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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현재
“우리 그만 이혼해요.”
아내의 당당하면서도 약간은 목이 멘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결혼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듣는 소리다. 늘 그렇지만, 그 말이 내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이혼을 하면 뭐가 좋지? 아내나 나에게나 이혼을 하는 게 이로울 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가 될 것도 없다.
“그러지 뭐”
아내는 그의 커다란 눈을 더욱 더 크게 뜨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아내의 그런 부라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찌푸린 이마를 펴며 아내는 말했다.
“아이는 어떻게 할 거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뭐.”
아내는 나를 흘겨보더니,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아내가 나간 방문 쪽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쩝, 여자란.
날이 너무 더웠다. 목욕이나 해야겠다. 혹시나, 아내가 있을까 해서,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혹시라도 아내가 들을까 봐 발소리를 죽여 가며 욕실까지 걸어갔다. 혼자서 즐기는 오랜만의 목욕이다. 물을 받고 있으니, 문득 아내와 결혼하게 된 때가 생각난다. 아내와 나의 결혼은 정말 우습게 이루어졌다.
2. 과거
Kenny-G의 The Moment가 집안을 온통 휘젓고 있다. 그의 섹스폰 소리는 나의 휴식을 편안한 길로 가게 해준다. 목욕을 시작하기 전, 창문은 모두 닫고 문은 꼭꼭 걸어 잠근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킨다.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선미의 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신촌의 어느 비디오방에서였다. 그때, 우리는 복잡한 거리를 걷다가 문득, 너무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은 무언가 행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선미의 대인기피증과 나의 대인공포증은 우리를 어딘가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그때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비디오의 화면이 진행되는 동안, 긴장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나는 선미의 몸을 더듬는 작업을 마치 항상 하던 일인 양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을까. 쾌락의 시작은 쾌락의 끝이었고,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감은 영화의 마감과 함께 끊어져버렸다. 경험이 없었던 우리는 쾌락의 절정을 이루지 못했고, 쾌락의 어느 순간에서 그렇게 헤어질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때 이루지 못한 쾌락의 절정을 맛보기 위해 목욕을 준비한다. 쾌락의 절정에 서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절망감. 나는 그 절망감으로 욕실에 물이 넘칠 때까지 한참을 누워서 그녀 생각을 했다.
목욕물이 넘치면 수도꼭지를 잠근다. 피곤해진 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나는 다시 운동을 시작한다. 맨손체조, 쿠샵, 자전거 타기 등 스트리킹은 한 시간쯤 계속된다. 땀을 한 바가지쯤 흘리고 나면, 조금씩 식욕이 돋는다. 먹는 건 언제나 나중 일이다.
욕탕에 들어가면, 펄펄 끓던 물이 많이 식어 있다. 텀벙, 몸을 완전히 담근다. 아, 이 시원함. 온몸에 묵을 때를 벗길 때의 시원함은 마치, 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상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과거, 사람에겐 얼마나 많은 과거가 있었던가? 과거가 없는 사람은 미래도 없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 과거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때타월이 나의 때를 벗겨낸다. 나의 과거를 벗겨내고 있다.
때를 벗기다 보니, 묵은 때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살갗이 빨갛다. 온힘을 다해 때를 벗겨낸다. 지난 기억을 지워내듯이, 내 온몸의 때는 욕탕 속의 물로 흡수되어, 맑던 물을 더럽힌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했다. 목이 마르다. 양동이에 담은 물을 몸에 쫙쫙 뿌리고,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후,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오렌지. 선미는 오렌지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가 오렌지를 좋아한 것은, 그녀가 떠먹지 않는 유일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처음 만나, 커피를 마실 때, 그녀는 커피를 조그만 차 스푼으로 떠서 먹었다. 선미는 그게 더 좋다고 했다. 만약, 그녀가 처음 만날 때부터 그렇게 커피를 떠서 먹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걸로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천성적인 그녀의 버릇이었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난 후면, 오렌지주스를 마시거나, 오렌지를 사 먹었다. 그것은 그녀의 기호품이었다. 지금도 그녀를 생각하면, 오렌지가 먹고 싶어진다.
오렌지주스가 내 목을 시원하게 통과한다. 그녀의 신 맛이 떠오른다.
