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륜 VS 인륜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인 것은 누구를 위한 복수인가.
트로이아 전쟁을 치르고 십 년 만에 아가멤논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것도 승리하여. 그 기쁨이 하늘에 닿고도 남았을 것이다. 갖은 고생과 숱한 전우들의 희생 끝에 얻은 승리이니 얼마나 값질 것이며 그로 인해 얻은 전리품을 비롯하여 그 명예와 자부심은 또 얼마나 대단했을지, 전쟁을 경험해보지 않은 나지만 미루어 짐작이 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아가멤논은 귀향하여 집에 도착한 첫날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에 의해 욕조에서 몹시 ‘모욕적으로’ 죽임을 당한다. 여인에 의한 죽음이라 더욱 모욕적이라는 아폴론의 관점은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것일 터이다. 남편을 죽인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명분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남편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 제 자식을 죽인 아버지를 어머니의 손으로 응징한다는 것. 아가멤논이 노한 파도를 진정시키겠답시고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아버지로서 너무나 잔인해서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마음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애타게 아버지를 부르던 이피게네이아는 가여웠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한 갈래가 아닌 것은 고대나 현대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향한 오레스테스의 복수의 칼날을 마주한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호소는 앞서 그녀가 제시했던 명분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 내 잘못을 말하려거든 네 아버지의 잘못도 말해야지.(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918)
남편과 떨어져 산다는 건 여자에겐 괴로운 일이란다, 아들아.(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920)
어쩐지 비굴하다. 그렇지만 그녀의 사유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라서 한편 씁쓸하다. 지금이라면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호소가 마냥 터무니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독수공방. 십 년. 더구나 아트레우스가(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저주의 기운. 이 가문이 멸하기를 한사코 바라는 아이기스토스 같은 인물이 가까이에 있고 보면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독수공방 그것을 지켜내는 일이. 그러니 지금이라면 그녀의 호소가 일면 공감을 얻어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여성의 인권과 욕망도 당연한 것이라 여겨지는 세상이고 부족하나마 페미니즘이라는 방패도 존재하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안타깝지만 작품의 배경은 무려 기원전 5세기이다. 그러니 아들인 당시의 오레스테스가 여인으로서의 제 어미의 애환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게다가 제 아버지를 죽였으니.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아가멤논에게 범한 행위는 명백한 살인이며 살인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해서는 안 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생명은 어떠한 경우라도 보호받아야 마땅한 것이고 어느 누구도 타인의 생명을 해할 권리라는 건 없는 까닭이다. 아무리 독수공방이 힘들고 제 딸을 죽음으로 내몬 남편을 참을 수 없었다 해도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남편살해는 도덕적으로 용서받기 어렵다. 아버지를 잃게 된 아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정치적인 여타의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이유로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남편살해가 용인될 수 없듯이 마찬가지 이유로 오레스테스의 모친살해도 용서받기는 어렵다.
오레스테스가 부모의 권력과 부를 바라지 않고 비이성적이며 편협한 신의 명령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만큼 지혜롭고 용감한 인물이었다면 어머니를 죽이는 일로 제 손에 피를 묻히는 우(愚)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그래야 했을까. 과연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어찌 보면 가장 쉬운 방법이다. 매듭을 풀지 않고 싹둑 잘라버리는 일은. 물론 때로 그래야 할 때도 있겠지만 목숨을 다루는 일이라면, 더구나 제 어미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싹둑 잘라내기보다는 풀어내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죽음이 안타까워서라기보다는 모친살해 후 오레스테스가 감당해야할 아들로서의 죄책감이 안쓰러운 까닭이다. 어미를 죽인 아들의 삶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결국 제 살 도려내는 일에 불과하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라지만 복수의 대가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이 괜히 있을까.
오레스테스는 더구나 비겁하다. 알고 보면 아버지의 복수라는 것이 오롯이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행해진 것만은 아닌 듯하다.
