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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집 해제
I. 매월당의 생애와 사상
1. 기인奇人의 행적과 그 정체
아니꼽고 역겨운 현실을 반대하는 모반인謀叛人
그들은 언제나 무지와 편견과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출하는 데에 그들의 삶의 보람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어느 시대, 어떤 겨레에 있어서나 이 같은 사람들이 있어 왔기 때문에 인류의 문화는 향상하면서 발전하여 왔던 것이다.
여기 우리는 우리의 문학사상에 있어서 아니꼽고 역겨운 현실에의 모반인
김시습이 있었음을 기억함으로써 우리 문학의 명맥이 새 힘을 얻었음을 기념해야 하겠다.
조선조 초기 조고계操狐界의 천황天荒을 깨뜨린 전기傳奇 문학의 백미白眉라고 평가받은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작자 김 시습은 그의 지닌바 곧은 성격과 그가 겪은 바 기구한 생애로 말미암아 후세의 호사가好事家들의 야사野史ㆍ수록隨錄의 좋은 소재로 취재되어 많은 문헌들에 전승, 기록되면서 실로 역사상에 드문 신인神人·술가術家·괴한怪漢·기승奇僧으로 알려져 왔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문헌에 의하면 실재實在한 김시습과는
아주 거리가 먼 가공적이고 우상화된 인물로서 나타나 있음을 본다.
그러나 필자가 보는 바로는 김시습은 적어도 다음에 드는 세 가지 각도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첫째로 김 시습은 조선 왕조 건국 당초의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인 기성세력에 감연히 육박하면서 성장하여 가는 신흥 사류파土流派의 동반자적同伴者的 전위분자前衛分子로서 굽힐 줄 모르는 정치적 양식良識을 지닌 불우한 한 사람의 정객政客이 어떠한 생애를 살았는가를 검토해야 하겠고
둘째로는 유불교체기儒佛交替期에 위치한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철두철미하게 현실을 부정하려는 불교 이념에 입각한 생활 태도와 이와는 상반되는 교양과 양식으로 정신 무장을 이루고 있는 유교儒敎 이념의 틈바구니에서 번민하면서 이 양대 사상을 한 사람의 사상가로서 어떻게 지양, 극복하였는가를 검토하여야 할 것이며
셋째로 그와 같이 불굴의 정치적 양식을 지닌 전환기의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때로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때로는 추오하고도 가증스러운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 분열 속에서 번민하는 그의 실존을 작품 활동을 통하여 어떻게 형상화시켜 내었는가를 검토함으로써 문학가 김시습의 역사적 진가眞價를 찾아내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잠시 김시습이 생존했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 왕조 건국 당초에 부르짖었던 사전개혁론私田改革論은 결국 중앙 집권적인 봉건 관료들의 토지 소유 제도의 재편성이라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 관료 기구의 확정에 따르는 토지 소유 관계의 변동은 곧 파당적인 정당政黨의 초래를 면치 못했던 시기였다.
이제 구체적으로 건국 당초의 이런 현상을 몇 들어보면
이성계李成桂의 5남 방원芳遠(태종)이 世子인 태조의 막내아들 방석芳碩 일파를 처치한 골육상잔
또는 태조의 4남 방간芳幹과 방원의 싸움인 정도전鄭道傳의 난亂등을 들 수 있겠고
같은 뜻에서 우리의 관심 대상인 김시습의 시대적 배경을 이룬 首陽大君의 왕위 찬탈과 누차에 걸친 단종端宗의 복위 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 든 그러한 정변政變이 있을 적마다 토지 소유제는 재편되어 몰적沒籍 재분배되었다는 사실이 곧 그런 사정을 잘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김시습은 중앙 집권적인 봉건 왕정이 교체된 직후에 태어나서
신구 관료군의 대립과 항쟁의 도가니 속에서 그의 생애를 끝마친 전환기의 제물이었다 할 것이다.
