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01.17 비전중앙교회 수요예배
본문 : 요한1서
우리가 요한1서를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1서, 2서, 3서는 별로 길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읽어갈 수도 있고, 또 조그만 마음 먹으면 아주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자세히 알 수도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다 모르면, 성경을 그냥 읽어갑니다. 그냥 성경을 쭉 읽어가는데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렇게 쭉쭉 읽어가다가, 이제 교회에서 말씀을 자꾸 듣고 또 신앙생활을 쭉 하다 보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는 생각을 좀 하게 됩니다. 또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이 말씀이 이런 뜻이 있구나 하는 것을 하나하나 깨달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그냥 읽어가는 수준에서 조금 깨달아가는 수준이 되다가, 어느 순간 이제는 말씀이 조금씩 눈에 보이면서 말씀이 뭔가 상반되는 듯한 느낌, 이게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 이게 뭔가 잘못 기록된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보다 보면, 지식적으로 뭔가 조금 이해가 안 되는 그런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제법 많이 나오는데요.
그리고 이제 요한1서를 읽어갑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요한1서를 읽어가면서, “나는 아무런 의문도 없었다. 이 말씀이 너무너무 이해가 잘 되더라.”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어쩌면 요한1서를 제대로 못 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후에 제가 같이 살펴보겠습니다만, 요한1서를 읽다 보면,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알아 왔던 것과는 뭔지 완전히 다른 표현들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차례 나온다고요. 그런데도 아무런 의문 없이 그냥 다 이해가 되더라 하면서 요한1서를 읽어 나갔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신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하긴 그렇지만, 뭔가 주의 성령께서 가르쳐 주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한1서를 안 보신 분은 여기 아무도 없을 거예요. 다 보셨을 거예요. 그런데 요한1서를 보면 ‘뭔가 잘 모르겠다, 도대체 요한이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전혀 생각이 안 들었다면, 까만 건 글이고 하얀 건 종이라는 식으로 그냥 봐나간 거겠지요.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요한1서 1장 8절 한 번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래놨죠?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이 말은 무슨 말입니다? 우리가 죄가 있다는 이야기예요, 없다는 이야기예요? 죄가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렇죠? 이렇게 쉬운 말을 해석을 원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럼 3장으로 가요. 9절에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났음이라” 이런 말씀이 있단 말이에요. 이 말씀이 뭔가 상반되잖아요. 앞에는 죄가 있다고 했고, 뒤에는 죄가 없다고 했어요. 이건 지금 아시는 분들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다면 일단은 백지상태로 만드셔야 해요. 백지상태로 만들고 들으셔야 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5장의 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그래놨잖아요. 그럼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난 자인데 범죄 안 했습니까? 했잖아요. 이건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다 싶단 말이에요. 그다음에 왜 우리가 범죄치 아니하느냐 하면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우리는 대부분 이를 그리스도라 생각한단 말이에요- 즉 주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 이래 되어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앞에는 죄가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또 뒤에는 죄가 없다 이야기하고 또 범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여러분들이 자주 요한일서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해보고 해도 사실은 답이 나오기 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으신 분들은 사실은 이런 문제 가지고 시비를 잘 안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그냥 넘어가 버린다고요. 여기에 대해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들, 중세시대를 우리가 무슨 시대라 그럽니까? 암흑시대라 그럽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요.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서는 중세시대가 무슨 시대입니까? 최고의 전성시대죠. 그러나 우리 개신교 쪽에서는 중세시대는 완전히 암흑시대라 그랬는데, 왜 암흑시대라 그랬습니까? 성경이 닫혀있는 시대였기 때문이에요. 카톨릭에서는 성경을 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성도에게는 성경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없었어요. 그래서 성경을 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암흑시대다.
