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금산교회〉 이야기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다. 이화학당을 세우고,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다. 기독교 불모지 한국에서 열심히 선교하였다. 매일 이런 기도를 하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청청하고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아 있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의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정연희 소설 『양화진』 p.235)
1890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1년 시카고 맥코믹 신학 대학에서 한국 선교 보고를 하였고 남부 내슈빌에서 윤치호와 같이 강연회를 개최하여 한국에 적극 선교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테이트 선교사
언더우드의 보고에 감동한 선교사 일곱 명이 이듬해 한국으로 왔다. 그중 테이트(Lewis Boyd tate. 1862~1925)라는 목사가 있었다. 신학과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으며 30세로 일곱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전주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차차 전라북도 여기저기를 다니며 선교지역을 넓혀갔다.
전주에서 부안이나 고창 등으로 가려면 금산을 거쳐야 했다. 백제가 망한 뒤 호남의 맹주로 등장한 견훤이 아들에 의해 유폐되었다는 그 유명한 금산사가 있는 바로 그곳이다. 금산사 입구에 조덕삼(趙德三,1867~1919)이라는 부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선대에는 평양에서 인삼 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고 금산에서 광산을 해볼 요량으로 이주해온 것이다. 근동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조덕삼 장로
유능한 장사꾼은 돈 굴러다니는 길과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법. 돈 길목을 차지한 조덕삼은 마방(馬房)을 운영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밥과 술을 팔고 말도 관리해 주며 잠도 재웠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도 귀를 세웠다. 테이트 선교사는 그 마방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다. 고수(高手)는 고수를 금방 알아본다. 두 고수의 말문이 자연스럽게 트였고 이어 탐색에 들어갔을 터이다.
당시 조선 백성의 삶은 참혹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못 사는 나라는 없었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소출이 적어 먹을 것이 부족한데다 혹독한 신분 차별과 가렴주구에 시달렸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수만 명이 죽어 나갔다. 특히 조덕삼이 자리 잡은 금산 주변은 동란의 중심으로 피해가 막심했다. 그건 나라도 아니었고 사람 사는 땅도 아니었다.
이자익 목사
이자익(李自益,1879~1958)은 경남 남해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먹을 것이 없었다. 1896년 봄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북쪽으로 걸었다. 우선 살아야 했다. 땅이 드넓은 김제 평야에 가 일하면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말을 들었던 터였다. 닥치는 대로 일해주거나 문전걸식하며 500리 길을 걷고 또 걸어 여름에 조덕삼의 집에 당도하였다. 먹여만 주면 몸 바쳐 일하겠다 맹세했다. 조덕삼은 한눈에 거지 소년의 사람됨을 알아봤다. 둘이 만났을 때 주인은 29세 거부였고 이자익은 17세 머슴이었다.
이렇게 하여 세 사람이 같은 시대, 한 공간에서 부딪히게 되었고 각각 세상과 교회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 기막힌 이야기를 조금 펼쳐보련다. 아니 내가 아는 게 많지 않으니 그 조금이라는 것도 아주 쬐끔이리라.
예전 예배드리던 모습(모형)
초기 선교사들이 제사 금지, 신분 철폐, 미신타파 등을 외치며 목숨을 걸고 선교에 나섰는데 그깟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유교 윤리가 무서워 그렇게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었단다. 여성을 심하게 차별하던 시절, 조금 이상한 소문만 돌아도 혼인 길이 막히던 시절, 여성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남녀 자리를 구분하고 휘장을 쳤다는 말이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정되자 전주에 다시 내려온 테이트 선교사는 본격적으로 선교에 나섰다. 눈썰미 좋고 세상 돌아가는 데 관심이 많았던 조덕삼은 테이트를 12년 동안 지켜봤다.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미국 목사 테이트는 변함없이 겸손하고 성실했다. 도대체 예수교가 무엇이길래 지식인 냄새 풀풀 나는 사람이 낯설고 물선 땅에서 저렇게 열심히 전도하려는 것일까.
저런 사람이 믿고 전하려는 예수교라면 나도 한번 믿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테이트 선교사에게 이런 내색을 비쳤더니 반색한다. 1904년 봄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자신의 과수원에 5칸짜리 교회를 짓고 테이트 목사를 담임으로 모셨다.
한편, 이자익은 성실하고 총명했다. 조덕삼의 장남 조영호가 훈장을 두고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다. 이자익은 조영호가 천자문을 암송하는 소리를 지나다니며 듣고는 글자도 모르는 채 암송하였다. 조덕삼은 이런 이자익을 아들과 같이 공부하도록 배려하였다. 덕분에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이자익은 한자를 익혔고 한문으로 된 성경도 읽을 수 있게 된다.
조덕삼은 성실하고 총명한 이자익에게 좋은 배우자를 구하여 주었고 전주 서문교회(테이트 선교사가 33년간 세운 75개 교회 중 가장 먼저 만든 교회)에서 결혼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물론 주례는 테이트 목사가 맡았다. 조덕삼은 이를 지켜보며 하나님의 축복을 실감했다.
금산교회에 활력이 넘쳤다. 테이트 목사는 1906년 5월에 조덕삼과 이자익에게 세례를 주었고 1907년 6월 노회에 두 사람을 장로로 청원하고 허락받았다. 금산교회에서 테이트 목사의 사회로 공동의회를 개최하고 장로 선출을 위한 투표를 실시하였다.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이자익은 3분의 2 찬성을 얻어 장로로 선출되었으나 조덕삼은 필요한 찬성 표를 얻지 못했다. 테이트 목사는 난감했고 교인들은 술렁거렸다.
조덕삼이 발언권을 얻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 열의가 대단한 분입니다.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말처럼 조덕삼은 이자익 장로를 섬기며 주변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오기를 권했다. 조덕삼의 재력과 인품에 힘입어 신자가 늘어났다. 조덕삼은 교회를 크게 짓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과수원을 내놓고 신축 비용 전부를 부담하였다.
이자익 장로와 교인들은 돈이 없으니 몸으로 힘을 다했다.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무를 자르고 날랐다. 들로 나가 흙과 돌을 날랐다. 남북으로 다섯 칸을 앉히고 북쪽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두 칸을 이어붙여 외형으로 보면 ㄱ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인데 모두 27평이었다. 드디어 1909년 4월 4일 테이트 목사를 모시고 헌당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지금의 금산교회가 탄생하였다.
『이자익 이야기』 표지
1910년 조덕삼은 장로가 되었고 이자익을 평양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로 유학을 보낸다. 남은 가족의 생활비는 물론 학비도 모두 부담하였다. 목사가 된 이자익은 1915년 금산교회 목사로 부임하였고 조덕삼 장로는 변함없이 이자익 목사를 섬겼다. 하나님 앞에서 높은 자와 낮은 자를 구분하지 않는 목사와 장로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진다. 백 년이 지났어도 그 냄새가 은은하다. 금산교회의 우람한 소나무 대들보가 풍기는 향기가 그 냄새이리라. 돌아오는 길이 막혀 버스는 서다 가다 하는데 100여 년 전 세 분이 보인 믿음과 또 나누었을 대화 그리고 하나님이 이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은 진정 무엇일까 등등을 상상하면서 나를 추슬러본다.
다음이 궁금하신 분은 위 책 『이자익 이야기』를 읽어보시도록… ㅎ! ㅎ! ㅎ!
[출처] 김제, 〈금산교회〉 이야기| 작성자 쭌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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