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祖上)의 자취를 고적(古迹)을 통하여 만났을 때 느끼는 정회(情懷)가 남다른 것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울산에서 전국체전이 있을 때였다. 맡은 일로 울산에 내려가 하루 종일 경기장을 돌아다니다 저녁에 여관에서 쉬면서 우연히 펼친 울산 관광팸플릿 속에서 ‘울산동헌은 부사 김수오(金粹五)가 처음 지었다’는 구절을 보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그분은 바로 나의 11대조이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 만사를 뒤로하고 울산동헌을 찾았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 “울산동헌은 숙종 7년(1681년)에 부사 김수오(金粹五)가 지었으며, 숙종 21년(1695년)에 그의 아들 김호(金灝)가 다시 부사의 자리를 이어옴에 지난 일을 생각하여 편액(篇額)을 일학헌(一鶴軒)이라 하였다”는 구절을 읽었을 때의 정회는 한층 더 했다. 300년전 이 뜰을 거닐었을 두 분을 생각하며 얼핏 내가 그 두 분 인양하여 동헌과 내아(內衙)를 둘러보았다.
동헌 뒤뜰에는 업적을 남긴 부사(府使)들을 기리는 공덕비가 죽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 ‘부사김공헌수청덕선정비(府使金公瀗秀淸德善政碑)’ 앞에 섰을 때의 느낌도 역시 그랬다. 그분은 바로 울산동헌을 처음 지은 수오(粹五)공의 7대손이고 나에게는 종고조(從高祖)가 된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10대조 호(灝)공의 가장(家狀)을 살펴보니,울산동헌에 편액을 걸면서 소회(所懷)를 기록한 ‘일학헌기(一鶴軒記)’가 있었다.
살펴보면 울산동헌(蔚山東軒)과 연안김씨는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울산부사 재임 시 동헌(東軒)을 처음 지은 분이 직강공파(直講公派) 수오(粹五)공 이며,그 아들 호(灝)공과,7대손 헌수(瀗秀)공이 울산부사(蔚山府使)를 역임하였다.
수오(粹五)공은 직강공파 파조인 성균관직강 승(昇)공의 7대손 이며,나산종중(羅山宗中) 처사(處士) 인개(仁漑)공의 손자로 1619년에 창평현(昌平縣,현 담양군 수북면) 나산(羅山)에서 태어났다. 166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장령,영암군수,울산부사,연안부사를 거쳐,1684년 통정대부로 승차하여 종성도호부사(鐘城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호(灝)공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자는 여습(汝習),호는 심락재(尋樂齋)이다. 효종1년(1650년) 수오(粹五)공의 3자로 태어나 숙종 4년(1678년) 29세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강원도사,해운판관,순천부사,홍주목사,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 하였다. 사헌부장령 재직 시 올바른 말로 직간(直諫)을 서슴지 않았던 분으로 끝내는 미움을 받아 1694년 12월 울산도호부사로 좌천되었다.
건강이 나쁘던 공에게 주위에서 부임을 만류하였으나 ‘울산은 선군께서 수령으로 있던 고을인데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며 셋째아들 상옥(相玉,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함)공을 대동하고 부임하였다. 선친의 유훈을 받들어 동헌의 편액(篇額)을 일학헌(一鶴軒)이라 하였으며 그때 지은 일학헌기(一鶴軒記)가 전하여 온다. 그러나 울산은 바다가로 숙질이 더하여 부임한지 세달 만인 1695년 3월 18일 겨우 45세의 아까운 나이에 아버지가 지은 울산부 내아에서 순직하였다.
그 후 수오(粹五)공의 7대손 헌수(瀗秀)공이 음직(蔭職)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1887년 울산부사로 부임하였다. 그 당시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심하던 시기였음에도 헌수(瀗秀)공은 선정을 베풀어,1890년 임기를 마치고 전라도 장성부사(長城府使)로 이임한 후 부민(府民)들이 선정비를 세웠으니,지금도 동헌 뒤편에 부사김공헌수청덕선정비(府使金公瀗秀淸德善政碑)가 있다.
