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 “‘박정희 주술’에서 하루 빨리 깨어나야“ ... 2005-03-15연행 아홉번, 구금 다섯번, 재판 세번을 받는 동안 1012일간 옥고를 치르고 언론계와 대학에서 각각 두번씩 모두 네차례 강제로 쫓겨났던 리영희(76) 전 한양대 대우교수. 최근 자신의 삶과 사상을 육성으로 담은 구술 회고록 <대화>(대담 임헌영. 한길사 출판)를 펴낸 그를 15일 경기도 군포시 자택에서 만났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져 글쓰기를 중단한 채 병마와 싸웠던 그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별거 아닌데 이렇게 많이 와줘서 고맙다”며 기자들을 맞았다.
오마이뉴스 | “‘박정희 주술’에서 하루 빨리 깨어나야“연행 아홉번, 구금 다섯번, 재판 세번을 받는 동안 1012일간 옥고를 치르고 언론계와 대학에서 각각 두번씩 모두 네차례 강제로 쫓겨났던 리영희(76) 전 한양대 대우교수. 최근 자신의 삶과 사상을 육성으로 담은 구술 회고록 <대화>(대담 임헌영. 한길사 출판)를 펴낸 그를 15일 경기도 군포시 자택에서 만났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져 글쓰기를 중단한 채 병마와 싸웠던 그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별거 아닌데 이렇게 많이 와줘서 고맙다”며 기자들을 맞았다.
1929년 일제 식민지 조선의 소년으로 태어나 해방과 분단, 미군정기, 한국전쟁, 4.19혁명과 5.16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87년 민주화투쟁 등을 거친 그의 활동 시기는 한국 근현대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야만의 시대’로 불렸던 시기를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를 묻자 그는 주저 없이 전두환 군사정권 기간을 꼽았다.
“박정희 정권 때도 그랬지만 자유로운 사상이나 가치추구, 집필, 연구조차 탄압했던 전두환 군사정권 때 가장 힘들었다.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도 나아질 징조가 보이지 않던 당시 절망밖에 없으니 자살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같은 극단의 시기에 그의 이름은 많은 청년, 학생, 지식인들에 의해 ‘사상의 은사’로 불렸다. 그럴수록 ‘야만의 권력’은 그에게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가시밭길만 있지 않았다. 99년 말 <연세대학원신문>이 실시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와 저작’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국내 학자 가운데 으뜸으로 뽑혔다. 스스로 ‘60% 저널리스트(언론인), 40% 아카데미션(학자)’이라고 말하는 그의 글이 사람들 의식을 깨우치며 삶을 통째로 뒤흔들었던 까닭은 새로운 담론을 제시해서가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온갖 질곡 앞에서도 진실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기며 참된 지식인으로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글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온전한 진실을 써내려간다’는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의무를 회피하지 않고 맞서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두권의 평전이 헌정되는 흔하지 않은 영예를 얻기도 했다. 그렇듯 그가 <대화>에서 풀어놓은 70년에 걸친 체험과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증언이자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이 땅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최근 ‘식민지배 축복 발언’ 등으로 세간의 비판의 받는 일부 지식인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는 일부 인사들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묻자 “오늘은 책에 대한 얘기만 하겠다, 시국 얘기는 나중에 하자”면서 뒤로 미뤘다. 그러나 그가 <대화>에서 밝힌 지식인에 대한 정의는 이번 질문에 대한 정답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 삶을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산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부부터 지금 노무현 정부까지 모두 거친 그는 역대정권을 어떻게 평가할까. 특히 지식인으로서 그의 신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박정희 정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는 “말로써, 글로써 다 할 수 없는 핍박을 받다 보니까 그렇게 좋은 평가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고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그렇다”고 전제했지만 “그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일부 수혜자들이 지금까지도 모든 것을 그 사람의 업적처럼 여기는 태도는 못 마땅하다”고 못박았다.
