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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 영원한 생명
불성은 천지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설사 우주가 무너지고 허공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라지거나 죽어질 수 없다.
불성은 말이나 생각으로 잡히지 않는 미묘 불가사의한 것이다.
한 점 찍어서 맛을 볼 수도 없는 허공처럼
형상과 감각을 초월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불성은 언어와 명상을 초월하여 홀로 뚜렷이 밝으며 난 바도 없고
그리하여 무너질 바도 없다.
당당하고 밝고 꿋꿋하다고 말할 수 있다.
불성은 말을 떠나 있고 이름을 떠나 있고 글자를 떠나 있고
형상을 떠나 있고 변화를 떠나 있으니
평등하고 동일하여 변화나 차별이 없다.
불성은 이름해서 붙일 자리가 없다. 흘러옴도 없고 흘러감도 없고,
붙을 자리도 안 붙을 자리도, 그 말조차도 붙을 자리가
못 되기 때문에 바로 붙일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불(佛)이니 불성이라는 것은
나의 근본 생명, 영원한 생명, 이 우주 전체를 싸고 있는
근본처를 말한다.
그런데 자기가 그 근본처에 들어 있는 줄을 모른다.
따라서 불이 중생을 미혹케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중생이
불을 미혹케 한 것이다.
자기 성품 중의 불성을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인 것이다.
분명코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 빠져 나온 것을 이름하여 유전자라 할 수 있다.
이 유전자가 자꾸 변전하니 나투어 돌아간다.
만법이 불성으로부터 벌어진 것이다.
불성은 유전자 그이전이다.
불성은 마음내기 이전의 마음이다.
불성이 만법을 머금고 있으니 큰 것이나 불성이 사람의 성품 중에
있으니 만법은 또한 자성 가운데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 불성이라면 산 넘고 물 건너 갖은 고난을 다 겪은
다음에 어디 머나먼 낯선 곳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다. 바로 내 안에 그 참 보배가 있어 설사 무식하다
할지라도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니 그러기에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참 보배가 어디 머나먼 험한 곳에 숨겨져 있다면
어찌 누구에게나 부처님과 동등한 불성이 있다고 하겠는가.
불법은 평등하고 광대 무변한 것이다.
퍼내어 써도 줄어듦이 없고, 퍼부어도 결코 한 방울도 더 늘어나지
않는 이 무량 광대한 진리의 맛은, 때로는 공공적적하여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가도 찰나에 이치에 응하여 모든 것을
바로 세운다. 평온한가 하면 일어나 소소영영하게 살아 있고,
움직이는가 하면 어느 사이엔가 측량할 길 없는 무한으로 되돌아간다.
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참 생명이기에 산다 죽는다
하는 것까지도 진리이며 자비인 것이다.
그렇게 위력 있고 그렇게 광대 무변한 줄은
맛을 보지 못하고는 결코 알 수 없다.
불성은 무한의 모든 것을 다 내도 줄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만약 삼천 대천 세계 우주 전체를,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천차만별로 되어 있는 사생을 다 운집케 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불성은 물들지 않는다. 똥통에 들어간 구더기의 몸은 더럽게
물들지언정 구더기의 본성은 물들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의 본성, 나의 본성, 구더기의 본성인
불성은 물들지 않는다.
해가 뜨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국토에서는 해가 뜬다 진다 하는
개념이 있겠으나 해가 본래 떠 있기만 하는 국토에서는
떴느니 졌느니 하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불성도 그와 같아 항상 밝아 있으니 사실은 밝힌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불성은 영과 다르다. 영은 보이지 않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며
모습 없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영혼은 각자 생각내는 그릇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불성은 더함도 덜함도 없이,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돌아간다.
**한마음 주인공(우주의 근본은 한마음)
불성이란 우주를 감싸고 있는 대원리이다.
이 우주 삼라만상에 불성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
불성은 무시이래로 있어 왔고 지금도 있으며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불성은 진리요 영원이요 모든 것이다.
불성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일체의 근본이다.
불성은 오직 하나라는 의미에서 한마음이요,
너무나 커서 한마음이요, 전체라서 한마음이다.
일체 만물이 그로부터 비롯되니 한마음이다.
한마음은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든 생명의 것이다.
일체 중생의 마음인 것이다. 한마음은 전체이다.
허공같이 원대하고 광활하다.
한마음은 너무나 커서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고 말할 수가 없다.
허공을 가리켜 동쪽에 있다거나 서쪽에 있다거나
북쪽, 남쪽에 있다거나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누고 나누는 데서 한마음을 구하지 말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데서 우리는 한마음에 다가가게 된다.
한마음 속으로 들면 하나도 없다.
그러나 한마음 속에서 질량이 나오면 헤아릴 수 없이
광대 무변하게 나올 것이다.
그래서 불성은 바로 만법을 들이고 낸다고 하는 것이다.
형상이 있기 이전의 한마음에서
수만, 수억의 부처가 나타날 수 있다.
일만 부처가 하나의 털 구멍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시기 이전에도 한마음은 있었고
부처님, 보살님들의 마음이 그 한마음을 여읜 일이 없으며
온갖 중생의 마음도 그와 더불어 있는 것이니
중생들에게도 또한 한마음이 있다.
부처님이 무한의 모든 것을 다 내도 줄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듯이
한마음은 삼천 대천 세계 우주 전체, 사생의 천차만별로 되어
있는 것을 다 포섭하고도 그것을 다시 좁쌀 한 알갱이에
다 넣을 수 있으며 그러고도 그 좁쌀 한 알갱이가 작다 하지 않는다.
한마음은 크다 하면 우주를 다 삼키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크고,
작다하면 바늘 끝이 넓을 만큼 작다고 할 수 있다.
한마음은 온 법계를 한 구석도 빈 데가 없이
한 발로 밟았으니 평발이요, 온 세상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전부 쥐니 평손이요, 높고 낮음 없이 전부 보니 평눈이다.
한마음은 시공을 초월한다.
한마음은 온 만물의 시작 이전부터 있었고
만물의 끝남 이후에도 있다.
한마음에는 어제 오늘이 따로 없고 크고 작음이 따로 있지 않다.
모든 물줄기가 바다에 이르러 하나가 되듯이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다 한마음에 포섭된다.
한마음은 바로 만물이 비롯된 근원이요 돌아갈 고향이다.
한마음 속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부처도, 관세음보살도 한마음 안에 살아 계시며,
지장 보살의 대원력도 한마음 안에 함께한다.
한마음 안에는 일체 제불이 존재한다.
한마음 안에는 삼라 대천 세계의 진실이란 진실은 다 모여 있다.
한마음 안에는 불보살들의 모든 원력이 다 깃들어 있다.
그러니 그러한 한마음이 무엇인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태양 빛은 온 누리를 다 비추고도 부족함이 없다.
한마음의 빛도 그러하다.
삼계를 다 비추고도 부족함이 없다.
한마음은 우주 전체의 힘이며 공덕이다.
