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화 간간이 눈이 내리고 잔뜩 흐림
무릉 외갓집에서 용수 포구까지 17.5km
수월봉과 차귀도 쪽을 다시 걷고 싶은 마음에 12코스를 걷기로 한다.
무릉 외갓집이 근처 폐교를 개조하여 훨씬 넓고 깔끔한 모습으로 새단장을 하였다.
올레 간세를 나타내는 표지가 이쁜 벤치가 되어 있다.
워낙 오래 전 걸었던 터라 무릉 동네가 새롭다.
살짝 길을 틀어 마을을 지나가게 하는데 마을 초입이 산티아고 마을 아헤스와 닮은꼴이다.
산티아고 정취가 느껴져 무척이나 반갑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정스러워 보인다.
주변으로는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너른 밭들이다.
밭들의 종류도 다양하다.
제주의 대표 작물들
수확이 다 끝나 초록색 커다란 이파리만 남겨 놓은 브로콜리, 장딴지 만큼이나 튼튼하고 실하게 자라고 있는 무, 노란 속살이 꽉 찬 양배추, 겨울이 무색하게 푸른 잎을 자랑하는 마늘 밭, 자주빛 콜라비..
얼기설기 얹혀진 돌돌이 밭담을 만들어 서로의 경계를 나타낸다.
거센 바람도 숨죽이게 만드는 밭담의 현무암 돌무더기가 신기하다.
걷는 내내 주발을 덮어 놓은 듯한 한라산의 꼭대기가 옆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등허리 뒤로 따라 오기도 한다.
올레 길 함께 걷는 맘씨 좋은 동무같다.
어제만 하더라도 꼭대기 부분만 하얗더니 오늘은 설산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밤새 한라산엔 눈이 더 많이 내렸나 보다.
막힌 곳이 없어서인지 바람이 퍽이나 거세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만나게 될 수월봉과 차귀도 바닷가 바람과 견줄 순 없겠지
올레는 바람이 불 때 걸으면 더 제 맛이 난다.
춥다는 날씨도 영상 온도를 유지하는 터라 걸을 때면 외려 시원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간간이 뿌리는 눈발은 바람 속으로 들어 오는 고명같은 존재^^
너른 들판 사이 만난 도원 연못은 색다른 즐거움이다.
잠시 내어준 곁길은 뽀송한 잔디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올레의 또 다른매력은 오름이다.
12코스에는 무려 세 곳, 녹남봉, 수월봉, 당산봉
젤 먼저 만난 녹남봉은 녹나무가 많아 녹남봉이라 부른단다.
오르는 길 야자 매트를 최근에 깔았나 보다
미끄러지지 않고 쉽게 오를 수 있게 매트 사이 간격을 두고 하얀 줄을 깔아 놓았다.
오름을 지키고 가꾸는 이들의 정성이 그득하게 담겨 있다.
전망대도 세워져 있다.
사방팔방 시원하게 보인다.
우와, 저멀리 가파도랑 마라도도 보인다.
구름은 잔뜩 끼어 있지만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하늘이 시야를 멀찍하게 내어 준다.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고, 한 숨 쉬어 가고 싶은데 열려 있는 카페가 없다.
바닷가에 있었던 카페에라도 들어갈 걸..
겨우 불을 밝히고 있는 카페를 발견했는데 쥔장은 없고 커다란 개 한 마리만 카페를 지키고 있다.
외출을 나타내는 정낭이 입구를 무심하게 가로막고 있다.
한경과 무릉을 걸으며 만난 이는 개와 산책하는 사람 뿐 관광객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조차 뜸하다.
수월봉에 올라서야 몇 무리의 관광객을 만난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피해 금세 렌트카로 돌아가 버린다.
엉알길에는 제법 사람들이 많다.
퇴적층 암벽에 다양한 화산관련 물질들이 섞여 있어 지질학의 보고란다.
태평양 전쟁 무렵 일본놈들이 만들어 놓은 진지도 보인다.
제주를 거쳐 일본 본토가 침공 당하리라 생각하고 최후의 보루를 제주로 삼아 이 곳 저 곳에 엄청난 진지를 구축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히로시마에 원폭이 터져 항복 선언
그들의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엄한 제주만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생채기를 입었다.
바닷가에는 떠내려온 쓰레기 더미가 많다.
중국에서 건너 온 커다란 원형 스트로폼, 육지 양식장에서 넘어 온 부표,그 외에도 낚시 도구들 페트병 등등
두 분의 아주머니께서 열심히 치우고 있다.
쓰레기가 없다면 그야말로 수려한 풍경일텐데 아쉬움과 씁쓸함이 함께 찾아 든다.
거의 13킬로남짓 걷고 난 후에야 차귀도가 훤히 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과 쉼을 갖는다.
엉알길을 벗어나 당산봉으로 오른다.
정상이 아닌 둘레를 걷게 하며 차귀도의 변하는 모습을 맘껏 감상하게 한다.
새들의 절벽이라는 생이기정길
간간이 가마우지가 보인다.
원없이 푸른 바다를 넘보고, 원없이 바람을 맞았다.
탁 트인 바다와 차귀도, 누운 섬을 마주 할 수 있는 벤치에 앉아 손액자를 만들어 담아 본다.
12코스 올레의 종점, 용수포구가 코 앞이다.
걷는 내내 행복하고 가슴 뻥 뚫리게 한 길
올레, 참 고맙다.
첫댓글 까미노님 참 대단하세요.
벌써 수일 전의 일인데 이렇게 조그만 것 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으니 천재인가 봐요.
저는요.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다 잊어버려요.
따뜻한 주말과 성탄 맞으세요.
자칫 폭설에 갇힐 뻔 했네요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