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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말씀은 시편 112편 9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112편 9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기억되고 그의 영광을 받으며 높아질 것이다.
이 말씀의 요지를 좀 더 알기 위해서는 잠언 22장 9절 말씀도 우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 22장 9절을 표준새번역으로 같이 읽습니다. 시작.
남을 잘 보살펴주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그가 자기의 먹거리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이 시편 112편 9절과 그리고 잠언 22장 9절 말씀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은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남을 잘 보살피는 일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복을 베풀고 싶은 일이라는 거예요.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 이건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복을 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이 받게 되는 복은 어떤 걸까요? 시편과 잠언의 말씀을 요약하면 그들의 행위가 기억되고 영광을 받아 높아지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복인지 분명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복을 받게 될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 우리가 고린도후서에는 심는 것, 뿌리는 것 이런 개념이죠. 심으면 뿌리면 반드시 어떤 복이든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위가 기억되고 영광을 받아 높아지게 되려면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된다는 거니까 씨를 뿌리고 많이 심어야 한다는 겁니다.
10절에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자들이 누리는 또 다른 복이 기록되어 있어요.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이들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 이렇게 있어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거예요. 가난한 자들은 여러분과 저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가난한 자들은 우리에게 그러니까 교회가 공급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사람이 가난한 자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아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거 다시 말하면 교회와 성도를 풍요롭게 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우린 보통 가난한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으면 피해라고 생각하잖아요. 성경적인 관점은 전혀 다른 거예요. 가난한 자들은 나에게 뿌리를 씻었다 그리고 먹을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사람들인 거죠. 교회와 성도들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이 늘 있는 게 정상이고 그들을 돕는 것이 정상적인 영성이라는 거예요. 교회가 공급이 끊어지지 않는 비결은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교회가 세상을 섬기지 않으면 가난해져요. 어쩌면 지금의 교회들이 가난해지는 건 세상을 섬기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지 않으면 가난해집니다. 10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같이 읽어봅니다. 우리 같이 읽습니다. 시작.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또 씨를 마련하여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는 자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풍요롭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은 우리에게 귀찮거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존재예요.
실제로 서울의 한 교회가 이제 독거 노인들에게 우유를 이렇게 일주일에 두 번 이렇게 세 번 공급해 주는 이 사역을 벌였어요. 내 주변에 아무튼 독고노인들이 많기 때문에 꽤 많은 재정이 들어갔습니다. 이 교회가 이것을 1년 한 게 아니라 10년 넘게 긴 시간 동안 이 사역을 했어요.
여러분 이 교회가 가난해졌을까요? 아니요. 풍요로워졌어요. 교인도 더 많아졌고 이 사역을 돕는 사람들도 더 많아졌어요. 심지어 우리나라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가 이 사역을 전적으로 후원해요. 그래서 이제는 제주도까지 이 사역이 퍼져서 확대되어서 이 사역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것이 결국 우리를 가난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도 어려운 사람이 많아서 힘들어요. 우리 가족 중에도 힘든 사람이 많아서 내가 힘이 들어요. 그거는 성경적인 원리는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은 어떻게 말하냐 하면 그들에게 우리가 심으면 그들을 섬기면 하나님이 심을 씨와 양식을 풍성하게 해주신다 그랬어요. 그들은 결국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심어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계속 심을 수 있도록 심을 씨를 공급해 주시고 자신이 먹을 것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는 거예요. 남에게 공급할 것도 계속 주시고 나를 풍요롭게 할 것도 계속 주신다는 거예요.
앞에서도 역으로 한 번 생각했듯이 역으로 생각하면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풍성하게 하는 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거예요.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도우면 심을 씨와 먹을 양식으로 우리는 풍요롭게 되는 겁니다.
심는 개념은 이전에 봤던 것처럼 단순히 가난한 자들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에요. 헌금 자체도 심는 것일 수 있고요. 목적 헌금도 신는 것일 수 있고요.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도 힘든 것일 수 있어요. 어쨌든 섬기는 것, 또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을 심는 것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들을 우리 가운데 이루어 가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결코 가난해지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뭐예요? 열심히 심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심는 것 씨뿌리는 것에는 눈에 보이는 손해가 있어요. 당장 통장이 비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게 돼요. 때로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이 지연될 때가 있어요. 당장 주시지 않고 한참 후에 많은 시간이 흘러서 우리를 풍요롭게 하실 때도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씹는 것에 주저해요. 왜요? 금방 손해가 난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가진 뭔가가 내게서 없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심는 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 영적인 유익들을 우리가 못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하면 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믿음으로 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의롭게 하실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으면서 우리가 열심히 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인 거예요.
아마 여러분과 저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베푸는 것 심는 것은 나의 재산을 증식시키는 방법이다. 이런 믿음이 있어요. 저도 이런 믿음이 있어요. 아마 여기 앉아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도 이런 믿음이 있어요. 베푸는 건 내 재산 증식의 방법이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철저하게 이런 생각을 경계합니다. 저도 이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일을 대개 우려하면서 명확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순종할 때 첫 번째로는 하나님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형제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쓰임 받는 것이지 내가 나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심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내가 쓰임받는 길이라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도움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진다는 겁니다. 찬양과 경배가 하나님께 올려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씹는 것은 우리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영광을 얻기 위한 수단도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는 것을 나를 부용케 하는 방편으로 생각해요. 최종적으로 그런 결과가 올 수는 있겠지만 바울은 이 생각을 철저히 경계해요. 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수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지, 이것이 내 부의 부 축적의 도구는 아니라는 거죠.