마음이 진실로 텅 비어 유무와 호오의 양면을 떠난
중도에서 한마음의 힘은 드러나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의 마음은 하나이다.
모든 생명들끼리는 사실 너와 내가 없다.
본래로 생명은 하나이다.
본래 생명은 부처이다.
그러므로 본래 생명의 마음을 일컬어 한마음이라고 한다.
생명체들이 제각기 육신을 갖고는 있으나 본래 둘이 아닌 것이다.
만 사람이 모여도 본존불은 하나이다.
그것은 체가 없기 때문이다.
각자에 다 본존불이 있어 자기의 본존을 마음의 주인이라 한다면
각자의 마음의 주인은 다 한마음인 것이다.
한마음은 어느 한편이 아니다.
나누고 나누는 데에서 한마음을 구하지 말라.
우주 전체가 생명의 근본 마음, 인간의 근본 마음에 직결되어 있고
세상살이 돌아가는 이 자체가 내 근본에 가설되어 있다.
우주 삼천 대천 세계가 그냥 하나로 통해 있다는 말이다.
벽도 없고 봇장도 없으니 일체 제불의 마음이 곧 내 한마음이고,
일체 제불의 법이 곧 내 한마음의 법이며 생활인 것이다.
이 전구 저 전구에 들어오는 전기가 다 똑같듯이
만물은 다 한마음에 하나로 가설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 모두가 부처요, 보살이다.
우리 모두의 한마음이 부처요 보살이다.
무 하나로 요리를 할 때 국을 끓일 수도 있고 김치를 담글 수도 있고
갖가지 요리를 할 수 있으나
김치를 담근 무, 국을 끓인 무가 본래의 무를 떠난 게 아니듯
이 삼계의 모든 유위법은 그 본원이 한마음인 것이다.
한마음에서 비롯된 전체적인 우주의 섭리, 연관성이
바로 우리 마음에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말하게 되고 움직이게 된다.
근본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전체가 우리 마음에 직결되어 있다면
그 속에 누구인들 없겠으며 무엇인들 없겠는가.
제불보살도 다 그 자리에서 나타난 화현이다.
모든 부처와 중생은 한마음이다.
한마음이기에 부처와 중생에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한마음으로 돌아가면
부처가 스스로 나타나기에 중생이 곧 부처인 것이다.
**한마음 영원한 주인공
발전소에서 내 집 전등에 이르도록 전선을 가설해 놓고서
스위치를 올리자 불이 들어오듯이 나의 마음은
한마음과 연결되어 있어 그 근본이 다르지 않으니
나의 근본이 곧 만법의 근본이라, 이름하여 주인공이라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했을 때
벌써 근본 자리에서 알고 있으니
그래서 참 부처요, 자성불이요, 참 보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란 영원한 자기의 실상이다. 영원한 생명의 실상이다.
주인공은 생명의 근본이다.
그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우주와 직결되어있고 이 세상 만물과도
가설이 되어 있어서 일체는 다 같이 공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근본의 주인공은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 영원히 돌아가는
자가 발전소와 같아서 항상 안으로 불이 켜져 있기 때문에
켜졌다, 꺼졌다 하는 말조차 붙지를 않는다.
주인공이란 생각나기 이전의 마음 중심,
바로 나의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둥이 아니라 전체적인 기둥이다.
전체적인 기둥이므로 무엇이든 한생각 내는 대로,
불을 켜려면 켜고 밥을 지으려면 짓고
모터를 돌리려면 돌리고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끌어 쓸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자동적으로 할 수 있다.
마치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듯이,
무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 마음의 기둥, 그것은 바로 적멸보궁 전체 우주를
싸고 돌리는 기둥과 같다.
맷돌에 심봉이 있어 아래 위가 맞물려 돌아가며 곡식을 갈아내듯이
우리 마음의 기둥이 심봉이 되어 우주 전체가 돌아간다.
주인공은 진리요, 빛이며 영원이요, 생명이며 부처요 보살이며
청정하며 긍정이다. 거기에는 어둠도 없고 죽음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부정도 없다. 주인공은 진리이니 빛보다 더 밝고,
진리이니 행복보다 더 기쁘며, 진리이니 허공같이 크고 영원하며,
진리이니 텅 비고 고요하여 자취도 없다.
주인공! 하면 거기엔 지렁이의 생명도 포함되고
올챙이의 생명도 포함된다.
일체의 생명이 다 포섭된다.
물의 생명도 포섭되고 불의 생명도 포섭되고 돌의 생명,
흙의 생명도 다 포섭된다.
주인공은 일체 만물 만법의 원소이며 핵이며 에너지이다.
주인공은 밝고 영원하고 지극하다.
그 주인공은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도 있었고
설사 우주가 무너지고 허공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라지거나 죽지 않는다.
그런 주인공을 일컬어 '한마음'이라고도 하는데
그 한마음은 말이나 생각에는 잡히지 않을 만큼 미묘 불가사의하다.
주인공을 불성이라고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바로 이 주인공이 있음으로써 중생은 노예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모든 것을 다 쉬고 맡기게 되면
대자유를 누리게 되는 이치도 주인공 그가 본래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텅 비어 걸릴 것이 없다.
주인공은 본디 태어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다.
주인공은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생각으로 잡히지 않지만
영원하고 크나큰 나이다.
위대한 지혜의 빛나는 힘이 있고 청정하여 변함이 없다.
또한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갖춘 나이다.
중생은 모습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고 나고 죽고
하지만 주인공은 다만 하나가 만 개로, 만 개가 하나로 도는 가운데
여여하니 이를 일컬어 또한 부처, 자성불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을 통해 중생과 부처가 만나고,
둘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나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의 근원이다.
주인공은 나의 주인이자 모두의 주인이요, 삼계의 주인이다.
'주' 한 것은 근본자리를 말하고 '공' 한 것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주인공 자리엔 무엇 하나를 고정되게 세워서
'나' 라고 할 수도 없고 무엇 하나를 세워서 활용이라 할 수도 없고
무엇 하나를 세워서 부처라 할 수도 없고, 무엇 하나를 세워서
늙은이다 젊은이다, 여자다 남자다, 아비다 자식이다라고 할 수도 없다.
**한마음 주인공(나의 시작이자 끝)
중생은 본래 성품인 주인공에 근거해서 존재한다.
비유하자면 나무가 땅속의 뿌리를 근거로 하는 것과 같다.
또 비유하자면 허공은 영원토록 결코 무너지는 일도 없고
다시 생겨나는 일도 없고 육안으로 잡히지도 않는데
그 속에서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어나며,
또 바람 그치고 구름 스러지듯이 중생은 주인공에 근거한다.
나무에 비유하여 내가 열매라면 주인공은 열매를 있게 한 꼭지와 같고,
내가 꼭지라면 주인공은 그 꼭지가 매달린 가지와 같으며,
내가 가지라면 주인공은 그 가지가 돋아나온 줄기와 같다.