- 울산산부사 김헌수 청덕선정비 -
울산읍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본 읍은 거듭된 흉년을 여러 번 격어 호구가 점차 줄어들고 요역(徭役)이 괴롭고 무거우니 백성이 견디지 못하였다. 정해년 7월 28일 통훈대부 김헌수(金瀗秀)가 부사로 부임한 이후 백성들의 청원서를 살펴 그 여론을 파악하고 내상(內廂), 동면(東面), 서생(西生)의 한산호(閑散戶)와 부정하게 세금을 감면받은 호(戶)를 조사해 내어 모두 6백여 호에 고르게 배정하니 한 고을이 혜택을 입음이 적지 않았고, 떠나 떠돌던 백성이 모두 돌아와 거주하였다. 두 차례 상경하니 혹시 옮겨 임명할까 백성들이 걱정하였으니 혜택이 사람들에게 미쳤음을 알겠다. 관청의 비 새고 썩고 상한 곳은 부고(府庫)를 살펴서 객사(客舍)부터 고치고, 특히 기축년에 장청(將廳)을 증축하는데 비용이 3,000여 금에 가까웠는데 백성에게 걷지 않고 백성을 부역시키지 않았으니 실로 빗돌에 새겨 후세에 전함이 당연하다. 경인년 6월 26일 정사에서 장성부사(長城府使)로 옮겨 임명하였다."
울산동헌(蔚山東軒)은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1997. 10. 9 지정)로 울산광역시 중구 북정동 34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옛 울산읍성(蔚山邑城)의 중심 건물로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의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고,내아(內衙)는 수령이 살던 살림집이다.
울산동헌을 소개하는 글들을 종합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울산동헌은 울산이 군ㆍ현ㆍ도호부 등으로 자격이 오르거나 떨어질 때마다 옮기거나 새로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선조 32년(1599년)에 울산이 부로 승격된 후 숙종 7년(1681년)에 부사 김수오(金粹五)가 지었으며,숙종 21년(1695년)에 그의 아들 김호(金灝)가 다시 부사의 자리를 이어옴에 지난 일을 생각하여 편액(篇額)을 일학헌(一鶴軒)이라 하였다. 그 뒤 영조 39년(1763년)에 부사 홍익대가 다시 지어서 현판을 ‘반학헌(伴鶴軒)’이라 고쳐 달았다고 하나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영조 36년에 다시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회의실로 사용되었다가 1981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동헌은 정면 6칸,측면 2칸,겹처마 익공(翼工) 양식의 팔작지붕집으로 좌우에 2칸씩의 방을 두고,가운데에 2칸의 대청을 두었다. 왼쪽 방 주위에는 계자(鷄子) 난간을 둘렀다.
내아는 8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로 온돌방 3칸,대청 2칸,부엌과 누마루 각 1칸씩을 두었다. 살림집인데도 마당이 없고 동헌과 구분되는 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처음 건립된 당초 동헌과 내아는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더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울산읍지(1895년)에 “동헌에는 6칸짜리 반구헌,1칸짜리 방인루,4칸짜리 서작문,3칸짜리 흡창방,5칸짜리 고,3칸짜리 출입문,1칸짜리 정자정 등 여러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내아는 8칸의 대청,9칸의 행랑,3 칸의 내주(부엌),3칸의 사당,6칸의 동서방 등을 두었다”고 했다.
일학헌기를 표점(標點)하고 역해(譯解)하면 다음과 같다.
一鶴軒記。
守蔚山時,乙亥三月。
粤在聖上紀元之六年庚申夏,先君作宰是府。翌歲辛酉春,不肖來覲見,東閣之內有麗,然而新構不麗不陋,軒窓明奧。一日侍坐從容,先君謂不肖曰:“凡郡衙必有內軒,然後宜於居處,便於聽民。是邑廨宇可謂悉備,而唯內軒缺焉,余爲是刱之。 工旣斷手,不可無扁額。汝惟書揭令名,仍作記以道其意。” 不肖聽,惟謹思,所以奉承而惟忝是惧。適有慈母之病,煼熬無暇,未久又有嶺東佐幕之除,因試事,期急卒卒。辭歸以待,其後再覲之日也,其年冬,先君遞還,因以未就。不肖無狀,不克遵奉親敎,中間凶禍,風樹不停,孑焉爲孤露之人矣。
迺於十五載之後,不肖忝叨是府,到官入門,舊堂猶存,觸目生悲,掩涕彷徨。 怵惕靡寧,首謨所以追成先志者,名之曰一鶴軒,取是府鶴城之號,而借用趙閱道載一鶴之蜀之事也。嗚呼! 不肖之身,墜失先訓,獲辜,明時乃復來,莅於先君所經歷之地,履軒砌而愴舊,揭華扁而傳後,若有不偶然者,存乎其間。 後之覽斯文者,亦必有感於心也。 旣又倣杜少陵兗州城樓之作,輒次其韻,書之楣間。
淸獻舟中鶴,高軒偈額初,
淸神江月滿,襟韻竹風徐。
默坐有書後,潛思聽政餘,
昔人有潰句,吟罷史躊躇。
일학헌기(一鶴軒記).
