넝쿨째 굴러온 호박 / 이금영
이상기온으로 인해 농산물값이 들쑥날쑥하다. 날씨 탓인지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 오늘은 별로 살만한 물건이 없을 듯해서 그냥 눈요기하고 새벽바람이나 쏘일까 해서 남부시장 새벽 장에 나왔다. 그런데 새벽 장에 나와보면 진한 삶의 향기가 느껴진다. 새벽부터 오가는 인파 속에 흥정하는 소리가 시끌벅적하다. 농 수산물이 그때그때 달라 계절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장마가 끝나고 쾌청한 날씨가 이어졌으니 호박이며 가지가 풍성하게 출하될 것이란 믿음도 있다. 여름철 채소 중에 값이 만만한 것이 가지와 호박이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가격이 내리지 않았다. 염치없게 아침부터 물어볼 수 없어서 옆 사람이 흥정하는 걸 들어보니 예쁘게 생긴 애호박 한 개에 이 천원이다. 생산자의 노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쳤다. 다른 거 두어가지 사 들고 오는데 자꾸만 애호박이 눈에 아른거렸다.
저녁 무렵에 “딩동”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13층 여자다. 불쑥 애호박을 내민다. “요즘 호박이 잘 열려요. 농사지은 거 하나 드셔보세요.” “아니 이렇게 이쁜 애호박을 주시다니요. 그렇지 않아도 남부시장에서 사려다 말았는데 잘 먹겠습니다. 호호.” 나는 반색을 하며 호박을 받았다. 낼 아침에 당장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살짝 쪄서 새우젓과 깨소금에 묻혀 먹어야지. 침이 꼴깍 넘어간다. 다음 날 아침에 호박 나물을 하여 아침상을 차렸다. 들큼한 호박과 깨소금 냄새가 어우러진 집안 공기는 미각을 자극해 입맛을 다시게 했다. 이틀이 지난 저녁때 “딩동” 또 그 여자다. 손에 애호박 두덩이 속음 배추를 묵직하게 들고 서 있다. “ 아니 또 어떻게 이렇게 많이 주십니까?” “내가 호박을 자꾸 주고 싶어져요. 호박 받고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 첨 봤거든요. 맛있게 해서 드세요.” “지난번에도 주신 호박, 호박전에 나물에 진짜 맛있게 먹었어요.” “호박 나물은 새우젓에 묻혀야 제맛이지요” 나는 호박을 받아들고 거실로 들어오면서 “어어 큰일 났네. 13층에서 호박을 또 주네요. 나는 무엇으로 답례를 하지.” 11월 11은 가래떡 데이다. 오는 정 가는 정으로 약간의 가래떡을 들고 올라갔다. “아휴 앉은자리 풀도 안 나겠네.”우리네 입맛은 서로가 비슷한가 보다. 이웃에서 작은 거 하나라도 나눠 줄 때 반갑고 고마운 표정은 주는 사람에 대한 예의이지 싶다. 애호박 하나면 몇 끼를 해먹을 수 있다. 나도 잘 생긴 놈 하나 골라 가까이 지내는 지인에게 나눌 수 있었다. 사나흘 지난 뒤 그 여자가 또 벨을 누른다. 이번에는 제법 큰 덩이다. 그렇다고 늙은 호박도 아니다. 어디 숨어있다가 이제 눈에 띈 모양이다. 마음에 준비도 없이 넙죽 받아들었다. 이번에는 얼큰하게 풋고추를 넣고 된장국을 끓여야지. 덩치가 제법 있는 풋 호박이라 쓰임이 더 많았다. 이 호박을 깍두기로 썰어 카레를 만들어야지. 머릿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본다. 큰놈이 들어왔으니 작은놈 두 개는 호박고지로 해서 채반에 펼치니 시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반달이랑 둥근달이 채반에 가득 내려앉는다. 말려둔 호박고지로 함박눈 사뿐히 내리는 날, 구수한 호박고지 들깨탕을 끓이고 붉은 팥 넣은 찰밥을 지어 그립던 임과 마주 앉아 조촐한 저녁을 나누리라.
