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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지" 증보판 하권
[문헌 잘못 바루기]
문경시 홈페이지 <우리 마을 유래 및 설화>,
2002년 <문경지> 증보판의 산양면 지명
신라중기까지 금품면(근품현) 혹은 근암면(근암현)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가유현으로 개칭되어 보주(현 예천)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때는 산양현이라 하였고 감무를 설치하여 상주에 속한 고려 명종 때(1180년) 감무가 폐지되었으며, 고종 32년(1895년) 문경군에 편입되었고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산동, 산남 일부와 예천 화장면 일부 용궁군 읍내면 일부를 병합 산양면으로 호칭되어 현재에 이름.
[지명유래]
<과곡리(果谷里)>
- 과상골(果上谷)∙과상동(果上洞)∙과곡(果谷)
조선 명종 이전에는 거묵동(居默洞)이라 불렀다 하나 1550년경(명종때) 김국(金國)이 라는 처사(處士)가 예천(禮泉) 우감(牛甘)으로부터 이주하여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곳이 다상다과(多桑多果:뽕나무가 많고 과일나무도 많다는 뜻)하였다 하여 과상(果上)이라 하였다가 후에 두 자연부락 중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과상골∙과상동이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과곡 1리를 말한다.
- 과하리(果下里)
원래는 과곡리 거묵동(居默洞)과 같은 마을이었으나 그 마을 아래쪽에 1559년경 임수민(林壽民)이란 선비가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을 개척하여 과상리에 대칭하여 과하리라고 불리게 되었으며,(불렀다.) 곶감 생산이 많이 되어 소득증대에 이바지하였으며 현재 과곡 2리를 지칭한다.
- 점마(店村)
이 마을은 1883년경에 토기를 구워 내는 옹기굴이 있어 이곳에서 옹기를 매매하게 됨에 시장이 형성되어 점마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과곡 3리를 지칭한다.
- 말계∙말기∙두계(斗溪)
이 마을은 계곡물이 흘러 내려 여기서 계곡의 종점을 이루었다고 하여 말계라고 하며 일설에 의하면 뒷보에서 흘러내리는 봇물의 제일 끝이라고 하여 말계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녹문리(鹿門里)>
- 녹문(鹿門)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전 진사(進士) 고성겸(高聖謙)의 호(號)를 녹문(鹿門)이라고/녹리(甪里)라고 하였는데, 이분이 이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래서 당시 그의 문하생들이 스승의 호를 따서 녹리(甪里)/녹문리(鹿門里?)라 불렀다고 한다.
- 서리기∙서록리(捿鹿里)
옛날부터 산은 높지 않으나 빼어나게 아름답고 물은 깊지 않으나 맑게 흘러서 사슴이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서록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서록리가 변음되어 서리기(捿里基?)가 되었다.
- 치골∙기산(箕山)
약 150여년전 홍박천(洪博川)이라는 사람이 생활의 근거지를 찾기 위하여 각지를 찾아 다니다가 이곳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주위의 잔디가 너무나 아름다워 신을 벗어 놓고 이곳을 정착지로 결정하고 지명을 기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 갱빈∙금천(錦川)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에 진사 고성겸(高聖謙)이 정자를 강변에 세웠는데 그후 이곳에 장수(長水) 황씨(黃氏)들이 이주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되었다. 이때 금천 강변에 있는 부락이라 하여 갱빈 또는 금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구야(九野)
지금부터 약 250여년 전 박습독(朴習讀)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를 개척할 당시 이곳에 구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구야리(九野里)라고 하였다 한다.
<바루기>
조선 세조 2년(1457) 순천인(順天人) 박문규(朴文規, 한양에서 상주로 이주)의 차남 박윤공(朴允恭)이라는 선비(훈련원 습독)가 사육신의 사화 때 화를 피해 산양 현리로 이거하였다. 뒤에 그의 자손들이 산양 녹문리에도 산거하며 여러 들판을 개간하니 그 들판을 구야(九野) 혹은 구빼미들이라 한다. 녹문리 금천변에 구강정(九崗亭)을 세우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7세 박윤공(훈련원 습독). 현감 박문규의 차남.
8세 박린(충좌위 부사과). 박윤공의 장남. 연산군의 혼정 때 낙향하여 현리 금천변 소봉에 부벽정(浮碧亭)을 세우고 소요하였다.