그럼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은 누구든지 성경을 볼 수도 있고, 해석할 수도 있고, 이게 종교계획을 통해서 이렇게 됐단 말이에요. 이제는 여러분들 스스로 성경을 보면서 나름대로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연구도 하고, 말씀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생겼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바르게 알려고 노력도 하고 애를 써야 하는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목사님의 말씀에 의존합니다. 물론 목사님이 말씀대로 바르게 증거하고 알리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괜찮아요.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건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성경 자체에 대한 어떤 내용들을 본인들이 검토도 하지 않고 아예 성경을 눈으로 보면서 까만 건 글이요, 하얀 건 종이요 하는 식으로 그냥 봐나가고 주일날 와서 말씀 듣는 것에 그친다면, 중세시대와 똑같습니다.
중세시대에도 성경을 안 읽고, 그들의 사제가 말하는 그 내용에 따라 움직였거든요.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그러잖아요.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목회자가 가르치는 그 사상을 따라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또 성경 연구를 깊이 있게 해야 합니다. 깊이 있게 해서 정말 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이고 무슨 뜻인가를 성도들에게 말씀 그대로 알려줘야 합니다. 뭔가 사심이 들어간다거나 욕심이 들어가서 성도들에게 잘못 가르치고 잘못 알리면 굉장히 문제가 됩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느 광고를 봤어요. 기독교 신문에 나온 광고를 보니까, 일천 번제에 대한 어떤 부흥집회를 하더라고요. ‘일천 번제’라는 책을 쓴 저자가 와서, 일천 일 동안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고 번제를 하고 헌금을 바쳐서 복 받은 이야기들을 그 책에 기록해 놓았는데, 그걸 성도들에게 간증하는 거예요. 자, 이건 성경이 아니거든요. 완전 가짜란 말이에요. 이런 분을 초청하는 교회도 이상하고, 그렇게 알리는 강사도 또 희한해요.
일천 번제라는 것은 일천 일 동안 드려진 제물이 아니고, 거의 하루에요, 하루-다윗이 그렇게 했죠-. 일천 마리의 번제물이지, 일천 일 동안 제사 지내는 그런 형태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왜 일천 일 동안 일천 번제를 이런 식으로 하느냐? 일단 자기가 잘못 배워서 그래요. 옛날에 저도 그런 식으로 많이 배워서 일천 번제 하면 일천 일 동안 솔로몬이 기브온 신당에 가서 제사한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솔로몬이 왕이 되고 나서 그럼 일천 일 동안 -보통 제사를 하면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통치도 안 하고 맨날 제사만 지냈단 말인가? 일천 일이면 3년인데, 이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성경을 다시 들여다본 거예요. 다시 보니까 이건 일천 일이 아니고 일천 번제야, 일천 번제물이라고. 이것을 누가 먼저 했냐 하면 아버지 다윗이 먼저 했고, 그걸 솔로몬이 보고 배워서 자기도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이게 잘못됐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제가 2000년경에 한 번 글을 낸 적이 있어요. 일천 번제, 이것이 잘못됐으니, 지금 한국교회가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요. 그런데도 일천 번제를 자꾸 하는 이유가 뭡니까? 솔직히 여러분들 무엇 때문일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그게 맞아요. 다 그것 때문에 그래요. 아주 속 보이는 짓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성도들은 그것도 모르고 성경을 제대로 안 보니까, 틀린 말을 해도 맞는 줄 알고 그냥 따라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 요한일서 내용이 단순한 것 같아도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게 변증서 역할을 하면서 사랑에 대한 기록이에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또한 변증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장부터 바로, 초대 교회 당시에 교회를 어지럽혔던 이단 사상 중에 영지주의 사상을 공격하면서, 성도들에게 이런 사상에 미혹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게 1장 1절부터 시작을 해요. ‘이게 영지주의다’ 이런 말은 없잖아요, 성경에. 그러나 그때 당시에도 ‘영지주의다’ 이런 말은 안 해도 그들의 가르침들이 교회 내에 굉장히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리잖아요. 영지주의 사상을 모르면 서신서 제대로 알기 어렵다고요. 영지주의 사상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 오늘 말씀들, 또 앞으로 요한1서에서 가르치는 사도 요한의 말씀의 참 의미, 즉 하나님의 참뜻을 우리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려운 겁니다. 그러면 이제 목사님들이 영지주의 공부를 해야 하잖아요. 영지주의 공부가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니까, 딱 우리 기독교와 관계있는, 성경과 관계있는 그런 내용을 요약하여 이들의 사상이 어떻다 하는 정도는 성도들에게 알려주고요, 그런 뒤에 이제 성경과 연결하면서 서신서에 이런 거짓된 무리의 사상이 어떠한가, 어떤 사상이기에 사도들이 이런 식으로 써놨는가, 그러면서 성도들의 삶과 하나님에 대한 관계, 그리고 세상에 대한 관계를 포괄적으로 알려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1서는 굉장히 심오한 책입니다. 단순하게 그냥 표현 자체가 쉬우니까 이게 쉽지 않겠나 싶어도, 제대로 이해를 하려고 하면 사실은 좀 어려운 책입니다. 아까도 우리가 몇 군데 봤지만, 뭔가 이해되기가 조금 쉽지 않은 내용이 자꾸 나오는 책이 이 요한1서입니다.