다시 욕탕으로 들어가, 비누칠을 했다. KENNY-G의 테이프 앞면이 다 돌아가고, 뒷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KENNY-G의 섹스폰 연주소리는 언제나, 과거와 현실, 미래의 순간적인 사고들을 온통 뒤죽박죽 만들어 놓으면서, 날 편안하게 해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비누칠을 하고 나니, 온몸이 미끈미끈하다. 난 이 감촉이 너무 좋다. 평소에 거칠거칠하던 살결이 비누를 칠하고 나면, 마치, 선미의 살결같이 고와진다.
선미와 전화를 처음 밤을 새던 날이었다. 오빠, 나 무서워. 선미는 무섭다며 전화를 잡고 놓지를 않았다. 왜? 거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선미네 집은 신촌 부근에 있었다. 몰라, 애들 데모하나봐. 오빠, 전화 끊지 마. 그래, 알았어. 안 끊을께. 나는 그저 선미가 떠는 얘기를 무심코 듣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관심 있는 건 선미의 이야기와 어떻게 하면, 선미와 하룻밤 잘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라디오나 TV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선미의 이야기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 없었다. 어떻게 하면, 선미의 고운 살결을 구석구석 더듬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난 선미가 하는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이 왔다.
비누칠을 다하고 난 뒷면, 물을 몇 번이고 뿌려주면서 몸 구석구석을 제대로 닦아주어야만 비누는 완전히 닦여져 나간다. 손으로 내 몸을 구석구석 닦아낸다. 이것은 선미의 살결이야. 나에게 주문을 외면서 그녀의 몸을 더듬지 못하는 아쉬움에 대한 대리만족을 한다. 비누는 잘 닦여져 나갔다. 선미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선미와 헤어지게 된 건, 이런 내 욕심 때문이다.
비누를 말끔히 닦아냈다.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 목욕을 하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제 머리를 감을 차례다. 머리를 감을 때, 샴푸로 감을까? 비누만을 칠할까? 하는 고민은 항상 나를 괴롭힌다.
선미의 머리냄새는 좋았다. 선미와 포옹을 할 때마다 난 선미의 머리냄새에 취하곤 했었다. 선미의 머리냄새가 나는 샴푸를 찾기 위해, 어느 날은 슈퍼에서, 샴푸냄새를 일일이 맡아보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미의 머리에서 나는 냄새와 똑같은 냄새의 샴푸는 없었다. 난 선미에게 물었다.
“머리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아. 무슨 샴푸 쓰니?”
“샴푸 안 써.”
나는 놀라 물었다.
“그럼?”
“비누로 감아.”
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비누로 머리를 감고 나니, 머리가 까칠하다. 내 머리는 비누로 머리를 감으면 부드러워지지가 않는다. 머리에 묻은 물기를 제거한다. 이제 목욕은 끝난 건가? KENNY-G 테이프 뒷면이 다 돌아갔나 보다. 다시 The Moment가 흐른다. 몸에 묻은 물기를 제거하고, 그 상태로 소파에 털썩 주저 않아 담배를 하나 입에 문다.
선미를 만나면 항상 듣고 싶던 노래였다. 나는 한 번도 선미와 이 노래를 같이 들어본 적이 없다. 선미와는 한 번도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선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선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 한편을 보면, 거기에 대해서 하루 종일 얘기하는 게 선미의 일과다. 책을 한권 읽으면, 내가 알아먹을 때까지 하루 종일을 이야기한다. 분석하고 다시 생각하고 또다시 분석하는 것이 선미의 유일한 낙이었다. 선미는 나에 대해 세밀히 분석했을 것이다. 선미는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듯했다. 나는 선미에 대해 잘 모른다. 음악소리가 조금씩 사라져갈 즈음, 초인종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잘못 들었나? 그러나, 조금 있으니 그 소리는 또 들린다.
3. 현재
목욕을 끝내고 지금 나는, 아내와 식사 중이다. 식사 중에도 우리 부부는 별다른 대화가 없다. 늘 조용하다.
“밥 좀 더 줘”
아내는 말없이 밥 한 그릇을 담아온다.
“위자료는 충분히 드리죠”
“고마워”
몇 마디 대화가 오고가지만, 굉장히 형식적이고 틀에 박혀 있다.