8세 박빈(진사). 박린의 아우.
9세 박인창(충좌위 부사과), 박지창(유학), 박충창(충좌위 습독) 형제.
9세 박효창(충좌위 사과). 현리 인천채씨 입향조인 채유부의 장인. 부벽정을 외손자인 채득호에게 전수하였다.
11세 박원개, 박원량 형제는 임진왜란 때 산양의병 창의에 동참하고, 경상도의진의 팔공산회맹, 당교전투, 망우당 곽재우의진의 화왕산성 방어 등에 참여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기여하였다.
<반곡리(盤谷里)>
- 반곡(盤谷)
마을 주위에 있는 산과 계곡에 크고 작은 반석이 많다고 하여 반곡이라 하였다.
- 불미골∙풀미골
옛날에 이곳에서 놋그릇을 많이 생산하였는데 놋쇠 조각을 녹일 때 사용되는 풀무가 집집마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이 풀무 손잡이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불미골 또는 풀미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한바우∙반암(盤岩)
반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국도변 산모퉁이에 소반 같이 생긴 큰 바위(고인돌∙支石 )가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바우∙반암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마귀할머니가 아기를 재우기 위하여 큰 반석에 고임돌을 괴워 그늘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소반 같이 생겼다고 하여 반암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 뱀골∙백동(白洞)
반곡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뱀같이 길고 꾸불꾸불하게 생긴 골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뱀골이라 하였으며 또 이곳에 백사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백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정리(鳳亭里)>
- 굴골(堀谷)
1592년경 경주사람 최윤(崔潤)이란 선비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마을 모양이 굴과 같이 푹 패어 있어서 굴마 또는 굴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재 봉정 1리 마을이다.
- 탑골∙탑동(塔洞)
마을 동쪽 월방산 밑에 3층석탑이 있었으나 일제시대 때 일본 도굴군에 의해 탑이 허물어진채 그냥 방치되어 있다. 인조 때 광주 사람 노이명(盧履命)이란 선비가 상주군 화령에서 이주 정착하였는데 이때 탑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탑골 또는 탑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봉정 2리의 속명으로 전한다.
- 진등∙장등(長登)
1920년경부터 각성(各姓)이 모여서 생긴 마을로 마을 뒤에 긴 언덕이 뻗혀 있어 진등 또는 장등이라 부르게 되었다.
<부암리(富岩里)>
- 부암(富岩)∙보밑(洑底)
마을이 형성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터인지 보밑∙비밑이라 불렀다. 또 마을 가운데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를 부자바위라 불렀고 1914년 행정구역 재조정때 동명을 찾던 중 마을의 번성과 부자마을이 되었으면 하는 염원으로 부암리라 하였다 한다.
- 큰마
부암리중 가장 먼저 발전한 곳으로 영양(潁陽) 천씨(千氏)의 시조(始祖) 천만리(千萬里)장군을 모신 노양영각(魯陽影閣)이란 사당이 있고 가장 큰 마을이라고 하여 큰마라고 불렀다.
- 봉우재(烽底)
이 마을 뒤에는 비조산 뒷봉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은 옛날에 봉화(烽火)를 올리던 곳으로 이곳 사람들은 봉화를 올리던 산밑의 마을이라고 하여 봉우재라 불렀다고 한다.
<불암리(佛岩里)>
- 불암리(佛岩里)
본래는 이곳이 상주군 산남면에 속하였던 지역으로서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형성된 마을인데 마을 서편 산 바위에 봉황새가 자주 내려앉았다고 하는 전설로 인해서 봉암리(鳳岩里)라 하다가 그 이후에 이 바위 모양이 부처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불암리(佛岩里)라 하였다 한다. 현재 산양면(山陽面) 소재지로서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다.
<송죽리(松竹里)>
- 송골∙송곡(松谷)
1580년경 의령인(宜寧人) 여춘(余春)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송자(松字)가 든 부락은 왜군이 침범하지 않고 피하였다고 하여 난을 피할 목적으로 자기 호(號)를 따서 송곡 또는 송골이라 하였다 한다.
- 못골∙지곡(池谷)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에 부사 권총(權總)이란 분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이 마을 앞에 50평 정도의 못이 있었다고 하여 지곡 또는 못골이라 하였고 당시 이 못에는 고기와 연꽃이 많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 옥산(玉山)
옛날 옥황후의 묘소가 있었던 곳이라고 옥산이라 불렀고 또 마을 앞산이 구슬과 같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옥산이라 하였다. 현재 송죽1리에 속한 마을이다.
