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의 둘 째 언니는 15년 전에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집사람은 세자매 중 셋째이다.
집사람의 둘 째 언니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고 한국을 오가며 개인사업을 하며 생활하다 일본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그 후 쭉 거기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사업이 어려워져 스트레스로 인한 암이 발병하고 심해져 사망했다.
그 때가 베이징 올림픽 기간이었는데, 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사람은 아이 둘을 데리고 급히 일본으로 갔다.
이틀 뒤 우리나라가 야구 결승전에서 이겨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소파에 앉아 소맥을 마시며 보는 나에게 걸려온 국제전화에는 언니의 부음을 전하는 집사람의 슬픈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일본 사람인 동서형님은 미쯔비시社의 직원이었고, 직원과 가족들은 회사에서 마련한 납골공원에 안치될 수 있었는데, 도쿄 외곽의 산자락에 위치한 거대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우리가 백두산을 생각하듯 일본사람들이 성스럽게 생각하는 후지산이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안치된 처형의 유골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기에 안락하게 자리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형부마저 돌아가시면 언니의 납골묘를 관리할 마땅한 사람이 없어 형부와 동생은 서로 고민했고 형부도 언니의 유골은 고향에서 편안하기를 원했다.
이번 일본 여행아닌 여행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일본에 도착한 날 오후 우에노의 한 식당에서 만난 형부(동서형님)은 처형의 유골함을 작게 포장해서 가지고 나오셨다.
유골함을 바라보던 나는 처형의 나이를 불현듯 떠올렸고, 나보다 한 살 많은 처형이 2008년에 죽었으니 그때 나이 40대 중반이었음이 생각이 났다.
나이가 겹쳐진 처형의 생애는 처연하고도 서글픈 감정으로 다가왔다.
형님과 맥주 여 섯 병을 스시와 함께 마시고 헤어진 후 집사람은 언니의 유골함을 호텔에 두고 올까 아니면 그냥 들고 다닐까 고민했다.
나는 언니에게 정말 오랜만에 세상구경 바람구경 꽃구경을 시켜드리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유골함이 큰 것도 아니고 정말 작게 된 함이어서 백팩이나 가방에 넣으면 표시도 안나고 무게감도 못느낄 정도였다.
그 날 오후 늦게 우리는 벛꽃이 유명한 명소로 향했다.
山手線은 우리나라 서울의 2호선처럼 순환선이었고, 그 중에서 메구로역에 내리면 벛꽃의 명소가 바로 나온다.
한문으로 中目黑은 일본어로 ‘나카메구로’라고 읽었고, 메구로 강 주변에 위한 오래된 벛꽃나무들이 즐비한 관광명소이다.
퇴근 후 야경은 더욱 예쁘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저녁이 될수록 주변은 인산인해가 되어 통행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다음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고, 우리는 신주쿠역 근처에 있는 큰 공원 ‘신주쿠교엔’을 찾았다.
이 곳 역시 벛꽃의 명소였고 조경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커다란 공원이어서, 비가 내리는 중에도 산책을 즐기기에 좋았다.
처형을 모시고 다니는 인근의 나들이는 슬픔보다는 함께 한다는 기쁨과 한국으로 함께 온다는 행복감이 더욱 컸다.
벛꽃이냐 사쿠라냐, 어느나라 꽃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만개한 벛꽃 자체가 주는 화사함과 그 속에서 함께 하는 여행객들, 그리고 그 속에 함께한 우리들로 인해 처형도 행복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그리 많지 않은 날들을 보낸 처형이고 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상황이 슬프고 애닳은 마음으로 가득 다가왔음에도 집사람은 슬픔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고 담담하고 잔잔한 미소로 함께 했다.
한국으로 오기 전 날 저녁 짐을 싸는(packing) 과정의 가장 큰 고민은 처형을 기내에 태우고 오느냐 아니면 수하물로 부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검색해봐도 이런 절차나 내용이 명확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처형은 미리 주문한, 좀 더 큰 납골함에 옮겨 모셔졌고 거실에서 동생(집사람)과 하룻밤을 보냈다.
처형을 곁에 두고 추억을 회상하며 맥주를 나눠 마신 나와 집사람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울의 동생 집으로 온 처형은 행복했을까.
아마 행복해하시리라 믿는다
이번 일본 여행은 하늘나라의 처형이 아닌 우리 곁의 처형
그리고 지상의 벛꽃과 함께 한 언니와 동생의 소담스러운 산책여행이었다.
처형, 이제 당신의 나라 하늘에서 편히 쉬시길
- 2023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