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십년 전만해도 남자들은 작은부인을 얻어 살았다.
작은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의 이야기이다.
40대 중반의 여자분이 절에 찾아왔다.
"스님,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자주 보여요.
엊그제 밤에는 화장실에서 나와 컴컴한 거실을 무심결에 봤는데 소파에 아버지가 앉아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고 무서워서 얼른 방으로 들어갔어요.
그 후론 낮에도 소파만 보면 겁이나요. 아버지가 진짜로 와 계신걸까요?"
나는 말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으며 따님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그녀는 말했다.
"저희 집은 형제들이 많아요. 큰엄마한테서 난 자식들이 5명이고 큰오빠와 15살 차이가 나요. 우리 엄마는 둘째 부인이고 제 형제도 3명 이예요.
어려서 우리 형제는 큰엄마 형제들한테 기도 못펴고 살았어요. 큰오빠는 아빠보다 더 무서웠고 큰오빠 한마디가 법이라 감히 말대꾸할 생각도 못했지요.
엄마도 늘 집안에서 궂은 일만 도맡아했어요. 엄마가 그렇게 사니 저도 큰집식구들 눈치보며 살았습니다.
우리 형제는 큰집 형제들에 밀려 공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한 뒤로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였어요.
아버지한테 대학 보내달라고 했는데 계집애가 대학은 가서 뭐하냐고, 취직해서 시집이나 가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말에 정말 큰 상처를 받았고 그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커져 말도 안했어요. 결혼하고 아이 낳아 살면서도 한번도 살갑게 대해본 적 없었고 명절 날에도 아버지와 몇마디 나누면 전 늘 퉁명스럽게 쏘아부치며 타박하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저희 부녀는 물과 기름마냥 섞이지 못하고 지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사실 그때도 슬프다는 생각은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부터 오는 슬픔은 아니었기에 돌아가신 후에도 보고싶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문득문득 아버지가 생각이 나고 제가 아버지께 쌀쌀맞게 대한 것들이 후회되고 그러더라구요. 근데도 집에 있을땐 무서워요."
얘길 듣고 나는 말했다.
"아버님이 집에 와 계신것 같네요. 천도를 해드리는게 좋겠습니다. 아버지 사진 있으면 몇 장 가져오세요."
다음날 집에 있는 사진을 다 가져왔는지 열 장도 넘게 가져왔다. 한장 한장 보면서 사진속의 사연을 들었다.
아버지는 사업이 망한 후로 장성에서 곶감장사를 했는데 그것도 돈벌이가 안되어 그만두고 또 다른 것에 손대도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집안에 돈이 없어 대학갈 형편이 안되었던 것 같다며 옛일을 회상했다.
나는 아버지의 모습과 삶의 흔적들을 떠올리며 의식을 일치시켰다. 얼마 후 아버지가 느껴졌다. 그런데 좀처럼 다가오지 않고 말을 걸어도 아무소리를 안하는 것이었다.
좀더 기다리면 경계를 풀까해서 기다렸지만 오히려 철벽 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이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이 많나봐요. 대꾸를 안하시네요."
"그래요? 우리 아버지가 원래 남들한테 붙임성이 좋은 편은 아니에요. 더군다나 사업이 안되면서 사람들한테 상처를 받았는지 그 후로 더 외골수로 사셨어요."
그러더니 아버지는 죽어서도 성격이 그러냐며 또 쏘아부치듯 말했다. 딸의 핀잔에 기가 꺾인 아버지가 나한테 말했다.
"스님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말주변이 없고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아버님을 부른건 따님이 아버님을 그리워해서 만나게 해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부담갖지 마시고 따님께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따님이 대학 안보내줘서 많이 서운해하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간호조무사로 취직해 일을 했는데 자기 적성에 맞지않아서 힘들어 했고 그때마다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하네요."
아버지는 풀이 죽은 채로 말했다.
"세상 사는게 뜻대로 안되더라구요. 사업이 잘 나갈때는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들에 조급해지고 하는 것마다 실패하여 빚을지니 제 마음이 닫혀있었습니다.
하필 그런시기에 딸아이가 대학을 보내달라고 하니 도저히 엄두가 안났어요. 어느 부모가 자식 앞길을 막고 싶겠습니까. 특히 저 딸아이는 제가 예뻐했던 애입니다. 그런데 딸애한테서 대학얘기를 듣는 순간 속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나가더군요.
어쩌면 못난 애비의 속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때문에 딸애가 그토록 상처를 받았는 줄은 몰랐네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말했다.
"따님도 결혼해서 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입장이 되셨으니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실 겁니다. 결코 따님을 미워해서 그러신건 아니에요. 자식이 한다는 걸 못해주고 기분좋은 부모는 없어요.
그리고 그때는 어린 딸에게 집안 형편을 이해시킬 만한 여건도 아니었어요."
듣고 있던 딸이 얘기했다.
"저는 그때 오빠들은 다 공부시키면서 나는 안해주는 것에 화가 났어요. 그동안 차별받고 산 것도 서러웠고 엄마가 부엌에서 구박받고 울던 기억들이 더해져서 아버지가 미웠어요. 원치 않는 직장생활의 불만도 아버지 탓이었고 결혼생활이 힘들때도 아버지를 원망했어요.
그렇게 아버지에게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해본적이 없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문득문득 아버지한테 상처준 말들만 떠오르는 거에요."
나는 말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따님이 마음에 걸려서 아파트에 갔었던 것 같네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한 공간에 있으면 안됩니다. 공간이 음해져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요. 아버지 천도를 도와드릴테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딸은 이 말을 듣고
"아버지, 아버지 말에 사사건건 토달고 못되게 굴었던것 죄송해요. 하지만 속으로는 저도 아버지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어요. 결혼해서는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고 자식 노릇도 할려고 했어요. 근데 막상 아버지랑 이야기를하면 꼭 어깃장을 놓고 눈을 흘기게 되더라구요. 고쳐보려고 했지만 잘 안됐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 그게 제일 후회돼요. 용서해 주세요."
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니다. 내가 미안하다. 나도 그때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라며 딸을 부등켜 앉고 눈물을 흘렸다.
딸도 아버지 품에서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부모 자식간에 그 한마디가 어려워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았구나. 참 안타깝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실컷 울고 난 아버지가
"스님, 딸애한테 뭐하나 잘해주지 못했는데 스님께서 제대신 맛있는거라도 사 먹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면 제 마음이 편할것 같아요."
"네, 그렇게 할께요. 제가 맛있는거 사드릴테니 아버님은 걱정마시고 제가 알려드리는대로 하셔서 사후세계에 적응하세요."
그 후 나는 아버지가 사주는 거라며 공주 산성시장에 가서 따님과 쭈꾸미볶음을 맛있게 먹었다.
계룡산 약선사에서
명상스님 ( 010 - 3658 - 9517 )
* 가족이 꿈에 자주 나타나거나 사고로 돌아가신 분이 있어 천도가 필요한 분들은 연락주세요.
준비할거는 생전의 사진 몇장과 차 한잔 올리면 됩니다.
천도비용은 알아서 불전에 올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