- 덕바우∙덕암(德岩)
1580년경 개성사람 고극근(高克勤)이란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송내촌(松內村)이라 하였으나 그 후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이 마을이 그 바위의 덕으로 편안히 잘산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바위가 용궁을 바라보고 있는데 용궁은 항상 홍수의 피해를 받게 되자 용궁 사람들이 이 바위 때문에 그렇다고 하여, 이 바위를 파괴하려고 산 위에로 몰려가자 별안간에 천둥과 벼락이 쳐서 일부는 죽고 남은 사람들은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덕암이라 하여 보호하게 되었으며, 마을 이름도 덕암이라 하였다 한다. 현재 송죽2리에 속한 마을이다.
<신전리(新田里)>
- 시고개∙삼령(三嶺)
1860년경 김용학(金溶學)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고 고개가 셋이 있었다고 하여 시고개(세고개)∙삼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신전2리에 속한 마을이다.
- 섶밭∙신전(新田)
1529년경 개성사람 고극공(高克恭)이라는 판결사가 이주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로, 개척 당시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섶밭이라 부르다불려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신전이라 하였다.
-장잠∙장잠마∙장잠리(丈岑里)
1859년경 정윤백(鄭允栢)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장잠이라 하였는데 마을 뒤에 막대를 세워 놓은 듯이 우뚝한 산이 있다 해서 마을 이름을 장잠, 장잠마라고 하였다 한다.
<연소리(蓮紹里)>
- 궁골∙궁곡(宮谷)∙연소(蓮紹)
1570년경 초계(草溪) 변씨(卞氏)가 이 마을에 정착하여 개척할 당시 어느 고을의 원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서 줄남포등을 달고 하룻밤을 쉬어 갔다 하여 궁곡(宮谷)이라 부르다가 강릉최씨 최만향(崔萬享)이란 선비가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만개된 것을 보고 연소라 개칭하였다 한다. 현재 연소1리에 속한 마을이다.
- 진선마∙진선촌(進善村)
1679년경 연주현씨(玄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을 때, 대승사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앞 바위에 앉아 잠시 쉬면서 마을 사람들을 보고 이곳에서 앞으로 착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 말한 것을 듣고 마을 이름을 진선촌∙진선마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재 연소2리에 속한 마을이다.
<우본리(憂本里)>
- 감실∙감골∙시곡(枾谷)
이곳 산기슭에는 밭이 많고 감나무가 많아서 감실이라 하였으며 감골이라고도 부른다.
- 동살미∙동산미(東山美)
1780년경 임영식(林英埴), 임무수, 임사욱(林思郁) 등 세 선비가 과하(果下:과곡2리)에서 동쪽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하여 동살미∙동산미라 부르게 되었고, 일설에 의하면 조선조 선조대왕께서 이곳을 지날 때 동쪽 산을 가리키며 매우 아름답다고 하였다 하여 동산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송암저수지와 사슴목장 등이 있어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 솔개울∙송본(松本)∙송계동(松溪洞)
조선 명종 때 송본대동(松本大洞)에 속하였다가 그 후 폐동되고, 1780년경 밀양박씨 박병문(朴炳文)이란 선비가 이곳에 이주 정착하면서 송본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우본리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 이름이 생긴 까닭은 당시 마을 동편에 큰 소나무가 있었고, 동쪽에서 남쪽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있어서 솔개울∙송본∙송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위만리(渭滿里)>
- 우마이∙우만(于巒)∙위만(渭滿)
처음에 이곳을 청주(淸州) 정씨(鄭氏)가 이주 정착하여 개척하였는데, 그 후 조선 6대왕 단종께서 영월에서 사사 당하였을 때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던 엄흥도(嚴興道)가 이곳에 숨어살았다 한다. 그의 현손(玄孫) 엄한의(嚴漢義)가 이곳에 머물면서 마을 중앙에 소와 같이 생긴 봉우리가 있다 하여 이 마을 이름을 우만∙우마이라 불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위만이 되었다.