자, 1장 1절 보세요. “태초부터 있는”. 성경에 ‘태초’라는 단어가 구약의 창세기 1장 1절에 나와요. 그다음에 사도 요한이 두 번 사용해요. 요한복음에 ‘태초’, 그다음에 요한1서에 ‘태초’. 그러나 구약에 있는 ‘태초’와 신약에서 말하는 ‘태초’의 의미는 다릅니다. 구약은 ‘시간의 시작’을 말하는 거예요. 제가 여러 차례 이야기했죠.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하는 요한복음의 1장 1절에 나오는 ‘태초’와 그다음에 요한일서에 나오는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 아니고 ‘영원’이라는 뜻이에요.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한글이 똑같다고 해서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걸 먼저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태초부터 있다’는 ‘영원 전부터 있었다’는 거예요. 여기는 번역이 그렇게 돼야 해요.
“영원 전부터 있는” 그다음에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이래 놨거든요. ‘생명의 말씀’ 이것은 어렵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해오면, ‘생명의 말씀’이라 하면 대부분이 ‘성경이다’라고 생각 않고 바로 누구를 생각합니까?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거예요. 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은 다르게는 ‘복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복음보다도 더 강한 거예요.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생명이 말씀 안에 있다’라는 거예요. 말씀 안에 생명이 있는데 이 말씀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어디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거예요. 이게 언제부터 있었다? 태초부터, 영원 전부터 그것이 존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보통 1절에는 사도가 인사를 하면서 편지를 시작합니다. 요한2서 보세요.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이런 식으로 하면서. 요한3서도 봤잖아요.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이런 식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요한1서는 성격이 다르잖아요, 그런 게 없잖아요. 바로 1절부터 “태초부터...”, 요한이 뭔가 좀 격분한, 격앙된 듯한 느낌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느냐 하면, 잘 봐요, 예수님이 언제부터 존재했다는 이야기입니까?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는 거예요. 그분은 영원 전부터 존재했고, 그리고 그분이 이미 생명이고 그분 안에 생명이 존재한다. 이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요한이 이걸 말하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나오는 거예요. “이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사람의 오감 가운데서 가장 예민한 부분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발견해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앞에서 읽었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여기까지와 그다음에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는 달라요. 뭐가 다릅니까? 이걸 찾아야 하는 거예요. 앞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관하여”, 그리스도를 말하죠. 그다음에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것도 그리스도를 말해요. 분명히 그분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앞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뭘 이야기합니까? ‘선재성’을 이야기합니다. ‘신적인 존재’로서의 그분이에요. 그분은 신으로서 영원 전부터 이미 계셨던 분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뒤에 ‘우리가 손으로 만졌다. 눈으로 봤다. 귀로 들었다.’ 이 말은 뭡니까?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왜 이 말부터 하면서 다른 서신과는 조금 어조를 달리했느냐 하면, 이유가 있는 거예요. 영지주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육체로 온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신으로서 이 땅에 온 적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는 다 가짜라는 거예요. 가짜로 그렇게 봤을 뿐이고 그 그리스도는 진짜가 아니라는 그런 주장을 하면서, 그리스도가 육체로 이 땅에 오심을, 쉽게 말하면 ‘인성’을 부인했어요. 영지주의가 그걸 교회에서 가르치고 성도들을 그렇게 미혹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딱 1절부터 영지주의 사상을 바로 반박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어떻게 알아요? 그렇다는 근거 있습니까? 근거 있죠.