그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업적은 미국의 반공정책과 패권주의 수단으로 이뤄졌다”며 “미국이 북한과의 투쟁에서 독재개발 체제를 만들지 않고는 안되겠다고 생각, 박정희를 내세워 경제개발과 정치독재를 시킨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그(경제개발 성과) 자체가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몇 푼의 물자로 우리 제도가 비뚤어지고 부패타락이 방치된 채 희생된 것은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지금까지 박정희 주술에서 박정희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루 빨리 꿈에서 깨어나 진실에 접근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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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 조급, 비타협, 아집 등 변해야” 리 전 교수가 70•80년대 ‘청년학생’에 보내는 당부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 전쟁>,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 리 전 교수의 저서 대부분은 70•80년대 많은 지식인•학생•청년들의 의식을 깨우치며 삶의 전환이 됐던 일종의 ‘사상 지침서’이기도 했다. 그는 이중 가장 애착이 가는 책으로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꼽았다. 깜깜하게 모르고 있던 사람들에게 진실이 뭔가를 전해줬고, ‘청천벽력’처럼 읽혀졌다고 그는 회고했다.
70년대 초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대학생들이 영향을 받는 저서’ 50권에 따르면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가 1•2위였고,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과 송건호 선생의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가 3•4위, <우상과 이성>이 5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당국이 많은 사람 잡아다가 캔 정보에서 나온 순번인 셈인데, 결과적으로 보람있던 책이 아니었던가 싶다”며 웃었다.
당시 그의 저서나 담론, 이론에 몰입했던 청년 세대들은 학생운동기, 사회변혁기를 거쳐 김영삼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개혁주도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에게 그는 어떤 당부를 하고 싶을까.
그는 먼저 “인간행위는 항상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혁주도) 세대들이 투쟁했던 대상물과 대상의 상황도 상당히 바뀌었다”면서 “목적을 추구하는 행위방식과 철학이 다소 달라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는 “두고두고 뜻을 지니는, 의의 깊은 변화는 단시일에 이루고자 해서도 안되고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며 “과격한 것, 조급한 것, 일절 타협을 배격하는 것, 자기만이 옳다는 것 등 지난날 운동 방식에서 더 지혜로워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또 자주적인 외교정책과 관련, 노무현 정부에 뼈있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그는 노 대통령에 대해 “이분이 처음 미국 가서 ‘웃기는 소리’를 하길래 싫은 소리를 쓴 일이 있다”고 회고한 뒤 “이라크 파병을 적극 반대했지만 결국 보냈으니 민족이익을 취할 수 있는 주체적 입장을 가지는 방향으로 임해달라”고 주문했다.
- 신미희 기자 (2005-03-15)
한겨레 | 장엄한 저녁놀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리영희 선생님께. 평안하신지요?
“사람은 해질녘이 좋아야 해!”라고 촌로들께서 말씀하십니다. 젊어 고생해도 늙마가 편안하면 좋다는 뜻이지요. 살아오신 내력의 참됨으로 인생이 아름답게 노을져야 한다는 건 제 해석입니다. 선생님의 <대화>를 읽으면서 유감없이 장엄한 저녁 노을을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부끄럽지 않다!”고 회고할 수 있는 인생이 흔치 않은 듯싶습니다. 젊어 고생한 자취에 어리석은 노욕으로 오물을 끼얹기도 하고, 어지럽게 찍은 발자취에 입에 발린 참회와 달관으로 분칠하는 수작도 흔히 봅니다. 내 앞에 던져진 현실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한다셨지요?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오신 것이 고맙고 죄송스러워서 내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다 읽었습니다.
<장자>의 포정(疱丁)은 죽은 짐승의 고기와 뼈를 솜씨 있게 다루었다지요? 당신의 평생은 살찐 권력의 비계와 살아있는 우상의 껍데기를 발라내는 일이셨습니다. 우상의 저주와 힘센 짐승의 패악이 아이들 말로 장난 아니던 시절을 이성의 펜대를 칼로 삼아 싸워 오셨습니다. 그렇게 발라주신 살코기를 날름날름 받아 먹으면서 정신적 미숙을 자인할 수밖에 없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철부지 아이들이 많은 흥부네 집 같은 우리 현실을 지켜오셨습니다.