내가 줄기라면 주인공은 비유하건대 뿌리와 같으니
뿌리는 나무가 있게 된 근본이라 그로부터 줄기와 가지와 잎과
열매가 나왔듯이 나의 모든 생각, 나의 모든 활동, 나의 모든 공덕이
그 주인공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다.
주인공은 나의 참된 근본이다.
내 몸, 내 생각은 돋아났다가 곧 스러지는 가지, 잎과 같으니
뿌리는 가지와 잎이 떨어지고 꺾이면 새로운 가지와 잎을 돋게 하듯이
주인공도 그러하다.
그렇다고 나의 주인공이 나무의 뿌리처럼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 육안으로 보여지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만약 모양이나 음성으로써 부처를 구한다면
필경 여래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눈 아닌 눈으로 보아야 한다.
주인공은 차라리 뿌리 없는 나무라 할 것이며
한 점 찍어서 맛볼 수도 없는 허공같이 형상과 감각을
초월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나의 진정한 면모로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자재로운 나의 참 주인이자 이 세계의 참 주인이다.
일컬어 자성이라고도 하고, 본래면목이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하고, 여래장, 진여, 참 나라고도 하며
주인공이라고도 하는 이 나는,
중생이 흔히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과는
천양지차로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은 광대하고 적적하면서도 그 신령함이
내 안에 남김없이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크다 하면 삼라 대천 세계에 차고도 남고
작다 하면 티끌보다도 작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주인공의 품에 싸여 있고,
내 안의 작은 불씨 하나는 거꾸로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
주인공은 나의 시작이며 끝이요, 나의 궁극이며 목적이다.
나를 있게 한 이도 주인공이며 나를 데려갈 이도 주인공이다.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도 주인공이며,
나를 그 곤경에서 구해 주는 것도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내 속의 나' 또는 '참 나'라고 말할 수 있다.
수억겁 전부터 우리는 모습을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바꾸고
여기로 왔다가 저기로 갔다가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나를 끌고 온 주처는 과연 누구인가?
다름아닌 주인공이다.
우리는 여직껏 수억겁을 거쳐 내려오면서
한 번도 죽어 본 일이 없다.
나를 형성시킨 것도 주인공이고 이끌고 가는 것도 주인공이다.
수억겁 진화의 길을 끌고 온 근본이 주인공이다.
지금 자기 육신을 끌고 가는것도 주인공이다.
인간의 뿌리는 체가 없어 보이지 않으나
마음내고 말하고 보고 듣고 걷는 일체의 행동을 하게 하는 것도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이란 자기 육신이라는 배에다
몸 속의 온갖 중생들을 싣고 다니는 선장과 같다.
**한마음 주인공(무한량의 자재권)
모든 사생의 일체 만물만생의 근본이 하나로 뭉쳐서 시공 없이
돌아가는 그 자체를 한마음이라 하니 내 한마음 주인공은
전체로 가설된 자가 발전소와 같아 무한량의 에너지가 주어져 있다.
그 에너지야말로 내 몸이 아프면 의사가 되어 주기도 하고
약사보살이 되기도 하며 지장보살이 되어 내 명을 이었다 붙였다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자재권을 가졌으므로 삼천 대천 세계의 어느 것이든
내가 아니 되는 것이 없고 일체 생물이 다 될 수 있으며,
살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죽은 세상에도 내 자리 아닌 게 없듯
유무가 합쳐진 자리인 것이다.
주인공은 내 속에 갖춰져 있으면서 법계에 충만하여
아니 미치는 데가 없다.
지구상에 있는 온갖 진귀한 보배를 다 합쳐도 바꿀 수 없는,
무한히 값진 진리가 곧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그렇거늘 그렇게 무한한 보배를 갖고서도 이것 저것 걱정이 많다.
그것은 마치 억만장자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주인공은 광대무변한 불법의 뜻을 그대로 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수억겁을 거쳐 나왔기에 그 경험을 살려
이끌어 갈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주인공은 천백억 화신으로 공존한다.
주인공 속엔 역대의 일체 부처님이 들어 계실 뿐 아니라
일체 중생이 다 같이 들어 있다.
주인공은 우주 전체, 태양계의 혹성들과도 마음이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억겁을 거쳐 물질적으로 되나오고 또 되나오며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살아온 습성도 거기서만 해결할 수 있다.
주인공은 마치 업의 용광로와 같다.
한마음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고 과거의 업을 녹여 줄 수 있고
위로는 부모, 조상의 묵은 빚을 갚아 줄 수 있고 아래로는 자녀들에게
햇빛을 비춰 줄 수 있다. 주인공만이 그런 능력을 줄 수 있다.
주인공은 거대한 용광로이다. 이 보이는 세계와 더불어 함께하는
일체 제불의 보이지 않는 절실한 대원력이 언제나 함께하는 용광로이다.
그러한 용광로가 내 속에 있다. 어떤 쇠든지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아 내리듯 그 어떤 눈물도 자비로 화하고,
그 어떤 아픔도 감사의 염으로 되살아나게 하는 용광로가 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업도, 어떤 환난도 그 앞에서는
한 점 눈송이일 뿐이니 주인공은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의 신묘한 비밀이요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불성으로서의 불가사의한 힘이다. 그것이 바로 주인공의 위덕이다.
주인공은 무한량의 에너지, 무한량의 능력일 뿐
쓰고 안 쓰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 하기 나름이다.
그러므로 중생심을 끊고 참 나를 얻는 게 아니라
도리가 그러함을 발견함으로써 거짓의 나 또한
참 나의 한 나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금강 같고 여여하고 원만하고 달처럼 해맑고
태양처럼 밝고 맑다. 그런 자성이 누구에게나 들어 있건만
온갖 대상, 제멋대로의 상념이나 견해, 욕망 따위에 끄달리고
얽매이니 중생은 마치 항아리 속에 불을 켜 놓은 것과 같다.
스스로 불 켜 있는 줄도 모르고 밖을 비추지도 못한다.
나 없는 참 나, 주인공에겐 길 아닌 데가 없어 산도 길이요
들도 길이요 허공도 길이요 길이 없는 데도 길이니
어느 한구석 손 안 닿는 데가 없고 발 안 닿는 데가 없다.
그래서 평발이요 평손이다.
부처님의 발을 평발, 평편족이라 하는 것은
아니 닿는 데 없기에 그렇다.
주인공은 만법의 근원이기에 평발이다.
인간을 보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 것은 참 자기,
주인공이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모든 재료가 다 갖춰져 있다는 사실, 여여하고, 청정하고,
자유자재할 수 있다는 사실,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는
근본이 갖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인간은 말로는 만물의 영장이라 하면서도
소견을 작게 쓰고, 따로따로 가르기를 일삼으니
지혜가 넓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꿈이다 생시다, 시간이다 공간이다, 생사다 윤회다 하는 말이
붙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서 그대로 여여하게 내가 나를 이끌어 가며
상신하고 하달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누구에게나 갖춰져 있다.
