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막측(神妙莫測) / 권재기
간호사가 아기를 데리고 왔다. 나를 쳐다보는 아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다. 신기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보니 마치 지남철에 자석이 붙듯 나와 아기는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해산의 고통 같은 것은 벌써 잊었다. 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
두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아기를 받아 안은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신기하고 소중한 생명을 감사하고 사랑하리라는 마음이 용솟음쳤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나는 두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엄마로서의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다. 두 아들은 형제라도 똑같지 아니한 독특한 개체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하나님께 매일 감사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걸작품이라고 한다, ‘신묘막측’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오묘하여 미리 추측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때도 하나님의 지으심에 경탄하고 기이함을 보고 놀란다. 뒷산을 덮는 4월의 유채화는 물 한번 안 줘도 저절로 자라 우리 눈을 즐겁게 해준다. 우리 집 뒤뜰은 넓기만 할 뿐 잔디는 다 죽어 모하비 사막처럼 연갈색이다. 그러나 봄이면 새끼손톱만큼 작은 분홍색 잡초가 잔디 대신 다투어 자란다. 토끼와 이름도 모르는 새들이 비교적 사이좋게 한 마당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내 손바닥 크기의 새 한 마리가 자기 몸보다 배는 더 큰 까마귀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광경이었다. 그 이후로 까마귀가 다시는 뒷마당에 나타나지 못했다. 그 새가 다람쥐까지도 공격해 이제는 다람쥐마저 사라졌다. 덕분에 우리는 처음으로 잘 익은 대추를 먹을 수 있었다. 그동안 다람쥐의 횡포로 과일나무에 열린 감, 대추, 석류 등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 새의 정체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길이 없었는데 오늘에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른 아침 채소밭 옆에 앙증맞게 핀 보라색 잡초 꽃를 발견했다. 서둘러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있을때, 그 새가 바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주위를 뱅뱅 돌며 계속 큰 소리로 짹짹거렸다. 무섭기도 하고 사진도 잘 찍고 싶어서 나도 계속 큰소리로 “Be quiet! stop it”라고 소리쳤다. 새는 막무가내였다. 꼭 쪼일 것 같은 공포감에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채소밭 옆에는 무성한 덤불이 있다. 혹시 그 속에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보는 주인인데도 마치 다람쥐를 쫓듯이 유난스럽게 위협을 했으니 말이다. 하기야 시꺼먼 카메라와 삼각대가 무기같이 보였을 법도 했다. 제 식구 보호 본능이라면 얼마 안 있어 새끼 새들이 뒤뜰에서 먹이를 주워 먹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이들도 하나님이 지으신 귀한 존재이다.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 속에서 만들어지고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하나님의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로 태어났다고 믿는다. 생각지도 않던 미국까지 와서 이렇게 50년을 살고 있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외롭게 자랐던 것도 미국에서의 생활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는지….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신묘막측한 존재로 나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 뿐이다. 나는 유일한 존재로서 지금의 나 자신을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하고 감사하며 최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