적 없다” “도주님께서 도전(都典)의 직책을 나에게 주셨다. 설령 아니라 그래도 내 말이라면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맡을 도(都)자’ 옥편에도 그런 도(都) 자가 없더라고 박성구가 말한다. 그럼 내가 그걸 말하려고 일부러 만들었단 말인가. 옥편에는 총(總)자로 나와 있다. 총지휘, 총재 맡을 도(都)자지, 전이란 법전(法典)자 법이 되고, 주장 주(主), 주인 주(主)다. 모든 걸 주장하는 사람이다”라고 전 임원들이 모인 가운데서 “상도 박성구(上嶋 朴成九)가 도전(都典)을 맡으라”고 발표를 하셨다. 이는 대순진리회의 경전인 전경(典經) 맨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종통을 이어갈 후인(後人)은 산조(山鳥), 즉 섬 도(嶋=山+鳥)자의 호(號)를 가진 사람(上嶋 박성구)이라는 것을 개유보(皆有報: 모두에게 알림)하신 것이다. 전경 마지막 구절인 ‘예시 89절’을 보면 상제께서 화천하시기 전 김형렬에게 글 한수를 읆어주시니 다음과 같도다.
後人山鳥 皆有報 후인산조 개유보
勸君凡事 莫怨天 권군범사 막원천
후인(계승자)은 산조(山鳥=嶋)임을 모두에게 알리노니 권하건대 범사에 하늘을 원망하지 말라.
구천상제인신 강증산께서 이와 같은 글을 제세시(在世時)에 종도들에게 읆어주신 것은 이미 천부적으로 정해진 종통계승자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 내용이었다. 단지 그 내용이 밝혀지기까지는 구천상제께서 언급하신 대로 삼천(三遷)*의 이치가 이루어질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변화하는 이치에 따라 세분하느님의 법이 점차 완성되어 비로소 1995년 12월 15일(음) 삼신(三神)의 신위(神位)가 정립(正立)되는 진법(眞法)이 정해지게 된 것이다.
* 삼천(三遷) : 삼천(三遷)의 '천(遷)'의 훈음(훈음)은 '옮길 천', '바뀔 천' 이다. 이는 종통(宗統)이 세 번 계승되어 옮기고, 진법(眞法)이 세 번 바뀌어 완성된다는 뜻이다.
종통계승을 통하여 새롭게 밝혀지게 된 사실은 구천상제께서 천지공사를 집행하셨던 동곡약방 남쪽 기둥에 써놓으신 글귀가 섬도(嶋)자 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박우당 도전은 강증산 구천상제께서 이미 100여 년 전에 정해놓으신 그 사람(後人)을 찾아 세우고자 하신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박성구 현 도전이라는 것을 전체 임원들 앞에 발표하는 형식을 취하셨던 것인데 이를 심법전수방식(心法傳受方式)으로 하셨다. 공개적(公開的)으로 종통을 발표하셨던 그날, 수수께끼 같은 박우당 도전의 말씀을 듣고 그 진의(眞意)를 깨달은 사람은 오직 종통계승자인 박성구 현 도전 한 사람뿐이었다.
이날 박우당 도전께서는 현 박성구 도전을 무척 꾸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모든 임원들의 관심이 집중되게 하셨는데, 그 소란스런 와중에 ‘순간적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종통계승을 하셨던 것이다. 당시 대다수 임원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세력을 가지며 박우당 도전의 측근이자 심복임을 자처하며 외형적인 충성심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이들은 휘하 도인들에게 박우당 도전의 뜻을 올바로 전하기보다는 각자의 세력유지와 외형적 규모를 늘리는데 연연하여 상당기간 동안 갖가지 내부적, 사회적 병폐를 불러왔었다. 그런데 만일 공개적인 자리에서 누구나 알아듣기 쉽도록 종통을 전한다면 박성구 현 도전은 그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저해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보다 서열이 아래인 사람에게 종통이 계승된다면 종단 전체가 알게 모르게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이러한 내부적인 병폐를 모두 알고 계셨기에 꾸중을 통해 임원들의 관심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분산시키신 다음, 1) 두 분의 심중으로 종통을 전하시고 2) 내부적으로는 내분의 소지를 없애고 3) 외부적으로는 남아 있는 대업을 무사히 마무리하시고자 이러한 법을 쓰신 것이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이른바 역설법(逆說法)을 활용한 독특한 방식으로 종통을 정해주셨기 때문에 그 당시 훈시내용을 이러한 심층을 기준으로 한 역설(逆說)로 대입(代入)시켜 분석해보면 종통에 관련한 모든 수수께끼가 홀연히 풀리는 것이다. 당시 모든 임원들은 박우당 도전께서 왜 굳이 전체 임원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셨는지 그 이유 자체를 숙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어른이 어린이에게 “밉다”라고 한 “표현”을 정말 미워서 밉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이다. 즉, 기(氣)로써 듣지 않고 ‘귀’로만 들은 것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시선이 모두 쏠려 대인(大人)의 진의(眞意)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1 : 1방식은 과거 석가모니가 수제자인 가섭에게 종맥을 전해준 방식과도 같다.