뒤에 보면, 영지주의자들의 ‘죄관’부터 다 다루어요. 그러니까 영지주의 사상 모르면 1장 8절하고 9절 이해 못 합니다. 3장 9절과 연결시킬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영지주의에 대해서 2장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4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바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4장에 보세요. 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그래 놓고, 2절에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뭐로 오신 것을?-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이랬거든요.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시인하지 아니한 영은 다 뭐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상을 가르치는 무리가 있어요. 그 무리가 바로 영지주의자들이에요.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만 가진 교리로서 교회에 영향을 안 끼치면 큰 문제가 안 되는데, 이런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미혹할 때에, 이런 게 있습니다. 어떤 말을 들을 때에 처음에는 저것이 완전 거짓말이다, 잘못됐다고 판단하고 처음에는 미혹이 안 되지만요, 거짓말을 계속 반복해서 듣게 되면 가스라이팅이 됩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오래 전에 나온 소설입니다. 소설에서 유래한 심리적인 용어인데, 어떤 사람에게 뭔가 거짓을 진짜인 것처럼 자꾸 이야기하면,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세뇌’라고 하면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이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고 미혹할 때, 그냥 ‘육체로 온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해버리면 미혹이 안 되겠지만,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면서 거기에 맞는 거짓 가설을 만들어버립니다. 거짓 가설을 만들어서 가스라이팅 한 거예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원래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인간 예수가 있었는데 인간 예수가 땅에서 활동하다가 세례받을 때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그때 잠시 역사를 하다가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갈 때 그 영은 떠났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현상이 아니라, 잠시 온 것 같은 그런 현상일 뿐이다. 이걸 가지고 너희들이 자꾸만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처럼 이런 형태로 왔다고 믿는 것은 잘못 믿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교회에 들어온 영지주의자들이 가스라이팅을 한 거예요.
당시 초대교회에 성경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잖아. 성경이 있더라도 조각 성경이 돌아다녀서 일부를 보고 그러는데, 전부 다 말로써만 증거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말로써 이렇게 하다 보면, 거기에서 영지주의 사상을 아주 멋진 신사 같은 사람이나 멋진 귀부인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며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너희들이 사도들에게 배웠던 그런 가르침들은 -무조건 틀렸다 이야기를 또 안 할 수 있어요- 조금 잘못된 것이 아니겠나 내가 생각할 때는 이런 것 같다는 식으로 설득을 해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도들에게 들었던 것이 확실한 줄 알고 복음으로 믿고, 분명히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활동을 마치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다가 승천하셨다’ 이렇게 믿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들어와서 그런 식으로 살살 미혹을 하니까 아직 뭔가 신앙이 어리고 잘 모르는 사람, 사도에게 듣기는 들었지만 아직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런 가짜들에게 쉽게 미혹되어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모든 사도가 다 언급했다고 제가 그랬잖아요? 이 사상은 그만큼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영지주의적 뿌리에서 자라나서 지금 한국교회 전체를 어지럽히는 게 신사도입니다. 신복음 같은 것, 그다음에 영지주의 사상이 뉴에이지의 형태로 현재의 우리에게 다가와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이름이 다르니까 다른 건 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추적해 들어가면 뿌리가 다 똑같아요. 한 뿌리에서 가지가 나면서 시대에 따라서 이름만 달리해서 지금 교회에 가라지처럼 들어와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대부분 신사도적이에요.