“이혼은 언제쯤 할 거지?”
“지금 이혼수속 밟고 있으니까, 그것만 끝나면 되요. 당신은 이 집에서 살아요, 최소한 1년은 넉넉히 살 수 있을 거예요. 어차피 아이는 당신이 못 키울 것 같으니까 제가 데려가죠. 1년 안에, 당신이 일자리 구하거든 데리고 오셔서 키워도 되구요.”
“아니, 그냥 당신이 키워. 난 아무래도 애 키우는데 소질이 없을 거 같애”
“아니, 애 키우는 것도 소질이 있어야 하나요?”
아내는 또 따지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의례히 그러듯,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데 열중한다. 피곤한 건, 딱 질색이다.
“당신은 도대체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아내가 던진 이 질문에 나는 문득 내가 왜 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나도 잘 모르겠어. 한번 생각해볼게.”
이렇게 말하고, 집을 나왔다.
아내가 던진 그 말이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내가 왜 살지? 처음에, 아내는 나를 먹여 살렸고, 나는 꼭두각시처럼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했다. 어느 날 그녀는 술집을 차렸고, 나를 그 술집의 사장으로 앉혔다. 아내는 절대로 그녀 스스로 물건을 사는 법이 없었다. 정작, 돈을 내는 건 그녀이면서도 항상 무언가를 사야 할 때면, 나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곤 한다. 나는 황당해하면서도 그러마고 했다. 그러면,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했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 눈앞에선 모두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나 역시, 사람들의 눈에 비취진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때론 우연이란 것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무작정 거리를 걷던 중,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 지나갔다. 나는 어디선가 보았겠지 하면서 지나가는데, 그 여자가 내게 말을 건넨다.
“나 선미야, 기억하지?”
문득, 그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모자이크 되어 흘러갔다.
“선미?”
“이게 얼마만이야? 결혼은 했어?”
잠시, 나는 망설였다.
“아니, 아직……”
그러나 나는 봤다. 선미의 두 손이 뒷짐을 지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을. 그 무엇인가가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어디 가서 얘기 좀 하다 갈까? 바쁘지 않지?”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빠지지 않는 반지에 대해서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선미 역시 결혼했을 테고, 이혼을 하려 하는 중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선미 역시 거기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선미는 얼른 나의 팔에 팔짱을 끼었고, 해후는 이렇게 나를 다시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공원에선, 기타를 치는 사람들, 벤치에 누워서 잠을 자는 사람들, 잔디밭을 뒹구는 사람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거리의 광인에 대해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미, 이 사회에선 무관심의 미덕이 존재한다. 그녀와 나의 관계도 무관심의 미덕으로 이룰 수 있었던 만남일지도 모른다. 해가 지고 있다. 집에다 전화를 하려다, 문득 선미생각이 났다. 옆에 있는 선미를 생각하니, 전화를 하는 게 우스워졌다. 선미에게 물었다.
“집에다 전화 안 해? 늦었잖아?”
“아직도 내가 스무 살 인 줄 알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이 오자 우리는, 공원에서 가장 깊숙한 곳 벤치에 앉아, 서로의 살결을 더듬으며, 밤의 싸늘한 바람을 식혔다. 공원 반대편 어디선가, 기타와 하모니키가 어우러진 연주가 우리의 밤을 무르익게 했다.
4. 현재
동이 트자, 선미는 말했다.
“나 회사 가야 돼? 또 언제 보지?”
“오늘 밤에”
선미를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지옥 같은 걸음걸이가 아내를 생각나게 했다. 아내는 외박을 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 그 일을 말한다면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어쩌면,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지 모른다. 아내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애초에 나를 사랑한 적도 없었으니까.
초인종을 눌렀다. 아이가 문을 열어주며,
“아빠”
하며 반갑게 맞는다.
“그래, 엄마는 어디 가셨니?”
“몰라요, 어디 잠깐 나갔다 온다고 집 잘 지키고 있으랬어요.”
“언제 나가셨니?”