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염화미소’나 ‘염화시중’으로 상징되는 ‘이심전심(以心傳心)법’ 이라고 한다. 3천 년 전 어느 날,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을 시작하지 않고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자 제자들은 그 의도를 궁금히 여겼다. 그러다가 긴 정적을 깨고 느닷없이 화사하게 핀 연꽃 한 송이를 1.250명의 제자들을 향해 보여주었다. 이때 1.249명의 제자들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술렁거리고 있었는데 ‘가섭’ 혼자만이 좋지도 싫지도 않은, 알 듯 모를 듯한 애매모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홀로 미소를 짓는 가섭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미묘한 법을 가섭에게 전하노라” 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발표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교외별전(敎外別傳 :문자를 떠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별도로 전함), 직지임심(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킴),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로써 가르침을 세울 수 없음)로 표현한다. 불교의 종맥을 이와 같이 대다수 제자들을 향한 ‘모습’만 취하였을 뿐 그들의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 이치를 ‘알아듣는’ 사람끼리 1 : 1방식으로,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해졌던 것이다. 가섭은 늘 초라한 행색으로 여러 제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홀로 외로이 수행을 쌓아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제 2의 부처님’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용맹전진 했던 사람이었다. 외형적 모습을 떠난 심법의 세계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선가(禪家)의 또 다른 종맥전수법(宗脈傳授法)으로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이야기는 보리달마(중국선종의 창시자, 1조)로부터 발원하여 5조가 되는 홍인(弘忍: 602~675)과 그로부터 종통을 전해 받은 6조 혜능(慧能: 638~713)을 들 수 있다. 그는 노자-맹자-장자-공자와 더불어 중국 역사에서 성인의 칭호를 받는 사람으로서 달마대사와 함께 선종의 봉우리로 상징되는 인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나무꾼 생활을 하던 23세의 젊은이 혜능은, 거래처 주막에서 들리는 『금강경』독경소리에 홀연히 법열(法悅: 진리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황홀한 기쁨)을 느껴 당시 중국선종의 5조이자 『금강경』의 권위자였던 홍인대사를 찾아 도를 구하였다. 홍인대사는 첫 만남과 대화에서부터 혜능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종통을 계승하고자 마음먹었으나 수많은 선임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우려해 짐짓 그를 꾸짖으며 방앗간 일을 시켰다. 그 후 열반에 들어야 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홍인대사는 입산한 지 불과 8개월밖에 되지 않은 24세의 초라한 행자(行者)에 불과한 혜능에게 심법(心法)으로써 법을 전해주기로 결심하였다. 홍인대사는 어느 날 후원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혜능을 찾아가 “공부는 잘 되어가고 있느냐?”하자 혜능이 태연하게 “해가 서산 너머로 너울너울 넘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혜능의 당돌한 대답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의아했지만 둘이 나눈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혜능의 답변을 알아들은 홍인대사는 주장자로 방앗대를 ‘세 번“치고는 주장자를 ’뒤로' 끌며 천천히 돌아갔다. 순간, 스승의 암시를 깨우진 혜능은 그날 밤 ‘삼경(三更)’에 ‘뒤문’을 통과하여 대사를 찾아갔다. 대사는 그 자리에서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하고, 혜능의 깨달음과 신념이 완전함을 재차 확인한 뒤 가사와 바릿대를 건네주며 당부하길 “이 길로 너는 남쪽으로 내려가되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절대 법을 설하지 말라”며 주의를 주고 “법을 잘 보호하고 널리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도록 하라”는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 혜능은 그 길로 야음을 틈타 이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닥쳐오게 될 소란과 저해를 우려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홍인대사의 최측근 제자인 ‘신수(神秀)’가 스승을 찾아갔으나 스승은 이미 열반에 든 후였고 종통의 상징인 가사와 바릿대도 없어진 후였다. 