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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도
잊혀져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자꾸만 자꾸만 저를 반성하게 됩니다. 저의 자만했었던 마음, 교만했던 마음을 떠올리며, 이제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그 방황들, 그 숱한 위기의 순간들을 겪으면서 결국, 진실한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 그것은 진심일 것이라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들입니다.
잊혀져 가는 눈물에 대해서 자꾸만 자꾸만
전창수 지음
01. 프롤로그·나는 네 잎 클로버를 손에 쥐고 있었다
02. 비빔밥
03. 주변인의 삶
04. 나는 쓰네
05. 인사는 지금부터다
06. 가을 땡볕 아래서
07. 아이스 에이지 (ICE AGE)
08. 시궁쥐
09. 햄스터 가족
10. 커닝 (Cunning)
11. 세상은 넓고 크다
12. 대박뿐인 인생이
13. 영화 보는 소년
14. 절망의 꽃·1
15. 절망의 꽃·2
16. 거짓증언·1
17. 거짓증언·2
18. 거짓증언·3
19. 거짓증언·4
20. 거짓증언·5
21. 거짓증언·6
22. 거짓증언·7
23. 나는 네 잎 클로버를 손에 쥐고 있었다
24. 나는 제대로 된 시간표를 무척 원했다
25. 에필로그·나는 잊혀져 가는 눈물에 대해서 썼다
프롤로그·나는 네 잎 클로버를 손에 쥐고 있었다
세 잎 클로버를 손에 쥐고서 하늘을 바라본다 푸른 세상이 야위어만 구름 위에서 두둥실 두리둥실 떠다니고 주머니엔 없는 동전 한 닢 새의 꿈을 꾸면서 노을 저편에 함박웃음을 짓고 걸려 있다
손바닥을 펴 흘린 한숨 스러져가는 지평선을 바라보면 이어지는 엄청난 고요 어둠은 떠나지도 않았는데 햇살은 수평 아래 내리쪼이고
꿈을 꾼다, 잠이 들면 두 손을 불끈 쥐고 떠올려지는 분노 분노들 이제 곧 철거되어야 할 쌍팔 년도의 외국인을 위한 미화정책들에서 희생된 철거민들이 봉기한다 깡패들과의 맞짱 대결에서 놀랍게도 대승리를 거두는 그들.
비 빔 밥
배 아픈 건 배 고픈 거겠지?
웬 시대착오(時代錯誤)적인 발상이냐고 네가.
배 고파 아픈 사람들
그 어쩔 수 없는 비참함
네가 알겠어? 넌 언제나 스테이크.
시대를 잘못 타
깨끗한 접시에 담겨져
빡빡하게 닦아줄 필요 없는
너의 그 발상, 시대과오(時代過誤)적인?
정신없는 시대(時代)
비벼줄 시간 아까워
눈치만 보려 하는 네가.
기회주의(機會主義), 적(的)인. 무척.
넌 이제 비빔밥, 온갖.
찌꺼기들만 담은.
빡빡하게 비벼야 제 맛을 내는
주변인의 삶
나는 동정에서 동정으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또 주변에서 주변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는 세상 윤회하지 않는
동심으로 돌아간 연못가에서 가득한 웃음으로
슬픈 눈을 가진 한 아이가 뛰어놀고
나는 늘 그의 웃음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내가 없는 건지, 그가 아닌 건지
과거는 한바탕 티브이(TV)에서 막 오르는 쇼처럼
사뭇 진지한 척 나를 소개하지만
속살 없는 게 다리, 살 없는 뼈다귀.
늘 뒤쳐져만 있던 삶이 다가와 말을 건다
나는 동정에서 사랑으로 사랑에서 다시
동정으로 주변으로 결코
주연일 수 없는 세상, 저 멀리.