“아침에요”
다행히도, 아내는 집에 있지 않았다. 한숨 자고 나는 또 선미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 꿈을 꾸는 중이다. 아내가 불에 타고 있었다. 아내는 나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아내를 살리려고 아내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나는 빠른 동작으로 아내의 몸에 물을 부었다. 불이 다 꺼지자, 시커멓게 탄 아내가 눈동자를 깜박이고 있다. 그 눈, 잊지 못할 눈이다. 그토록 맑은 아내의 눈은 본 적이 없다. 아내는 보조개를 띠며 살짝 웃었다. 그토록 자연스러운 아내의 웃음은 본 적이 없다. 나는 무심결에 “여보……”하고 중얼거렸다.
“여보, 여보!”
아내였다. 그녀가 나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제 어디 갔었어요? 몸에서 왜 이렇게 열이 나죠?”
“지금 몇 시지?”
“다섯 시요.”
나는 몸을 일으키고 외출준비를 했다.
“여보, 이 몸을 해가지고 어딜 가요?”
“남이야, 가든 말든, 이혼 수속은 다 되가나?”
아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집을 나왔다.
우스운 일이다. 아내가 내 걱정을 다 하다니. 아내는 한 번도 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아내는 자기 할 일만 하면 되었다. 파티에 초대되면, 나는 그녀의 꼭두각시가 된다. 내가 추기 싫어도 그녀가 원하면, 나는 춤을 추어야 했고, 노래도 불러야 했다. 그러면, 파티에 같이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우리를 부러워했다.
아직, 거리엔 어둠이 깔리지 않았다.
선미를 만나려면, 어둠이 필요하다. 누군가 우리를 아는 사람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까 겁이 난다. 철저한 어둠에서 우리는 서로를 만나야만 한다. 선미의 회사가 끝나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공원에서 기다리는 동안, 아직 20대의 젊은 연인들이 많이 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선미의 남편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의 약속을 깨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다. 오늘은 선미에게 청혼을 해보는 거다.
이런저런 생각에 시달리다 보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걸 발견했다. 내 앞에 선미가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있어?”
“저, 저기……”
“뭔데?”
“선미야, 우리 결혼할래?”
5. 미래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때, 결국 사람들은 한 쪽 길만을 택하게 되어 있다. 몸이 한 개인 이상, 두 가지의 길을 모두 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을 인용하곤 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이미 독충으로 변한 그레고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죽음을 향해가는 일방통행로였다. 때로 사람들은, 일방통행만을 고집하기도 한다. 갈림길보단 일방통행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은 걸어가기엔 훨씬 쉽기 때문이다.
선미에게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고는 그녀가 잠든 걸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어디갔다 와요?”
생각해보니, 외박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알아서 뭐하게?”
“여자 생겼죠?”
뜨끔했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이혼수속은 언제 되나?”
“이혼은 안할 거예요.”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믿었던 선미와의 결혼이 난관에 부딪히는 말이었다.
“왜?”
“저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이상한 말이었다. 아내가 처음 이혼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었다. 지금의 아내는 오히려 당당한 말투다. 더 알 수 없는 건, 아내는 지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내는 절대로 사랑이란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아내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아내는 지금껏 나를 사랑해 온 건가? 아니면, 이혼을 하기 싫은 것에 불과할까?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복잡한 문제는 싫다.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다시, 선미 생각이 났다. 그럼, 선미는 어떻게 하지?
일방통행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요령 있게 빠져나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어쩌면, 내 삶은 일방통행로였는지 모른다. 지금 나는 선미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의 모든 걸 아내가 결정해 주었듯이, 지금 나는 또, 아내가 결정 해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선미는 지금쯤 밤을 지새운 그 여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내가 내게 대한 그 태도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선미에게, 나는 말할 것이다. 널 사랑한다고. 그렇지만, 나는 이혼할 수가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선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미 선미는 그곳에 없었다. 선미가 다닌다는 회사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그런 사람은 근무한 적이 없다는 말 뿐이었다. 선미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인가, 선미를 찾기 위해 허우적대는 나를 발견하고, 아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허우적대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나를 점점 더 힘들게 죄어왔다. 딸아이는 여전히 아빠를 찾으며 까르륵대었지만, 그 웃음은 나를 오히려 힘들게 했다. 아내의 걱정스런 바람과는 달리, 나는 점점 더 병들어가고 있었다. 퍼뜩, 아내가 선미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착각이 들었고, 나는 아내에게 선미야, 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그런 나에게 너무도 친절하게 대했다. 나는 점점 더 아내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