즉 그는 토지 소유권의 재정비라는 시대적 각광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에 앞선 기성세력의 보루는 그로 하여금 그 특권을 누리게 하지 않았고
그의 동조자들이 실권을 장악하였을 때에는 그는 이미 능력을 상실한 한갓 불평분자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낡은 시대의 지도 이념인 불교의 세력이 꺾여가는 반면에 새 시대의 지도 이념으로 등단한 性理學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김시습이 아직도 전래의 타성을 멈추지 않고 있는 불교에의 미련을 끊지 못하고 평생을 승려의 행색을 하여 그의 생애를 마치게 된 것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는 그 자신이 그의 그러한 행적을 설명하되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려는 뜻이고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의 뜻을 나타내려 함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요컨대 상치되는 두 개의 이념 사이에서 전환기에 처한
한 사람의 지성인으로서의 고뇌를 면치 못한 시대의 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타협과 저항의 분기점에서 그의 젊음을 불사르고 방랑의 길목에서 환속還俗도 하여 보고
모인조소侮人嘲笑하는 일사逸士이면서도 오히려 名分에 얽매인 범인으로 후퇴하기도 했다.
이것이 곧 그가 처하고 있던 역사적 성격의 거울로서의 그의 참된 모습이었으니 그는 왕정의 교체기에서 새 빛이 약속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영달을 위해서는 아직 시기가 일렀고 유불儒佛의 사상적 교체의 틈에 끼어서는 새로운 이념인 유교의 지나친 명분이 그로 하여금 낡은 이념인 불교의 세계로 후퇴하기를 강요하였기에 그는 이 시기 지성인의 하나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2. 신동神童의 수난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塞子ㆍ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贊世翁,
법호法號는 설잠雪岑이라 하였으니 그의 관향貫鄕은 강릉江陵이다.
先代는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원성왕元聖王의 아우 주원周元의 후손이고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 시중侍中 김연(金淵·김태현金台鉉이라 한다.
증조부 김윤주金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조부 김겸간金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선사仙槎 장씨張氏였다.
신동 김시습은 세종 17년(1435)에 서울 성균관成均館 부근에 있는 사저에서 출생하였으니
그는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생지지질生知之質’을 타고났다고 할 만큼 그 천품이 영민하였다.
다섯 살 때에는 이미 세종 대왕의 총애를 입어 후일이 자못 기대되는 바 있었다.
그는 13살에 이르기까지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또 당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며 후진 교화에 40년이란 긴 세월을 바쳤다는 유명한 교육자 김반金泮의 문하에서 혹은 국초 사범지종師範之宗이라고까지 칭송을 받던 별동別洞 윤상尹祥의 문하에서 수학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타고난 재질에 이름난 스승을 만나 그의 학업은 일취월장하여 갔다.
그러나 조물주가 시기를 하였던지 신동 김시습은 계속하여 그의 어린 시절을 탄탄한 대로를 걷지는 못하였다.
즉 그가 15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를 여의게 되자 외가의 농장으로 내려가서 몸을 의탁하고 수분守墳하던 중 3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여 오직 믿고 있던 그의 외조모마저 세상을 뜨니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으나 그때에 아버지는 중병으로 말미암아 거의 가사를 돌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렇듯 중첩하는 가정적 파란 속에서 그는 다시 계모를 맞이하였고
이어서 훈련원訓鍊院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맞아 장가도 들었으나 그의 앞길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만 갔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학업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닫고