또렷하게 뜬 눈이 늦잠 자던 나를 깨운다
나는 쓰네
<1> 위 운동이 부족해요
저 남자는 끊임없이 트림을 내뱉습니다. 꺼억, 꺼억, 꺼억꺼억꺼억…. 듣기 거북합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나이는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고, 안경이 꽤나 두껍군요. 키는 큰데, 좀 많이 말랐군요 심각한 수준이네요 어머나, 눈이 반쯤 감겨서 마치 그 옛날 길동이의 꺼벙이를 연상시키고 있군요 놀랍습니다 멈추지 않고 꺼억꺼억꺼억…… 까치였나? 까악까악이 아닌 꺼억꺼억. 으- 이제는 더 심해지네요 꺼어어어억! 놀라운 트름일 따름입니다 대체, 무슨 병이 있길래?
<2> 나는 총각이거든요
저 여자는 나를 끊임없이 흘려 보는구나 왜지? 내가 뭐 잘못했나? 아- 나의 꺼억 소리 때문인가 보군. 지겹다. 이놈의 트림. 멈추길 바래- 그러나, 한번 나빠진 위속의 운동부족은 멈추지 않는다 어서 가자 어서 가자 -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누군가를 위해서는 한 번도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차디찬 바람.
<3> 만남은 늘 어긋난
그들은 말이 없다 남자가 꺼억 소리를 멈추자 여자는 더 이상 남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남자가 버스의 벨을 누르자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승카드기에 삐익- 소리를 내며 자신의 카드를 댄다 남자는 그녀의 뒤에 서 있다 버스가 멈추자 여자는 내려서 뒤에 오는 버스를 향해 힘차게 내달린다 남자는 그냥 터벅터벅 힘없이 내리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버스에서 내린 그래서 다른 버스를 타고 가버린 그녀와 같은 방향이다 그와 그녀는 사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동네친구란 소문이 무성하다 나는 그 말을 그 남자의 동네친구에게서 들었다 사실은 그 남자는 나일지도 모르고 그녀는 내 애인일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말했다
인사는 지금부터다
인사는 지금부터다 환상이다 환상이다 버릇처럼 깨어나는 아침 차량들 차곡차곡 모여지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도 아침인사를 한다 밤새 첫눈처럼 내린 낙엽을 밟고 지나가면 버스를 기다리는 두 여자의 까르륵 도로 가득 메우고 칠보 가는 55번 시내버스 견인차에 실려 가고 있다 식수통 가득 담은 아주머니의 발걸음은 스르르- 미끄러짐이 자연스러운 날씨다 터미널 가는 300번 좌석버스의 불규칙한 기다림.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란 듯, 입김을 호호 불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 있다 만원인 버스에 올라서면 빼곡히 들어차 더 들어갈 틈도 없는 세상이 있다. 불가항력의 승차거부. 시간은 더불어 승차거부를 한다 차량들 서서히 빠지고 있습니다, 이어폰에서 이어지는 신호음. 삐이이- 사람들 한결같이 빠져나간 정거장, 버스는 조금 늦게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가을 땡볕 아래서
할아버지 멍하니 하늘 보고 계신다.
지나간 사람들을 보면서 지나간 사람들을
추억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가을 땡볕 아래서
할아버지 졸고 계신다
꿈을 꾸면서 며느리랑 손자랑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계시나 본데.