13층과 우리는 같은 라인에 살면서 서로 마주치면 인사하며 지내는 정도다.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일까. 아니면 동갑내기일까. 이 기회에 터놓고 친구 하자고 할까. 이웃사촌이 먼데 사는 친지보다 가깝다는 속담도 있지 않든가. 내가 심고 가꾼 호박도 네댓 덩이 따먹기가 어려운데 말이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서 호박 넝쿨을 많이 보아왔다. 호박씨를 심으면 떡잎이 나오고 사나흘이면 잎이 나오면서 커진다. 호박 넝쿨이 자랄 때는 수분이 많아야 한다. 호박 구덩이에 쌀뜨물을 마르지 않게 자주 주면 에너지가 풍부해진다. 그리 기다리지 않아도 넝쿨을 뻗으며 노란색 호박꽃이 아롱아롱 핀다. 호박꽃은 암수가 따로 있다. 암꽃은 나올 때부터 열매를 달고 나온다. 이때 호박벌들이 윙윙 날아와 암꽃 수꽃의 수분을 매개체로 수정을 한다. 벌들의 수고가 꼭 필요한 때이다. 호박꽃과 벌들의 상생 관계다. 벌이 호박꽃으로 깊이 들어가 한참을 속삭이다 나온다. 그 내용은 궁금하지만, 호박벌이 호박꽃 방에서 놀다간 사연을 호박꽃은 비밀을 지키려 입을 꼭 다문다. 작은 열매가 자라는 모습이 앙증스럽다.
호박 한 알이 둥글게 자라기까지 햇볕과 이슬이 내려 머물고, 달빛을 받아서 그리 매끄러운가. 천둥과 비바람을 막아주는 까슬까슬한 호박잎은 넝쿨손을 내밀어 보듬어주는 보살핌이 필요하리라. 장마철이 되면 호박 넝쿨이 하룻밤 사이 15센티도 자라지만 햇볕의 광합성이 부족 하면 어린 호박은 맥없이 툭 떨어져 낙과된다. 그리되면 장마철 애호박값이 철없이 치솟는다. 자연이란 때때로 허망해 보일 때도 있다. 시골에서는 시장도 멀고 해서 하루는 호박 된장국 하루는 감자 된장국 애호박 부침 이렇게 많이 먹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노랗게 늙은 호박이 인기가 좋다. 늙은 호박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주황색으로 골이진 호박 두어 덩이 구해서 현관문 앞에 진열해 놓는다. 누런 호박을 바라보며 가을을 보낸다. 2023. 10. 26.
첫댓글 이금영 선생님께서 메일로 보내주신 글 올립니다
교수님1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스스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을 읽다 보니 예전 채소밭 가꾸던 기억이 나네요.
남편이 근무하던 학교에 사택과 텃밭이 있어서 온갖 채소를 다 가꾸었지요.
특히 호박은 다 먹을 수 없어 노인당에 가져다 주면 주민들이 나누어 먹곤 했습니다.
내가 가꾼 호박밭도 아닌데,
올 가을 이웃 덕분에 애호박 푸지게 먹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겨울 호박죽 끓여 주던 엄마 생각이 납니다.
노란 호박 푹 삶어서 곱게 이깬후 붉은 팥을 몽땅 넣고 끊인 죽!
참 많이 먹었더랬는데 이젠 구경하지도 못하네요. 새삼 입맛 다셔집니다.
세실님 엄마만큼은 아니어도 제가 호박죽 끊이는것은 일가견 합니다
눈 내리는 날 호박죽 파티 할까여 ~~^^
@김재희 호박죽 지가 끊일테니 구경오세여!
붉은 팥넣고 새알넣고, 날잡아 호박죽 파티 합시다.
오실분 손 드세요 ~~^-^
@루시 말씀만 들어도 기뻐요
고맙습니다
@루시
손 들었어요!
@루시 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