누구나 지금 지장 행을 하고 있고, 누구나 지금 관세음의
삼십이응신을 하고 있다. 누구나 본래 그러한데 다만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한정된 자기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
태양은 내 빛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붕 없고 벽이 없으면 태양은 그대로 비춰 준다. 주인공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동차를 몰고 갈 때에 운전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든, 착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또 차를 몰고 가는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엔진에 기름이 공급되듯이 참 나는
가화합의 나에게 에너지를 줄 뿐이지 따로 있어서 가고 오는 것,
그르다 옳다 하는 것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한마음 주인공(전체이자 공)
왜 주인공이냐? 나의 참 주인이니까 주인공이요,
또 텅 비었기에 '빌 공(空)'주인공이다.
주인공이란 뜻은 내가 그것을 근거로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부모로부터 몸 받기 전에 나는 무엇이냐?' 할 때에
'인간이 다만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태어난 것' 이 아니라는
바로 거기에 주인공이 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살아 있는 것은
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다.
줄기·가지·꽃·열매는 보이나 뿌리는 보이지 않아도 땅 밑에
뿌리가 있어 나무가 존재함을 아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뿌리처럼 고정되어 있다고 해서는 안된다.
주인공은 나의 근거이자 동시에 모든 것의 주인이므로
'부처님'이라 할 수도 있다. 모든 불보살과 일체 선지식과
모든 생명의 근본이 되는 주인공을 깨달아야
참 부처를 알 수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
또 주인공은 마치 허공과 같아 무너지는 일도, 변하는 법도 없으면서
삼계의 모든 것에 나투고 모든 것을 기르고 되돌려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인공엔 나와 너의 나눔이 없다.
주인공! 하면 거기엔 일체 만물이 다 포함된다. 그리고 공한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생명이 다 합쳐지는 거기,
만물만생이 다 합쳐져서 부동한 자리이자 공한 그 자리가
일컬어 주인공이다.
경계와 거짓 나와 참 나가 하나이다.
모든 것을 다 싸잡아서 주인공! 한 것이다.
그 모든 것 속에서, 그 모든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고
또 그 모든 것 자체인 것이니 일체가 다 들어 있으나
내가 있음으로써 근본이 되고 중심이 되고,
모든 사물이 나로부터 벌어져 주장이 되고,
또 그것이 화두가 되므로 바로 주인공이라 한 것이다.
주인공! 할 때는 벌써 전체가 궁그른다.
각자는 제각기 '주인공'하니까 개별적인 그 무엇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주인공은 곧 전체이다.
그러므로 주인공! 하면 태양보다 더 크고 더 소중하고,
위력이 당당하고 신비하고, 말로 뭐라고 할 수 없이 도도한 것이다.
내 주인공, 네 주인공의 나눔이 있는 줄 안다면 그것은 병통이다.
주인공은 찻잔도 될 수 있고 컵도 될 수 있고 접시도 될 수 있고
책상도 될 수 있고 의자도 될 수 있고 사람도 될 수 있고
짐승도 될 수 있다. 주인공은 다 해당될 수 있다.
주인공은 이름이지만 그대로가 우주 법계, 생명의 실상이다.
모든 것은 원소 자체가 흘러감도 흘러옴도 없이 흐르는
허공 속의 나툼인 것이다. 고로 그것을 자세히 파악해서
고정된 관념을 그냥 모조리 타파하여 내 마음이 허공같이 돌아갈 수
있으면 그대로 여여한 것이다.
내어놓을 수도 없고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근본 자기,
주인공은 어디에 국한된 게 아니라 이 우주의 광대무변한 이치를
모두 포섭하고 있다.
근본의 주인공은 텅 비었으면서도 말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니 꺼진다 켜진다 하는 말이 붙지 않는
자가 발전소로 비유할 수 있다.
주인공은 빛깔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그러면서도 여여하게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끝도 시작도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공이요 무요 나툼일 뿐이다.
주인공은 다른 곳에 있는게 아니라
주인공을 발견코자 하는 그 속에 있다.
우리가 요리를 할 때에 먹고 싶은 대로 재료를 준비해서
오븐에 넣으면 맛있는 음식이 되듯이,
필요한 대로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그 살림살이 가운데
주인공의 면목은 드러나 있다.
본래 있으니 발견해 보라 하니까 사량으로 주인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인공이다' 하면서 주인공의 탈(가면)을 잡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된다.
본래로 한 물건도 없다 했으니 주인공 또한 이름일 뿐
공하다 하겠으나 그것을 문제 삼지 말라.
참으로 알 것을 알아야 참으로 그 아는 것을 버릴 수 있고,
있는 그것을 참으로 알고서야 없는 이치가 자명해지는 것이니
주인공을 문제 삼지 말라.
참 자기를 모르고서는 참된 무아가 실현될 수 없다.
주인공의 이름을 그냥 아빠라 해도 좋고 엄마라 해도 좋다.
심주라 불러도 좋고 평상심이라 해도 좋다.
청수, 생명수라 해도 좋고 심봉이라 해도 좋다.
주인공을 한 물건이라 해도 좋고 본래면목이라 해도 좋다.
'한 놈도 없는 그놈' 이라 해도 좋다. 아미타불이라 해도 좋고
본존불이라 해도 좋다. 포괄적인 주처이므로
하느님이라 불러도 좋고 나의 님이라 해도 좋다.
주인공은 무엇이든 다 될 수 있어서 도무지 고정됨이 없다.
주인공은 어버이이자 자녀이며, 가장 높은 이이자 가장 낮은 이이다.
주인공은 이름이 무엇이든 자신을 이끄는 참 자기인 것이다.
주인공은 '나의 나'요 내 '마음의 마음'이다.
자기의 참 부처를 발견하려면
생각나기 이전의 근본에 부합되어야 하나
말로써 부합시킬 수 없으니
나고 드는 자리를
한마음 주인공이라는 하나로 세운 것이다.
주인공이라고 하니까 개별적인 '나'로 알면 안된다.
주인공이라 하면 이미 전체를 의미한다.
일체 법을 감싸고
일체 법을 지탱하며
일체 법을 굴리는 그 자리를
주인공이라 하는 것이니
어찌 네 주인공이니 내 주인공이니
나눔이 있겠는가.
**나의 실상(누가 주인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바로 참 나인 주인공으로부터이니 오직 참 나를 찾기에 노력해야 한다.
참 나가 이날까지 같이 하여 왔고 이날까지 같이 돌아왔는데
그것을 모르니까 그 모든 것이 참 나에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하라 하는 것이다.
육신은 참 나에서 나타난 싹, 잎사귀, 가지와 같은 것이라
뿌리를 놓아 두고 어찌 가지나 잎사귀를 자기라 할 것인가. 그 뿌리를 알라.