할아버지 갑자기
눈물은 왜 글썽거리시는지
가을 땡볕 아래서
꼬마애들 소꿉장난 하고 계신다,
여보당신 하면서 재미있는 장난을 치시나 본데
할아버지 연신 갸우뚱하며 쳐다보시다
문득 얹어지는 입가의 미소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이
자꾸만 햇살을 가려내신다
아이스 에이지(ICE AGE)
얼음이 쩌어억- 갈라지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녹여진 마음. 도토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람쥐 스크랫의 투쟁은 역사를 뛰어넘어 지금도 이어진다 <다람쥐를 보호합시다> 심심풀이로 도토리를 주워가는 사람들. … 심심풀이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늘보 시드와 맘모스 매니에게 우연히 맡겨진 임무. 아기 로산을 인간에게 데려갈 것. 호랑이 디에고에게서 아기를 보호할 것. 여행은 위험천만하다. 얼음 땡, 시대를 녹이기 위한 매니의 노력. 디에고의 항복은 자연스럽다. …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즐길 줄 아는 그들이 곡예를 한다. 얼음만이 가득한 세상, 파라다이스를 즐기며 먹을 것 하나 없는 이 세상에 따스한 온기 하나로 빙하를 녹이고 있다, 로산! 로산! 아기가 인간에게 구출된다. 아기가 멀어진다, 세상이 멀어진다. 아득하다. 빙하의 시대가 끝이 난다. 그들도 사라진다 지구의 온난화가 시작된다 …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간의 생명을 구한 강아지가 … 도토리가 거리 곳곳마다 뒹굴고 있다
시궁쥐
만신 창이된 시궁쥐*가 병균을 매개로 활개친다. 몸은 크며 귀는 두껍고 짧으며 正中線(정중선)에서는 긴 털이 密生(밀생). 지하철 곳곳에서 뿜어낸 독기가 전류를 타고 넘쳐흐른다.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질척질척한 열차 안, 속에서 내뿜는 열기는 깜깜 무소식이다. 시궁쥐도 무소식이다. 희소식이 무소식. 무소식이 悲報(비보), 悲報(비보). 한 자락 희망을 안고 시궁쥐는 진창*에 빠져 삶의 아우라를 붙잡고 허우적댄다. 얇은 실눈으로 주시하던 이 세상 어딘가에 빨간 색의 불이 번져 가고 진창이나 시궁창이나. 타오를세라 삶의 헛발을 재빨리 닫고 내딛는 저 생명력. 희망의 시작, 삶은 지나치던 시궁창이다. 허우적대던 시궁창이다. 불길 뚫고 내딛는 저 시궁쥐, 날카로운 눈빛 가득 한 더미의 슬픔을 뱉고 시궁창으로 행진 중이다.
*aura : 첨단방전에 의해 일어나는 기류
*시궁창 :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질척질척한 곳
*시궁쥐 : 쥐과의 동물. 인가 부근의 시궁창에 삶. 몸은 크며 귀는 두껍고 짧으며 정중선(正中線)에서는 검고 긴 털이 밀생(密生)함. 페스트 병균을 매개함.
*진창 : 땅이 곤죽같이 진 곳
햄스터 가족
1번 햄스터 : 나는 그놈이 싫다. 그놈은 나의 놀이기구를 빼앗아 혼자 가지고 논다. 나는 어쩌다가 나의 두 앞발로 그놈의 배를 걷어차 보지만, 그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놈은 보란 듯 나를 깔아 뭉게고는 뭐든지 혼자서 독차지한다.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씨도 혼자 다 먹고…
2번 햄스터 : 요놈은 틈만 나면 도망갈라 그런다 지 둥지에선 매일 고양이에게 쫓기면서도 낯선 냄새 무서워 나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는다 지 에미도 몰라보는 놈이라니, 며칠 간 외출을 시켰던 건 우리 주인의 크나큰 실수였다
3번 인간 : 나는 본다. 저들의 세계를. 그러나 단념하지 않는다. 저들의 세계는 낯설지만 낯익고,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고 그 다가설 수 없음에 절망하지만, 나는 그들을 키운다 사각의 절제된 방 안에서 사각의 절제되지 않은 햄스터, 우리 안에서…
커닝(Cunning)
둥글게 형광등을 싸고 있는 세상, 희미하게 보이는 나와 의자와 침대와 그리고 커닝(Cunning) 없는 세상. 맥주박스를 힘겹게 옮기는 트럭아저씨, 뭐가 불만인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면서 남자친구를 구박하는 여인, 내일을 향해 힘차게 뛰어노는 아이들, 뒷동산 머언 산, 그리고 강이 흐르는 앞마당. 적적하게 담배를 피워올리며 거리를 내다보는 어르신들. 자리를 옮기면, 누군가 한마디 한다. 의자에 앉아서 궁상을 떨고 있는 또 한 명이 있다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위치. 밤이 되면, 사라지는 모드. 세상은 둥근데, 정치를 하는 어르신들의 한마디. 어디 한번 잘 살아 봅세!