- 의산(義山)
이곳에 영월엄씨들이 정착하게 되자 충신의 후손들이 살던 곳이라 하여 앞에 보이는 산을 충의산(忠義山)이라 칭하고, 그 산록에 사당을 짓고 주위의 부락을 의산마을이라 불렀다. 현재 의산초등학교가 있는있던 마을이다.
- 웃우마이∙상위(上謂)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 온 인동장씨가 처음으로 개척한 마을로서, 우마이 위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웃우마이라 불렀다. 상위리(上謂里) 뒤에 위치한 왕의산(王衣山)의 전설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복주(안동)에서 피난하고 귀경길에로 피난하던 길에 이 산을 넘어면서 쉴 때 옷을 벗어 걸었다 하여 이 산골을 옷걸골이라 하였고, 산 이름을 왕의산(王依山)이라 하였다.
<존도리(存道里)>
- 비석거리∙비석동
교동 서쪽 삼거리 국도변에 있는 마을로서 100여년전에 상주목사 송인명(宋寅明)의 송덕비와 진주강씨 유허비가 서 있는 곳이라 비석거리라고 하였으며, 길손을 맞는 주막 몇집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는 안쪽으로 옮겨진 송덕비만 우뚝 서 있다.
- 잔두리∙존도리(存道里)
1479년경 상산김씨 지연공(知然公)이 이 마을을 개척한 후 진주강씨가 약 30년간 살았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 풍산인(豊山人) 서애 류성룡의 후손 류연원(柳延元)이라는 선비가 세교(細橋)라 하였다가 잔두리로 변칭되었다. 이 마을에 작은 다리가 여러개 있었다고 하여 불려진/붙여진 마을이름이라고도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존도리로 바꾸었다.
- 교동(校洞)
1670년경 구씨(具氏)성을 가진 자가 이 마을을 개척한 후 1780년경에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일이 발생하여 살부지(殺父地)라고 일컬어지다가 폐촌되었다. 그 후 110여년전 구씨가 마방(馬房)을 지어 다시 살게 되자 여러 성씨들이 모여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1930년경 이곳에 산양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교동이라 고쳐서 불려지고 있다.
< 추암리(秋岩里)>
지금으로부터 350여년 전에 인천(仁川) 채씨(蔡氏) 3형제가 이곳에 정착할 무렵이 가을이었고 뒷산에 바위도 많아서 마을 이름을 추암이라 하였다 한다.
- 하리∙봇들
비석거리와 추암리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앞 시냇가에 보(洑)가 있었기 때문에 봇들이라고 하며 5, 6호가 농∙축산업을 경영하며 생활하고 있다.
<진정리(辰井里)>
- 미러물∙진정리
1400년경 초계변씨 계흠(季欽)이란 선비가 경남 합천에서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 이름을 우물이 맑고 좋다고 하여 미러물이라 한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진정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혹은 용(미리)이 살던 우물이 있다 하여 미리물(辰井)이라 하였다 한다.
※미르(龍), 미리미동국
- 텃골∙턱골∙기동(基洞)
1700년경 영양남씨 문중에 남용한(南龍漢), 호가 임은(林隱)이라는 선비가 영덕군 영해에서 안동 예안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동명을 텃골 또는 턱골로 부르다가 후에 기동(基洞)이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은 청룡산의 좌청용(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비룡상천지형(飛龍上天之形)에 위치하고 있는데, 청룡산의 명칭은 남용한(南龍漢) 선비의 용자(龍字)와 산이 푸르다는 의미의 청자(靑字)를 따서 청룡산(靑龍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산에 학이 서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현재는 수령이 약 300년 정도 되고 둘레가 6m정도 되는 노송이 있어서 주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해 주고 있다.
- 추산(秋山)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 경주김씨의 입향선조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산에 머루, 다래 등 과실나무가 많아서 “멀뫼”라 하였다. 뒷날 한문으로 고칠 때 추산(秋山)이라 하여 오늘에 이른다. 경주김씨 계림군파의 집성촌이다.
- 시거리
예천, 산북, 점촌 등 길이 세갈래로 갈라지는 삼거리였기 때문에 “시거리”라 하였으며, 10여호가 있었는데 도로가 넓혀지면서 도로에 편입되는 가구는 모두 철거되었다.
<평지리(平地里)>
- 평지못골∙평지(平地)∙상평지(上平地)
1653년경 안동권씨가 순흥에서 난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당시 덕암 앞에 큰 못이 있어서 주위보다 산세가 낮다 하여 평지못골로 칭하다가, 현재는 평지 또는 제일 윗쪽에 위치한 곳이라고 하여 상평지라 부른다.