드디어 번거로운 장안을 등지고 三角山 重興寺로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같이 그가 입산 수학하게 된 것이 몇 살 때인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아뭏든 다시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얻은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드디어 그의 생애를 갈라놓은 단종端宗 손위遜位의 변을 그 山寺에서 만나게 된 것이 비극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즉 앞에서 말했듯이 세종대왕의 기대가 컸고 신동의 이름으로 그 재명을 떨치던 김시습이 어찌하여 20살이 되도록 科擧에 한 번도 응시를 하지 않았으며 또 당시에 창설되었던 四部學堂에도 진학하지 않고 이 선생, 저 스승을 번갈아 찾아다니다가 급기야는 산속 절간에 가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하는 문제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즉 그 하나는 김시습의 지닌바 그의 인생관이나 사회관이 어려서부터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고 官學에 나가는 것이 싫어서 사부학당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으면 객관적인 조건 즉 당시의 사회적인 제약이 그로 하여금 그럴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던지의 어느 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家系로 미루어 그의 출신이 武家系였고 그의 아버지는 겨우 음보蔭補로서 충순위忠順衛라는 무관직을 얻기는 했으나 병으로 말미암아 부임하지도 못했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당시의 명문거족의 문벌에 태어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리 좋은 조건 아래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신분은 못 되었다고 보인다. 더구나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건국 이래로 억무숭문抑武崇文의 정책을 국시國是로 삼았기 때문에 김시습의 벼슬길은 더욱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따라서 그는 제왕의 커다란 기대와 장차 크게 등용하겠다는 굳은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그 뜻을 이룰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그의 객관적인 조건이 불리하였던 탓으로 영광스러운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기세조속棄世嘲俗하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3. 방랑과 은둔 속의 청춘
그러한 환경과 조건 아래 그는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 독서하다가 21살 되는 해에 수양 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 그 길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전국 편력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탕유관서록岩遊關西錄> 후지後志에 보면 어느 날 홀연히 감개한 일을 만나(단종이 쫓겨난 알)
매양 산수에 방랑하고자 하던 뜻을 결단하고 중의 행색을 가탁하여 송도松都로 향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때 떠나는 심회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내 어려서부터 마음이 훤칠하여 名利를 즐겨하지 않으며 生業을 돌보지 않고
오직 淸貧으로 뜻을 지킴이 나의 회포인지라 본시 산수에 방랑하기를 바랐었다.
이 글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생활에 패배하고
현실을 거부하는 지식 청년의 특징적인 고민을 엿볼 수 있을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기성 관료층에 대한 철저한 저항 의식을 읽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송도(개성)에 당도한 그는 5백년 사직을 지켜온 옛 성터에 올라도 보고 텅 빈 옛 수도의 거리를 배회하면서
옛 정이 새로운 궁전과 능묘陵墓에 다북쑥이며 수숫대가 우거진 광경을 바라보고 어찌 느낌이 없을까보냐고 하였다.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천마산天摩山ㆍ성거산聖居山에 올라
중봉衆峰의 깎은 듯 높은 경치며 박연폭포朴淵瀑布의 웅장한 모습을 완상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는 다시 관서지방으로 나아가 절령(思嶺)의 험한 고개를 넘고
패수浿水의 물을 건너 평양平壤의 천년 묵은 성곽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어 살수薩水의 끝을 거슬러 안시安市에 다다르니 수당공방隋唐攻防의 참담한
옛 싸움터가 나그네로 하여금 배회주저하게 하여 실로 천고의 한을 충격함에 족하다고 하였다.
다시 향령香嶺에 올라 멀리 발해도서渤海島嶼의 아득함과 북으로 삭막한 산하의 험준한 모습을 바라보며
천지자연의 무궁한 변천과 그 정화를 마음껏 즐기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드디어
내 만일에 벼슬살이를 하였던들 이 아름다운 경치를 어찌 즐길 수 있었으며 또한 이러히 마음껏 노닐 수 있었으리요.
오호라, 사람이 천지의 사이에 나서 한갖 名利에 얽매여 生業에 허덕인다면 이 몸의 괴로움이
어찌 저 뱁새가 능초陵茗를 그리워하고 표주박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라고 하였으니 이때 그는 이미 생활 전선에의 의욕을 완전히 잃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등지고 살겠다는 뜻이 완전히 굳어졌다고 보인다.
이리하여 4년간의 관서지방 유람을 마친 그는 24살 되는 해에 다시 발길을 돌려 관동 지방으로 들어갔다.
동으로 금강金剛·오대五臺에 올라 아름다운 강산의 기이하고 영롱함을 마음껏 즐겼다.
