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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김기곤목사 04 신학여행 요한복음의 내용과 배경
성도 여러분 오늘은 지난번에 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이어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 공부하겠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서로 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있지만 요한복음은 아주 많이 다릅니다.
오늘은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에 나타난 교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의 주제절을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10장 30절, 그리고 20장 28절을 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렇게 말씀했고요.
10장 30절, 요한복음 10장 30절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데 또 요한복음 20장 28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도마의 고백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이어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사도 야고보의 동생이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입니다.
요한은 사랑받고 싶어 하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하고 누가 크냐 하는 논쟁에 앞장서고 또 성격이 급해서 우리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성품에 여러 가지 단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같이 곁에 있으면서 그의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성화된 사람의 한 모본으로서 우리가 사도요한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개세마네 동산에 그날 밤에 제자들이 도망쳤지만 도망치지 못하는 두 제자가 있었죠?
누굽니까? 베드로하고 요한입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다고 돼 있지만, 요한은 바짝 따라가서 예수님께서 가야바이 법정에서 침뱉음을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시는 그 장면까지 바짝 따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정말 바짝 따라가는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을 가질 때 멀찌감치
멀찍이 신앙을 갖는 것과 바짝 따라가는 신앙을 갖는 것과 어떤 것이 편하겠습니까?
요한은 바짝 따라가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아예 죽는 것까지도 다 맡겨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죽는 고통에까지도 같이 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오래 살았죠. 요한은 말년의 예배소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제자들과 함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를 반모섬에 유배 보냈을 때 그는 거기서 허송세월하지 않고 예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유명한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반모사의 유배가 풀려난 후 에베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95세가 넘는 노인이었습니다.
요한은 아마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순교해서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사도 중에서는 오직 요한 홀로 남았습니다. 세계 곳곳에 교회들이 많이 서기는 섰지만 점점 더 이단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의 말년에
교회를 괴롭히는 이단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신성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마음이 급해서 붓을 들어서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는 예수님께서 어떤 피조물이나 하나님보다 열등하신 분이 아니시고 바로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시라는 것,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
그것을 확실하게 온 세상의 교회에 말씀하는데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혹은 예수님께서 하나님보다 열등하신 분이라고 말을 하는데, 만일 그렇게 되면 여러분 기독교는 뿌리채 무너져 버립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그게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보다도 조금이라도 못하신 분이시라면 삼위일체가 아니시라면,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을 기독교로 받아들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열성이 많고 전도도 부지런히 하지만은 하나의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을 피조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순간 기독교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무너져버립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죠.
아무리 그 피조물이 첫 번째 창조됐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상한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이 그 당시에 각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이제 죽음을 얼마 앞두고 급히 붓을 들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으신 분,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요한복음에 기록을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구조는 요한복음 21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0장이 한 가운데 있죠.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그렇게 말씀하신 10장의 한가운데 있고
1장서부터 10장까지는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서 쭉 기록을 했습니다.
11장부터 20장까지는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그리고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구조의 특징 중에 하나는 뭔가 하면 하나의 스토리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사명이나 혹은 예수님의 교훈을 설명하는 데 요한복음의 특징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가 나오죠.
그리고 물로 대표되는 유대인 혹은 율법으로 혹은 침내로 대표되는 상징하는 물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달콤한 포도즙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그 포도즙 물을 포도즙으로 변화시킨 예수님의 기적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서 설명을 하죠.
3장은 밤중에 유대교를 대표하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나비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고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고 참 모범이 되는 사람이죠.
그러나 성경에 보면 사케오나 혹은 십자가 앞의 강도에게는 그처럼 쉽게 구원을 선언하셨던 예수님께서 죄인 사케오나 혹은 십자가의 강도보다 몇십 배 몇 백 배 한 고상한 준비된 것처럼 보이는 니고데모에게는 구원을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네가 구원을 받으려면 내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이미 예수님을 찾아오기 전에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가 혹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켰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은 어떤 율법의 준행이나 행위의 완전함이나 혹은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그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거듭난 사람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고 싶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은 또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신 것이 나오시죠.
그리고 생수 대신 예수님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를 공급하시는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은 베데스타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 오후에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의 영육을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나오면서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 우리가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정도로 그렇게 강력한 영적 관계를 우리 예수님과 갖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거기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은 또 가늠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를 끝없이 용서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은 소경을 고치신 이야기가 나오면서 빛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또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 AD 96년 그 당시에는 이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쓰여진 뒤 40년이나 된 때입니다.
40년 후기 때문에 이미 공간복음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온 세상 교회에 다 퍼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복음서를 읽고 있었죠.
따라서 요한은 요한복음을 쓸 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온 이야기들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 쓸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새해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적들 다 생략이 되었고요. 예수님의 탄생이나 시험이나 침례받으신 장면이나 그런 것들도 다 생략이 되었고, 갈릴리에서 열심히 봉사하신 예수님의 갈릴리 봉사도 대부분 다 생략이 되었습니다.