- 중평지(中平地)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 안동권씨와 의령여씨가 살았는데 마을이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평지라고 칭하였다.
- 하평지(下平地)∙기와집 못골∙안항(顔巷)
아래 평지(坪地)∙옛날에 기와집이 많이 있었다고 하여 기와집 못골이라 부르기도한다. 광해군 난정(光海君亂政) 때 고월봉(高月峯)이라는 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여 옛 안자(顔子)의 고사(古事)를 쫓아 “안항에서 한 표주박 물과 한 그릇의 밥으로 살아가니 참다운 즐거움이 이곳에 있다."라는 시를 지어 자적(自適)하였다 하여 안항이라 한다. 마을 아래에 옛 삼사지(三沙池) 못이 있어 못골이라 부르고, 못의 바로 위에 있다 하여 직상(直上)이라 하기도 한다. 개성고씨 안항파의 집성촌이다.
※월봉 고인계(高仁繼)
- 새발재∙봉강(鳳崗)∙봉계(鳳溪)
1719년 조선 정조 때 인동인(仁同人) 장극찬(張極極 )이란 분이 산북 내화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 보니 산이 낮고 평평하여 새가 밭에서 나르는 형상같기도 하고, 산이 새의 발같기도 하여 새발재 또는 봉강이라 불렀다 한다.
<현리(縣里)>
- 현리
신라시대 때부터 부락이 형성되어 현청 소재지였고, 고려시대 때에는 가유현(嘉猷縣)의 소재지여서 현리로 칭하게 되었다 한다. 지금부터 약 550여년 전에 훈려원습독을 지낸 박윤공(朴允恭)이라는 선비가 아들 박린, 박빈과 입향하여 세거하면서, 손자 박인창, 박지창, 박충창, 박효창과 함께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지금은 인천채씨의 집성촌이다.
- 신역골(新驛谷)
고려 때 가유현을 왕래하는 행인들과 관원들의 숙소로 이용되었고, 우마를 사용하여 역의 기능을 처음으로 행사하였던 취락이라고 하여 신역골이라 불렀다 한다.
- 창마∙창동(創洞)
구한말 때 오면창(五面創)으로 산동, 산서, 산남, 산북, 산양/영순의 다섯 지방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이곳의 창고로 보관하여 군량미∙구휼미 등으로 이용하던 곳이라 하여 창마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형천리(兄川里)>
- 고모(顧母)
마을 동쪽에 높은 산과 낮은 산이 있는데 마치 낮은 산이 높은 산을 돌아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고모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한다.
- 맏내∙마내∙형천(兄川)
본래 상주군 산동면의 지역으로서 전설에 의하면 의좋은 형제가 이곳에 거주하였는데 어느해 폭우가 내려 형이 들에 나가 보니 냇둑이 터져 아우의 논이 내(川)가 될 염려가 있으므로 형의 논으로 물길을 돌려서 형의 논이 내가 되었다 하여 맏내∙마내 또는 형천이라 하였다 한다. 고종 32년(1895)에 문경군에 편입됨에 산양면에 예속시켰다.
- 큰구렁이∙큰구렁∙상두리(上杜里)
산양면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4㎞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큰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4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마치 계곡이 큰 구렁이 같이 생겼다 하여 큰구렁이라 하다가 1923년경 마을 위에 위치하였다 하여 상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하두리(下杜里)
임진왜란 때 이곳에 피난 왔던 김귀진(金貴珍)이란 선비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둘레에 있는 낮은 산들이 난을 피할 수 있도록 둘러져 있고 지대가 낮은 곳이라 하여 하두리라 불렀다 한다.
첫댓글 2002년 2월 발간 <문경지> 하권 p665~p811, 제9편 지명유래 제1장~제15장에는 우리 고장의 지명유래가 읍면동별로 적혀있습니다. 역사적 고증에 의한 연혁과 유래 등이 자세하게 기록된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럼에도 보다 더 상세한 부분까지 교정을 하지 않은 것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추후 새로 발간되는 문경시지에서는 앞서 미비했던 점들을 한층 더 보완한 사료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특히 점점 더 잊혀져 가는 옛 지명과 고갯길들이 빠짐없이 재조사, 기록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