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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졸작 동시집 <원댕이 아이들> 부록에 수록된 글입니다)
〈원댕이 마을〉의 근현대사
김 태 수(안성4.1독립항쟁기념사업회장, 안성3.1운동기념관명예관장)
글 제목을 원댕이 마을의 근현대사라 하니까 <원댕이>가 대단한 지역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아주 작고 외진 구석진 마을이다. 지금은 차도 드나들고 꽤 여러 채의 가옥이 마을을 이루고 있으나 과거에는 집한 채 없는 적막한 산골이었을 때도 있었던 작은 마을로서 원 표기는 <원당>이라 하는 시골 동리이다. 이곳이 조금은 특별한 것은 <원당>이라는 이름이 꽤 오래전부터 이 동리 이름뿐만이 아니라 이 지역, 과거 오래전 원당면지역을 원댕이, 원댕이 라고 지칭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옛 원당면 시절에 면소재지가 이곳 원당부락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원댕이라는 이름으로 이곳 칠곡리를 포함한 원곡지역이 주위에 꽤 많이 알러져 있다.
이 것을 예리하게 간파한 이철우 시인이 이미 발간한 시집과 발간하고자 하는 동시집의 제목을 <원댕이>에 두었기로 원댕이와 함께 자라고 살아온 나이기에 여기에 주안을 두고 원댕이에서 원곡으로 이어지는 고향의 숨결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내가 평소 아끼는 후배 이철우 시인의 동시집 <원댕이 아이들> 발간에 즈음하여 말미에 나마 부족한 졸필, 평소 이 시인이 좋아하는 원댕이 근현대사 이야기를 게재하는 영광을 얻게 되어 매우 기쁘고 고맙게 생각하며 이 시인의 동시가 많은 사람의 애독물이 되어 이 땅에 오래된 전설의 고을 <원댕이>가 새삼스레 빛 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원댕이> 사람으로서 기쁨을 금치 못하며 졸필을 엮어 나가고자 한다.
이 마을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조왕정시대, 국운이 기울어진 구한말, 원당말의 당자가 집당(堂)이다 보니 마을에 당집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오래전부터 원당(元堂)으로 불리어졌고 이 원당은 당시 면 이름에도 통용이 되어 이곳이 원당 면이었으며 1910년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찬탈하여 합병한 후 4년 뒤인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작은 규모(보통 4개법정리정도)의 면을 지금의 형태로 개편할 때에 원당면(元堂面)의 원(元)자와 이웃에 있던 반곡면(盤谷面)의 곡자를 붙여 원곡면(元谷面)이라 이름하게 되었고 특이하게도 전국지명중에 으뜸원(元)자 들어가는 행정지명이 많지 않은데 유독 이곳만은 으뜸원자를 사용하게 되어 한글로 쓰면 <으뜸골>이 되어 어쩌면 행운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안산시(安山市) 원곡동(元谷洞)이 있어 혼란을 초래할 경우가 있으므로 조금은 아쉬운 데가 있다. 어떻든 이렇게 해서 100년 전에 지금의 원곡면이 탄생했으나 당시를 되돌아보면 당시 행정구역을 개편한 일제는 딴 지역은 몰라도 원곡면 만큼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주민편의보다는 어디까지나 행정 편의적으로 개편하였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지문리 앞으로 시도인 대로가 뚫려서 성은리, 성주리, 산하리 주민들이 딴 곳 거치지 않고 직접 면소재지를 한 다름에 오고 갈 수 있으나 지문리 앞 시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성은, 산하리에서 소재지를 와야 할 경우 걸어서 논뚝길, 산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양성고개를 거치거나 오산, 혹은 송탄을 경유 평택을 지나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잘은 알 수 없으나 짐작컨대 일정규모 이상으로 면을 묶다보니 당시 양성군의 내,외가천리와 칠곡리, 지문리의 원당면에다 길도 없고 생활권도 달랐던 진위군 승량원면과 승량동면, 그리고 평택쪽의 도일면, 반곡면을 주민편의 무시하고 임의로 합쳐 일정규모의 원곡면을 만든 게 아닌가 짐작이 간다. 덕분에 필자가 어렸을 적 목격한 사실은 해마다 8월15일 날이면 원곡면민 축구대회를 개최했는바 거의 매번 우르르 사람들이 몰리면서 싸움판이 벌어지곤 했는데 나중에 그 이유를 분석해 보니 생활권이 다르고 교류가 적은 이질적 지역에 살다보니 한 면 사람이면 서도 잘 모르는 사이가 되어 싸움이 잦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참고로 요즈음도 체육대회를 2년에 한번 씩 개최하지만 싸우는 경우를 거의 본바 없다.
