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1
이태종 요한 신부 / 중국 차쿠사적지
땅덩이가 커서 그렇다. 중국인들에게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길은 없었을 거다. 이런 생활습관이 몸에 밴 까닭인가? 요즘같이 비행기에 고속열차가 등장해도 당일 치기로 나들이하는 중국 신부들을 보지 못했다. 누구를 방문하면 사나흘은 같이 먹고 자고 해야지 서로 편해지는 모습들이다. 우리처럼 빨리빨리, 오전에 왔다가 점심만 먹고 오후에 돌아간다고 한다면 집주인은 손님 대접을 잘못했다고 자책할 것이다.
만주 사람들에게는 길을 떠날 때 상차교자上車餃子라고 만두를 먹는 풍습이 있다. 집에 돌아와서는 회가면 조回家面條 라고 국수를 먹는다. 길 위에서는 가족 사랑하는 마음만 만두처럼 포옥 싸고 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국수 면발처럼 확 풀어져서 길고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희원이다. 어쨌든 동북삼성의 주식이 쌀밥, 만두, 국수 순이고 보면 누가 지어냈는지 잘도 지어냈다.
나는 중국과 한국에 걸쳐 집이 세 개나 된다. 대련 차쿠에 있는 사제관과 심양의 신학교에 내방이 있다. 그리고 청주교구청에도 아예 트렁크를 던져놓고 다니는 방이 있다. 대개 보름에 한 번씩 이 세 군데를 돌아가며 사는데 거리가 최소 300Km이다. 나만 빼놓고는 완전 딴 세계들이다보니 아침에 깨어 먼저 하는 일이 여기가 어딘가를 체크하는 일이다.
집이 많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집이 여러 개란 소리는 진짜 내 집은 한 개도 없다는 소리일 테니까. 이래저래 뜨내기 신세를 면할 수 없는 여행자로서는 문 열어주는 사람의 “열렬히 환영해!”보다 “돌아왔네!”라고하는 인사말이 듣기 좋다. 집이 세 개나 되다 보니 자연히 길 위에서 보낼 때가많다. 처음, 길이란 것은 나에게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동하는 귀찮은 연결에 불과했다. 길에서 만나는 이들에게도 건성건성, 정작 집에 도착해서나 표정관리를 잘 하자고 다독였다.
그러나 점점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공간적인 길을 위해 시간적인 길을 이리 허비해도 되겠는가
싶어졌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들이 주머니 속으로 묵주를 돌리는 일, 휴대폰 글 쓰기란에 끄적거리는 일, 지나
쳐온 곳을 정리해두거나 가는 곳을 계획하는 일이다. 막상 지나놓고 보면 어디까지가 길이고 어디부터가 집이었는지 구분이 잘 안 가기도 한다. 성격상 길에선 눈을 부라리다가 집에 도착했다고 없던 웃음을 바로 내놓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러하다. 거기다 또 며칠 후면 짐을 꾸려 딴 집으로 가야만 하니, 집이 길 같고 길이 집같다. 비정상이 되어가는 걸까? 더 웃기는 일은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 집이 여기 집 같은 착각 현상이다. 특히 백가점 기슭의 소나무 숲에 있을 적에는 정말 진천 배티의 소나무 숲에 들어 앉아있는 착각이 든다. 산수도 비스름하고 정취는 똑 닮았다. 그러다가 차쿠의 거리에 들어 쏼라쏼라 하는 소리에야 여가 중국이었구나 하며 실소하는 것이다. 이러다 정말 중국에서 한국 사람 찾고 한국에서 중국 사람 불러대지 않을까 모르겠다.
근데, 뭐 또 그러면 어떤가도 싶기도 하다. 왜냐면 나중 나중에, 한 생을 다 오른 그 등성이에서 지나온 시간을 굽어볼 때, 과연 어디까지가 길이고 어디부터가 집이었나를 구분하는 일이 뭔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세상에 깃들이던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마련될 거처(장례예식서 인용)로 가는 우리의 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하늘에서 보면 길도 집도 모두 하나의 작은 점 밖에 되지 않는가 말이다.
좌우지간 분명히 하는 것은 길은 길이요 집은 집이란거다.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곳이 집이다. 그런데 무슨 조화 속이랴? 어느 낯선 길의 모르는 사람에게서도 오래된 느낌을 얻어 만난다면! 그 따스한 느낌을 헤집어보면 거기 나 자신보다 낯익은 분의 웃는 얼굴이요, 속삭임도 가만가만 계신다. 하여, 길 위에서도 외롭지 않다.
그리고 보라! 기대도 하시라. 길 위에서는 만 가지 일이 다 일어나느니!
첫댓글 길위의 시간, 시간의 길, 그냥 길이란 단어가 주는 철학적 명제가 가슴속에 쑥 들어와 앉을 때는
뻥 뚫린 길보다는, 고비사막의 아득함이 가물가물 떠오릅니다. <길 위에서> 미 잭 케루악의 소설에 심취했던 적도....
잘 읽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