이어 강릉江陵동쪽으로 나아가 경포대鏡浦臺ㆍ한송정寒松亭에 이르러 옛 신선의 끼친 발자국을 더듬으며
赤壁賦를 읊던 소동파蘇東坡와 그 심경을 비겨 보기도 하였다.
개심開心의 비폭飛瀑이며 풍악楓岳의 백석白石, 명연鳴淵의 훤칠함을 바라보면서
속세에 더럽혀진 티끌을 말끔히 씻은 반면 현실에 대한 매력은 더욱 잃게 마련이었다.
2년 동안의 관동 유람을 끝낸 그는 26살 되는 해에 다시 발길을 돌려 호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풍성한 남국의 물자와 찬란한 문화는 관서·관동 지방의 승경에 못지않게 그를 감격시켰다.
늙은 매화·성긴 대밭·겨울 치자·긴 난초, 귤과 유자가 가을에 익고 비자와 잣나무가 겨울에 푸르렀으니 그의 눈을 즐겨 주는 데 족하였다. 또 감이며 밤을 비롯하여 생강밭・목화밭의 풍성한 모습은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었다.
이렇듯 알찬 삶의 보람이며 풍부한 물산이 해동 여러 지방에서 으뜸간다 하겠으나 그 옛날 百濟의 패망이 곧 이 풍성한 물자를 믿고 국민이 오만하고 안일하게 지낸 결과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오히려 역사의 원리를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이렇듯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격양가擊壤歌 소리 높은 호남의 풍물을 보고 난
김 시습은 겨우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고 보인다.
북으로는 안시•향령을 넘고 동으로 금강산·오대산을 거쳐 남으로 다도해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방랑하는 동안에 어언간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21살로부터 29살이라면 여느 사람 같으면 황금과도 같은 청춘 시절이다.
이 청춘의 황금 시기를 그는 오로지 산수에 방황하면서 세월을 보내었다.
타협과 굴복을 거부한 지성인의 고난의 댓가로는 너무도 냉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평소에 아껴 주던 정창손鄭昌孫은 영의정領議政이었고 김수온金守溫은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어 있었으니
이렇듯 대조적인 현실을 그가 용납할 도리도 없었다고 하겠다.
그가 31살 되는 해 봄에 그는 경주 남산 金鰲山에 금오산실을 짓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였다.
10년 가까운 방랑 생활을 마친 그는 나이 30 고개를 넘어서게 되자 그의 심경이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고 보인다.
수양 대군의 不義로운 폭력에 반기를 들고 현실을 저주하면서 방랑의 길을 떠난 그가 10년이 지난 후에 흥분이 가라앉고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었기에 금오산에 자리를 잡고 평생을 마치기로 결심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드디어 금오산 남쪽 동구에 있는 용장사茸長寺라는 절간에 머물면서 매월당이란 서재를 근거로
인생과 자연을 해석하고 사색하면서 국문학사 상에 빛나는 명작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창작하였다.
그는 5살의 어린 몸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장차 크게 등용할 것을 약속받았으나 단종 손위라는 뜻하지 않은 변고로 말미암아 그 꿈이 깨뜨려졌고 나아가서는 정치의 이면에 숨은 추악한 현실을 정시할 때에 그는 정치에의 불신이 더욱 자라나는 가운데에 좀 더 순수한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그의 이상의 세계를 문학 활동에서 찾아 <금오신화>를 창작하기에 이르렀다고 보인다. 따라서 이 <금오신화>는 진실로 그의 고고청순孤高淸純한 인간 정신의 발현이며 고독한 청춘 번민의 양상이라고 할 것이다.
이 작품에 등단하는 모든 주인공들은 한결 같이 질곡과 같은 현실 세계를 벗어나
미지의 신비계를 방황하고 인습적인 사상 감정의 굴레를 훨훨 벗어버리고 보편 영겁의 세계를 날고 있다.
그들은 세속적인 권위나 財寶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고 오직 초자연의 魔法을 좇아 행동하고 있다.
