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경(裵玄慶)과 배극렴(裵克廉)
배현경(裵玄慶,?~936)과 배극렴(裵克廉.1325~1392)은 각각 고려와 조선의 창업 공신이다.
이들은 모두 배(裵)씨 가문을 빛낸 출중한 인물들이다.
경주배씨(慶州裵氏)의 시조 배현경은 홍유,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고려 4대 개국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배현경은 담력이 보통 사람보다 특출했다.
그래서 비록 병졸 출신이었으나 계속 승진하여 대광(大匡)에 올랐다.
배현경은 본래 궁예의 부하로서 병사로 시작하여 마군장군(馬軍將軍.기병대장)이 되었다.
그는 궁예가 개국할 때에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폭정이 심해지자 배현경은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한다.
배현경은 919년(고려 태조2년)에 도읍지를 송악으로 옮길 때 개주도찰사로서 새 도읍을 건설하는데
앞장섰으며,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데도 공을 세웠다.
936년(태조19년) 배현경이 병으로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을 갔다.
왕은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고 했다.
그리고 왕이 밖으로 나가자 배현경은 곧 죽었다.
태조 왕건은 가마를 멈추고 통곡했다.
배극렴은 고려 충숙왕 2년(1325년) 경북 성주읍 대황동에서 위위소윤(衛尉小尹)으로 있던 아버지
배현보와 어머니 서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산(京山) 혹은 성산(星山)이다.
배극렴은 우시중으로 있던 1392년 조준, 정도전 등과 모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국 일등공신이 되어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이 됐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관향인 성주 관하리에 살고 있을 때 그는 근처의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짓게 했다.
백성들은 그의 공을 고맙게 생각해 그 곳의 땅이나 하천을 배천(裵川), 배야(裵野) 라고 불렀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 진주목사로 부임했을 때는 산에서 잣나무를 북쪽 관아에 옮겨 심었다.
진주 사람들은 배극렴을 추앙해 이 나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했다.
배극렴은 고려 우왕 4년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합포성을 쌓았다.
경상남도 마산시 합성동에 위치한 이 성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성의 원형이 거의 소실되고 석벽 일부와, 성을 쌓았던 그 당시의 돌들만 흩어져 있다.
이 성은 천시, 지세, 인화가 일체된 성이라는 점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다.
성의 철저한 경계를 위하여 성의 요소마다 회례문(남문), 회의문(서문), 지용문(북문), 원인문(동문) 등
4대문을 두었다. 조선조 때에도 여기에 영을 두었다가 선조 때에 진주로 옮겨갔다.
고려 말년에“비의군자(菲衣君子)의 지혜로 삼한을 바로 잡는다”라는 말이 떠돌아다녔다.
‘非'와 ‘衣'를 합하면 ‘배(裵)' 자로 이는 바로 배극렴을 가리켰다.
고려 말 국운이 기우는 민심과 당시 그의 덕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392년 이성계가 세자를 책봉할 때 조준, 배극렴 등은 “평화시에는 적자가 책봉돼야 하고 난시에는
공이 많은 사람이 세자로 책봉돼야 한다.”며 이방원을 의중에 두고 주장하다가 묵살 당했다.
이로 인해 조준은 사직 당하고, 배극렴은 불정면 삼방리로 귀양을 갔다.
이방원은 임금이 된 뒤 배극렴이 머물던 이곳의 산을 어래산(御來山), 마을을 삼방리(三訪里)라 부르게
했다. 배극렴은 1392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편 경주배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6부 촌장 중의 한 사람인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只他)가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고 총재태사에 올랐다.
그 후 32년(유리왕9년)에 금산가리촌을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성을 배(裵)씨로 하사했다.
후에 한지부가 경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관을 경주로 했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은 기록이 없으며,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배씨는 후대에 내려오면서 고려조에 공이 있어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진 배원룡(裵元龍)의 후손이
분성배씨,
고려 원종 때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진 배인경(裵仁慶)의 고조 배위준(裵位俊)의
후손이 성산배씨,
고려조에 나라에 공이 있어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배운룡(裵雲龍)의 후손이
달성배씨,
충숙왕 때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진 배전 의 5대조 배경분(裵景分)의 후손이 흥해배씨,
달성배씨에서 9세손 배맹달(裵孟達)이 세조 때 곤산군(昆山君)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이 곤양배씨 등으로
갈라진다.
그밖에 경주 처사공(處士公) 충과파(忠果派), 성산 복야공(僕射公) 영찬파(英贊派), 화순
진사공(進士公) 연파(練派), 함흥 교서공(校書公) 덕수파(德秀派), 협계 합문사인공 진파(縉派) 등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모두 경주배씨의 분파다.
시조와 중시조가 같은 뿌리이므로 근래에는 경주로 일원화했다.
배씨는 고려 개국공신이며 중시조인 배현경의 후광을 받아 고려조에서 번영을 누렸다.
조선조에서도 영의정 1명, 청백리 1명, 공신 2명, 문과 급제자 47명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배씨는 2000년에 총 59개의 본관에 인구는 372,064명이다.
성주배씨 90,239명, 분성배씨 71,268명, 달성배씨 61,104명, 성산배씨 36,164명, 흥해배씨 29,210명,
경주배씨 22,069명, 곤양배씨 7,328명, 나주배씨 3,789명, 협계배씨 63명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