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가끔 소주를 권했다. 그 술을 받아 마신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주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수긍의 악수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내게 넘기는 짐을 잘 받겠다는 악수. 당신을 이해한다는 악수. 부모님에게 대놓고 반항한 적은 없었다. 아쉬운 소리나 원망을 해본 적도 없었다. 일을 해야 하면 일을 했고,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벌어서 드렸다. 부모님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두 분이 게으르게 살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과 부모님을 이해한다는 말이 같은 뜻은 아니었기에,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며 아버지 힘드시죠,라는 눈빛을 건네고 싶진 않았다. 원망하지도 않지만 이해하지도 않는 선. 그 선을 지키는 것이 내가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구의 증명 / 최진영 #######
얼마 전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이제 간다, 그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하루가 다 저물 즈음에야 불현듯 꿈 생각이 났다. 그래, 꿈에 아버지가 보였지. 드디어. 드디어 아버지가 내게도 찾아왔구나. 장례를 치르고 동생에게만 보였던 아버지에게 어쩌면 서운했던 것일까. 맏이인 내게 먼저 찾아오지 않은 게 야속했던 것일까. 유난히 아버지와 부딪쳤던 나를 아버지는 보고 싶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꿈을 꾸고 나서 나는, 선생님에게 받아야 할 도장을 마침내 받아 낸 학생처럼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구'는 아버지의 술을 받아 마시지 않았다. '구'에게 아버지가 권하는 술은 어떤 의미였나.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문득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구'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거 마시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라고. 그렇지만 아버지의 술 따위 받아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얄궂은 운명이 곱게 피해 가 줄 리는 없다. '구'도 그러한 빌어먹을 인생의 이치를 모르지 않았을 테지만, '구'가 할 수 있는 저항의 표현은 고작 그 정도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구'에게 그는 아버지고 아버지를 저버리는 것은 나쁜 사람이나 하는 짓이고 '구'는 그 정도로 나쁜 아이는 아니니까. 동생에게만 찾아오고 내게는 찾아오지 않는 아버지가 묘하게 나의 죄책감을 자극했던 것처럼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간 두려운 일이며 그래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실상 최소한의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그러니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느냐는. 그러므로 항변할 수 있다. 내게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냐고. 물론 신은, 만약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고작 콧방귀나 뀌고 말겠지만.
나는 '구'를 이해한다.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섣부른 이해가 타인에게 줄 상처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감히 '구'를 이해한다. 그가 아버지의 술을, 아버지의 악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 이해할 수 있어서 슬프고 아프다. 나는 '구'의 잔혹한 운명 같은 건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그러하겠지만 나에게도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길에 항상 아버지는 방해꾼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혹 내게 모든 당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술을 권한다면 나 또한 '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꺼이 그 잔을 거부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또한 도리 없이 죄책감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유독 아버지의 악수가, 굳이 내게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간 아버지가, 고마웠던 것인지 모른다. '구'가 그랬듯 비록 당신이 건네는 운명의 술잔을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당신이 청한 마지막 악수만큼은 거부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그리해서 어느 만큼은 죄책감을 덜 수 있게 해 주었기에. 적어도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안도할 수 있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