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핸들
방향이 중요하다. 방향은 연결한다. 연결하면 커지고 커지면 이긴다. 방향은 공격 아니면 수비다. 공격은 하나만 뚫으면 이기고 수비는 다 막아야 이긴다. 공격은 하나만 뚫으면 이기므로 널리 연결하고 수비는 다 막아야 이기므로 지역방어로 흩어진다.
공격과 수비는 대등하나 공격이 유리하다. 무승부면 교착되고 수비가 이기면 대결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럴 때 우주가 죽고, 생명이 죽고, 문명이 죽는다. 공수가 대등한 이유는 공격 측이 이기되 속도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주의 근본원리다.
산의 정상은 하나이고 기슭은 다양하다. 보편성과 특수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획일성을 싫어하고 다양성만 좋아할까?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고 방어하려고 하는 부정적 사고 때문이다. 공격자의 긍정주의, 낙관주의로 갈아타야 한다.
산의 정상은 기슭을 통제하나 기슭은 정상에 맞설 수 없다. 정상에서 모두 만나 밸런스를 이루지만 기슭은 흩어져서 밸런스가 없다. 정상은 기슭을 향해 지렛대를 사용하지만 기슭은 어쩔 도리가 없다. 모두 연결된 정상의 보편성에 공격 주도권이 있다.
지식인은 공격자다. 진리는 공격이다. 과학은 공격이다. 필연과 우연, 진보와 보수,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이나 조절장치는 필연에 있고, 진보에 있고, 선에 있다. 지식인이 정상에 서서 보편성의 조절장치를 장악하고 게임을 주도하면서 긍정해야 한다.
에너지의 결
사람은 한 사람씩 있고, 사물은 한 개씩 있고, 나무는 한 그루씩 있다. 음식은 한 그릇씩 팔고 과자는 한 봉지씩 판다. 그것은 단위다. 어디를 가나 단위가 있다. 인간이 세기 좋도록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단위 중심으로 사고한다.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단위는 존재의 진실이 아니다. 단위는 인간 마음 속에 있다. 자연은 색色이 아니라 공空이다. 자연은 단위가 없다. 대신 메커니즘이 있다. 원인과 결과다. 결정자와 전달자다. 원인은 결정하는 메커니즘이고 결과는 전달하는 단위다. 단위는 잠정적인 형태다.
굴러다니는 돌이 정확히 한 개로 되어 있는건 아니다. 흙이 정확히 한 무더기로 있는게 아니다. 부서져서 흙인지 뭉쳐서 돌인지 애매한 상태로 있다. 식물도 많은 경우 어디까지가 한 그루인지 명확히 나눠지지 않는다. 단위는 인간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세상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대칭이다. 단위는 받는 자 입장이다. 받는 자는 결정권이 없다. 주는 자는 메커니즘으로 존재한다. 주는 자는 일정한 단위가 없고 상대를 봐가며 그때그때 형태를 만든다. 에너지는 받는 자의 형편에 맞게 자신을 조절하여 준다.
주는 자는 자신을 조절하므로 고정된 단위가 없다. 에너지는 닫힌계를 이루고 내부에 밸런스와 지렛대를 만들어 조절한다. 밸런스로 동력을 모으고 지렛대로는 힘을 전달한다. 단위가 아니라 단위를 만드는 자궁이다. 메커니즘 중심의 사고를 익혀야 한다.
보편적 진리
어떤 생각이 맞느냐 틀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이 이어지느냐가 중요하다. 한 걸음 더 전진했느냐가 중요하다. 방향이 맞으면 계속 가야 한다. 생각이 이어지면 방향이 맞다. 중간에 끊어지면 방향이 틀린 것이다.