더 나아가서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 영광이 돌려드리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길인 거지 내가 영광을 받기 위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돕는 일을 통해서 내가 영광을 받기를 되게 기뻐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내가 돕는 것을 사람들이 몰라주면 되게 섭섭해하고 힘들어하고 1~2년은 하다가 다들 멈춰요. 그래서 바울이 이 일을 아주 경계하면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 심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잘 심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 외의 명령에도 하나님께 순종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성령과 동행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 마음이 그들을 주장하고 있다는 의미예요. 하나님이 그를 주관하고 일 수 있기 때문에 심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의미가 있는 거예요. 교회가 주저하지 않고 심는 거 심을 수 있다는 것 성도가 주저하지 않고 심을 수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할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아주 큰 이런 말이 이상하지만 어떤 믿음의 경지에 그 교회가 도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지표죠? 교회의 건강 지표, 교회가 하나님 안에 있는가를 좀 따져볼 수 있는 지표 지표와 같은 것입니다. 심는 거 뿌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나 개인이 영적으로 아주 든든하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것에는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어요. 바울이 이것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이 사건은 흩어진 교회들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하고요.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일부라는 것을 알게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는 계기가 이 고린도 교회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교회론이죠? 교회론이 대개 성숙해지기를 교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고, 고린도 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교회가 별도의 공동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사역들은 이런 큰 의미를 담고 있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가 하는 명령에 순종하잖아요. 이 순종은 단순히 그냥 어떤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을 넘어선 큰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바울이 이것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거예요.
너희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심는 것, 연약한 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것에는 이런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너희가 기쁨으로 이 사역에 동참해라
라고 그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역하는 것 그 이상의 큰 의미가 우리의 사역에 들어있어요. 이걸 발견해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사역하다가 실족하거나 넘어지지 않아요. 성도들이 많이 실족하고 넘어지잖아요. 그 이유는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의미를 못 찾아서 그래요. 목사인 제가 그걸 또 잘 설명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죠.
근데 사도 바울은 행여나 고린도 교회가 그럴까 봐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차근차근 하나씩 다 설명해 주고 있어요.
심는 것은 심을 씨와 그리고 너희의 공급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의 육체를 베부리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송받게 하는 일이다
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거예요. 알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섬기는 것 심는 공동체는 그 심는 것과 섬기는 것의 이상의 의미가 그 공동체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만큼 공동체가 성숙하고 성장해 있다는 것을 또 알길 바랬어요. 그래서 바울이 이 편지를 계속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 대부분 헌금강조라는 생각을 해요. 헌금에 대해서 예민한 사람들은 오늘 본문 지난주도 그렇고 그 지난주도 그렇고 보면 대부분 헌금 강조의 포인트가 맞춰져 있어요. 진짜 본문의 의도와는 너무 멀리 있는 거예요. 아마 대부분 다 그럴 걸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우리는 대부분은 헌금강조의 포인트가 맞춰요. 그 이상의 의미를 못 찾아내는 거죠. 우리가 대표 기도하는 것은 대표 기도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내가 누군가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그걸 찾아야 대표 기도를 온전히 할 수 있고요. 교회를 청소하는 것은 청소하는 것에 이상이 있어요. 교사를 하고 찬양단을 하고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행위 이상의 것들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을 찾는 사람들이 참되게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거예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성숙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심을 씨앗과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는 수단과 도구들인 거죠. 따지고 보면 축복의 통로인 거예요. 이 사람들이요.
교회가 이들을 도우면 교회는 풍요롭게 돼요. 성도들이 이들을 도우면 성도는 풍요롭게 돼요. 하나님 풍요롭게 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뒀어요. 그래서 불편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열심히 섬기고 도와줘야 될 사람입니다.
저는 학부 때부터 20살 때부터 밀알이라는 장애인 단체에서 사역을 하고 지금도 이제 밀알이 지방에서 사역을 많이 해요. 이제 대구에도 많은 이제 밀알 관련된 업체들이 봉사단체들이 막 많이 세워지고 그 일에 저도 조금씩 동참을 하고 있어요. 워낙 오래 했던 일이니까.
근데 정말 신기한 건 이 단체가 얼마나 이렇게 말하면 이 사람이 커졌는지 몰라요. 정말 아무것도 없던 단체거든요. 장애인들을 도왔더니 풍요로워졌어요. 심지어 그 단체를 섬기는 사람들도 폭력으로 맞았어요.
이게 이상한 거죠. 너무 이상해요. 제가 아는 형 한 분은 목사 안수를 포기했어요. 포기하고 장애인을 평생 섬겼어요. 최근에 이제 제가 알기로는 이제 신대원을 졸업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안수를 받았는지까지는 제가 최근에 못 물어봤는데 신대는 졸업을 했어요. 최근에 근데 따지고 보면 평생 장애인을 섬겼잖아요. 가난해야 정상인데 그렇지가 않아요. 물론 평생 선교보다 가난한 분들이 있긴 있어요.
제 요지는 그런 차이점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 씹는 것이 결국 우리를 궁핍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온전히 바른 믿음으로 바른 신앙으로 심으면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심는 것에 대한 좀 믿음을 가져야 돼요.
결코 손해되는 일이 아니다.
교회와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끊임없이 내가 누군가를 섬길 수 있는 축복의 통로이기도 하다
라는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잘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