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1:2~9 남은 자
황궁쟁반짜장이라는 요리가 있는데,
그 집의 요리가 일품인 것은 황궁기름이라고 하는 기름에 있다. 어떤 음식도 그 기름이 조금 들어가면 고소하면서 칼칼한 맛이 난다. 그런데 이 기름은 조금만 넣어야 하는데 이것을 많이 넣으면 음식 맛이 이상해진다. 그것은 소스로서 맛을 내기 위한 것으로 조금만 넣거나 혹은 꼭 넣지 않아도 되는 소스이다. 그런데 맛을 낸다고 그것을 모든 요리에 다 넣으면 어떻게 되는가. 요리마다 담백한 맛이 있는데 어떻하겠는가. 어떤 이상한 주방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짜장면 맛은 ‘아이미(미원)’맛이라고 미원으로 맛을 내고 있었다. 이는 비본질을 본질로 본 것이다.
레위기서에서 제사를 보면 대부분의 제사가 무교병으로 순수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 다만 화목제를 드릴 때 약간의 유교물을 넣어서 하나님께 드려진다. 그러나 제사에 있어서 핵심은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거룩함과 화목함을 얻는 것에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다. 거기에 화목제물의 넓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이라던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다가 봉변을 당하였다. 비본질을 본질로 착각한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 본질이란 말씀과 기도 예배 거룩함과 복음전파이다. 그리고 거기에 여러 가지 화목제로서 프로그램이 첨가되는 것이다.
아론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으니까 백성들과 함께 걱정하면서 애굽의 습관을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하나님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셨다. 모세가 내려와 무서운 심판을 내리고 금송아지는 부서졌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 싶어요. 하였으나 거부당하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휘황찬란한 성전을 지었으나 많은 부인을 두는 바람에 이방신전이 들어오고 그는 하나님께 듣는 것을 잊어버렸다. 결국 그는 읽고 듣고 순종하지 못하였고 성전은 결국 파괴되었다. 그리고 성전이 파괴되어 포로기를 겪으면서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기동안 성전 없이 회당에서 또는 가정에서 듣고 읽고 순종하는 것으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화목하기를 힘써야 하지만 잘못된 문화가 자신에게로 들어오는 것을 각별히 주의해서 분별해야 한다. 특별히 현대에 이르러서 이런 경향은 교회에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은총으로서 학문을 중시하는 것은 맞지만 신앙의 영역까지 가져오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것을 잊고 다른 비본질적인 것에서 힘과 위로를 찾으려고 한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과 예배 십자가 복음 피의 복음 죄사함과 부활이다. 예를 들어, 성전제사의 핵심은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가 기본인데, 화목제와 유교물만을 키운다면 제사가 엉망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그것이 너무 많을 경우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성전제사가 비본질 것에 치우쳐 버린 것을 두고 이사야가 지적하는 장면이다. 하나님 앞에 듣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나오거나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례행사나 혹은 축제나 대회를 하려는 마음으로 나오는 것을 두고, 죄에 대한 걱정이 없이 나오는 것을 가리킨다. 당시 상황은 하나님께서 웃시야 왕을 통해 장기간의 태평성대의 시대였다. 대하26:1~15절 웃시야 왕은 형통함을 받았고 매우 강성하여 많은 사업을 하고 나라를 정비하였다. 하나님께 기이한 도우심을 얻었다고 쓰여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안목에서 번성한 웃시야의 강성시기는 매우 위험한 시기였다. 이는 다윗도 모세도 엘리야도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죄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사야는 누구나 다 그렇지만 회심한 후로 글을 썼다. 성전에서 주님의 옷자락을 체험하고 주님의 숯불 사건을 체험함으로 그는 거룩에 대한 마음을 받았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하는 인간의 죄인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마치 엑스레이로 인간의 내면의 상태 죄인의 상태를 투시하고 있는 것처럼 적나라게 설명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끝을 보았다. 남은자는 마치 불에 타고 남은 그을린 장작의 부분과 같은 것 같은 것이다. 그는 죄의 상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는다. 죄에 대한 처참한 인식이다. 마치 전신 화상을 입은 자의 몸을 보듯이 그는 죄인 이스라엘을 두고 탄식한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먼저 자신의 심정을 얘기하신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고 언제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 그러나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그러나 타락이후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한다. 죄의 대물림은 아담 안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조상들 안에서도 심각한 것이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
-> 죄는 가볍게 시작하지만 허용하면 계속 파먹어가는 해충같이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마침내는 그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파멸시키는 원인이 된다. 웃시야 왕의 강성 안에서 죄는 경계되지 않았고 격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만성화가 된 것이다. 죄가 만성화 될 때 우리 눈에는 죄를 알기 어려우나 하나님의 눈에는 매우 심각한 상태의 환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비본질적인 것에 혈안이 될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죄에 대한 애통이 사라지게 된다. 바른 예배가 사라질 경우 오감이나 사람의 심리에 맞춘 방향으로 갈 경우에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속으로는 점점 썩어들어가는 것이 되어버린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 하나님의 눈에 비추인 아담 안에 인간의 상태이다.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 예레미야는 죄인을 ‘표범점박이’로 묘사했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환자’로 죄인을 묘사하고 있다.
7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폐하였고
-> 죄는 자신뿐만 아니라 환경을 파괴시킨다.
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참외밭의 원두막같이, 에워 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 포도밭에 망대는 점처럼 보인다. 참외밭의 원두막도 에워싸인 성읍도 배꼽처럼 작다. 죄로 인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쬐끔 남았다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성령의 역사를 의지함밖에 없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하다.
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 아담 안에서의 부패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면, 아담 안의 인간은 언제나 조건만 주어지면 급속하게 부패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만이 인간에게 소망이 된다.
교회의 자랑은 십자가이다. 십자가 때문에 모이는 것이 교회이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는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대속이다. 원래 거기에 죄인된 내가 매달려야 한다. 예수께서 받으신 그 험한 모습은 원래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져주신 것이다. 또한 십자가는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오늘 본문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당해야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실존을 보여준다.
십자가 안에만 남은 자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자는 다 죄로 인하여 불타버리는 장작처 럼 되는 운명이 되고 만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의 실존을 보여준다. 동시에 십자가는 우리가 구원받았음에도 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죄짐을 짊어지시고 죄와 사망과 율법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거룩함을 체험하고난 후에 그는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 보이게 되었다. 이사야는 자신이 엄청난 죄인이란 인식과 동시에 죄와 싸워야 하는 인식을 내려놓지 않는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