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테너). 평양 출생. 평양 광성고보(光成高普) 및 세브란스의전(醫專) 졸업. 이유선(李宥善)의 친형.
1907-1960. 성악가, 한국 오페라 개척자.
어려서부터 교회의 찬송가와 오르간을 벗삼아 지내면서 광성학교를 다녔고, 선교사로부터 성악을 배운 것이 테너가수로 성장하게 된 동기였다.
서울로 이주하여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문과에서 수업하면서 베커 여사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베커 여사의 반주로 노래를 불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동생 이유선과 함께 성악의 길을 닦는데 노력했다. 1928년 무렵부터 서울의 음악회에 출연했으며, 연희전문 2년을 마치고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한 후에도 부츠 여사에게 음악지도를 받았다.
1928년 4월 7일 춘기음악회 때 출연했고, 1933년에 설립된 오케음반에 창작동요와 가곡 및 애창곡 등을 취입했다. 1934년 4월 10일 공회당에서 도구음악회(渡歐音樂會)를 열었다. 연전(延專) 시절 김영환(金永煥)의 음악지도와 더불어 베커 부인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황주(黃州)에서 개업했으나, 성악 공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마침 오케레코드사 이철(李哲) 사장의 주선으로 1931년 이탈리아로 3년간의 유학 길을 떠났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유학 시절 첵키에게 3년간 사사를 끝내고, 1938년 5월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를 성공리에 가졌다. 그의 시원한 고음과 서구적 매너는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도 그 이름을 떨쳤다. 1938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그리고 1939년에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이인선 관련 기사는 『東光』(1931) 22호·『中央』(1934) 8호·『三千里』(1934) 6권 9호·『中央』(1934) 8호·『朝光』(1936) 7호·『女性』(1936) 1권 5호·『朝光』(1937) 20호·『朝光』(1937) 21호·『朝光』(1938) 31호·『朝光』(1939) 43호·『人文評論』(1940) 6호·『三千里』(1941) 13권 4호 등에 나온다. 이유선과 함께 또는 테너독창으로 취입한 "거룩한 밤"·"모도(모두) 내 사랑"·"니나의 죽엄"·"라르고"·"라파로마"·"마리아 마리"·슈베르트 소야곡·"여자의 마음"·"오! 나의 태양"·"주여 인도하소서"는 오케음반에 전한다.
1945년까지 성진(城津)에서 병원을 개업하면서 성악을 개인교수하였다. 그해 월남하여 국제오페라사를 창립하고,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수익금을 모두 바쳐 오페라운동에 헌신하였다.
1946년 10월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이탈리아 가곡과 오페라 연구의 목적으로 그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국성악회(韓國聲樂會)를 조직했다. 1948년 1월 시공관에서 오페라 "춘희" 공연 때 대본을 번역하였다. 1948년 1월 "춘희"를 최초의 오페라로 상연하고 주역을 맡았고, 1950년 5월 비제의 "카르멘"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50년 도미(渡美)하여 마취학을 연구하는 한편 오페라에도 전심하여 1952년 가을 뉴욕 메트로폴리탄가극단 오디션에 동양인으로 처음으로 영예의 합격을 하였다. 1960년 3월 19일 켄터키주 루이뷜 시에서 병사(病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