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Blue)
조 남 숙
예술은 자유가 날갯짓을 훈련하는 곳이다(마티 루빈, 저술가, 캐나다 토론토),라는 마틴 루빈의 말에서 날갯짓이라는 낱말에 잠시 멈춘다. 어쩌면 날갯짓은 마법의 다른 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피터팬의 팅커벨(Tinkerbell)처럼 날개를 가진 이들이 마법을 일으키니 말이다. 그러니 마법이 일어나는 곳은 자유가 있는 곳이고 결국, 자유는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 예술에서 마법이 일어나며 자유로운 일을 만난다. 마녀가 욕심을 부리기도 하지만 어떠랴. 복원력을 가진 마녀의 힘도 팽팽하니. 마법은 좋은 이야기가 샘솟는 곳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팅커벨의 반짝이는 지팡이처럼 마법의 생성점이 예술이다.
날갯짓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은 언제라도 가고 싶다. 태어나는 순간, 모두가 예술가인 것처럼 탄생의 울음이, 첫 숨쉬기가 예술이다. 예술은 생명의 날갯짓이며 그 날갯짓으로 사랑을 알게 된다. 그런 것이 가능한 도시가 있다면 어찌 주저하랴. 기꺼이 날갯짓으로 예술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그 도시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곳이 통영이다. 전복적인 예술의 혁신과 창조가 일어나는 곳. 세상에 없던 예술의 상상력이 탄생하는 곳이다.
마법이 일어나는 순간은 온갖 색들의 환호성이다. 그 색 중에서 유독 마음을 끄는 것이 파란색(Blue)이다. ‘Blue’의 사전적인 의미는 파란, 푸른, 하늘색의, 우울하다는 의미가 있지만 푸른색이 주는 느낌은 자연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자연의 저편에도 존재하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개연성을 갖는다. 또한 ‘Blue’라는 낱말은 안락함이라는 느낌이 어렴풋이 있다. 이렇게 색이 주는 무한한 발상, 색이 풍기는 천연의 순수함, 색이 보듬는 시간이 존재하는 곳이 통영이다.
예술의 도시 통영은 블루의 도시다. 산천초목이 우거진 여름은 말할 것 없이 사계절이 모두 블루다. 색채나 명암의 차이가 존재하는 도시, 그러나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도시다. 어떤 색채의 이론이나 명암의 문장이 필요 없는 곳이다. 병풍처럼 도시를 아우르는 푸른 바다는 마술사다. 혼령을 부르는 하늘을 맘껏 볼 수 있는 곳이다. 삶의 희로애락이 파도처럼 넘실대면서 춤을 추는 곳이다.
통영에는 그림으로 푸른 세상을 표현한 전혁림(1916~2010, 서양화가, 통영) 화가가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파란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무척이나 바다를 사랑했던 화가의 그림에서 수만 가지의 바다색을 만날 수 있다. 맨눈으로 보지 않으면 느낌이 어설프다. 그의 작품은 바다에서 탄생했다. 푸른색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을 표현했고 지나간 추억을 두드렸다. 간직하려 하지 않아도 마음에 새겨지는 인연을 데려왔으며 번져오는 내일을 기대하게 했다. 출렁이는 슬픔의 넋두리를 풀어놓게 했으며 우울한 일상의 순간을 목도하게 했다. 다양한 삶의 형태를 다양한 푸른색으로 인간의 평등함을 고백하게 했다.
세상의 모든 색상 중에서 특히 푸른색을 보고 느끼려면 통영에 가야 한다. 이곳의 푸른색은 이곳만의 신비함이 있다. 통영의 바다와 하늘, 숲과 오래된 거리와 집들. 그리고 통영의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곳에서 파란 마음이 움직인다. 새소리가 들리는 작은 집에서 시를 낳고 있는 소박한 시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것뿐이랴. 긴긴 시간의 흐름을 바다의 선율로 들을 수 있는 곳, 그 소리가 리듬이 되고 문학이 되고 색채가 되는 곳이다.
바다처럼 눈이 파란 사람들이 사는 곳, 섬과 섬 사이의 파도를 타고 노는 사람들이 있는 곳, 배들이 무리 지어 파도와 말을 섞는 곳, 갈매기 떼들의 움직임 따라 쫓던 눈을 감아버리는 곳, 그 마음에서 그리운 이를 만나는 곳이 통영이다. 이곳에서 숨 쉬는 것이 블루다. 블루를 느끼지 않으면 숨을 쉬지 않는 것이다. 검은 밤바다에서 달빛 길어 올리는 시간에 펼쳐지는 세상도 푸르다.
영화, 문라이트(Moonlight, 2016)의 대사다.
- 그럼 아저씨 이름이 블루에요?
흑인 아이의 물음에,
- 블루? 글쎄, 달빛에서는 그렇게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어떤 할머니에게. 달빛 아래에선 흑인 아이가 푸르게 보인데….
달빛에 파도가 그림처럼 보이는 시간에 두 흑인은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흑인 어른은 흑인의 삶과 고통을 흑인 아이에게 단조로운 리듬처럼, 숨소리 같은 파도처럼, 고요한 달빛처럼 말한다. 세상은 푸르다고.
달빛 아래서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한 색이 ‘블루’다. 어떤 이유에서건 인간을 차별할 수 없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달빛이 환한 바다에서 무엇을 차별한단 말인가. 검은색이 푸르게 보이는 곳에서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차별 없는 예술을 생각한다. 틀 밖에서 생각하며 틀 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오히려 어둠을 찾아 눈을 감고 빛과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서 나와 응시하는 시간을 갖고자 할 때가 있다. 지금의 나를 생각하고 예전의 나를 생각하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의 숨소리를 어둠 속에서 느끼고자 할 때가 그렇다. 어둠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푸른빛을 기대하면서. 그 빛으로 내일을 준비한다. 세상은 아직 내 곁에 있고 그 세상이 어떤 어려움으로 다가오더라도 푸른빛이라면 견딜 만하다는 것을 달빛 아래에서 노래할 것이다.
예술이 날갯짓하는 소리가 푸른빛으로 들려오는 곳이 통영이다.
조 남 숙
월간 수필과 비평 등단. (2012.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