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의 4가지 특성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조는 사도신경과 더불어 A.D 381년에 확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입니다. 이 둘이 교회의 두 기둥이 되는 전통 신조인 것입니다. 특히 후자는 니케아 신조를 모체로 하고 있고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결의했으므로 이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신조에 교회론의 아주 중요한 용어가 나타납니다. 즉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백하는 교회에 대한 특성이 바로 ‘교회의 4가지 특성’이 되는 것입니다.
1) 교회는 하나이다
① 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여럿인데, 왜 교회는 하나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엡4: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② 교회가 여럿으로 나누어 진 현실로 볼 때 장․단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를 거룩한 교회라고 하며, 사도신경에도 ‘거룩한 공회’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교회의 상황은 그렇지 못한 것 같고, 오히려 죄로 물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거룩하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참조/ 고전1:2, 엡1:2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교회는 보편적이다
‘보편적’이란 뜻은 계급·인종·지역의 차이가 없는 만민의 교회라는 말입니다. 즉 교인이 되는데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가 만민의 교회일까요?
① 구원의 보편성 때문에(참고, 요3:16, 엡3:6)
히2:9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② 만민을 향한 선교의 요청 때문에
마28:19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1: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③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되기에 만민의 교회이다.
갈3:2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실 이러한 표현은 초대교회에서는 혁명적인 용어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문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마침내 인종의 장벽, 신분의 장벽을 뛰어 넘고 종과 주인,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형제인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만민의 교회 개념은 초대교회 때 반짝하다가 2000년 교회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미국도 20세기 중반까지 백인·흑인교회가 나뉘어 있었으며, 독일의 경우를 보면 민족교회 정신이 만민의 교회 정신 위에 올라 서 있었습니다. 사실 이때가 바로 교회가 역사 위에 죄를 짓는 순간입니다. 전체 교회가 자국민의 이기심을 추구하면 전 세계는 평화가 깨지게 됩니다. 따라서 만민의 교회 정신은 전 세계 땅의 평화를 위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 여러분 개인이 회개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교회는 사도적이다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 사이의 가장 큰 이견은 교회의 사도성에 대한 것입니다.
① 카톨릭 교회의 견해: 카톨릭 교회가 이해하는 사도적인 교회란 로마 교황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임명 받은 주교가 다스리는 교회입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는 전체 권한을 베드로에게 양보(베드로 수위권)하였고, 베드로는 로마교황 → 주교에게 양도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교회만이 사도성이 있는 것이고 참교회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통해서나, 교회사를 통해서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② 개신교 교회의 견해는 무엇일까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사도들에게 복종하는 교회’를 사도적인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터전은 사도, 선지자들이기 때문입니다.(엡2:20) 그러나 최후의 사도가 죽고 그들의 말씀, 교훈, 복음만이 남아 있고, 또한 그들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따르는 것이 사도적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5. 교회의 기본적 사명
새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교회는 그 자체의 독특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명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로서, 교회가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하는 한 반드시 추구하고 완수해야 할 사명입니다. 또한 아래의 5 가지 사명은 어느 한 쪽에만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이를 균형있게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과 세상 앞에서 교회의 사명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1) 케리그마(선교, 전도)
마28:19-20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말의 뜻은 전도자의 행동보다는 설교자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이 선포의 말씀은 전파 혹은 전도와 설교의 방법으로 행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업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케리그마’의 내용은 말씀 또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방법에 있어서는 전도, 선교,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는 ‘복음’, ‘전도’, ‘선교’, ‘설교’ 등으로 그 번역이 다양하게 됩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시고 인간을 용서하시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뜻이고 이에 따라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구원하고 용서하는 은혜에 대한 이 말씀을 더 전하고 말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의 입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이 ‘케리그마’를 듣고 사람이 그 말씀에 대하여 자신을 열어 놓으면, 그 사람은 자기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며 구원됩니다. 따라서 말씀 선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셔오고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므로 교회의 매우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2) 레이투지아(예배)