아무래도, 한국에선 못 살겠어요, 교통이 너무 안 좋아서요. 아이구, 서울 거리는 왜 이리 복잡하다냐? 여보게, 여기 어딘지 아슈? 내 아들 놈 집인데. 할아버지, 저도, 여, 여기 처음인데요? … 막무가내로 내민 쪽지엔 <충북 청주시… : 교통이 좀 복잡하니까 중심을 똑바로 잡고 오세요> 어, 어라. 할아버지. 터미널로 다시 가세요. 잘못 오셨어요.
우리 당을 찍어주세요! 다 함께 잘 살아 봅시다! 저 양반들, 뭐야? 에잇, 저 **같은 새끼들. 할아버지, 말씀이 좀… 뭐, 내 말이 어때서? 저런 놈들은 우리 나라에서 사라져야 해. 에잇, 퇴퇴퇴! 프랑스로 가고 싶어요. 세계일주하는 것이 저의 꿈이지요. 그래, 그래, 자네는 좋은 꿈을 지녔구만. 부디, 성공하게나. 아이구, 터미널로 가려면 어찌 가야하남? 여기서 지하철 2호선을 타시고…
둥글게 세상은 돌고 돈다. 베개를 꾸욱 안고 잔뜩 쪼그라진 잠이 든다. 아침이 들면 밤새 가시지 않은 피로와 맞선 악몽, 커닝(Cunning)없는 사회가 처량하다
세상은 넓고 크다
그녀는 어린 시절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주 조그만 반지를 기억해낸다 그것은 순금으로 된 실 반지였다 왜 하필이면 실 반지였을까 그녀는 거울에 그녀의 모습을 비추어본다, 아무리 봐도 그녀의 머리는 너무 크다 가냘픈 허리 그보다 더 작은 실 반지처럼 뼈만 앙상하고 섹시한 다리 그럼에도 그녀의 머리는 너무 커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세월이란 것은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가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리는 점점 작아져만 간다 그녀는 그녀의 머리가 너무 무거워 머릿속에 든 짐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가 뼈만 앙상한 섹시한 머리가 되기에는 그녀의 머리에 든 짐이 너무 많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그녀의 머리에 짐을 실기 시작했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머리는 기하학적으로 늘어만 갔다 아마도 너무 많은 세월이 그녀로부터 역행한 듯하다.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제 머리가 무거워 보이나요? 아니요. 너무 커 보이는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작아 보이죠? 글쎄요. 그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그녀는 거울을 본다. 그녀는 이제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는 남자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매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정성스레 벗듯이 실반지를 벗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벗기 시작한다.
대박뿐인 인생이
로또에 관한 이야기라고, 오류하지 마세요 죽음에 관한 이야기거던요 아니요 문법이 틀렸어요 틀리는 순간 그것은 아! 바로 옆이 낭떠러지군요 그러나 그 밑은 아주 낮아요 툭 빠지면 또, 아니아니 더러운 이물질이 올라와요 음 - 냄새 좋군요 -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랍니다 대박 터져 죽은 심장의 시체들 즐비해요 마구마구 닥치는 대로 그 거대한 악마는 아니아니 그 거대한 천사는 죽음을 집어 삼켰죠 사랑이란 허울 좋은 과시 앞에서 말이에요
말이죠 아- 로또에 관한 이야기라고 제발, 오류 좀 써주세요 문법이 맞지 않는다고 주제가 없는 인생이라고 나무라지 말아요 대박 터지는 인생 한 번의 큰 기쁨으로 심장이 터져 죽은 사람들은 그저 행복할 뿐, 뿐이에요
영화 보는 소년
“아저씨, 추워요. 라이터 하나만 사 주세요.” 라이터 하나를 사고 나는 게임에 접속한다‘접속하시겠습니까?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 당신의 목숨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소녀를 구하기 위해 PC방에선 연일 목숨을 걸고 사람들이 접속 중이다‘할머니가 게임을 알아요?’신문에는 게임 속 영웅처럼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 매니아들이 이 세상에서 떼구르르 떨어져 나간다‘병원으로 가시면 소녀를 구할 확률은 0%입니다’영화를 보고, 나는 버스를 탄다. 600원을 적선하고 남은 돈은 400원. 주머니 속에서 100원을 꺼내 창밖으로 내동댕이친다 남은 돈은 300원. 바람이 휭하니 들어와 창이 절로 닫힌다
남은 돈으로 뭐할까?
