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여하(洪汝河 1621(광해군 13)∼1678(숙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경삼(景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덕록(德祿)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호(鎬)이며, 어머니는 고종후(高從厚)의 딸이다.
1654년(효종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는 ≪주역구결 周易口訣≫·≪의례고증 儀禮考證≫·≪사서발범구결 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 彙纂麗史≫·≪동사제강 東史提綱≫·≪해동성원 海東姓苑≫·≪경서해의 經書解義≫ 등이 있다.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1672년(현종 13)에 홍여하(洪汝河)가 지은 편년체(編年體)의 역사서. 13권 7책. 목판본으로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 東國通鑑≫을 취사·절충해 가숙용(家塾用) 교재(敎材)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저자가 파주에 은거하는 동안 지은 것으로, 가숙용으로 필사되어 읽히다가 별세하고 100여년 뒤인 1786년(정조 10)에 안정복(安鼎福)의 서문을 받아 출간되었다. .
≪동국통감≫의 고대사 부분을 주자(朱子)의 강목법(綱目法)에 따라 고쳐 쓴 것으로 시대 구분을 조선·삼국·신라의 크게 세 시기로 나누고, 조선은 다시 기자(箕子)와 마한(馬韓)으로 나누어 서술하여 기자와 마한을 정통국가로 인정했다.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은 기자 밑에 부기(附記)되고, 진한과 변한은 마한 밑에 부기되었다.
삼국시대는 신라왕을 표제로 내세워, 그 밑에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부기하는 형식을 취해 신라를 정통국가로 취급하였고 669년(문무왕 9) 이후를 ‘신라기(新羅紀)’로 독립시켜 발해의 존재는 무시되었다.
중국 정통왕조 제왕(帝王)의 사망 기사를 실어 처음으로 한국사에서 중국사를 포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기자에서 마한을 거쳐 신라로 이어지는 국가 활동을 고대사의 정통으로 보고 나머지 국가들은 신하나 찬탈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역사서술 방식은 그 뒤 유계(兪棨)의 ≪여사제강 麗史提綱≫, 임상덕(林象德)의 ≪동사회강 東史會綱≫, 안정복의 ≪동사강목 東史綱目≫ 등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사 서술을 정통론을 빌려 재구성한 것은 새로운 중원의 지배자로 등장한 청나라에 대해 문화적 우월성을 확인해 국가의 권위를 드높이려는 국가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학문적으로는 주자의 강렬한 존화양이적(尊華壤夷的) 역사서술 방법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전통적인 화이(華夷)의 동아시아 세계질서 속에서 청나라의 등장은 조선 지식인의 세계관에 존화(尊華)와 존이(尊夷)의 상반된 대응을 야기시켰다. 전자는 문화자존 의식을 통한 국가의식으로, 후자는 혈통적 독자성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민족의식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참고문헌≫ 17·18세기 史書와 古代史認識(李萬烈, 韓國의 歷史認識, 創作과 批評社, 1976), 17세기 중엽 嶺南南人의 역사서술-洪汝河의 彙纂麗史와 東國通鑑提綱-(韓永愚, 邊太燮博士回甲紀念史學論叢, 1986)
첫댓글 훈몽 역이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