울산부사 재직시 을해년(1695년) 3월
성상 6년 경신년(1680년) 여름에 선군(先君)께서 이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셨다. 이듬해 신유년(1681년) 봄에 내가 내려와 찾아뵈었을 때,동헌 내부가(여러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새로 지어 화려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았으며,창문이 안쪽까지 밝게 비추었다. 하루는 옆에서 조용히 모시고 있었는데,선친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무릇 관아에는 반드시 내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처하기에 마땅하고 백성의 말을 듣기에 편리하다. 이 읍은 관아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만 내헌이 결여되어 내가 처음으로 지었다. 공사가 이미 끝났으니 편액이 없을 수 없다. 너는 오직 좋은 이름을 써서 걸고 기(記)를 지어 그 뜻을 말하라.”하셨다. 내가 듣고 삼가 생각하니 뜻을 받드는 것이 오직 분에 넘쳐 욕이 될까 두려웠다. 마침 어머니가 병환이 있어 마음 졸이느라 겨를이 없었고,머지않아 강원도사(江原都事)에 제수되었는데 향시(鄕試)의 일로 인하여 부임 기일이 급박하였다. 사직하고 돌아와 (다음 임지를) 기다리다가 그 후 선친을 다시 뵙게 된 날은 그 해 겨울이었으니 선친께서는 체직되어 아직 (다음 임지로) 나가지 않았었다. 내가 형편이 되지 않아 선친의 가르침을 받들 수 없었는데,중간에 선친을 여의게 되니 효도를 다하지 못한 슬픔을 멈출 수 없고,외롭게 의지할 곳 없는 몸이 되었다.
마침내 15년 후 내가 외람되이 울산부사가 되어 관아에 이르러 문에 들어서니 옛 건물은 아직도 그대로 있고,눈길 닫는 곳마다 슬픈 생각이 들어 눈물을 감추며 이리저리 거닐었다. 편치 않은 몸을 두렵고 조심스러워하며 선친의 유지를 따라 이루는 일을 먼저 도모하여 그 이름을 일학헌(一鶴軒)이라 하니,학성(鶴城)이라는 이 읍의 칭호에서 취하고,(송나라) 조열도(趙閱道)가 학 한 마리를 배에 싣고 촉(蜀)으로 갔던 일을 빌려 썼다. 아! 불초한 내가 선친의 가르침을 실추시켜 죄를 지었으나,밝은 날이 다시 와 선친이 다스렸던 땅에 임하여 동헌 섬돌을 밟고 옛 일을 슬퍼하며 아름다운 편액을 걸어 후세에 전하니,우연(偶然)하지 않은 것이 그 사이에 있다. 뒷날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역시 반드시 마음에 느낌이 있을 것이다. 이어서 두보(杜甫)가 젊은 시절에 지은 ‘능연주성루(陵兗州城樓)’를 본떠 문득 차운하고 문미 사이에 쓰노라.
조변(趙抃)이 배위에 실었던 한마리 학(鶴),
이제 막 높은 동헌에 편액(扁額)으로 걸렸네!
맑은 정신은 강물에 비친 달처럼 가득한데,
마음속 운치는 대숲에 부는 바람처럼 느릿하구나.
글쓴 뒤에는 묵묵히 앉아있고,
정사(政事)의 여가에는 깊이 생각하네.
옛 사람도 자나치게 꾸민 구절이 있어,
읊고 나니 화려하여 주저하노라.
延安金氏大宗會顯彰硏究委員會 硏究委員 壽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