적선.
한 푼만 적셔 달라굽쇼?
사오정 같으니.
지금은 겨울이 아니라 가을, 애써 상기시키듯 낙엽이 뒹군다 여기가 어디지?. 가을, 아니. 겨울. 여기가 어디냐구?. 겨울, 아니지. 가을. 사오정 같으니.여기가 어디냐니까?. 대체 몇 정거장을 더 지나쳐 온 거야?. 아직 가을은 지나지 않았어, 추워졌을 뿐이지. 젠장, 묻는 게 아닌데. 영화는 재밌었어?. 여기가 어디냐니까?. 병신. 뭘 봤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대체, 여기가 어디냐구?. 네가 오늘 본 건 라이터 파는 소녀가 아니잖아, 왜 아직도 가을이냐구 묻는 거야?, 가을 맞다니까. 정말 너하고는 말이 안 통해. 병신, 지하고도 말이 안 통하면 누구랑 말을 하겠다는 거야?. 네온사인 간판이 빽빽이 들어찬 어느 정거장, 버스를 내려 터벅터벅 걷는다.
남은 돈으로 뭐할까?.
적선.
병신, 미쳤어? 300원 남았는데.
응, 너 미친 거 맞아, 내가 미쳤거든.
제기랄.
나는 100원짜리를 하나씩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첫번째 100원은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 위의 어느 차에 정확히 명중했다. 워낙에 씽씽 달리던 차라 미처 멈추지 못해,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두번째 100원은 지나가던 꼬마애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으라고 쥐어주었다. 요즘에 1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어딨냐고 투덜대는 아이 덕에 나는 18세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100미터 달리기를 했다. 세 번쨰 100원은 슬쩍 집어서 바지주머니 옆으로 흘러 뜨렸다. 아주 착한 어떤 아저씨가 동전을 주워서 나한테 건네주려고 해서, 나는 열심히 뛰었다. 정말 열심히 뛰었다. 아저씨도 열심히 쫓아왔다. 나는 아저씨 가져요, 라고 소리쳤지만. 아저씨는 막무가내였다. 요즘 100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아냐며, 나를 잡으려 했다. 숨을 헐떡이며
여관방에 서 있다. 부끄러워 그랬나 보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도 쳐다보지 않았다. 숨을 헐떡였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이유 없는 세상에 살고 있나 보다. 그래서 이유가 필요한 것인가 보다. 섹스에 이유가 있다면 본능일 뿐이다. 그래서 소녀는 라이터가 필요했었나? 그래서, 소녀를 얼어 죽여야 했나?
정신 차려, 여기가 지네 집인 것도 몰라?.
야, 너 누구야?, 누군데 자꾸 말을 시켜?.
내가 너지 누구야?, 지금까지 얘기해놓고 기억도 못해?.