집 지키는 개처럼 사셨지요? 객이 오가는 동정을 주인에게 알리되, 객들의 속마음을 읽어 때로 거칠게 으르렁대고 때로 눈을 맞추며 꼬리를 흔들어 주셨습니다. 영특한 진돗개가 그런다지요? 속내를 들킨 허울만 번지르르한 손님이나 사나운 도둑들의 욕설과 발길질인들 왜 없었겠습니까? 개밥그릇을 차 던지고, “개 좀 묶어!” 소리치고, 혼비백산하여 봉당 위로 뛰어 달아나는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복날 잡아먹자!” 하는 소리도 남들 안 듣게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비유가 너무 예의 없었습니다. ‘겨레와 사상의 스승’이라는 표현도 좋지요. 더 긴 존경의 수식을 당신의 이름 앞에 붙여드리고 싶은 심정은 저도 마찬가집니다. 다만, 그 영특한 어미 진돗개 곁에서 멋모르고 따라 짖는 아직 여리고 서툰 새끼 진돗개가 되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누구의 호의나 힘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나 혼자 하는 것이려니 하는 정신자세로 살았노라고 하신 대목도 읽었습니다. 높은 산정에 서면 마음 그리 허전할 수 있겠다는 짐작만으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지는 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신지요? 당신의 그 외로움에서 오히려 힘을 얻게 된 심정도 다 아실 줄 믿습니다.
당신의 도저한 행적을 따라 읽으면서, 사실은 자책과 함께 깊은 낭패감도 있었습니다. 세상을 읽는 식견, 사람을 보는 안목, 신념, 열정, 너그러움에 글 솜씨까지, 어느 것 하나 당신을 따라잡지 못할 범재들이면 누구나 품음직한 절망이고 자괴가 아닌가 합니다. 당신은 그림 그리는 솜씨도 부러운 일이라시고, 피아노 한 가지쯤 못 익힌 각박한 삶을 아쉬워하시지만, 민족의 명운과 나라의 존망을 지키는 일과는 애당초 견줄 일이 아닙니다.
이제 이쯤 왔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과거의 중압에서 벗어나서 대화·융합을 생각하라셨지요? 아픈 자기 성찰과 자기부정 위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지요. 당신 말씀처럼, 묵인도 회피도 말아야 하고 기권은 더구나 안 될 일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에 대한 배신’은 차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회고록을 유치한 독법으로 다시 읽습니다. 책의 본줄기를 잠시 접고, 누구나 흉내낼 수 있을 법한 당신 삶의 원칙과 신조를 가려보았습니다.
-화투, 짓고땡, 고스톱, 바둑, 트럼프, 마작, 골프, 복권, 돈내기 오락, 경마 따위는 성에도 안 맞고 인생철학에도 위배되어 가까이 않고 산다. -정치인, 군인, 정부고관, 실업가 같은 사회적 지배계층에 속한 인사들과는 ‘친교’를 맺은 일이 없었다. -돈 장난, 소매 밑, 투기 따위와 인연 짓지 않았다.
꼽아놓고 보니 무능하고 평범한 저희에게는 당연키도 하고 절로 그리 살아질 일이기도 합니다. 잘난 사람들이라도 그리 살면 실수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우선 그것부터 배우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되지요? 훈수를 두시는 셈으로 가끔 들려주시는 뜻 깊은 육성을 새겨 듣고 있습니다. 당신의 건강과 평안한 노년을 위해서라도, 늙은 진돗개가 힘겹게 몸 일으켜 짖어댈 일이 우리 마당에서 자주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빕니다. “나 떠나기 전에 어디서 좋은 개 몇 마리 구해야 할 텐데…” 그런 심정이신지요? 아름다운 노을 뒤에 평안하고 따뜻한 휴식의 밤이 있으시라고 빌겠습니다.
- 이철수/판화가 (2005-05-20)
한겨레 | 타협은 없다 진실이 아니라면… 글이 아니었다. 마른 하늘 날벼락이었다. 정수리에 꽂히는 대침이었다. 장막을 가르는 칼날이었다. 언론인 리영희(76)씨가 쓴 모든 글들의 글자 하나하나는 과녁을 뚫고 지나는 탄환, 어둠을 흔들어 깨우는 타종이었다. 책이 동력이 될 수 있다면 그의 책이야말로 극우반공체제를 통째로 밀어버린 불도저의 동력이었다. 그는 청년 학생들에겐 ‘사상의 은인’이었고, 반공권력자들에겐 ‘의식화의 원흉’이었다.
