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11
캘리포니아대 키리초크 박사팀 속도제어 메커니즘 발견
사람의 새 생명은 남자의 정자가 여자의 난자와 결합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시작된다. 그러나 정자는 난자를 만나기 위해 아주 긴 여행을 한다. 여성의 질 안에 들어온 정자는 자궁 속을 지나 난소가 있는 난관을 향해 약 17㎝의 거리를 헤엄쳐 간다. 이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자신의 몸길이(약 0.05㎜)보다 3000배 이상 먼 곳을 헤엄치는 것이다.
난자와의 상봉 위해 힘 조절
정자는 1분에 3㎜의 운동 능력으로 난자에 접근해 간다. 편모에 의해 움직이면서 난자가 유인하는 분비물을 따라 길을 찾아간다. 1회에 사정되는 약 3억개의 수많은 정자 중 난자 근처로 갈 수 있는 정자는 100개 정도다.
정자가 헤엄쳐 가는 자궁과 난관의 내부에는 복잡한 주름과 섬모가 있어 힘든 장애물 경주를 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빨리 헤엄치기만 한다 해서 난자와의 만남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있는 힘을 다해 헤엄치면 난자에 도달하기도 전에 힘이 빠져 맥을 못 추기 때문이다. 또 난관(한 쌍의 길고 좁은 관, 나팔관이라고도 함)은 좌우 두 개의 길로 갈라져 있어 아무리 빠르게 헤엄쳐 간 정자라고 해도 난자가 있는 곳이 아닌 엉뚱한 길로 가면 난자와 만나지 못한다. 난자는 난관 두 곳 중 한 곳에서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반의 적당한 스피드와 어느 지점에서 스피드를 내야 하는지의 타이밍이 중요하다. 정자는 난자에 가까워질수록 스피드를 높인다. 왜 그럴까?
난자에 가까이 갈수록 힘 펄펄
보통 정자는 여성의 몸속에 들어가면 여성이 보내는 화학적 신호에 반응해 움직임이 매우 격렬해진다. 이 흥분 상태로 인해 정자가 난자 속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다. 정자가 격렬하게 헤엄을 쳐서 난자에 도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산성도(pH)이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알칼리성이 될수록 빨리 움직인다. 예컨대 높은 산성을 띤 남성 생식기에서는 정자 역시 강한 산성을 띠면서 움직임이 둔하다. 그런데 여성 생식기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난자 쪽으로 접근하면서 알칼리성이 강해져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난자에 거의 닿을 무렵에는 최고의 속도를 낸다. 이처럼 산성도가 정자의 활동성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메커니즘 속에서 정자가 스스로의 산성도를 바꾸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지난 2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생리학자 유리 키리초크(Yuriy Kirichock) 박사팀이 남성의 정자가 스스로 산성도를 조절해 활발하게 움직이거나 움직임을 억제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했다”는 내용을 영국 BBC 방송과 미국의 사이언스 데일리가 보도해 화제가 되었다. 키리초크 박사팀에 따르면, Hv1이라는 정자 내부 물질이 산성의 양성자 방출을 적절하게 제어함으로써 정자의 움직임을 때로는 활발하게 때로는 둔하게 한다. 정자 내부는 산성의 양성자가 바깥보다 1000배나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정자가 스스로 알칼리성으로 만들어 활동성을 높여야 할 때를 안다는 뜻이다. 정자가 난자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Hv1이라는 물질이 정자 표면의 미세한 구멍을 확 열고 산성 물질의 양성자를 바깥으로 내보내 정자 내부를 알칼리성으로 만들어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반대로 힘을 아껴야 할 때는 구멍을 닫아 산성 물질을 유지한다. 이 구멍의 이름은 ‘Hv1 proton channel’이다.
그렇다면 정자는 어떻게 난자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 구멍의 문을 여는 것일까. 그것은 정자의 Hv1이라는 물질이 여성의 생식기 특히 난자 부근에 많이 분비되는 아난다미드(anandamide)라는 물질에 반응함으로써 일어난다. 아난다미드와 반응한 Hv1이 정자 표면의 구멍을 잽싸게 열어 산성의 양성자를 방출한 결과 신기할 정도로 난자 주변에서 정자가 속도를 더해 아주 빠르게 진출하는 것이다.
정자가 가진 에너지는 한정돼 있다. 그래서 난자와의 거리가 먼 곳에서는 에너지를 아끼고, 거리가 가까운 곳에서는 비축해둔 에너지를 최대한 사용해 전력 질주해 나가는 메커니즘을 정자가 선택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Hv1 조절 가능하면 피임·불임 치료 가능
이렇게 험난한 여행을 거쳐 가장 건강하고 운이 좋은 단 한 개의 정자가 난자와 결합한다. 난자 근처로 간 정자 100개 중 한 개를 빼고는 모두 들러리를 서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자는 동그란 머리에 긴 꼬리를 흔들면서 난자를 향해 헤엄쳐 나가는, 그저 난자에 제일 먼저 도달해 수컷의 DNA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으로 임무를 끝내는 단순한 수컷의 생식세포일 뿐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수정 확률을 높이려고 속도 시점을 조절한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야말로 영리한 생식세포이다.
▲ 정자가 수정을 위해 난자로 들어가는 모습을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사진. / ⓒ조선일보DB
정자가 난자를 만나면 머리끝에 있는 아크로신이라는 효소로 난자의 세포막을 녹이고, 꼬리는 남겨둔 채 머리만 난자 속으로 들어간다. 원래 난자와 정자의 크기를 비교하면, 난자는 0.2㎜이고 정자는 약 0.05㎜이므로 정자는 난자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머리 부분만 따지고 보면 난자와 정자의 크기는 마치 공룡과 사람처럼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하나의 정자가 들어가면 난자의 세포막에서 전기반응이 일어나 다른 경쟁 정자들은 난자의 세포막에서 떨어지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난자의 겉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이 딱딱하게 굳어 다른 정자가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고 2~3시간쯤 지나 수정란이 분열을 시작하고, 수정된 지 약 7일째 되는 날 수정란은 자궁내막 안으로 들어가 아기로 자라기 위해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알에서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번 키리초크 박사팀의 발견으로 불임 치료와 남성 피임법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만약 인위적으로 Hv1을 조절할 수 있다면, 불임의 원인인 운동성이 약한 정자의 활동을 활발하게 해 임신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또 정자의 움직임을 억제해 임신을 막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정자에 Hv1의 조절 스위치가 켜져 피임약 개발은 물론 불임 치료에도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기를 기대한다.
김형자 /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