이것이 곧 작자 김시습의 인생을 이해하고 우주의 신비를 추궁하려는 知的 노력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4. 분열증分裂症으로 보낸 장년기
이 같이 금오산에서 6,7년을 보내는 동안 중앙에서는 世祖와 예종睿宗의 두 임금이 바꿔지고 成宗이 등극하여
武斷 신불信佛의 폐단을 개혁하고 숭유문치崇儒文治를 표방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였다.
이에 김시습은 성종 2년 그가 37살 되는 해 봄에
서울로부터의 청이 있어 오래 정든 금오산실을 하직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20년 가까운 청춘기를 방랑과 은둔으로 세월을 보냈던
그가 다시 서울에 돌아와 보니 때는 이미 그와 교의가 두터웠던 친구들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즉 서거정徐居正은 달성군達城君으로 봉작封爵을 받고 있었고 아울러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하고 있었으며
정창손鄭昌孫은 영의정, 김 수온金守溫은 좌리공신佐理功臣, 노사신盧思愼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등이 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안 그는 서울 온 이듬해에 城東)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복축卜築하고 그곳에서 평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40 고개를 넘은 그의 심경이 단순하게 평온할 수만은 없었다.
하루는 술을 먹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의정 정창손이 지나는 것을 보더니
“야아 이놈아, 이제 그만 해먹어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다.
또 한 번은 서거정이 조정으로 나가면서 기세등등하게 벽제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는 것을 본 김시습은 남루한 의복에 패랭이를 쓰고 허리에는 새끼 띠를 두르고 벽제 꿈 속을 헤치고 나타나면서 “야아 강중剛中(서거정의 자아, 너 요즘 편안하구나.”하며 외쳤다고 한다.
그때 서거정은 광주廣州·임진臨津ㆍ토산兎山 등지에 광대한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시습 자신은 성동 땅에 겨우 몇 두덩의 농토를 얻어 몸소 농사를 지었으나
그 반은 관원이 빼앗아 갔고 반은 들쥐와 산새들이 먹어치워 버리는 형편이었다.
지난날의 친지들이 누리는 그 영화와 참담한 현재의 자신을 비교했을 때에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 없어 길거리에서 고관대작을 만나면 그렇게 봉변을 주었다고 보인다.
그는 또 어느 때인가 다른 사람이 그의 전답을 빼앗아 농사를 짓는 것을 모른 체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그 사람에게 자기의 전답이니 돌려달라고 졸라대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끝끝내 자기가 주인이라고 우기기에 김시습은 관가에 재판을 걸어서 가까스로 농토를 되찾기에 이르렀다.
승소한 문서를 들고 나오다가 관가의 정문 앞에 이르자 그는 그 승소한 문권을
갈갈이 찢어서 시냇물에 던지고는 하늘을 우러러 껄껄대고 웃었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자기를 따르는 사람에게 돌팔매질을 하기도 하고 시장바닥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멍청히 정신 빠진 사람처럼 서 있으니 어린아이들이 깨어진 기왓장을 던지고 그를 쫓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를 욕하는 사람이 있더라는 소문을 전하는 이가 있으면 그는 좋아하고 거짓 미친 체하고
속은 따로 있다더라는 소문을 전하는 이가 있으면 얼굴을 찡그리고 기색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김시습의 행동은 저 유명한 고독한 예외자例外者 키에르케고호르가
코펜하겐의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었던 일을 연상하게 한다.
수많은 코펜하겐의 시민들로서 키에르케고오르를 모르는 이가 없었지마는 키에르케고르의 고민이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사람이 없었듯이 서울 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김시습을 모르지는 않았으되 김시습의 고민을 아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김시습의 그러한 행동은 어찌 보면 일종의 정신 분열증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모순된 사회에서 모순된 행동을 취함으로써 俗衆들을 모멸했지마는 오히려 그 속중들은
김시습을 奇人·怪僧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라 하겠다.
고독한 예외자 김시습은 속중들에게 조소를 받고
철모르는 아이들에게 돌맹이를 얻어맞고도 양심과 지조를 버리지는 않았다.