한 시대 진보의 최전선이었던 그에게 지난 몇 년은 암흑의 심장에서 막 빠져 나오는 시기였다.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의 햇살에 막 몸을 적시던 시기였다. 그의 정신이 사상의 감옥 바깥으로 나와 기지개를 켰을 때 난데없는 ‘손님’이 그의 육신을 거꾸러뜨렸다. 2000년 11월 그는 중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됐다. 일흔의 노구로 그는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바깥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일어섰고 잃었던 언어기능을 되찾았고 걸음을 옮겼다. 가장 명철한 지식인으로서 그는 40여년 동안 수없이 많은 발언을 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에게 더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자서전을 내야 한다는 출판사의 거듭된 요청에 그는 떨리는 손으로 글을 쓸 수 없어 말로 풀기 시작했다.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그렇게 해서 2년 반 만에 완성된 인간 리영희의 회고록이다. 그가 살아온 삶은 한반도의 비극과 격동의 20세기와 그대로 포개진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을 겪고 동족상잔의 참상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이승만 독재와 뒤이은 30년 군사독재의 칠흑 같은 터널을 통과했다. 그 참담한 시대를 그는 눈 맑은 학생으로, 유엔군 통역장교로, 신문기자로, 대학교수로, 그리고 무엇보다 펜을 쥔 지성인으로 살았다. 진실이 아니면 타협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겐 국가권력의 감시·연행·취조·투옥이 일상이었다. 병마와 싸우는 불편한 정신이 온전히 구술하기엔 체험의 양이 너무 많았다. 10여년 터울로 그와 동시대를 산 문학평론가 임헌영(64)씨가 방대한 현대사·개인사의 자료를 정리해 대담자로서 자서전 주인공의 구술을 도왔다. 대담자는 구술자의 희미해진 기억을 복원시켜줄 뿐만 아니라 나름의 관점으로 구술자의 정신을 자극함으로써 이야기의 밀도를 높인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베트남 전쟁> 등등 그의 모든 책과 글을 관류하는 공통의 특성은 동시대인의 통념을 뒤엎는 진실의 힘에 있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외친 ‘동굴 속 절규’은 이제껏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듣게 해주었다. 모든 한국인들이 ‘반공성전’인 줄로만 알았던 베트남 전쟁이 핍박받는 민중의 처절한 민족해방전쟁임을 처음으로 알린 것도 그였고, ‘공산 오랑캐’의 나라인 줄로만 알았던 사회주의 중국의 현대사에 처음 눈뜨게 한 것도 그였다.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에 비해 절대우위인 줄로 철썩같이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진실은 정반대임을 1980년대 그의 논문은 처음으로 폭로했다. 서해의 ‘북방한계선’이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려는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남한의 북침을 막으려고 유엔군이 그어놓은 ‘남한군 출입금지선’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사실을 알린 것도 일흔 고개에 이른 그 노지식인이었다.
이 비타협적 진실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도 자서전 곳곳에서 주저없이 털어놓는다. 한국전쟁 중 유엔군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술기운에 권총을 꺼내들고 호기를 부리다가 진주 기생의 위엄 있는 한마디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던 일, 강원도 전선의 건봉사에 만난 스님에게 총구를 들이댔다가 생사를 초탈한 듯 자신을 타이르던 모습에서 한없는 수치심과 함께 감동어린 깨달음의 기쁨을 얻은 일 들을 이야기한다. 그는 일시에 휴머니즘의 투사가 된 것이 아니라 천천히 깨어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저항정신을 물려받은 딸이 전두환 폭압기에 대학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하며 숨어다니다 2년 만에야 얼굴을 보인 일을 말하는 대목에선 가족사의 한 풍경이 엿보인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행보를 스스로 결정한 ‘자유인’이었고, 그 자유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때의 자유는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필경 ‘형벌’이었다.
늙마에 찾아든 중풍도 그 형벌 가운데 하나였을까. 경기도 산본의 자택에서 방금 제본소를 빠져나온 자서전을 앞에 두고 만난 그는 자신이 아직도 병마와 싸우는 중이라며 복잡한 현실상황을 밀어두고 ‘개구리’ 이야기를 했다. “아침 신문을 보니 개구리가 얼어죽었대요. 우수 경칩이라고 나왔다가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니까 얼어죽었다는 거예요. 가슴이 아팠어요. 조금만 더 있다 나오지.” |
첫댓글 아이고 머리야,,,넘 길어서 오늘은 기냥 갑니다,,,담에 시간있을적에 도전하겠습니다,,,=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