주로 예루살렘에서 봉사하시는 장면이 요한복음에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요한복음에서 꼭 뺄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들은 포함시켰습니다.
가령 5천 명을 먹이신 약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이미 다 나와 있지만은 요한도 그것을 다시 기록했습니다.
그날 밤 배를 타고 풍랑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건넌 건너시는 이야기도 중요하기 때문에 요한은 빼지 않고 그걸 썼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공간 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을 뺐기 때문에 요한복음에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2장에 물을 포도즙으로 만드신 이야기, 3장에 니고데모 이야기, 4장의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신 이야기, 5장에 베데스타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신 이야기, 8장에 가늠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용서하신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들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우리 1장으로 한번 다시 1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한복음 1장으로 요한복음
1장 특별히 1장 1절에서 18절까지는 요한복음의 서론인데요.
또 본론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아주 무겁고 장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영혼 전부터 함께 계신 분이시라는 거, 그리고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장 우리가 잘 아는 절이 있죠?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유명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평범한 것 같지만은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냐 없냐 강하냐 약하냐 그렇게 물어볼 때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도대체 믿음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이 요한복음 1장 12절은 아주 간결하게 명쾌하게 믿음의 정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고 진정으로 영적인 깊은 관계, 인격적 관계를 갖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게 요한복음 1장 12절은 정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또 요한 계시록에서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또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여기서 문을 열면이라는 것은 영접하면 그런 뜻이죠.
내가 그에게로 돌아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내 안에 이렇게 거할 만큼 아주 강한 사랑의 영적 관계죠.
인격적 관계 그것이 여러분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유명한 성경절입니다.
또 요한복음 1장 12절은 구원이 무엇인가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데 그 구원이 뭡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어 여러분 하나님의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뭐 복잡한 정의를 내리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만큼 최고의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복음이죠.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전 존재가 삽식간에 변하는 것입니다.
먼지 같은 벌레 같은 존재에서 온 우주가 부러워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삽식간에 그 존재가 변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만큼 큰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들에게 너 구원받았냐 그렇게 물어보면 우물쭈물할 것이 아닙니다.
뭐 어색해 할 것도 아니에요. 구원받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면 바꿔보면 됩니다.
너 하나님의 자녀냐 그게 최고의 구원이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죠. 부족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은 중요한 절입니다.
믿음과 구원을 확실하게 명쾌하게 정의해주는 절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믿음이 무엇인가 구원이 무엇인가 잘 아셨죠?
요한복음 1장 35절서부터 보면요. 51절까지 이렇게 보면은 1장 제자들을 선택하는 장면이 이렇게 나옵니다.
처음에 요한과 안드레를 만나셔서 제자를 삼으셨죠?
그 안드레가 자기 형님 베드로한테 가서 베드로를 데려옵니다.
똑똑한 베드로가 오지 않으려고 하자 와봐라.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그리고 베드로를 데려와서 제자가 되게 합니다. 빌립은 또 나다나엘을 데리고 옵니다.
나다나를 오면서 예수님을 무시하고 왔죠. 나살에 대해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멸시하면서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라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렇게 칭찬하시니까
나도 하나님이 놀라서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랬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내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의심하면서 온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서 널 보았다고 말씀하시니까 당장 엎드려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제자가 됩니다. 여러분 그렇게 의심에 가득 찬 나다나일이 왜 무화가나무라는 말을 듣고는 그렇게 감격했을까요?
당장 제자가 됐을까요? 여러분 나다나엘이 언제 무화가 나무 아래에 있었습니까?
그가 죽고 싶을 때, 그가 외로울 때, 세상에 나 혼자라고 생각될 때, 온갖 불행이 그를 괴롭힐 때 그는 무화과 나무 아래서 혼자 외롭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외로운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나다나을과 예수님께서는 이날 처음 만났지만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너를 보았다는 말씀을 듣자마자 나다네엘은 엄청난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즉시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1장에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나의 혼인잔치에 예수님께서 참석하신 것이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인간의 즐거운 혼인잔치에서 있었다는 것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줍니다.
어느 수요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녀는 수요일에 결혼식을 주로 했기 때문에 아마도 예수님의 친척이었다고 생각되는 이 집에서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이제 밑에 유대 지방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시고 고통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첫 번째 하신 일이 이 결혼식에 참석하신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대지방에서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많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어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도 역시 그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마구간에서 태어날 때 천사가 했던 말, 또 동방박사들이 찾아왔던 일, 목자들이 경비하러 왔던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잔칫자리에서 그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놓고 공포하기를 어머니로서 간절히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마리아가 예수님한테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뭐 포도주가 지금 없다는 그런 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주 깊은 숨겨진 마리아의 소원이 들어있어요.
