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방(新方) 팔략(八略)의 인(引)
약(藥)을 방(方)에 집착(:執)하지 않고 마땅함에 합(合)하여 사용하면 그 방(方)은 있을 필요가 없느니라.
방(方)으로 법(法)을 입(立)하고 법(法)으로 마땅함을 제(制)하면 그 방(方)은 없으면 안 되느니라.
방(方)의 선(善)한 것은 그 마땅함을 얻는 것이고, 마땅함을 얻는 것은 가히 법(法)으로 삼을 수 있느니라.
방(方)의 선(善)하지 않는 것은 그 마땅함을 잃은 것이고, 마땅함을 잃은 것은 가히 거울(:鑑)로 삼을 수 있느니라.
다만 법(法)에는 선(善)과 불선(不善)이 있고 인(人)에는 지(知)와 부지(不知)가 있느니라.
반드시 방(方)을 아는데 잘 하는(:善) 자는 방(方)을 집착(:執)하지만 또 방(方)을 집착(:執)하지 않느니라.
방(方)을 집착(:執)하지만 방(方)을 집착(:執)하지 않는 것은 시(時)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느니라.
이처럼 방(方)을 폐(廢)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사람(:人)을 계발(啓發)하려는 것일 뿐이니라.
내가 고방(古方)에서 마땅함을 얻은 것들에서 모두 약간의 수(首: 중요한 것)만 선택(:選)하여 팔진(八陣)으로 열거(列)하였으나, 많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느니라.
내가 보건대 그래도 미진(未盡)함이 있는 것 같아서, 이로 인하여 다시 신방(新方) 팔진(八陣)을 제(制)하였는데, 그 중에는 심(心)으로 깨달은 것, 경험(經驗)한 것, 고(古)의 미비(未備)함을 보충(:補)한 것 등이 있느니라.
각 방(方)의 아래에는 대부분 가감(加減) 등의 법(法)과 분량(分兩)의 수(數)를 첨부(附)하였는데, 모두 그 출입(出入)에 하나 같지 않음이 있으니, 이는 바로 방(方)을 볼 때 집착(:執)하면 안 되기 때문이니라.
팔진(八陣) 중에서 공방(攻方)과 한방(寒方)은 언급(:及)이 많지 않으니, 이는 고법(古法)에 이미 많이 있어서 다시 첨족(添足: 첨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라.
대체로 방(方)은 마땅히 간략함(:簡)을 따라야 하니, 내가 다시 쓸데없이(:冗) 더한다면 비루(:鄙)하지 않겠는가?
그 뜻(:意)는 바로 쓸데없는 것(:冗) 중에 간략함(:簡)을 구하는 것일 뿐이니, 이것이 방(方)을 제(制)하는 뜻(:意)이니라.
그런데 방(方)을 사용하는 뜻(:意)은 '의(意)에는 원통(圓通)함을 귀(貴)하게 여기고 사용에는 집체(執滯)함을 혐(嫌)한다.'는 것이 그 요점(要)이니라.
만약 단지 원(圓)하기만 하고 주(主)가 없다면 잡란(雜亂)이 생(生)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의사(疑似)한 중에 저절로 일정(一定)하여서 불역(不易: 불변)하는 도(道)가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니, 이처럼 원통(圓通)한 중에서는 집지(執持)가 없으면 안 되느니라.
또 만약 하나에만 집착(:執)하여 반(反: 되돌리다)하지 않는다면 편요(偏拗: 치우쳐 비뚤어지다)가 생(生)하여 동(動)하면 서로 모순(:左)이 되느니라. 순식간(:焂忽間)에 매번 그 삼인(三因)을 추측(測)하기가 어려운, 많은 변(變)들이 된다는 것을 모르니, 이처럼 집지(執持)한 중에 원활(圓活)이 없으면 안 되느니라.
원활(圓活)은 마땅히 삼사(三思: 3번의 생각)를 따라야 하고, 집지(執持)는 반드시 정견(定見: 확고한 견해)이 있어야 하느니라.
능히 집지(執持)하고 또 능히 원활(圓活)하다면 바로 능히 방(方: 모나다)하고도 능히 원(圓: 원활)한 사람이로다! 그 사람이 누구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