주머니 속이 허전하다
절망의 꽃 ․ 1
- REPEAT
R - 희망을 읊으며 절망하는 것
E - 절망하는 데에 다시 절망하는 것
P - 절망을 희망으로 옮겨 놓는 것
E - 옮겨놓은 절망에 희망을 부여하는 것
A - 부여한 희망에 다시 희망을 부풀리는 것
T - 부풀린 희망에 다시 절망하는 것
(그러므로, REPEAT는 REPEAT인 것)
(그러므로, 반복되는 것은 다시 반복되는 것)
(그러므로, REPEAT는 반복되는 것)
(그러므로, 반복되는 것은 REPEAT인 것)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
절망의 꽃 ․ 2
- 자만(自慢)에 대하여
컴퓨터 조각의 불러오기, 디스켓을
A:
B:
에 꽂고
디스켓 한 조각을 야금야금 먹으며
아, 詩
를 쓰다
C:
무한대의 용량,
기억된 걸 모두 잊어버리다
야금야금 갈아먹는 C:
에
아, 詩
가 있었다
디스켓 한조각을 야금야금 먹는
A:
B:
그리고
C:
아, 詩
를 썼다
거짓증언․1
- 반항 (反抗)
1
나 이제 꿈
꾸지 않으려 한다
- 수도 없이 상처받은 사람들이 대인기피증 혹은 대인공포증에 걸릴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폭넓은 이해심을 지녔을 것이라고 나는 한번 생각해 본다 때로 상처 없이 병에 걸린 사람들 자기 안에 갇혀 자기만의 슬픔이 최고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문득
역겨워진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런 생각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내가 있다
문득, 그가 역겹다
흉터 하나 없는 고운 얼굴이다
2
햇살이 언제나
따스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 따가운 손 위에 내 손을 얹었을 때 때로는 차가운 손이 따가운 손을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더욱더 큰 상처
차가운 마음으로 치료할 수 있으리라
(상상(想像) : 원형(圓形)의 탁자에 1,2,3,4 가 놓여있다
눈물 흘리는 1번 앞에 2번
차가운 눈길로 3번 쏘아보고 웃음 머금은 3번
4번의 차가운 손잡고 4번의 다른 손
1번의 눈물을 훔친다)
이제 더 이상
손이 차가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3
도망가자
이 바쁜 한숨 속에서
울렁이다 토해내는
오염된 땅
이제 그만 벗어나자
- 고개 푹 숙이고 땅만 보며 걷는다 기운 없어 보이고 싶지 않지만 고개 들고 싶지 않다 세상을 바라보는 게 그저 부끄러워 고개 푹 숙이고 땅만 보며 걷는다
나는 왜 오염된 땅이라고 하면서
오염된 땅만 바라보는 것일까
그게 다시 부끄러워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씨다
4
답답한 가슴 눌러앉고 하늘 바라보면
고요한 세상은 숨 막힐 지경이다
- 포용력을 지닌다는 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한번 생각해 본다 그러므로 노인은 공경하고 봐야한다 이것이 신세대의 약점이라면 약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 포용력은 사람을 지치게도 하지만 그런 포용력이 없다면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내 생각을 확실히 알 수 없다
확신할 수 있다면)
이제 더 이상
이따위 시는 쓰지 않으리라
똑바로 서려 해도
결코 설 수 없는
오뚝이는 되지 않으련다
증언대에 서서
거짓말하는
그런 옹졸한 인간은
되지 않으련다
나 이제 꿈
꾸지 않으련다
거짓증언․2
- 주행중(走行中)
1
저녁 5시 안성에서 수원으로 가는
좌석 없는 직행버스 한켠에 서면
졸음과 매스꺼움 한꺼번에 몰려들어
고속도로 4차선
보았다 싶으면 곧장
시간의 눈 속으로 사라지는
하얀 점선들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점선 속에선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순간으로 사라졌을까
2
고속 주행하는 차들을 생각 없이 바라보면
내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런 것들로
슬퍼할 때가 있다 의식 없는 것들을
모조리 물리칠 수는 없는 걸까
의문에 쌓일 때가 있다
멈추고 싶다
3
오늘도 무사히 다녀오세요
택시 앞면 유리창, 혹은
뒷면 유리창
파란색 글자로 새겨진 문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문을 외고 있었던 걸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음주운전 절대 금물
자정 넘은 시각 밤을 물리치지 못한 자들
어둠의 거리 무제한 속도의 질주
면허정지, 면허취소, 음주운전 무더기 적발
한사코 나는 술을 안마셨다고
구속영장 첨부는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살아남기 위한
건강보조식품, 또는 보신탕
병들어가는 시대에 병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
시대를 역행하면
더 빨리 죽을 수도 있다는 걸.