비록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기인·괴승의 이름이 붙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스스로를 속중 속에 더럽히기를 꺼려했으니
그가 겪은 수난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고귀한 것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리라고 본다.
그는 47살 되는 해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조부에게 제문을 지어 올려
지난날의 죄를 뉘우치고 드디어 安氏의 따님을 맞아 장가를 들므로써 완전히 환속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얼마가지 않아 부인은 세상을 떠났고 그 이듬해인 성종 16년에는
조정에서 윤씨페비의 논의가 일어나니 그는 다시 세상일에 뜻을 잃고 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번화한 서울을 등지고 정처 없이 방랑을 거듭한 지 다시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하여 성종 24년 2월 어느 날 낭랑히 뿌리는 봄비에 쓰다듬기우면서 59세를 일기로 그는 다정다한한 생애를 끝마쳤다.
율곡栗谷 선생이 쓴 전기에 따르면 김시습이 죽은 뒤에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기에 그의 관곽을 절 곁에 3년 동안 모셨다가 장사 지낼 적에 그 관을 열어보니 그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았으므로 많은 중들이 그 얼굴을 보고 그가 부처가 되었다 하고 화장을 하여 그 뼈를 거두어 부도浮屠를 만들어 세웠다고 하였다.
그는 생전에 자기의 초상화를 손수 그리고 다시 찬시贊詩를 곁들이되
“네 모습은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구렁 속에 버려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언제나 반성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을 구학溝擧으로 밖에는 보지 않는 理性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아니 그는 그가 죽은 뒷세상까지도 ‘구렁’일 수밖에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죽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찬贊이야말로 그가 평생을 살아온 그의 생애의 총결산이었고
그가 본 인생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었고 그가 얻은 바 철학의 최후 결론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가 겪은 고통과 수난의 댓가로 얻은 기인.괴승이라는 이름,
그것이 바로 우리 겨레가 세계의 문화사 속에서 위대한 지성인을 가졌다는 증거로 내세울 고귀한 이름이라 할 것이다.
5. 매월당의 사상
매월당을 평가한 옛날 학자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논의되어 왔으나
율곡栗谷 선생은 선조宣祖의 명을 받아 매월당의 전기를 쓰면서
김 시습은 비록 그 처신과 처세의 방법에 있어서 또 재질과 성품에 있어서 장단과 득실이 있다고는 하겠으나 절개와 의리를 표방하고 윤리와 기강을 부지하는 데 있어서는 그 뜻이 밝고도 정대함이 해와 달로써 그 빛을 다툴 만하다고 하여 공명정대한 매월당의 사상을 극구 칭찬한 바 있었다.
한편 퇴계退溪 선생은
오직 한갓 괴이한 사람으로 궁벽스러운 일을 캐고 괴상스러운 일을 행하는 무리로서
그가 살고 있었던 시대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그의 높은 절개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라고 하여 매월당의 학문을 궁벽스럽고 괴이쩍다고 하였다.
비록 율곡과 퇴계의 위와 같은 상반된 평가가 있기는 하나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두 분의 학자가
매월당에 대하여 그만큼 관심이 컸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주목의 대상이 곧 그의 유불일체儒佛一體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의 절개가 아무리 높고 인격이 아무리 고결하였다 할지라도 만약에 그가 정말 중이 되어서
山僧으로 평생을 보냈다면 율곡과 같은 이의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월당은 우선 규범적인 유학도였다.
그 증거로는 그의 문집에 나오는 論 즉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고금군자은현론古今君子隱顯論 고금충신의사총론古今忠臣義士總論·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 등의 논문을 통하여 치국평천하의 원리를 논하였고 人才說·生財說·名分論 등을 통해서는 경세제민하는 방법을 논설하였다.
그리고 人君義·人臣義·愛民義·愛物義·禮樂義ㆍ威儀義·德行義ㆍ刑政義 등을 통해서는
경전과 고금 성현의 논설을 비판, 주석하였다는 사실을 들면 족할 것이다.