우리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리니까 다른 교회도 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줄 착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예배 안 드립니다. 다른 데 가면 신납니다, 재미있습니다, 어깨가 들썩거리고, 춤도 추고 싶을 정도로 좀 있는 교회는 조명 비추죠, 그리고 기타 주자들 보면 기타를 희한하게, 막 현란하게 연주합니다. 그게 왜 필요해요? 지금 한국교회 대부분이 왜 그렇게 하는 줄 압니까? 그렇게 하니까 사람이 오거든요. 지금 오는 것처럼 보이죠? 조금만 있어 봐요. 안 옵니다. 그래도 온다고 하면 다 가짜가 되어 버립니다. 복음이 안 들어가요. 복음이 안 들어가고 이상한 형태로 미혹이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신사도라든가 신복음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신선하게 보여요. 우리가 해왔던 신앙 형태와는 뭔가 모르게 변화도 있고 짜릿하고 재미도 있거든. 그러니까 그게 신선하게 미혹이 되어간단 말이에요. 처음에는 그렇게 신선한 점도 있는데, 그러다가 그게 가짜인데도 조금씩 조금씩 하다 보니까 이게 완전히 교회 전체를 싹 장악을 다 해버립니다. 그 가짜가 완전히 진짜처럼 돼 버립니다. 우리가 가짜처럼 보입니다.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는 교회가 부흥이 안 되고 맨날 몇 명 데려다 놓고 하니까 그런 소리냐, 약자의 변명 아니냐 그렇게 얘길 하는데, 이게 무슨 약자의 변명이에요? 여러분 솔직히 한번 생각해봐요. 하나님이 교회 숫자를 보겠어요? 안 보겠어요? 관심이 있겠어요? 관심이 없겠어요? 하나님이 교회 숫자에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교회 재정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제가 지난번에 어느 교회 그 주 한 주의 헌금 내역을 쭉 봤거든요. 블로그에 있길래 보니까 한 주에 헌금이 얼마 나온 줄 압니까? 한 주에 13-14억 정도 나오더라고요. 여러분 이거 생각을 해봐요. 1년 같으면 얼마예요? 그러니까 좀 큰 교회 목사들은 그 자리 놓기 싫은 겁니다. 세습하고 싶은 거예요. 교회가 완전히 기업 이상이에요. 우리는 한 주에 헌금 천만원만 나와도 좋겠다. 그러니까 당신 교회는 부흥이 안되니까 그렇지. 물론 우리의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겠죠. 여러분, 돈 좀 벌어 헌금 좀 한 천만원씩 하라고요, 나도 좀 신나게. 이러면 성도들이... 안 그래도 돼요. 하나님은 헌금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이 헌금에, 숫자에, 건물에 관심이 있겠어요?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말은 그렇게 한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전부 다 건물에 관심이 있고, 전부 다 숫자에 관심이 있고, 전부 다 돈에 관심이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안해요. 성경에서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를 안 하거든요. 성경적으로는 그런데, 현실은 또 안 그렇거든. 그러니 우리는 현실을 따라가는 거에요. 그러므로 이렇게 가스라이팅이 조금씩 되면 그것이 처음에는 가짜라고 생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진짜처럼 느껴집니다.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고요.
