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고려 명종 1, 1171~고려 고종 8, 1221) [자료조사:신후식]
성은 신씨(申氏). 자는 영형(永逈). 아버지는 통한(通漢)이며, 상주 산양현 출신으로 세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 밑에서 자라났다.
13세 때 가은 봉암사(鳳巖寺)에서 선사 동순(洞純)을 은사로 득도(得度)하였고, 이듬해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197년(고려 명종 27) 스승 동순이 입적해서 그 장례를 치르느라고 승과 과정을 제대로 치루지 못하였는데 명종이 '범례에 구속하지 말라'고 명하여 승과를 볼 수 있었고 합격하였다.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지눌(知訥)에게서 법요(法要)를 받고 강릉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배한 뒤 크게 감응을 얻었다. 청평산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능엄경(首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문수원기(文殊院記)』를 읽고 마음 깊이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람하였다. 모든 상(相)이 망상임을 통연히 깨닫고 자기 마음의 광대함을 알아 불법을 선양할 때에는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겠다고 발원하였다. 『능엄경』이 한국 선종에서 숭상되게 된 연유는 이자현이 문을 열고 승형이 다시 천명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선종의 주요 경전인 『능엄경(楞嚴經)』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참선 수행법인 능엄선(楞嚴禪)의 주창자이다.
1210년(고려 희종 6)에 연법사(演法寺) 법회의 법주(法主)가 되어 선풍(禪風)을 떨치고, 1213년(고려 강종 2)에 삼중대사(三重大師), 1214년(고려 고종 1)에 선사(禪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영일군 보경사(寶鏡寺)에 머물렀다.
1220년에는 희종의 넷째아들인 경지(鏡智)의 은사가 되었고, 1221년에 『능엄경』을 설한 뒤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옮겨 입적하였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비는 보경사에 있고 시호는 원진(圓眞)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보경사에 고려의 고승 원진국사 승형의 비가 있는데 이공로(李公老)가 짓고 김효인(金孝印)이 써서 1224년(고려 고종 11)에 세웠다. 비는 귀부에 비신 양 모서리를 줄인 규형의 형태이고 비신에는 당초문을 둘렀는데 오른쪽 아랫부분이 파손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운문사 연실선사(淵實禪師)에게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조계산에 가서 보조국사에게 법요를 묻고 문성암에 가서 능엄경을 열람하고 유점사 주지를 지내고 서울(개경)에 가서 강종·희종·고종의 우대를 받으며 포항 보경사 주지를 지냈으며, 기도와 덕행으로 감응을 많이 남기고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는 보물로 1963.01.21. 지정된 승려 승형의 출생해서 입적 할 때까지의 행적을 새긴 탑비로 입적 후 3년 뒤인 1224년에 세웠는데,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위에 몸돌인 비신(碑身)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몸돌 윗부분 양 끝을 접듯이 자른 것은 고려 시대에 유행한 양식이며, 몸돌 둘레에 장식된 덩굴무늬는 고려 시대 중기 이후에 제작된 탑비의 특징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조선총독부.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