먼저 나를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중생의 본래 성품은 원만하고 공적하여 태어난다든지 죽는다든지 하는
어느 한편에 기울어지는 법이 없으나 중생의 실제 생활을 보면
삼독심에 물들어 마침내는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로 원만공적한 참 성품이 구족해 있다는
이 문제가 풀릴 것 같으면 불법의 참 맛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내가 없다면 태초가 어디 있으며 우주가 어디 있으며
현상계는 어디 있다고 하겠는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없다면 부처도 불법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
먼저 자신을 알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나고서 세상은 벌어졌다. 나로부터 이 세상이 생겼고
나로부터 가정이 생겼고 나로부터 상대가 생겼으니
내가 나오면서 이 세상 우주 전체가 벌어진 것이다.
나를 빼놓고 무엇을 이 세상이라 하며, 무엇을 진리라 하며,
무엇을 가르침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참모습, 진짜 자기의 뿌리와 씨를 알아야 한다.
보고 듣고 앉고 서고 말하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소소영영하게 응대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 나왔기에 일체 만법이 나로 인해서 들고 나며
상대성 원리로서 돌아가는 것이지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주인공이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함은 한마음으로 하나가 나왔으니
독존이요, 나로부터 벌어졌으니 유아독존인 것이다.
개별적인 나로서의 독존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묶어 '나' 하나가 나왔으니
독존이요, '나' 나온 것 모두를 합해서 독존이다.
그 무엇이 싹을 틔워서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나를 싹 틔운 그는 누구인가? 곧 참 나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중생은 그 씨앗을 잊고서 '지금의 나'에게만 매달리기 때문에
온갖 고에 휘말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씨'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최초의 씨앗은 이제 지금의 나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열매가 영글었다면 그 열매는 곧 처음의 씨앗과 다르지
않으니 지금의 나 속에서 참 나를 찾아야 한다.
자기로부터 우주의 근본이 나오므로 자기를 알아야 한다.
우주의 어떠한 작용이 위대하다 할지라도, 지구를 집어삼킬 힘이
있다 할지라도 자그마한 자기의 내놓을 수 없는 마음의 근본보다
더할 것이 없다.
광대하고 적적하면서도 신령함이 내 안에 남김없이 깃들어 있으니
내 안의 불씨 하나가 온 우주를 감싸고도 남는다 할 것이다.
사람의 뿌리는 모습이 없어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누구도 그 뿌리가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근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자기의 뿌리가 없다고 단정할 것인가.
목수는 자기 마음대로 집을 설계하여 짓지만 인간은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마음먹은 대로 자식을 낳지는 못한다.
어떤 부모라도 목수가 집을 설계하듯 그렇게 자식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가 설계한 것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제기하는 삶의 비밀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집을 짓고 들어가서 사는 이치를 보라.
집을 지어 놓고 우리가 그 속에서 주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이지
집이 있어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다.
그와 같이 이 육신을 지어 놓고 들어가 사는 주인이 누구인가를 보라.
나의 육신은 마치 내가 헌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영원치 않아 무상하다는 것을 지켜보라.
나의 의식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지켜보라.
지켜보면서 과연 자기라고 하는 존재는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
나왔다가 어느 구석에서 사라지고 마는 허망한 존재이면서,
그나마 고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고통받다가 멸망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인지를 밝게 알아야 한다. 정말로 그러한가.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 주재자, 참 자기가 있다.
육신이 나인가, 의식이 나의 주처인가, 의지가 나의 주처인가.
육신도 내가 아니고 의식도 내가 아니고 의지도 내가 아니다.
그러한 나는 비록 애지중지해 왔다 해도 다 비실재요 가화합이요
인연 소산일 뿐이다. 그러므로 허망하다 함도 당연하다.
중생은 여직껏 그러한 나를 위해 살았고,
그러한 나가 나인 줄로 아는 그릇된 소견을 갖고 있었기에 말이다.
열매는 씨앗에서 생겨났고 그 씨앗은 이전의 열매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이전 열매는 또다시 그 이전의 씨앗에서 생겨난 것이니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열매는 미래로 또 그렇게 이어져 갈 것이니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어느 때의 열매를 '이것이 열매다.' 하겠는가.
고로 끝간 데 없이 이어지는 열매의 참 성품을 찾으라는 것이다.
**나의 실상(자기 속의 성품)
나무를 살리려면 뿌리에 영양분을 주어야 하듯이,
사람이 참 사람이 되려면 먼저 본래 성품 자리를 밝혀야 한다.
본래 성품 자리인 주인공이야말로 곧 사람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나를 있게 한 이도 주인공이요, 나를 데려갈 이도 주인공이다.
가을에 잎 떨어진다고 나무가 뿌리째 죽는 것은 아니다.
뿌리는 그대로 살아서 봄이 오면 다시 잎이 돋고 꽃이 핀다.
나무가 그러한 자기 뿌리를 보지 못하듯
인간도 제 뿌리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체가 없는 뿌리이지만 말하고 움직이게 하는 근본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니 먼저 참 자기부터 알아야 한다.
과거로부터 수없이 탈바꿈을 해 가지고 자기 형상을 형성시켰지만
그것을 모른 채 지금 현실의 나만이 내 실상인 줄 알고 애를 쓰고
있으니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면서
갖가지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보고 듣고 앉고 서고 말하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소소영영하게
보는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내가 있으니까 상대도 있듯이,
바로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일체가 있고 또 우주 천지와도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 몸을 '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 빛보다 더 빠르게 우주 천지 어디든지
연결되어 비춰 볼 수 있는 신통 묘용의 한마음 주인공이야말로
바로 나의 진면목인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말을 했다. 내가 지금 움직였다.
말하고 움직인 것을 내가 한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가?
내놓아 보라면 내 놓을 수 있는가?
말하고 움직인 그것을 누가 했는가?
바깥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감지할 수가 없다.
그 근본을 주인공이라고 한다.
한마음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참 자기라고도 한다.
자동차는 운전자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주인이라 하고 운전자를
그 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 일이겠는가.
주인공을 모른다면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숨을 들이고 내쉬는 것을 보라. 들이쉬고 내쉬지 못한다면
죽을 것인데 그것을 누가 하고 있는가.
그와 같이 생활 속에서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도
자기가 있으니까 들이고 내지 않는가?
수억겁 광년 전으로부터 끌고 왔고 지금도 끌고 가고 있는 근본,
이런 근본이 주인이 아니라면
주인이 왔다는 것은 증명도 못할 것이다.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없다면 죽을 것이요
또 내쉬고 들이쉴 수 없다면 죽을 것이다.
그 양면이 교차하는 그런 틈에 그대로 살아 있는 그 무엇이 있으니
그것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도 바로 그놈이다.
중생으로서의 나가 부정된 그 지점에 중생의 나가 아닌 영원한
그 무엇이 있다. 바로 참된 나의 주인공, 한 번도 나지 않았으므로
아예 죽을 바가 없는 무량겁의 나, 더러움에도 아예 물들 줄 모르고,
괴로움이란 것으로부터도 홀연히 초월하여 불생불멸, 부증불감, 불구부정의
지고지락한 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그 영원한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 영원한 나는 언어나 문자로 수식할 수도 없고 의론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아니므로 관념으로 알고자 하는 것은
통 속의 놀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기 뱃속에 있는 자기 씨를 찾아라.