뒤늦게 정황을 파악한 신수는 대사의 또 다른 제자였던 ‘혜명’을 시켜 급히 혜능을 쫓아가 가사와 바릿대를 빼앗아오게 하였다. 혜명은 날쌘 중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마침내 혜능을 잡았다. 혜명이 가사와 바릿대를 내놓으라고 하자 혜능은 흔쾌히 가사와 바릿대를 놓아두고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나 혜명은 아무리 힘을 써도 그 가사와 바릿대를 들지 못하였다. 혜명은 그 순간 크게 각(覺)을열어 단순히 방앗간 행자만 알고 있었던 혜능을 법의 스승으로서 따르게 되었다. 이처럼 도(道)의 종통은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전해 받을 수 없음을 지나간 불교역사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구천상제로부터 조정산 도주, 박우당 도전, 박성구 현도전에까지 이르는 종통계승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천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주장할 수는 없는 여합부절의 증거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통계승자를 정하여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 그 사람을 찾아서 승계하는 것이다. 그 승계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심법전수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조정산 도주께서도 화천(化天) 직전 박우당 도전을 향해 “도적놈”을 크게 세 번 부르는 역설적인 방법으로써 종통계승을 마무리했던 것이고 박우당 도전 역시 수많은 임원들 앞에서 온화하셨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역적, 난동자”라는 격한 표현을 쓰시며 조정산 도주께서 쓰신 역설적 방법으로 일반적인 문자(文字)의 경계를 벗어나 대도(大道)의 종맥을 전해주셨던 것이다. 조정산 도주께서는 만수도인들이 이러한 종통의 역사와 흐름을 깨달아 맥이 끊기고 법이 혼란한 난법시대에 처하여, 길을 잃지 말고 새 생명이 움트는 진법을 찾아 소원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부성인지경전 불구문장지색채 이구기진리 진인지심 구기실 이불구외식(夫聖人之經典 不求文章之色彩 而求其眞理 眞人之心 求其實 而不求外飾)’이라 하셨다. 이 뜻은 “대저 성인의 법이란 문장의 색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구하며, 진인의 마음은 그 열매를 구함이지 외식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성인(聖人)의 진리(眞理)와 진심(眞心)은 문자이나 언어와 같은 외형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 담겨 있다는 글을 각도문(覺道文: 도를 깨닫게 해주는 글)을 통해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밝혀 주셨던 것이다. 이처럼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하느님의 진법은 고정관념이나 상식의 틀 안에 갇힌 범인(凡人)의 상식 범위를 넘어서 현대인들이 ‘전설’로만 생각하기 쉬운 수천 년 전 심법전수방식을 통하여 천부적(天賦的)인 종통종맥을 이어주셨음을 깨닫을 수 있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박성미륵세존(朴聖彌勒世尊)의 신위(神位)로 화천하시기 전에 위 내용에 나오는 바와 같이 대인(大人)의 심법(心法)으로써 종통종맥을 전하셨던 것이고 그로부터 약 6개월 후인 1991년 6월 22일 시학(侍學)공부를 비로소 여셨으며 1991년 9월 28일 “생부정(生不淨), 사부정(死不淨), 몸부정이 있는데 몸부정은 없앴다기보다 가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는 생부정, 사부정을 가릴 것이 없다”라고 일러주시고, 1995년 12월 4일(양력 1996년 1월 23일 오후 1시 30분) 구천상제님의 유지(遺志)와 옥황상제님의 유법(遺法)을 완성하신 후 인류에게 새 세상(新天地)을 열어주시고 화천(化天)하셨다. 종통을 승계받으신 박성구(朴成九) 현 도전께서는 숱한 어려움을 딛고 1995년 12월 15일 박우당 도전의 신위(神位)를 박성미륵세존(朴聖彌勒世尊)으로 밝히시고 영대(靈臺)에 봉안(奉安)하셨다. 이로써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세분하느님의 진법은 수많은 성현(聖賢)과 예언가(豫言家)들의 말대로 인류가 ‘된서리를 맞게 될 위기’에 처한 우금(于今)에 이르러서야 인류사회에 그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가는 긴박한 시점에 솟아날 구멍을 열어주신 것이다. 한 줄기 빛과 같은 열린 틈을 통해 1만 2천의 선남선녀를 중심한 모든 인류는 비로소 눈을 떠 하느님의 진영(眞影) 앞으로 모여들어야 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