원당면으로 시작한 지금의 원곡면은 시작은 인위적인 개편으로 이질적인한 면이 되었지만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특히 커다란 혁명적인 큰 사건을 함께 겪으면서 동화되고 또 작은 인구인 탓도 있으나 이제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없을 정도로 이웃 같은 한 면민이 된 모습이다.
유구한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1900년대에는 커다란 변화와 아픔을 겪게 된다.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는 동방의 예의바른 선비의 나라, 화려한 금수강산을 간악한 흉계로 침략하여 급기야는 1910년 강제합방을 이루고 식민지화하여 이 땅을 유린하기 시작하자 비록 점잖은 선비의 나라 민초들이었으나 좌시하지 않고 삼천리강산이 분기하여 수많은 우국열사들이 나라 안에서 혹은 나라밖에서 의병으로, 광복군으로, 열혈지사로, 혹은 기미3.1독립운동을 통하여 독립의 횃불을 높이 든 것이다.
1894년 의병활동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되기까지 근 50년간을 수많은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이 고립무원의 빈들에서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가운데 근대국가 수립을 지향한 민족운동이었으며 국망에 맞서는 의병의 봉기와 애국계몽운동의 맥락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고 1910년대 비밀결사로서 계속된 투쟁과 저항정신은 급기야 3.1독립운동으로 폭발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왔다.
1920년대에는 반제국주의의 투쟁과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했으며 1930년대 이후에도 일제의 동화정책과 전시 강제동원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적인 투쟁으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폭압에 저항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공화주의에 입각한 자주적 민주국가 건설의 기틀을 닦는데 공헌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멸사봉공하신 애국선열들에게 독립유공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을 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특히 최근에 와서 1919년의 3.1운동에 대한 재조명활동이 활발해 졌는데 특히 주목할 사항은 3.1운동10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김대중 도서관 주최)에서 영국 켐브리지대학의 권헌익 교수는 3.1운동은 한반도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라고 진단하면서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시대에 아시아 여러 곳(베트남, 중국, 인도, 이집트 등)에서 유사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과 나아가 이 사실이 아시아만의 현상이 아니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곳, 또 중동과 아프리카의 식민주의에 대한 조직적 저항이 여러 모습으로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분출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며 3.1운동이 한 공유하는 시간의 정점에서 넓은 공간에서 각자의 이슈를 중심으로 하되 행동은 함께하는 동시성을 함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1운동이 글로벌한 역사속의 의의는 함께 했지만 다른 여타의 사건들과 비교해서 무척 특이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3.1운동 연구를 전체적으로 조명할 때에 중앙에서 변방으로, 엘리트중심에서 대중 속으로, 일체성에서 다양성으로 진화해 왔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연구 경향들이 앞으로 민족사의 영역을 넘어서 글로벌 역사의 지평에서 세계사의 하나의 중요한 부분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이렇게 한국사의 중앙/변방 그리고 일체성/다양성이 글로벌역사의 영역에서도 흡사한 구도로 더욱 성장하기를 기대한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안성도 어김없이 구국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여 독립의 횃불을 높이 들었으니 비록 구석지고 외진 두메산골이었으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 군적으로 참여하여 독립의지를 만방에 드날렸던 것이다.