여기에 사도 요한이, 사도 요한뿐만 아니라 거의 동시대에 있던 다른 사도들도 거의 다, 세운 교회나 성도들에게 이런 경고도 주고 조심하도록 경계를 하는 것은, 그만큼 그때 당시에 이런 거짓된 무리의 세력이 컸고 교회를 굉장히 어지럽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살살 살살 미혹해 갔던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도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1장 1절부터 바로 영지주의 사상을 반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밝히는 겁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자 바로 인간이라는 거에요.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인 이 그리스도, 영원전부터 존재했으니까 신이잖아요, 그리고 요한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도 만졌다고 그러잖아요. 사도 요한 그랬잖아요, 실제로. 그분이다, 이거예요. 그분이 완벽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걸 지금 증명하는 겁니다. 그것을 2절에 다시 한번 더 설명해요. 1절을 보충 설명하고 있죠. 보니까 “이 생명이” 뭐했다? “나타나신 바 된지라” 그래요, 어디에? 이 땅에. 이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왔다고 말하지 않는 무리, 이런 무리가 가짜라는 겁니다. 거기에 속아선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지금 그렇게 말하는 교회가 어디 있어요? 없지.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는 안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는 건 말을 해도,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을 직접적으로 부인하면 완전히 이단이 되니까 그렇게 이야기는 안 해도, 이제 다른 식으로 바뀌어 가죠. 뭐냐 하면, 그리스도만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참인간으로 왔지만, 그분만을 믿어서 꼭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기독교의 독선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각 종교에도 나름대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다 있다.’ 그러면서, -말은 잘해요-서울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가도 되고, 기차를 타고 가도 되고, 버스를 타고 가도 되고, 더 나아가서는 걸어가도 되고, 뛰어가도 되고 다 되잖아, 그러니까 날아가는 게 기독교고, 걸어가는 게 불교고, 이렇게 기차 타고 가는 게 회교고, 이런 식으로 갖다 붙여서 서울에 다 갈 수 있다는 식으로 아주 그럴듯하게 설명을 하니까, 사람들이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이?’, 처음에는 절대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다가, 그런 것 같기도 한데 하면서, 기독교가 너무 독선적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종교 간에 분쟁이 생기고 이러니까, 종교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종교인들이 서로 단결해야 한다, 결합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종교도 하나로 가서 하나로 하자 이런 식으로 살 끌고 가면요, 이거 너무나 듣기 좋은 이야기잖아요?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런 다원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성도가 얼마 안 됐는데, 지금은 벌써 그리스도인의 반 이상이 다원주의 사상을 갖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이게 얼마나 무서워요? 그런데 물어보면 “아니다” 그래, 하지만 하는 짓거리를 보면 또 그게 아니야. 막 연합운동에 참여하고 말이죠, 다원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한단 말이에요. 이것은 잘못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셨다는 인성에 대해서는 인정은 하지만, 그리스도 외에도 우리가 여러 방편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요. 그럼 성경 말씀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이름이라고 그랬거든, 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그랬는데-를 갖다 대면, ‘이거는 우리 기독교가 뭔가 어떤 기독교의 독특성을 갖추기 위해서 한 말이지, 이걸 그대로 믿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요즘에는 보니까 방송에도 자주 나오던데, 스님, 신부님-어떤 데는 순위도 나와- 그리고 목회자 이렇게 나와서 서로 우리는 하나다 이런 식으로 해서 통합을 은근히 딱 마인드 컨트롤을 시키는 거예요.
방송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줄 압니까? 여러분들, 광고 방송 있잖아요? 5초짜리, 10초짜리. 그 5초, 10초가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칩니다. 한 번 보고 눈 감으면 끝나버리는데, 그것이 분에 반복적으로 계속 들어오면 그게 우리 뇌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뇌를 바꿔버린다고요. 그 광고를 보면 뭔가 괜찮은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광고 보고 속아서 인터넷으로 과일을 사서 썩은 걸 많이 샀잖아요. 그래서 그런 걸 다시는 안 산다고 해놓고 또 보면 또 속는다고. 그래서 여러분들,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자칫 잘못된 이상한 것에 미혹이 되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요한이 다시 한번 2절에서 설명하는 거예요.