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욕심의 끝은?
2023년 9월 5일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 유력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서울 특파원을 3년간 역임하고, 한국이 좋아 현재 서울에 머물러 살면서 한국 여인(MBC 아나운서 임현주)과 결혼도 하고, 한국 국민과 한국 사회와 한국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한 이후, 한국의 실상을 예리하게 파헤친 작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다니엘 튜더(Daniel Tudor, 1982-)입니다. 그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책을 통해서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세 번 깜짝 놀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첫째는 3년간의 한국전쟁 후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이런 놀라운 경제 기적과 민주주의의 두 가지 기적을 이루어 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며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랄 일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온 세상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의 이러한 위대한 업적과 놀라운 기적에 대하여 깜짝 놀라게 되는데 정작 당사자들인 한국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그 자체를 잘 모른다는 사실에 대하여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렇게 놀라운 기적과 위대한 업적을 짧은 기간 내에 이룬 대단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 이 한반도 남단에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에 또 한 번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실증적인 근거를 우리 사회의 비극적 현상인 자살률에서 찾는데 지금 우리나라 자살률은 8년 연속 세계 1위라는 사실입니다. 하루 43명, 일 년에 15,000명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실증적인 예가 있는데 그것은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에서 OECD 국가 10대 청소년들에게 설문을 조사했는데 OECD 국가 중에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우리나라 학생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전 세계 178개 국가를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했는데 우리 한국 학생들이 102번째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구체적인 사실과 통계를 제시하면서 다니엘 튜더는 한국인들이 전 세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기는 했지만 정작 소유해야만 하는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린 나라로, 모든 국민이 불행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irony)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보람된 삶을 살면서 행복을 누리고자 함이 아닐까요? 그런데 보람된 삶을 살고 행복하기 위해서 이루게 된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의 기적이 오히려 우리의 기쁨과 행복을 빼앗아 가고 불행을 안겨주고 있다는 현실이 정말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 같은 불행의 이유에 관해서 다니엘 튜더는 지적하기를 우리 민족이 가진 무한 경쟁심과 함께 끝없이 펼쳐지는 욕심 때문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런 과욕이 우리 민족을 불행한 길로 이끌어 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칼럼을 쓰는 필자는 올바른 평가라고 생각됩니다.
욕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몇 군데 살펴보면, 디모데전서 6:10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야고보서 1:15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에베소서 4:22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욕심, 지나친 욕심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범죄 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사망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강원도 산골에 아들 삼 형제를 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빈곤한 생활에 아이들을 온전히 키우기 어려워서 마침 사업차 한국에 와 있었던 일본인 사업가에게 갓 태어난 막내아들을 양자로 주었습니다. 얼마 후 그 일본인은 자기 양자를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갔고, 세월이 흘러 일본인은 막대한 부를 양아들에게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미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고 있었던 청년은 수소문 끝에 강원도 고향에 노부모가 살아 계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일본 생활과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정리하여 현금을 넣은 큰 트렁크 하나를 가지고 자신의 고향마을 강원도 산골을 찾게 되었습니다.
수일이 지나 고향 마을에 찾은 그 청년은 물어 물어서 한밤중이 되어서야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마을 초가집 앞에 이르렀습니다. “계십니까? 하룻밤 좀 묶어 갈 수 있겠습니까?” 잠을 자다가 나온 두 어른은 젊은 길손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작은 방을 내주게 되는데, 청년은 너무 피곤하여 자신이 아들인 것을 내일 말씀드리기로 하고 큰 트렁크를 노인 부부에게 맡긴 후 바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에 노부부는 청년이 맡긴 큰 트렁크를 열어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노인이 평생 써도 다 쓸 수 없는 많은 돈이 트렁크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노인이 조용히 일어나 잠자고 있는 청년의 방으로 들어가 새끼줄로 청년의 목을 칭칭 감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두 어른은 밤을 지새우며 함께 돈을 세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오자 이웃에 살던 김 영감이 찾아왔습니다. 이웃집 김 영감님이 하시는 말씀, “어디 아들을 만난 소감 좀 들어보세나!” 하며 노인을 찾습니다. “뭐? 아들이라고?” “무슨 말인가? 어젯밤 내가 동네 어귀에서 자네 집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아무도 찾아온 사람이 정말 없단 말인가?”
이웃집 김 영감을 돌려보내고 난 이후 자신이 죽인 그 청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그의 팔뚝을 걷어 보았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팔뚝에는 이십 수년 전 일본인에게 양자로 주었던 아들과 똑같은 점 3개가 나란히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재물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한 결과 그토록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보고자 했던 그 막내아들을 죽이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욕심은 그 끝이 어디일까요? 사실 욕심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말하기를 “지구는 모든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먹거리를 제공하지만 모든 사람의 욕심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구촌에서 생산되는 각종 먹거리는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수 있지만 욕심과 탐심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지구촌은 늘 먹거리가 부족한 세상으로 분쟁과 다툼을 비롯하여 나라와 나라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4:11-12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릇된 욕심에 이끌려 사는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범사에 자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내게 주어진 작은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보다 더 보람된 삶을 살고 기쁨과 행복을 꽃피워 가는 에덴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