우리 안성의 독립운동은 구한말 의병을 통한 일차저항으로 표출되었으니 이때부터 응축된 민족적 분노가 1919년 기미독립운동으로 폭발했고 서울 파고다공원 3.1운동을 시발로 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확산된 3.1만세운동은 우리 안성에도 전파되어 다양한 방법으로 발현되었던 것이다. 신간회 안성지회의 활발한 운동양상, 군자금 모집 등을 통한 독립운동, 의 열 투쟁, 광복군으로서의 전투, 일본제국주의의 강제동원에 대한 직접적 저항 등 안성이 펼친 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집약 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성에서의 의병운동은 전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고 전기 의병은 1896년부터 전개되었으며 1899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민승천에 의해 의병이 조직되었고 민승천 의병은 김하락이 이끄는 이천의 의병과 합세하여 광현전투, 이현전투를 벌리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안성의병은 1907년 이후 후기의병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였으며 1907년 안성청년회장 강태영과 임근수 등은 광무황제 퇴위 후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안성일진회를 공격하는 한편 격문을 사방에 보내어 독려하였고 이어 죽산, 양지방면은 물론 수원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며 이 열기는 의병봉기로 이어져 안성의병 200여 명은 일본군과 두 차례 교전했는가 하면 주재소와 일본인을 습격하기도 하는 등 기라성 같은 의병이 안성의병을 빛내었던 것이다. 의병활동뿐만 아니라 안성에서 국채보상운동도 일어났으니 1907년3월15일 유희근, 이원세, 정기조 등이 발기하여 설치한 국채보상금 모집소는 의연금 20원을 모금하여 국채보상기성회로 보냈으며 3월18일에는 이병식, 오철영 등이 <황성신문>에 의연금 출연문을 발표하여 모금운동을 벌리게 하였고 1907년3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국채보상운동은 대부분 면, 리 단위로 이루어 졌는데 점차 지역과 계층을 확장해 가면서 구국의식을 한층 선양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성의 3.1운동은 전국을 대표하는 격렬한 독립운동으로 180여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고 1919년3월11일 양성보통학교에서 시작된 안성3.1운동은 3월부터 4월까지 안성 곳곳에서 전개되었으며 3월11일 양성과 읍내면애서 시작된 시위는 일제의 포악한 탄압으로 일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2주 후 원곡면, 읍내면 시위를 계기로 재개되었으니 규모미만의 작은 시위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전개되었고 소위 규모이상의 시위는 3월, 4월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어 20회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고 안성에서의 3.1운동 백미는 단연 원곡, 양성에서 전개된 4.1독립항쟁임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4.1독립항쟁은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19년4월1일(음력3월1일) 원곡면 주민 1,000여명과 양성면 주민 1,000여명이 연합하여 당시 안성서부 4개 면의 행정중심지였던 양성면 내의 통치기관, 이를테면 주재소, 우편국, 면사무소 그리고 일본인 가옥과 상점까지 모조리 파괴하고 방화한 의거이다.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안성에서는 3월11일 양성초등학교와 읍내면 상인중심의 첫 시위가 시작된 이래 군내 12개면 중 주로 읍내면, 양성과 원곡면, 그리고 일죽, 이죽, 삼죽면과 나중에 발견된 공도와 미양면까지 8개면이 주로 만세를 산발적으로 불렀으며 규모이상의 큰 시위는 3월11일부터 4월3일까지 집중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나와 있다.
안성의 3.1운동은 연인원 8,500여명이 참가한 독립운동으로 다양한 계층, 특히 하층이었던 읍내 기생까지도 함께한 전 군민의 열화 같은 독립운동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1,000여명 이상의 대규모시위는 4월3일 읍내면의 3,000명, 4월2일3일의 이죽면 시위 2,000명으로 이죽면 만세시위에서는 저들이 총격을 가해 사망3명, 부상8명의 희생자도 발생하였다.
원곡. 양성의 4.1항쟁은 주모자 이유석, 최은식, 이덕순, 이희룡, 홍창섭, 이근수, 이양섭 등의 주도로 4월1일 밤 8시에 원곡면사무소 앞에 1,000여명의 원곡면민이 모여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면장과 면서기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한 다음 이들을 앞세우고 이웃면인 양성면으로 행진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일행은 양성고개(지금의 만세고개)에 이르자 일단 대오를 정비한 다음 주모자 이유석이 일어나 “오늘밤 기약도 없이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은 천운이다. 제군은 양성면 주재소로 가서 일본인 순사와 함께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순사가 이에 응하면 좋으나 만약 응하지 않으면 우리로서도 할 바가 있다.”고 연설을 하고 이어서 홍창섭, 이덕순, 이근수, 최은식, 이희룡, 이양섭이 차례로 일어나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필요 없다.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같이 양성면, 원곡면 내의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자. 또한 일본인을 양성면내에 거주하게 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들을 양성에서 구축하자, 제군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성히 투쟁하라” 고 외쳤다.