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됐다”, 직접 이 땅에 왔다는 겁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이 그리스도에게 있는 생명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또 강조해요.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됐다”라고 또 강조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3절, 4절은 요한1서를 기록한 이유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을 합니다. 이 내용도 우리가 조금 할 말들이 있으니까, 이건 다음 주에 계속해서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가능하면 영지주의가 무엇인지 한번 검색해서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검색해보면 아주 복잡하게 설명해놓은 것도 있고, 간단하게 설명해놓은 것도 있어요. 몇 번 보다 보면 영지주의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고, 이들이 가르치는 사상이 어떤 것인지 보여요. 그런 그림을 갖고 이제 성경을 보면, 굉장히 쉽게 다가오면서 사도 요한이 왜 이런 말씀을 했는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기록하도록 하셨는가,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혹은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가야 할까에 대한 부분까지 환히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게 다 그냥 그렇게 돼요. 오늘 처음에 들어가면서 제가 이야기했던 요한1서 1장 8절, 요한1서 3장 9절 연결시킨 거 이런 거요, 영지주의 모르면 하나도 이해 못 합니다. 모르니까 자꾸만 여기에 나오는 말 가지고 자기 생각을 자꾸 집어넣는 거예요. 자꾸 집어넣다 보니까 이상한 해석이 막 나오게 되고 구원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그리고 신앙 자체가 굉장히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요한1서 3장에 넘어가면, ‘사탄대적설’이라는 사상을 만들어낸 이단 집단이 있습니다. 요한1서 3장 8절을 갖고 이단 ‘사탄대적설’을 만들어냈거든요. 요한1서 3장 8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도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탄대적설’이라는 그런 용어도 참 기가 차게 만들어냈어요. 천재들입니다. 원래 이단들은 주로 천재가 많습니다. 천재가 아니면 그런 걸 해내겠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대단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여러분들, 얼른 생각나는 이단 교주들을 생각해봐요. 그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아니면 세계적으로 그 많은 사람을 이끌어가는 거 봐요. 천재가 아니면 어떻게 하겠어요? 뭔가가 있으니까 하잖아요. 물론 사탄이 끌고 가니까 그러는 것도 있지만, 사탄이 아무나 세우겠어요? 뭔가 딱 그런 인간이 있다고요. 대단해요. 우리가 보면 그렇게 잘못된 게 많고 해도, 그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그것도 참 기이한 현상입니다.
기장에 신앙촌이 있는데, 보면 어마어마하게 커요. 그 동네 산이나 주변이 전부 다 옛날에 박태성 거예요. 전도관이 -지금은 천부교로 바뀌었지만- 다 그네들 것이거든요. 거기 가끔 가요, 제가. 거기 워낙 바닷길이 좋으니까 쭉 둘러보고 그러는데, 여러분들이 애를 많이 먹이면 쭉 한 번 돌아봅니다. ‘아이고, 하나님, 왜 이런 성도를 만나게 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듭니까?’ 하면서 툴툴대다가 혼자 바다 한 바퀴 둘러보고 오고 하는데, 거기 신앙촌이 있거든요. 제가 거길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박태성이 죽었을 때 부활할 거라고 다 믿는 거예요, 그 당시에 다 그랬어요.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지만, 나이가 드신 할머니들, 그런 분들이 다 부활할 거라고 믿었다니까. 박태성이 손 씻은 물이 생수라고 그랬어. 발 씻은 물이 생수라고 팔아먹고 그랬거든요. 그런데도 그렇게 속아 넘어간다니까. 여러분들 같으면 제가 손 씻은 물이 생수다 그러면, 사 먹겠습니까? 사 먹는 사람 또 나올 거예요. 그건 교주가 아니고, 뭔가 불쌍해서 -아이고 우리 목사님 얼마나 불쌍하냐 하면서 버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이 나온다니까.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이라도, 사람이 눈이 딱 감기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냥 그게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하셔야 해요.
그리고 그 뒤의 내용을 같이 보면서, 영지주의도 계속 이야기할 겁니다. 영지주의 사상 가운데 하나 오늘 이야기했죠. 뒤에 죄에 대한 이야기는 이원론을 알아야 해요. 영지주의 사상 가운데 핵심이 이원론 사상이거든요. 이건 또 죄와 구원과 관계가 있어요. 그게 바로 8절부터 나오는 이 이야기라고. 그러니까 그거하고 연결시켜 보면 뭔가 모르게 알 듯 모를 듯한 느낌이 든다고요. 그때 가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약 30여 년의 귀한 삶을 살다 가셨고, 그리고 짧은 공생애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음을 저희가 확실히 믿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이제 곧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사오니,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 잘 지키게 하시고 신앙으로 승리하는 자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목사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