지금 포도주가 떨어져서 이 집에 이 집이 큰 공경에 처했는데 당신이 메시아이신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권능이 있으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기회에 드러나면 어떻겠습니까? 드디어 때가 온 것이 아닙니까라는 어머니로서의 마리 간절한 소원이 들어 있어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말도 동문서답처럼 보이지만은 지금 마리아와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문제 영원한 구원의 문제 메시아의 문제를 지금 모자 간에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로서의 요청을 거절하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거절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그날 어머니를 위해서 또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 또 그의 메시아로서의 첫 행보로서 갈릴리에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물을 포도즙으로 변화시키신 것이죠. 여기에는 여러 가지 교훈들이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오늘 요한복음을 다 해야 되기 때문에 일일이 다 우리가 공부할 수 없지만 우리 물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율법적인 것, 유대교적인 것 그런 것들을 떠나서 달콤한 포도즙처럼 강력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 피로 피로 그 포도즙은 예수님의 피를 대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는 아름다운 구원에 대해서 우리 2장에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3장은 밤중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죠.
우리 첫 번째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우리 니고데모는 이미 예수님 없는 구원을 확신하고 온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죠.
우리도 어떤 때 니고데모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해봐야 되겠습니다.
10년 20년 믿어서 좋은 교인이긴 하지만 교회 직분도 있지만 아는 것도 많지만 그러나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한테 있는지 그래서 우리한테 영생이 있는지 우리가 잘 살펴봐야 된다는 교훈이 우리 3장에 들어 있습니다.
4장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 한 여인을 만나셔서 구원에 대해서 설파하신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 유대의 지도를 보면 제일 북쪽에 갈릴리 지방이 있고요.
가운데 사마리아 지방이 있고 제일 밑에 유대 지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지방과 북쪽의 사마리아 지방에는 북쪽에 유 갈릴리 지방에는
유대인들이 살지만 가운데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죠.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남쪽에 유대 지방에 사는 사람이나 북쪽의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이 가운데 토막 사마리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식사는 물론 말도 걸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북쪽의 갈릴리 사람이나 남쪽의 유대 사람이 서로 왕래할 때는 사마리아를 통과하기 싫어서 요단강을 건너가지 쭉 내려왔다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는 그런 어려운 길을 선택했죠.
그러나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과하셔야 하겠는지라 하고 강력한 결심을 말씀하십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길래 예수님께서 꼭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 했을까요?
요한복음 4장을 우리가 면밀히 봐도 다른 것은 없고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목마른 여인, 세상에 온갖 고초와 불행을 겪은 여인, 그런 수많은 갈등과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여인을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나서
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말씀하시고 구원을 가르쳐 주신 그 일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한 목마른 여인의 갈증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다.
그렇게 우리가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그 영원한 생수의 맛을 본 다음에 너무나 기뻐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내 모든 일을 다 아시는 분 메시아를 보라 그렇게 전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모셔가서 이틀이나 머무시면서 사마리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지방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 지방이 예수님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서 널리 퍼졌습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만 복음을 전하면서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기초를 다 놓으셔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 하겠는지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4장에 나와 있습니다. 5장은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베데스타 연못가에서 어느 안식일 오후에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데스다 연못은 가끔 물이 통할 때 제일 먼저 뛰어들어가는 병자의 병이 낫는다 그런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이 거기에 헛된 소망을 품고 그 주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안식일 오후 예수님께서 이 베데스타 연못가를 찾아가셔서 그중에서 제일 오래되고 제일 비참한 환자 38년 동안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환자를 택하셔서 그 환자를 고쳐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한테 참 많은 교훈을 주죠. 우리도 살아가면서 헛된 소망, 헛된 구원의 기대를 가지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이 세상에서 그러나 그것은 베데스다 연못처럼 헛된 기대고 헛된 소망이죠.
거기에 아무리 오래 기다리고 있어도 구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이 38년 동안이나
헛된 세월을 보낸 이 사람이 즉각 구원을 받습니다.
우린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서 찾아올 수도 없는 사람한테는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신다는 참으로 큰 기쁜 소식, 즐거운 기대 그런 것을 우리가 갖게 됩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 더군다나 그날이 안식일입니다.
우리 안식일을 지키면서 사는 우리들에게는 더욱더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죠.
요한복음 이렇게 해서 요한복음의 구조는 계속해서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예수님과 관계된 그다음에 그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은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21장 25절 제일 마지막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많아서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 그랬습니다.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이 예수님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에 이 세상도 그 기록들을 두기에 부족하다.
그렇게 요한은 말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
그분께서 나를 위해서 돌아가셔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강력한 기별을 외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요한복음의 도처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의 소원은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 지금 죽어도 영생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 그것이 요한복음이 말해주고 싶은 핵심 기별이고 요한의 소원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의 신성이 훼손되는 것을 조금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 아니시는 순간, 이 기독교는 기독교의 모든 매력과 자랑은 무너진다는 것 우리는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요한복음의 기별들을 자주자주 읽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고 마음속에 늘 기쁨과 영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살게 되시기를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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