사람들은 수박씨를 찾으라고 하면
지금 수박 속에 들어 있는 씨를 찾으려 하지 않고
작년 씨를 생각한다.
작년 수박씨는 화하여 이미 지금의 수박이 되었으니
씨는 제 뱃속에 있다.
**나의 실상(나의 의식과 주인공)
나의 의식이 주인이라 한다면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
혹은 이런 저런 일들이 성사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들이
뜻대로, 의지대로 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뜻대로 할 수 있는가. 되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괴로움과 고통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육신과 마찬가지로, 나의 의식이라는 것도
나의 진정한 주인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나의 실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환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중생은 그러한 나를 참 나로 알아
거기에 깊고 진한 집착을 두어
그 나를 중심으로 모든 언행을 짓고 있다.
가화합에 불과한 것을 중심에 두니 자연히 고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노예가 되고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사량심을 자기인 줄 알고, 그 사량심을 붙들고
육신과 더불어 아둥바둥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나' 말고 진정한 나, 주인공이 있음에도 바로 나를 있게 한
그 근본을 제쳐 두고 '나 아닌 거짓 나'를 참 나로 알고 있는 것이다.
미생물에서부터 끝간 데 없이 탈바꿈을 거듭하여
오늘의 자기가 형성되었건만 그것을 모르고 현실의 내가
바로 나인 줄 알고 급급해하니
사람의 도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모든 번뇌의 씨앗은 중생으로서의 '자기 사랑'이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생들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회한,
환희 등은 모두 중생의 자기 사랑일 뿐이니
어찌 그것을 진정한 자기 사랑이라 하겠는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자기에게
영원한 기쁨과 만족을 주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번뇌와 고통을 안겨 주고 있으니
결국은 자기를 위한다면서 자기를 저주하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전도몽상, 뒤집힌 헛 꿈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중생들은 꿈같이 뒤집힌 생각을 내게 되었다.
그것이 어둠이 되어서 본래부터 밝고 맑았던 한마음을 가리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밝은 태양과 맑은 하늘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것과 같다. 그리하여 중생은 태양이 없는 줄로 알아
태양을 잊었고, 하늘이 어둠으로 덮인 줄 알아 맑은 하늘을 잊었다.
그러므로 중생이 돌아가야 할 곳은
본래로 부처였던 그 성품, 그 태양과 하늘이다.
지금의 내 생각과 육신은 본래의 나에게 일어난
한 점 먹장 구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라고 믿어 온 것의 실체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어느 때의 나를 나의 실체라고 내세울 게 없으니
없다고 하는 것이다.
원래 참 나인 주인공의 성품은 영원히 밝고 청정하여
걸림이 없음에도 다만 중생심, 번뇌심, 삼독심 등의 망념으로
말미암아 가리워져 있으니 마치 맑고 밝은 하늘이 구름에 덮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문득 바람이 일어 구름이 흩어지듯
망념이 사라진다면 주인공 성품은 그대로 여여할 것이다.
주인을 모르면서 환상에 불과한 나를 주인으로 알고
'나', '나의 것'에 매달려 서로 다투고 애태우는
중생의 모습이 하도 측은해서 보다 못해
부처님이 나오신 것이다.
공한 자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
거짓 나가 주인공 앞을 막아 서 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믿는다 하면서
참다운 자기가 아닌 중생심, 이기심, 자만심에 빠진
자기를 믿고 있으니 참 나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거짓 나를 비켜나게 해야 참 나인 주인공이 드러난다.
'나'라는 생각은 현재 의식이다.
참 나는 현재 의식과 잠재 의식이
둘 아니게 나오는 해맑은 마음자리이다.
**나의 실상 (사대 화합의 육신)
중생이 자나 깨나 평생을 두고 위해 온 '나'는
사실 가화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의 뜬구름처럼 인연에 의해
일시에 지어진 것일 뿐 견고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실 육신이라는 것은 부모의 정혈이 모여진 것이요
사대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육신을 나의 실체라고
믿는다 할 때 그 육신은 영원치 못한 것이어서 언젠가는
멸망하게 마련이니 어찌 내가 영원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 육신도 실체가 아니다.
꿈 속에서 내가 여러 가지로 행을 할 때
그 꿈 속의 내가 실체가 아닌 것처럼
나의 육신도 알고 보면 실체가 아니다.
꿈 속의 허상과 다르지 않다.
육신이 나의 주인이라 한다면 이렇게 되어라, 저렇게 되어라,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저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하고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주인이라면 집이 헐어지는지, 고칠 곳이 어디인지,
어느 부위에 고장이 일어났는지 쯤은
소상히 알아 해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육신은 하나의 껍데기이다.
육신을 움직이는 그 무엇은 따로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 육신을
아주 실재적인 '나' 로 느끼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 '나' 라는 것은 포대자루에 불과하다.
여기저기 헐고 닳아서 쓰레기장으로 가게 될 때에
그동안 '내 것' 이라며 이것저것 주워 담은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육신이란 본래 공한 것이어서 한 철 살다가 어느 날
한 찰나에 구름 흩어지듯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을 '나' 라고 고집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육신이 '나' 라는 욕심 때문에 모든 일들이 어긋나고 있다.
'나' 라는 욕심만 없다면 보다 넓게 볼 수 있고 넓게 들을 수 있고
넓게 일할 수 있고 지혜의 샘물이 철철 넘쳐
아주 싱그럽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구름이 한데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다른 구름하고 모이듯이 인간도
언젠가는 사대로 흩어져 원점으로 돌아갔다가 어느 계기에 다시 모여
부모의 뼈와 살을 빌려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대가 흩어지는 것을 허망하다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이 도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수행자에게는 이 세상만사가 무상한 것을 아는 중에 오히려 도리를
알고자 함이 있으니 세상이 허망하지 않다.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다만 사대의 일시적인
화합이기에 인연 따라 모였다 인연 따라 흩어지는 것일 뿐으로
생멸을 반복하고 있다. 생멸하는 것은 참다운 실상이라 할 수가 없다.
영원히 불변하고 불생불멸하는 진실상이 아니라면 어느 것이든
한낱 가상에 불과하다.
고로 육신은 가화합이요, 환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를 모아 내 육신을 만든 그것이
바로 주인공의 신통묘용이다.
육신이란 주인공의 시자요 아들이다.
중생이 가화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참 나인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 이 가화합의 존재와 따로 있는가. 아니다.
그 주인공은 거짓 나와 떨어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짓 나의 근본이 되는 그 자체를 참 나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본래의 나, 참 나는 내 육신을 형성시켜 놓고 깊숙이 있으면서
삼천 대천 세계와 상응하며 진리로서 회전하고 있다.
그러면 참 나는 어디에 있는가?
팔에? 다리에? 가슴에? 머리에?
그 어디도 아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을 관찰해 보아도 내가 소재하는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어느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깊숙이 있으니 참으로 미묘한 그인 것이다.