엡1:6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배로 번역되는 ‘레이투지아’는 종교행위의 중심으로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단체적 행동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회당에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유대교 예배에는 시편 낭독, 공중 기도와 신앙 고백, 모세 오경과 선지서 낭독 그리고 설교 등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초대 교회 교인들도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예배하였으나 나중에는 ‘이단’이라는 이유로 쫓겨나서 전에 하던 대로 유대교식의 예배를 따로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성찬식이 없는 예배를 약 4세기 동안 계속하였고, 오늘날에 있어서도 성찬식이 없는 예배로써 신교는 그 전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배는 섬김의 형태를 가졌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야외에서, 집에서 혹은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곳에서 모여 예배하게 되면서부터 여러 가지 관습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교훈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16-17 말씀처럼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따라서 예배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언약의 관계를 그들 속에 체험하며, 그들의 생애와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이해처럼 예배의 신비성은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이러한 정적인 의미로만 쓰이지는 않습니다. 즉 예배는 행동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동으로써 우리의 예배에 응하십니다. 우리는 행동으로써 이에 보답하여 믿음과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는 결단과 우리들을 그의 자비 앞에 맡겨버림으로써 복종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3) 디다케(교육)
행4: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이러한 가르침을 의미하는 디다케라는 말이 매우 빈번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디다케’는 신약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약 전체를 통하여 교육은 강조돠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육은 교회 생활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되었고, 교육은 예배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전파하는 복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말씀 선포뿐만 아니라 가르침도 이에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설교와 말씀 선포로써 수행되어지는 복음적 사역에도 교육과 가르침을 통한 완성과 보충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육 행위에 있어서 교육적 기능은 전 공동체의 생활 자체 안에서 수행되었던 것이 그 특징이었습니다. 이 말은 공식적인 교육 형식이기 전에 초대 교회의 교육은 오순절 경험 이후에 크리스천 신앙생활의 지도, 사도들의 가르침, 성도의 교제, 기도, 그리고 떡을 함께 떼는 일이 모든 전체 생활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또한 초대 교회 당시에는 복음에 감동되어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 매우 긴급하고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이후 현재까지의 교회 역사 동안 만일 교회가 가르치는 ‘디다케’를 게을리 했다면 교회 존속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교육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보다 견고하고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기까지에는 기본적 진리에 대한 교육은 필수적입니다. 아무리 믿음의 열정이 불같다 할지라도 착실히 교육받는 것이 없으면 비정상적인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익숙히 깨닫는 일은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사람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이 일은 교육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4) 코이노니아(친교)
행2:46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코이노니아’는 희랍어로 ‘친교’를 의미합니다. 때로는 친교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인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통, 성도의 사귐들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친교는 종적인 관계와 횡적인 관계를 종합한 표현으로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바 그 무엇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본회퍼(D.Bonhoeffer)에 의하면, 성도의 사귐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으로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요, 둘째는 성도들이 서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중보의 기도와 행동이요, 셋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 서로의 사죄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교란 연령, 사회적 지위, 국가, 인종과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생기는 장벽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하고 또한 저들이 똑같이 저주받고 똑같이 용서함을 받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성립하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연관성으로써 그들이 서로 속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5) 디아코니아(봉사)
갈5:13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빌2: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봉사라고 번역되는 ‘디아코니아’는 본래 식탁에서 급사로서 일하며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박한 기원을 가진 단순한 말을 예수는 그 제자들이 가야할 방향과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해야 할 일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말로 만들었습니다. 마20:25-28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이러한 명령을 곧 자신이 감당하셨습니다. 온갖 치욕, 자기 부정, 십자가, 죽음까지도 감당하셨습니다.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디아코니아’를 “병을 고치거나 화해하는 일, 상처를 꿰메고 갈라진 것에 다리를 놓고 유기체에 건강을 회복케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디아코니아’의 적절한 예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해 행한 봉사를 들고 있으며, 현대 교회의 주요한 디아코니아적 기능은 세속 도시에서 산업화와 기계화에 고통 받는 현대인의 상처, 특히 도시로부터 발생된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호켄다이크(J.C,Hoekendijk)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생활과 교회의 봉사적 기능은 섬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향하여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서에 근거하여 섬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가난한 자” 혹은 “작은 자”라고 부릅니다. 참된 ‘디아코니아’란 지극히 작은 자들을 받아들이며, 가난한 자로 지칭된 이웃과 유대를 가지고 살며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봉사할 때 일어난다고 그는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