다음 그의 불교에 관한 조예는 그의 문집 중에서 無思·山林ㆍ三淸·松桂ㆍ扶世·梁武·人主·위주魏主‧隋文‧仁愛 등 10장으로 된 문답식 佛說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단행본으로 현전하는 그의 저서인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饌><十玄談要解><大華嚴一乘法界圖註> 등에서도 그가 지녔던 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 불교관계 논문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특징은
이른바 경세제민이 그 궁극의 목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불교에 대한 해석은 그의 사상적인 체계가 유교적인 정치사상을
불교의 교리를 빌어서 설명하려는데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즉 그의 문집 <雜著> 속에 있는 <人主>장을 보면 그는 유교의 성의정심誠意正心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불교에서는 求法當學智慧 以鑑徹事機爲先 한다고 하였고 유교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불교에서는 事佛當盡仁愛 以安民濟衆爲本 한다고 하였다.
이같이 그는 유교와 불교의 대응관계를 성심정의=학지혜, 격물치지=감철사기, 수신제가=진인애, 치국평천하=인민제중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유불일체의 이론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디까지나 불교가 정치사상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지언정
불승이 정치가는 될 수 없다는 것을 <仁愛>장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매월당은 그의 정치한 유교적인 사상체계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 그의 투철한 불교지식을 적용함으로써 이른바 유불 교체기라는 전환기에 처하여 그의 역사적인 위치를 값지게 정착시킴으로써 조선왕조 초기 사상계의 혹성으로 등단하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의 사상적인 근거는 어디까지나 당시의 신흥 士類派의 정신무장인 성리학에 있었으며 그는 진실한 불교도이기보다는 성리학도로서 대우받기를 원하였고 또한 역사상의 많은 성리학도들이 그를 성리학의 師宗으로 존숭하기도 하였으나 그가 불승이 직접 정치에 관여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상적 결론을 내린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매월당의 이러한 유불 일체사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 그의 철저한 현실주의 사상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즉 그의 현실주의 사상은 구체적으로 人本主義와 民本主義로 나타난다.
그의 수많은 논설에서 우리는 인간의 행복과 백성의 평안이 무엇보다도 앞서야 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현실주의적인 사상 체계는 그의 主氣 이론에서 연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율곡 선생에 이르러 이론적인 체계가 잡혔다는 이 主氣論의 초기 학설을 매월당이 개척했고 그러한 매월당을 율곡 선생이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흥미있게 바라만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거기서 어떤 학문적인 맥락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매월당의 불교 사상과 유교 사상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과히 심심치 않게 논의되고 소개된 바 있었다.
그러나 매월당의 도교 사상에 관해서는 오직 이능화李能和의 <朝鮮道敎史>에서 소개된 이후 별로 논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즉 동서 제21장 조선단학파朝鮮丹學派 제1절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실려 있는 선파仙派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전략)
그 전도된 근원을 소급해 보면 종리鍾離가 신라 사람 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紀·중 자혜慈惠에게 전하니
최승우는 최고운崔孤雲과 이청李淸에게 전수하고 이청은 다시 명법明法에게, 명법은 또 자혜慈惠 도요道要에게 전하고
자혜가 권청權淸에게, 권청은 원설현元偰賢에게, 원설현이 김시습에게 전수하였다.
이에 김시습은 천둔검법연마결天遁劍法鍊魔訣을 홍유손洪裕孫에게 전수하고
또 옥함기玉函記 內丹法을 정희량鄭希良에게 전수하고 동참용호비지同參龍虎秘旨를 윤군평尹君平에게 전수하였다.
(후략)
이 기록은 이능화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인용한 것인 바
<해동전도록>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찬술한 책이라 하였다.
어쨌든 이 기록으로 미루어 매월당이 한국 도교 사상사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같은 책 같은 장 제2절에는 홍만종洪萬宗이 찬술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실려 있는 선파仙派 제2항에 김시습의 도교 관계 논문인 천형天形·용호龍虎·복기服氣·수진修眞등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월당의 도교 사상이 얼마만큼 평가되어 왔는가를 알게 하고 있는 터이다.