그러나 소도 언덕이 있으니까 비비듯이
내가 있기에 상대가 있고
부처가 있고 모든 경계가 있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그 무엇이 있겠으며,
내가 없으면 어떻게 내가 나를 시자 부리듯 부리겠는가.
이 육신은 다만 주인공의 시자이니까
거기에 순응해서 따라갈 뿐이다.
육신은 사대가 뭉친 것이지만 육신이 있어야 불법을 알 수 있다.
육신이 없다면 더함도 덜함도 없으니 육신을 다만 허망하다 하여
그 모습을 버리면서까지 불법을 알려 한다면
극히 잘못된 생각이다.
만약 육신이 없다면 혼백만 있는 것이니 계발할 수도 없고
지혜를 넓힐 수도 없어 부처를 이룰 수조차 없다.
아들이 있음으로써 아비를 알게 되고
시자가 있음으로써 주인을 알게 되며
유위법, 무위법이 같이 움직이는 도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몸 떨어지고 나면 무엇을 보고 듣고, 부딪치고 생각하겠는가.
나무나 열매가 있음으로써 씨를 알고 뿌리를 알듯이
사대가 뭉친 인연이 있음으로서 육신이 비록
영원한 실체는 아닐지라도
한 생명, 한자리, 한마음 주인공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의 실상 (중생의 국토)
육신을 나라고 하지 말고 몸속의 중생들과 같이
한마음이 된 선장이 나인 줄 알라.
그 '나'라는 것도 공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없는 나,
개별적인 나가 아닌 포괄적인 나, 바로 주인공인 것이다.
자신의 몸일지라도 '나의 것'은 아니다. 공동체이다.
지금 이 지구 안에 별의별 짐승들이 많듯이
내 몸 속에도 별의별 생명체들이 그득하다.
그러기에 자기 몸이면서도 '나의 것' '내 몸' 이 아니라 공동체인 것이다.
중생들은 이 육신의 나를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심장, 간, 위와 같은 장기 하나하나에도 수억의 중생들이 있어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육신은 그대로 소우주의 꾸러미와 같아
오장 육부의 기능이라는 게 그대로 우주의 기능과 같다.
거기엔 천체 물리학, 지리학, 모든 과학과 철학이 다 들어 있다.
사람의 몸뚱이 하나에 수많은 중생들이 우글우글 공생하고 있으니
이 몸은 겉으로 보아 하나의 중생 같을지라도
실은 수많은 중생의 국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생들은 억겁을
거쳐 온 의식으로 뭉쳐서 몸을 집 삼아 돌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한 몸 깨달으면 육신 속의 수십억 중생이 함께
제도되며, 그 중생이 그대로 호법 신장도 되고 금강역사도 된다.
수억의 정자 중에 선택된 하나가 난자와 합쳐질 때에
나머지 5억 마리에 잠재해 있던 심성은 그 하나에 모두 포함된다.
그렇게 해서 육신의 구석구석 소임을 맡아 가지고 제각기 살면서
그 능력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니 참으로 묘용이 아닐 수 없다.
몸뚱이 속에 든 수십억의 생명들이 한데 합쳐 작용을 해주는 바람에
말하고 걸어다니고 '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생이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 몸 안에 또 사생이 있고
그 사생 속에 또 사생이 있으니 그 숫자를 이루 말하기 어렵다.
수십 수백억의 중생들이 있어 '나'라고 하는 그 육신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다니는데 그 움직이는 모습들이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마치 '육신의 나'라고 하는 것은
인형극의 꼭두각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숫자는 많아도 근본 의식은 같으니 하나라고도 할 수 있고
하나라고도 할 수 없는, 숫자 없는 숫자인 셈이다.
내 몸 속의 중생들은 우리가 지구 속에서 그렇게 살듯이 아마도
사대를 달처럼, 해처럼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또 몸 속의 생명들이 그렇게 운행하고 있기에
이 육신도 운행하고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지구를 내 몸뚱이로 비유한다면
우리가 지금 지구가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듯이
몸 속의 중생들도 여길 왔는지 저길 갔는지
모르고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주인공 자리를 알아야 중생들도 제도될 수 있는 것이다.
육신 안에 들어 있는 사생이 바로 공심 공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대로 보신이 되고, 무시하면 세균도 되고 해충도 된다.
가령 육신의 한 부분만 폐허가 되어도 그대로 죽게 되는데도
몸 속의 뭇 생명들, 각자 소임에 충실한 일꾼들을 무시하고
흔히들 자기가 산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회사 내에 사장 한 사람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수없는 생명체가 공생하고 있는 줄 안다면
어찌 '나'라고 세울 수 있겠는가.
내 몸에 십대 제자가 있다.
내 몸이 뭇 중생들의 주둔지이듯 현상계도 그와 같이
공체로서 공심 공용 공식 공생하고 있으니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아닌 게 없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상전이다.
먹고 싶은 것 대 줘야 하고 춥고 더운 것 가려 줘야 하고
가고 싶은 데로 데려다 줘야 하니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세포들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그 자식들이 상전 노릇은 다 하고
부모란 그저 윗사람이라는 꼬리표만 달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몸 속의 중생들이 병이 나면
나도 병이 나고 죽으면 나도 죽는다.
그러기에 어찌 내가 산다고 하고 내가 먹는다 하고
내가 잠잔다 할 것인가.
그 중생들이 바로 나와 둘이 아니라 내 육신은
공체로 공생하고 공식하고 공용하고 있는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내 몸을 이끌고 다니는 근본이 무엇인지,
그 근본의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나의 근본을 알면 내 육신을 제도하게 되는 뜻도,
내 육신을 이루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포의 마음까지도 알 수 있다.
이 육신도 마음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구보리라는 것은 자기의 근본을 깨닫고자 함이요,
하화중생이라는 것은 자기의 몸을 이루고 있는
수억의 중생을 제도함을 말한다.
그러나 본래 위와 아래가 둘이 아니기에
상구보리 하면 하화중생 하게 되는 것이요,
하화중생 하면 상구보리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겹겹으로 되어 있으면서 내장마다 수천억의 세포가 있고
세포 안에 다시 수없는 미생물이 있고, 장마다 수많은 세균이 살아 있으니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우주도 헤아릴 수 없는 별들로 이뤄지고
그 중 하나의 혹성인 지구에 또 수없이 많은 생명체가 우글거리고
그 중 하나인 인간의 육신 속이 또 그러하니
생명의 숫자는 그야말로 불가량이다.
그렇지만 움직이는 근본 하나만 깨닫는다면
그 근본은 일체의 모든 생물과 둘이 아니니
그대로 우주 온 법계의 작용을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실상(삼합-생명의 실상)
영원한 생명과 마음과 육신이
삼각으로 둥글게 돌아서 인간을 이룬다.
한 생명이 세상에 출현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합쳐진 때에
영원한 자기의 불씨가 같이 들어야 한다.