그런 다음 다시 대오를 지어 양성으로 돌진하였고 원곡시위대가 양성에 닿을 즈음 마침 양성에서도 1,000여명의 시위대가 주재소 앞에서 평화적으로 만세를 부른 다음 해산할 찰나에 원곡시위대가 몰려오므로 자연스럽게 합쳐진 연합시위대 2,000여명은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해산을 명하는 순사를 돌과 몽둥이로 위협하여 쫓아내고 주재소를 파괴, 방화하고 이어서 우편소로 달려가 전봇대를 쓰러뜨리고 우편소 집기와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웠으며 면사무소로 달려가 역시 파괴, 방화한 다음 일본인 잡화상 외리여수(外里與手)와 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파괴하였다. 한 밤중이 되어 양성주민 일부는 돌아가고 일부는 계속 만세를 불렀으며 4월2일 새벽에 원곡면시위대는 원곡으로 돌아와 면사무소를 불태웠고 이어서 소재지 남산에 모여 평택 철도를 파괴하고자 하였으나 헌병의 출동소식을 접하고 해산하였다. 이로서 4월1일과 2일 거사를 통하여 2일간 양성에서 일본인을 완전히 몰아내고 해방을 달성하였으므로 후세에 이를 <2일간의 해방>이라 이름 붙이고 기념하고 있다.
4.1독립항쟁은 1919년 3.1운동당시 남북한을 통틀어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독립운동이었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재판에 원용될 정도로 왜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거사였으며 거의 수세에만 몰려 당하기만 하던 만세운동에 특이하게도 저들을 축출하고 2일간이긴 하지만 서부 4개 면을 해방시킨 쾌거였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인 것이다.
특히 원곡. 양성의 4.1만세를 민족대표 33인의 재판에서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과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더불어 전국 3대 폭동(?)으로 규정할 만큼 격렬했던 항거였음이 저들의 기록에서 증명된바 있다.
그 후 일제는 즉시 군경을 동원하여 피신한 애국 열사를 체포하기 위하여 무려 3회에 걸쳐 무지막지한 색출작전을 감행하였고 양민을 학살하는가 하면 가옥을 불살랐고 배상금을 물리었으며 300명이상의 애국지사를 체포하여 갖은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여 피눈물을 뿌리게 하였으며 24분의 순국열사로 하여금 맞은 자리, 찔린 자리 겨우 고약으로 치료하다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나게 하는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고 오늘까지도 진정한 사과는커녕 엉뚱한 궤변으로 우리를 분노케 하는 개탄스러운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재판에 회부하여 저희들 입맛대로 판결하여 127명중 125명에게 징역형을 언도하여 철창에 가두므로 3.1운동사에 최대의 탄압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저들의 존엄에 정면 도전했다는 죄목으로 민족대표 33인의 최고형량 3년보다 4배가 많은 12년 형을 2분에게, 그리고 10년형을 3분에게 언도하고 나머지 분들에게는 모두를 1년3개월 이상 언도한 것으로 보아 대단히 엄중한 형량으로 저들이 얼마만큼 거사의 극렬함과 민중저항이 위협적이었나를 실감케 하는 민족사에 기리 빛나는 의거임이 증명된 사실이다.
1920년대의 안성의 또 다른 독립운동은 민립대학 설립운동, 청년회활동, 신간회 활동 등으로 나타났으며 농민소득향상을 위하여 협동조합 설립을 계도하는 등 다양한 국민계몽운동을 실시하였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며 끝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방되기 불과 15일전인 1945년7월20일 동지 조문기, 강윤국과 더불어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한애국청년당>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친일파 거두인 일본 중의원 의원 (박춘금)이 소위 <대의당>이란 정당을 조직하고 내선일체와 조선인의 황민화를 선동하는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개최 정보를 입수한 후 이를 분쇄하기 위하여 동지 2인과 함께 다이나마이트 폭탄 2개를 급조, 대회장인 서울 부민관 복도에 설치하여 이를 폭발시키므로 대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소위 “부민관 폭탄의거”의 주인공 유만수(柳萬秀)지사를 기억하고자 한다. 이 분은 안성군 금광면 개산리 출신으로 안청소학교를 나온 안성의 걸출한 애국지사이다.