생각을 이어가는 방법은 넓은 곳에서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범위를 좁혀가는 것이다. 출발점이 중요하다. 보편 아니면 특수다. 보편은 넓은 곳이고 특수는 좁은 곳이다. 진리는 보편성이다. 보편으로 방향을 잡고 넓은 데서 시작해야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
메커니즘이냐 단위냐다. 메커니즘은 범위를 좁히고 단위는 범위를 좁히지 못한다. 메커니즘을 따라가면 흥하고 단위를 따라가면 망한다. 인간의 실패는 단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메커니즘 중심으로 보는 보편성의 사고방식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에너지의 방향은 갈수록 작아지는 마이너스다. 우주 안의 모든 힘은 미는 힘이다. 세상은 깔때기다. 모든 의사결정은 간격을 좁힌다.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다. 밸런스가 내부의 힘을 모으고 지렛대가 외부로 내보낸다.
닫힌계를 지정하고 압력을 증가시켜 내부를 균일하게 한 다음 압력을 단계적으로 감소시키면 메커니즘이 단위로 바뀌고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작동한다. 그럴 때 에너지의 일방향성이 드러난다. 전체가 한 줄에 꿰어지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복잡성 문제
범인은 이 안에 있다. 단계적으로 범위를 압축할 수 있다. 아닌 것을 제거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잃어버린 동전은 도깨비로 둔갑하여 도망치지 않았고 사차원의 구멍으로 빠지지도 않았다. 떨어진 동전은 주변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확신을 가져야 한다.
주변을 100구역으로 나누어 99구역을 조사했는데 모두 실패했다면 나머지 한 구역에 동전이 있을 확률이 100퍼센트다. 그것을 믿을 수 있느냐다. 보통은 99번 실패했으니 나머지 한 번에 성공할 확률은 1퍼센트라며 포기한다.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하지날 정오에 위도가 다른 두 지점의 그림자 기울기 차이를 보고 지구 크기를 쟀는데 시대를 감안하면 놀라운 정확도로 맞았다. 수학은 연역이므로 믿을 수 있다. 틀려도 자가 잘못된 것이지 이론이 틀린건 아니다.
헷갈리는 것은 복잡성 때문이다. 복잡성은 중복과 혼잡이다. 같은 것의 중복을 제거하고 다른 것이 끼어든 혼잡을 걸러내면 단순화 된다. 단순화 하면 보편성이 작동한다. 특수성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두개다. 하나를 제거하여 보편성으로 바뀐다.
특수성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고 조건이 붙는다. 에너지를 주는 쪽과 받는 쪽이 대칭될 때 특수성이 작용한다. 받는 쪽을 고정시키면 된다. 과녁을 고정시키고 바람이 없는 실내에서 활을 쏘면 실력대로 점수가 나온다. 특수성은 보편성으로 바꿀 수 있다.
지구는 돈다
보편성은 필연이고 특수성은 우연이다. 필연은 하나의 조건이 결과를 결정하고 우연은 두 가지 조건이 결과를 결정한다. 원인이 둘이다. 간단하다.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를 제거하면 된다. 주사위의 조건과 바닥의 조건이 있다. 조건이 둘이면 우연이다.
생물의 진화를 결정하는 요인은 둘이다. 유전자의 변이와 환경의 변화다. 변인이 둘이므로 진화는 우연이다. 틀렸다. 생태적 지위는 정해져 있고 진화압에 의해 맞는 생태적 지위를 찾을때까지 계속해서 변이를 일으키므로 자기 생태적 지위를 찾아간다.
원인이 하나이므로 진화는 필연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독성의 감소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내부에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독성이 약한 바이러스가 이긴다. 이기지 못하면 이길때까지 변이를 일으키므로 결국 이기게 되어 있다.
생태계에 조절장치가 있다. 모든 의사결정 메커니즘에 조절장치가 있다. 변인 둘을 하나로 줄여서 조절한다. 투수와 타자가 둘이므로 우연이다. 좋은 투수는 타자쪽 변수를 무시하고 배트를 어떻게 휘둘러도 아웃시킨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가능하다.
닫힌계를 걸고 압력을 늘리면 내부가 균일해지고 밸런스가 작동한다. 밸런스의 대칭 2가 지렛대의 코어 1로 바뀐다. 방향이 좁혀져서 에너지의 일방향성이 작동한다. 특수는 보편으로, 우연은 필연으로 바뀌고 조절장치가 작동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