아버지,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가 당신의 집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480)
이 대목에서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 두 남매는 복수의 성공을 기원하며 아버지에게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비는 내용이 꽤나 흥미롭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이 슬퍼서라기보다는 복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기원하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 부디 복수에 성공하여, 오레스테스는 아버지가 가졌던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기를, 엘렉트라는 어머니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복수의 성공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제물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마치 협박과도 같은 기도. 우스웠다. 이것이 본심인가, 오레스테스의. 하긴. 인간의 마음이 한 갈래가 아닌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난할 일도 아니다, 당연하다. 그러니 내면에서 일렁이는 아폴론의 부추김 혹은 ‘신의 명령’이 오레스테스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명분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오레스테스가 복수를 실행하는 데 있어 아폴론의 명령, 소위 '신의 명령'이 큰 영향이 있었던 만큼 아폴론도 그를 위해 재판에서 기꺼이 변론을 자청한다. 어머니를 죽인 아들의 죄와 남편을 죽인 아내의 죄. 소위 천륜을 어긴 죄와 인륜을 어긴 죄. 어느 죄가 더 중한가. 이미 관습법에 따라 스스로 죄가 정화되었다는 궁색한 자기변명에 이어 최종변론을 신에게 떠넘기는 오레스테스의 모습은 비겁했다. 또한 명색이 신인데도 오레스테스를 변론하는 아폴론의 논리가 너무나 빈약하여 헛웃음이 나왔다. 아가멤논의 죽음은 남자의 죽음이며, 심지어 왕의 죽음이며, 더구나 여인에게 모욕적인 방법으로 당한 죽음이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이 어머니의 죽음보다 더 중한 일이다. 그러니 이런 살인을 저지른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죄가 더욱 큰 것이며 그런 죄인을 벌한 오레스테스는 죄가 없다. 확실히 기원전 5세기의 작품답다.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으니, 당시에는 이러한 논리가 합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발원지라는 명예로운 수식어가 있지만, 지극히 편협한 민주주의였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여성과 노예를 철저히 배제한 백인남성 위주의 민주주의였으니, 당시의 남성우월적이며 가부장적인 논리를 지금의 잣대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아테나의 최종판결에 이르면 더욱 가관이다. 아예 대놓고 편협하며 차별적이다.
나에게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하는 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자비로운 여신들, 736)
그래서 결국 오레스테스는 무죄가 된다. 아버지의 죽음이 더 중한 것이라던 아폴론에 맞서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인 사건을 들먹이며 맞받아치던 코로스의 반박이 빛났지만 아테나의 편파적인 판결로 오레스테스는 무죄를 받는다.
하지만 나는 오레스테스를 무죄라고 보지 않는다.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남편살해나 오레스테스의 모친살해나 명백한 살인이기에 어느 쪽도 무죄일 수는 없다. 남편을 죽인 것과 어머니를 죽인 것. 요즘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존속살해니 비속살해니. 아내를 죽였네, 남편을 죽였네. 각각의 사건마다 각각의 상황이 있을 것이겠기에 섣불리 단정적으로 어느 것이 더 중하네, 덜 중하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코로스가 내내 주장했던 혈족을 죽인 것이 어쩐지 나는 더 무겁게 와 닿는다. 제 부모를 죽이거나 제 자식을 죽이는 일. 가족은 공동체에서 지켜야할 의무의 최소한이라고 생각한다. 지켜내어야 할 도리가 무척이나 많지만 각자에게 가장 기본으로 주어진 의무, 책임, 도리가 가족에게 있지 않을까. 그것조차 지켜내지 못한다면 무엇을 더 지켜내며 살 수 있을까,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제 자식, 제 부모 하나 지키고 살기에도 힘에 겨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지켜냄으로써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 어미를 죽인 오레스테스가 안타깝고 그 후의 삶이 염려스럽다. 과연 모친살해범이라는 오명을 모르는 척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 비록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고는 하나 자신 스스로에게도 무죄를 내릴 수 있을까, 오레스테스는. 어머니가 저지른 죄가 자신의 죄에 대한 합리화도, 면죄부도 될 수 없을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