아무리 부모의 정혈이 합쳐진다 해도
영원한 생명의 불씨가 합해 들지 않는다면
자기가 이 세상에 출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한 생명의 탄생은
아버지의 뼈를 빌리고 어머니의 살을 빌려
거기에다 자기의 억겁을 거쳐 온 마음과 생명이
계합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람 하나 태어나자면 삼합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에 네가 나온 자리로 다시 들어가 보라고 하는 것이다.
나온 자리를 모르고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 몸과 마음내는 것과 마음내기 이전이 삼합이 되어 공존하기에
모두 한마음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삼합이 공존하니까 주인공이라 했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했다 해도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합일이 되지 않는다.
달리 보면 주인공이란,
삼합이 공체로서 공존 공용 공식하는 진면목이다.
주인공은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보이는 나는 안보이는 나의 생리적 도구이다.
주인공은 빛깔도 없고 쥘 수도 없으나
자기를 움직이게 하는 주장자이다.
영원한 생명과 생각을 낼 수 있는 분별, 그리고 움직이는 육신,
이것이 바로 법신이요 화신이니 삼위일체로 회전하면서
자기가 바로 선장이자 길잡이이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나의 무전자와 더불어 유전자,
유전자와 더불어 물질인 육신이 삼합으로 공존하면서
광대무변하기 이를 데 없는 줄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지금 살고 있는 이 몸뚱이, 생각, 의식들이
전부인 줄 알아 그냥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생명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 그 에너지, 마음의 별이라 할 수 있는
그로부터 우리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큰 별이 떨어졌구나.' 하듯이 이 마음의 별이 아니고는
태양도 형성시키지 못했을 것이고 자기도 형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소가 있고 마부가 있고 달구지가 있다. 달구지의 입장에서 보니까
자기를 끌고 다니는 소가 있다. 또 소만 있는 게 아니라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섰다가 갔다가 하는 것을 조정하는 마부, 나침반을 쥔 운전수가 있다.
고로 달구지는 움직이더라도 소에 의해 끌려다니니 움직인 사이가 없다.
소의 입장에서 보면 능력을 갖고 있으되
마부가 하자는 대로 능력을 내줄 뿐이다.
소는 잠재된 능력이고 마부는 현재 의식인 셈이다. 마부는 마음을 낼 뿐이다.
그런데 이 마부가 달구지와 마부를 자기라고 한다.
소가 있어 달구지를 끌고 다니는 줄은 모르고 있다. 50% 밖에 모르는 것이다.
현실세계는 소와 마부와 달구지가 삼합이 되어 돌아간다.
그걸 아는 게 현명한 마부이다.
마부의 입장에서는 달구지에 실린 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소의 능력도 알아야
고삐를 쥔 채 "이랴! 이랴!" "워! 워!" 하면서 달구지를 잘 몰 수 있다.
오다가다가 짐을 싣고 부리고 자재로이 할 수 있다.
고삐를 쥔 것은 '주인공이 다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말하고
'이랴 이랴' '워 워' 하는 것은 놓고 맡김을 뜻한다. 채찍은 주장자이다.
짐을 싣고 부리고 하는 것은 연방 돌아가며 생활하는 것과 같다.
달구지와 자기만을 전부인 줄 알았던 마부가 소와 둘이 아님을 알았을 때
소의 능력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부로 생겨났으면 마땅히 소를 부릴 줄 알아야 진정코 마부답다고 할 것이다.
소가 있고 마부가 있고 달구지가 있다. 삼합으로 돌아간다.
참 나는 만법의 근원이라
마치 임금이 있어 신하들이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듯이
참 나가 있음으로써 오관을 통해 움직이는 내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이는 나는 안보이는 나의 신하로서,
또는 시자로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이란 참 나의 시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거짓 나를 나로 알지 말고
참 나를 발견하라 하는 것이요,
모든 것을 참 나인 주인공에 일임하라 하는 것이다.
시자는 시자일 뿐이니 주인을 믿고 따르면 그 뿐,
주인을 제쳐 두고 제가 나서서
주인 행세를 하는 한에는
고통과 액난이 따르게 마련이다.
**둘이아닌 도리(현상계)
세상은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이다.
그 근본은 뿌리, 즉 주인공이요 부처의 당체이다.
그 뿌리로서 수많은 가지와 잎들이 나타난 것이 곧 현상계이다.
그러나 이것도 방편으로써 나누어 설명하는 말을 빌렸으니 그러할 뿐이지
사실은 하나라고 바로 알아야 한다.
각각의 잎을 생명체로 비유할 수 있지만
뿌리와 잎이 본래 따로따로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바다에 파도가 일어 물방울이 수없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라앉으면 다 바닷물 그대로이다.
이 경우에 물방울은 형상을 가진 중생이고 바다는 근본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튀어 오른 것은 중생의 태어남이고
스러지는 것은 중생이 몸을 벗고 근본으로 돌아간 것과 같다.
그와 같이 근본의 자리에서는 너와 나의 나눔이 없다.
네 조상 내 조상의 나눔이 없다.
생명의 근본은 그렇게 크고 넓으면서 하나이다.
바다처럼 잔잔한 물로 한자리 하고 있다가 때에 따라 작게도 크게도
나투면서, 물방울이 바람 따라 나타났다 스러지듯이
그런 이치로 들고 나며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전체 물질이 모두 지수화풍 사대에 의지한 것이니
우주 전체가 지수화풍의 집이다. 작은 찻잔 하나라도 사대가 아니면
이 세상에 출현할 수가 없다. 미생물도 그렇고, 나 자신도 그렇고,
허공에 꽉 찬 생명들도 그렇고, 저 우주의 별들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주의 모든 것이 사대로 연관지어 나 아닌 게 없다.
모두가 한마음인 것이다.
지수화풍이 우리 육신을 구성한 근본이다.
우리는 지수화풍을 가지고 살며 이것을 먹고 산다.
지수화풍의 근원이 있어서 일체의 물질적인 것들이 나왔다.
지수화풍은 생명체의 고향이다.
지수화풍이 바탕이 되어 있기에 육신통이 가능하고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을 충만히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지혜의 눈으로 본다면 어떤 체계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일체 만법이 다 보이지 않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쉼 없이 돌고 있는 게 우리들의 생활이기도 하다.
고로 틀 없는 틀을 볼 줄 알아야 하며
체계 없는 체계를 따를 줄 알아야 한다.
또 그것을 알았으면 행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한마음에 있다.
모두가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와 나의 몸뚱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나와 연관되어 있고 나 아닌 게 없다.
고로 사생이 둘 아니게 통신이 되고 안팎으로 법망이 쳐져 있으며
허공에도 길이 있고 우주 전체에 생명들이 꽉 찼다고 하는 것이다.
사대가 원천이기에 생명과 생명,
우주 전체는 공생 공용 공식 공체라고 할 수 있다.
사대가 원천이기에 또한 유위법 무위법이 같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둘이 아니요 마음이 둘이 아니며
모습조차 둘이 아닌 까닭에 그토록 많아도 걸림 없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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