이상으로 <원댕이>가 속해 있고 원댕이와 궤를 같이한 안성과 원당마을과 지근거리에 있고 <원댕이>로 지칭되었던 원곡의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 얘기를 두서없이 엮어 보았다. 이러한 위대한 민족적 거사가 원당면으로 지칭되는 원곡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원당의 으뜸원(元)자는 결국 영예롭고 영광스러운 명예로 그 뜻을 다하지 못하고 암울한 시절의 피와 땀과 눈물로 고난의 역사를 통하여 그 뜻을 펼쳤음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원곡면 에서는 특이하게도 이웃면에서 흔히 보는 면 출신 고위 직(국회의원, 장관, 법관, 장군, 고위공무원)이 전무하며 대신 애국지사는 단일 면으로는 최대인 순국24분, 옥고127분의 애국선열이 원곡면을 빛내고 있다)
또한 위대한 역사의 맥은 당대로 끝나지 않고 후대로 이어져 그 후손들도 독립운동에는 못 미치지만 큰 역사를 이루어 놓았으니 원곡면 만세로 868번지 안성3.1운동 기념관 건립이 그 것이다.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재건되었으나 기미년의 역사는 그 증거물인 재판기록이 부산 정부기록보존소에 묻혀 햇빛을 보지 못하다가 해방 된지 32만인 1977년도에야 유족 이세종, 3.1운동선양회장인 이종두씨 등의 수고로 재판기록이 발견되게 되어 대거 포상을 받게 되었고 비로소 4.1항쟁의 백미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선대들의 피어린 역사를 알게 된 후대들이 유족들은 3.1운동유족회(회장 : 초대 이돈영, 마무리회장 : 윤우)로, 유족을 포함한 기타 유지들은 3.1운동선양회(회장 : 이종두)로 조직을 결성하여 우선 3.1운동기념식을 거행하면서 기념탑 건립을 추진(추진위원장 : 처음 이종두, 나중 이자헌 국회의원)하기에 이른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지부진하던 중 칠곡리 용소의 유족 이종락(광복회 안성시지회 초대 지회장)씨가 현 기념탑 부지 약600여 평을 쾌척하여 급물살을 타 준공을 보게 되었으며 매년 3월1일 탑 부지에서 선양회 주관으로 기념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고 유족회와 선양회를 중심으로 여러 요로를 통해 기념관 건립의 열기를 표출하던 중 천만다행으로 1995년 해방50주년기념 중앙관심사업으로 책정이 되어 당시 국.도.군비 42억으로 2001년 11월 기념관이 준공되어 개관하게 된다. 중앙관심사업으로 책정되어 일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긴 했으나 준공하기 까지 이르는 일련의 모든 과정에 이곳 후대들의 피나는 노력이 작용하였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며 부지 수용과정이라든가 기타 굽이굽이 마다 많은 애씀이 경주되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안성의 독립운동을 비롯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역사에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안겨준 거사였으며 건국에 큰 공로를 세웠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약소민족에게 큰 영향을 주어 그들을 각성시키고 일어나게 하는데 크게 한몫을 하였음은 앞서 지적한바 있다.
이제 밖으로는 이웃이긴 하지만 작금의 일본의 행태를 보거나 안으로는 청산되지 않은 일제잔재와 오도된 역사분쟁을 보면서 끌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경우를 왕왕 느끼면서 오직 우리의 바람은 지금까지의 우리 선열님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 이룩한 위대한 독립운동역사가 결코 폄훼되거나 숭고한 독립정신이 촌치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연한 명제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가 꼭 기려야 할 수많은 애국지사의 불꽃같은 투혼, 그리고 굴하지 않는 기개와 용기는 우리겨레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혼으로 남을 것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세대가 본 받아 영원히 간직하고 계승해야할 크나큰 책무임을 천명하면서 이분들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의 건국의 초석을 놓으신 위대한 선구자이며 세계경제대국 10위권의 복지,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위대한 건국공로자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고 또 반드시 기려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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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태수님이 쓴 안성 전설의 고장 '원댕이 마을'에 대한 글을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안성의 3.1운동이 원곡과 양성의 4.1항쟁으로 그 기치가 높게 빛난 역사적 사실을 알고는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새삼 이철우 시인의 동시집 <원댕이 아이들> 을 통해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진것이 고맙고 그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