4
면허취소 당하고 차를 몰고 간다
감옥에 가기 위하여 술 마시고 운전을 한다
시대에 발맞추기 위하여 열심히 뛰어다니는
오로지 맨발로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청춘을 허비한다
이젠 주행 중(中)엔 주행 중(中)이란 푯말을
꼬옥 달아 놓자 가던 곳에 사람들
치이지 않게 붉은 빛깔들로
꼭꼭 채워놓자
- 건너편에 저 아저씨 횡단보도 깜박여요 빨리빨 건너세요 빵빵- 할머니 지팡이 놓고 안 건너면 갈겁니다 치여도 난 몰라요 내 잘못은 없어요 급해서 그럴 뿐이에요 벌써 빨간불이 켜졌네 아저씨 할머니 책임지세요 욕먹잖아요
5
산산조각 난 중형차의 뒤에서
버스에 탄 사람들의 시선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 사고났다 구경가자, 불났다 구경가자, 싸움났다 구경가자, 우리 모두 구경가자, 인간극장으로 구경가자, 구경거리를 찾아 구경거리를, 만들어보자
산산조각 난 중형차 구경
그러나 보고 싶은 시체는
보이지 않네
숨 가쁜 앰뷸런스
무제한의 차량을 뚫고 고속도로로 질주한다
사람들 사이 비집고
사라지는 저 앰뷸런스에
다시 오지 못할
내 의식의 증언도 있다
내 삶의 중추(中樞)가 있다
거짓증언․3
- 진짜 애국
영원히 사랑하다는 것은
조용히 살아간다는
이 말은 진리같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영원히 영원히
거짓말만 하고 살겠다는
그저 조용히 살겠다는
그 거짓말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려 하는
그 거짓말보단
스스로를 기르는 게
낫지 않을까
영구적인 생활필수품을 개발한 회사는
발매하자마자 망하고 말리라
영원은 곧 멸망이다
내 너희를 심판하노니?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말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법조계의 한국적 정서는
사디즘과 매저키즘의 혼합작용이 없다면
곧 평화가 올 것이다 더불어
후예도 없을지 모른다 오르가즘의 절정에서
인간은 아이를 탄생시킨다
그래도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를 탄생시키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일인 것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여 영원하라! 하하하
위선으로 뭉친 사회와 자본이 어우러진다
그리고 공산이 탄생한다
공산은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유토피아는
전쟁을 낳고
세상에 평화는 없다
곧
영구적인 생활필수품을
개발할 때가 된 듯하다
내 목숨으로
이미 개발되어 있는
내 목숨으로
영원히 사랑하리라
거짓증언․4
- 도시의 함몰
불빛들 살아나기 시작한다 도시의 어둠 내려앉은 소음과 매연들의 망설임이 마악 살아나기 시작한다 아파트 지대에 접어들면 어둠 같은 빛이 시작되고 있다
처음엔 자연이 있었어요 흙과 모래와 바람, 잡초 가득한 밀림, 원시림의 목욕과 부끄러움 없는 시대가 있었지요 차츰차츰 자연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저희에게 상처를 입혔어요 부끄러움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겐 움막이 필요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몸에 지푸라기를 걸치기 시작했어요 날것을 먹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도 했어요 변한 건 세월뿐이죠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었어요 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요 사람들이 변화를 이루었어요
삶의 고요한 빛깔들이 자연으로 내려오면서 사람들은 천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천사는 몰락해가는 도시의 풍경에 실망해 투명인간으로 변했다 천사는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가 악마와의 싸움을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새 도시가 건설되고 있었다
거짓증언․5
- 아르바이트 사원
나 역시 사원(社員)이다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이 회사의
동료들과 더불어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
거리에 진열된 가게들
모두는 내 손으로 들어와
잠시 눈을 반짝인다
스쳐갔던 곳에
같은 자리 또다시 와서 서다
지나치면 바람이
거리와 거리
