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수욕을 가다
임춘자
땡볕이 나무 그늘을 빼앗고
사철 맑은 앞 개울까지 좇아올 때면
대관령 아랫마을 우리동네에선
동쪽으로 동쪽으로 피난을 떠난다
고래도 살고 오징어도 살고 명태도 사는
동해
경포, 송정, 안목, 남항진, 안인......
백사장에 널린
조개껍질과 반짝이는 모래 밟으며
헌집 줄께 새집 달라며 토닥이던 해변에서
온종일 등껍질이 부풀도록 놀았다
모래성을 지우려 헐레벌떡 달려오는 파도와
발가락 간지르며 도망치는 물살을 쫓아
찰방찰방 달음박질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투명한 날이었다
2.
금옥이 이야기
임춘자
내 어릴 적 친구 금옥이
유난히 코를 많이 흘려 ‘코풀리개’라 놀림 받았지
1. 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아버지 없이 살던 금옥이
조그만 하꼬방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때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었단다
난 왜 몰랐을까
곱게 쪽진 머리 금옥이 엄마와
영화배우 보다 더 예쁜 언니 둘, 오빠 하나
다섯 식구 중에 막내지만
집안 가난은 혼자 다 지고 사는 듯
초라했던 금옥이
그래도 손재주 하나 만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했지
물고기도 잘 잡고 이도 잘 잡던 금옥이
옆집 친구 정자아버지 옷 벗으시라 해 놓고
이 잡아 주었다는 금옥아, 금옥아!
저녁이면 슬그머니 찾아 가
“정자야, 느 아버지 옷 벗으시라해!”
엉뚱한 금옥이 때문에 우리 동네
윗마을 아랫마을
봄볕은 따스하고 종달이 종달종달 기분 좋게 날았지
지금도 이 잡던 그 손 가지고
5층 원룸도 뚝딱 지어 살고
강릉바다 백사장에 널브러진 쓰레기들도
모조리 잡아버리는 내 친구 금옥이
6. 25사변 통에 나서 자란 우리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온 전쟁고아 몇 명이 같은 반이었는데
정자네 제사지내고 다음 날 싸오던 생선 반찬
다 발라 먹고 버린 뼈를 그 아이들이 주워서 먹더라고
“아유 불쌍해라, 그래도 지금쯤은 다 잘들 살겠지?"
그 커다란 눈에 눈물 그렁그렁 담고
말해 준 사람도 금옥이었다
3.
정자 언니
임춘자
학산 교회 정자 언니
오로지 교회 밖에 몰랐던 언니
모두 가난했던 그 시절
가난한 전도사와 결혼해서 가난하게 살았지
교회가 좋아 밤낮 없이 찾아가던 그 때
언니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다 열어 주었지
이십 리 밖 학교 갔다 함께 걸어오던 산길
들도 산도 나무도 우리의 이야기도 꽃 같았지
“밥 먹고 가”
배고프던 그 시절 눈물나게 반갑던 소리
꽁보리밥에 반찬은 달랑 간장 한 종지
그래도 우린 밥그릇 바닥까지 닥닥 긁어
재미있게 맛있게 고맙게 먹었지
그 정자 언니
50여 년이 지나 얼굴로 보네
비스가산으로 올라가는 모세처럼
사역을 다 마치고 목사님과 함께 조용한 노후를 보내시는 언니
꽁보리밥 이야기는 나한테만 있고 언니한테는 없네
아 그렇구나
잊혀지기도 하고 기억나기도 하고
그래서 세월이 고맙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또 언제 만날지 모르는 작별이지만
소중한 것은 소중한 채로
가슴 속에 반짝이는 별로 남아있겠지
우주 저 쪽 서로가 그리워지는 그 곳으로
하나 둘 사라져가는 즈음
4.
쌀값
임춘자
착한농사 짓는 우리 재성아재가
쌀값이 싸다
쌀값만 싸다
해서
밥 먹을 때마다
자꾸 미안해졌다
우리 재성아재가
작년보다 올해
조금씩 작아지고
주름살이 늘어가는 게
그 쌀값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밥이라서
밥을 많이 먹는다
내가 밥을 많이 먹어서
우리 재성아재 웃음을 찾아주고 싶다
5.
이런 꽃
임춘자
애물단지 취급하며
마지못해
남겨둔 선인장화분
오늘
듣도보도못한 꽃
살그머니
피워냈네
화들짝 반가워
요리보고 조리보고
지루한 일상에
한아름 웃음처럼 찾아온
선물
6.
임순
임춘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그리운 사람
우리의 유년과 청춘이 한 장면 안에 어른거리고
부끄러움과 칭찬이 함께 즐거운 추억이 되는
연인 같고 부모 같고 일기장 같은 사람
지지리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엄마와 앙숙이 되어 밤낮없이 쫓겨나던 친구
숨어든 부엌 봉당에서
주린 배를 안고 잠들기 일수였다는 그녀의 유년
미워하니 미운 짓만 거듭하게 되고
미워하는 줄만 알고 화해할 엄두도 못냈지
그 가난과 멸시 속에서도 중학교를 다니고
취직을 하고 서울살이를 하던 친구
남의집살이도 당당하게 해 내던
누구라도 한 번 인연이 되면 가족처럼 지내던
불사조 같고 오뚝이 같은 친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외국 생활을 하며
어디서든 사랑 받고 사랑하며 구김살 없이 살아가는 친구
화해보다 값진 봉양으로
엄마의 노년을 “고맙다, 고맙다” 눈물짓게 만든 대견한 친구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한국방문에
그저 먹먹해져
서로를 바라만 보다 그녀는 가고 나는 남았다
잡을 수 없는 것은 세월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