매월당의 도교 사상은 학계에서 앞으로 더욱 깊이 연구할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Ⅱ. 매월당의 저작著作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보면
“매월당은 金鰲山에 들어가 책을 써서 石室에 넣어두고 이르기를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는
“매월당이 쓴 시편은 수 만여 편에 이르지마는 널리 퍼져 나가는 동안에 거의가 흩어져서 사라져 버렸고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몰래 자기의 작품으로 만들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미수기언眉叟記言>에는
“매월당의 저서에 <四方志>1600 편과 <기산紀山>·<기지紀志> 200편이 있으며 따로 詩卷이 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東京誌>에는 “<四遊錄>·<太極圖說> 두 책의 판목이 경주 정혜사淨惠寺에 있다.”고 하였으며
“매월당은 성리性理ㆍ음양陰陽·의복醫卜 등 百家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문장이 호한浩汗하고 자사自肄하여
그의 저서 중 <매월당시집>·<역대연기歷代年紀>·<금오신화> 등이 세상에 널리 간행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문헌들에 기록된 매월당의 저작을 다시 정리해 보면
<매월당시집>·<매월당시><사유록>·<사방지>·<기산>·<기지>·<태극도설>·<역대연기>·<금오신화> 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만 편에 달하는 시편들은 많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바꿔져 전하는 것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그의 사후에 그를 아끼고 그를 알아주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수집되고 간행되었던 그의 유작의 일부가 남아 오늘에 전하고 있다.
매월당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이세인李世仁(1452-1516)이었다.
매월당이 세상을 뜬지 18년 후인 중종 6년 3월에 올린 이세인의 주청奏請에 따라 중종이 매월당 문집의 간행을 명한 바 있으나 그 결과는 알 수가 없고 10년 후인 중종 16년에 쓴 이자李耔(1480-1533)의 <매월당집> 서문에는 그가 10년을 걸려서 3권의 문집을 얻었다고 하였다.
다시 선조 15년에 선조가 율곡 선생에게 매월당 전기를 쓰게 하여 운각芸閣에서 매월당의 유고를 인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선조 16년에 이산해李山海(1538-1609)가
서문을 쓴 문집이 오늘날 전하는 甲寅字本 <매월당집> 23권 11책이다.
이 책은 오늘날 국내에는 낙질본들이 몇 사람의 장서가에 수장되어 있고
완질은 일본의 봉좌문고蓬左文庫에 수장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갑인자본에 보유편을 덧붙여서
매월당의 후손 김봉기金鳳起가 편찬한
신활자본이 1927년에 출판되어 널리 보급되어 왔었다.
그 밖에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詩四遊錄>이 따로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이 있고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씨가 소장했던 필사본 <매월당고梅月堂藁>가 있었으나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이 사본에는 문집에 실리지 않았던 시편들이 실려 있어서 학계의 주목을 끈 바 있었다.
그리고 매월당의 불후의 명작 <금오신화>는 국내에는 필자의 소장인 필사본
<신독재수택본전기집愼獨齋手擇本傳奇集>에 2편의 작품이 전할 뿐이고
일본에서1884년에 간행된 것이 있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 관계 저술로는 <대화엄일승법계도주>와 <십현담요해>의 두 책이 목판본으로 출간되어
오늘날 조명기趙明基박사가 수장하고 있는 바 이 두 저서는 모두 매월당이 水落山에 있을 때에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묘법연화경별찬>이 <명원산고溟源散藁>에 전하고 있다.
매월당이 內佛堂에서 연화경을 번역한 일이 있었기에 혹시 그때에 쓴 것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또 <천자여구千字儷句>가 같은 <명원산고>에 전하여 매월당의 재치와 박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상에서 현존하는 매월당의 저작들을 대충 소개하였거니와 앞에서 든
문헌들에 이름만 전하고 실물을 볼 수 없는 매월당의 유저들의 행방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거듭되는 병화兵火와 매월당의 기구한 행적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던 그의 유저 중
조각글이라도 남은 것이 있어서 뜻있는 분의 눈에 띄어 학계에 소개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정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