야구장의 환호성과
길가에 진열된 커피자판기
손 아래
손님도 영업사원이다
땡볕 아래 서서
불경기의 호황
대상과 수단
으로의 삶
나 역시 사원(社員)이다
거짓증언․6
- 순결한 남자
바람 들어와
거리에 째즈
- 거리의 찬란한 불빛에는 눈길 가지 않는다 그 속에 들어선 은은한 빛과 제멋에 취해 춤추는 사람들만이 나를 끌어당길 뿐 앞에 보았던 이성(異性)보단 새 이성(異性)에 눈길 돌리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앞이라도 좋아 한번 눈 마주치면 그날은 너야
바람 들어와
락카페엔
소음으로 가득 찬 단체손님
- 오늘은 허탕치지만 내일을 위해 오늘의 힘을 아껴둬야지 락카페가 일상인, 형의 순결스토리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어 돈 때문에 허리 때문에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던 순간들, 때문에 뒤집어지는 온몸으로 춤을 추는 거지 형의 의지(意志)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물좋은 동네
락카페에 가자
오늘도
제멋에 취하는 밤
흔하디 흔한 너를 본 순간
드디어 드디어
순결을 빼앗기고 싶었다
거짓증언․7
- 어둠의 자식
자갈더미의 잡초는 아직
공원의 “잔디 보호” 푯말을 잊고 있다
기타를 치며 하모니카를 불던
녀석의 주위에 어둠이 내린다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 박수를 보내기도 하지만 진절머리 나게
내 시 한편도 거기에 끼어 있다 그나마
도시의 소음들 속에 이곳은 고요하다 지금
연락할 방법이 없는 그녀에게선 연락이 없다
교회나 다녀볼까
중 2 때 4개월 다녀본,
그 후 4년은 성당을 다녔지
바꿔치기 하던 종교는
아직 나를 기다릴까 의문의 사나이가 된다는 건
그만큼 적응을 못한다는 그런 이유였음을
그들은 알까 녀석이 공원에서 광란을 벌이며
내 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네 잎 클로버를 손에 쥐고 있었다
행운을 부를 수 없다던 너의
세 잎 클로버를 손에 쥐고서
하늘을 바라본다, 푸른 세상이
야위어만 구름 위에서
두둥실 두둥실 두리둥실 떠다니고
주머니엔 없다던 엽전 한 닢,
새의 꿈을 꾸면서 노을 저편에
함박, 웃음을 짓고 걸려 있다
손바닥을 펴 흘린 한숨, 다시
스러져가는 지평선을 바라보면 이어지는 고요,
세상은 침묵 속에서도 흘러간다고
두 눈을 깜박이며 네가 말했던
세계는 지금 어둠에 잡혀가고 있다
아침이 오면 달라질 것들.
어둠은 떠나지도 않았는데,
햇살은 어딘가에서 내리쪼이고
나는 두 손에 네가 가졌던
네잎 클로버를 손에 쥐고서
꿈을 꾼다, 잠이 들면 꿈을 꾸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는 두 손을 불끈 쥔다.
나는 제대로 된 시간표를 무척 원했다
제대로 한번
마침표를 찍지 못한
복잡하고 불안한
낡은 공식,
나는 도표화시킨 시간을
머리에 그리고 있다
모모박사가
나는 척척박사가 아니라서
그런 건 자기에게나 어울릴 것이라며
잘난 척을 했다, 나는
시간을 그린다는 상념에 사로잡혀
우쭐해있는
그의 표정을 모른 척 했다
그러자 모모박사가 불만에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당신의 공식에 사로잡혀
현실을 볼 줄 몰라
퍼뜩 정신이 든 나는
눈물 글썽이는 그녀의 눈에
내가 그릴 수 없었던
마침표를 찍은
낡은 공식이 있었다
시간표는 무척 더디지만
정확히 흘러가고 있었다
에필로그·나는 잊혀져 가는 눈물에 대해서 썼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닿으면
멋진 글도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라며
너무도 당연한 충고를
모모박사는
진심을 가득 담아서
내게 총알같은 비수를
꽂아주었다, 나에게는
우울증에 걸린 환자들이
문득 떠올랐고
모모박사의 눈을 쏘아보면서
시 쓰는 그 자체가 진심이지요,
진심이 아닌 진심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겠지요,
라며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또 다른 충고를 했고
지나친 감상은 시 쓰기에 해로울 것이라며
모모박사는 또. 한. 번.
날카로운 지적을 했지만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모모박사의 눈물도 선명하게 글썽거리고 있었고
내가 떠올린 환자들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자꾸만 잊혀져가는 눈물에 대해서 나는 자꾸만
자꾸만 쓰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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