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제주시대를 향한 새로운 전진을 시작합니다”
신구범 민선 제주도지사 기념사업회 발기인모임 출범 취지문
그는 가지 않은 길을 떠났습니다. 없던 길도 그가 갔기에 길이 됐습니다. “제주도가 내게는 행운이자 기회였다”고 말한 게 그였습니다.
그는 그의 신조대로 살았습니다. 그의 신조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였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제29대 관선 제주도지사를 거쳐 초대 민선 제주지사를 역임한 고(故) 신구범(愼久範·1942~2023)!
고인은 모진 풍파와 시련의 삶을 뒤로하고 향년 81세의 나이로 2023년 11월2일 아침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고인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는 풍운아이자 좌절한 혁명가, 최고의 기획가였습니다.
그의 유년시절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누구나 그렇듯 '제주현대사'였습니다. 제주도 조천읍 신촌리 태생인 그는 초등생 시절 '4.3폭도의 수괴'로 불린 이덕구의 아들과 단짝이었습니다. 그 단짝은 그 참상의 시기에 홀연 사라졌습니다. 그 기억을 더듬어 좌·우파로 나뉘어 치러지던 4.3위령제는 그의 지사재임 시절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로 치러졌습니다.
장년기 추억도 기억합니다. 고인은 대한민국 농림부 축산국장 시절 한국마사회의 체육부 이관을 반대하다 당시 6공의 황태자인 박철언 장관에 '찍혀'(?) 미국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그는 김영삼(YS) 야당 총재의 눈에 들어 훗날의 영광을 담보했습니다.
고인의 이력엔 그렇게 곳곳에 그런 스토리가 즐비합니다. '위기'와 '기회'를 넘나들었습니다.
고인은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습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국제식량농업기구(FAO)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습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19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습니다. '늘푸른~'.'희망찬~' 등의 구호가 난무하던 그 시절 신구범 민선 도정의 슬로건은 '위대한 제주시대를 연다'였습니다. 파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옥고를 치렀습니다. 삼무힐랜드는 그의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습니다.
그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건 그의 업적보다 안타깝게도 국회에서 그가 한몸을 던지며 벌인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축협중앙회장 시절 그는 정부의 강제적인 농·축협 통합에 반발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아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국회에서 할복사건을 벌여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인생의 굴곡과 고비마다 정면도전하며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는 그의 신조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제주에선 그보다 그의 찬란한 업적을 기억하는 이가 더 많습니다. 공기업 제주개발공사를 세워 ‘삼다수 돌풍’을 불러왔고, 지자체로선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관광복권을 발행, 지금 연간 2000억원에 육박하는 로또 배당수익금을 받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그였습니다.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유치 실패를 기회로 삼아 서귀포 중문에 제주국제컨벤션센터란 금자탑을 만들어낸 것 역시 그였습니다. 지자체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수출무역기업인 제주교역이란 공기업을 만든 것도 신구범입니다. ‘세계 섬들의 문화올림픽’이란 기치를 내건 세계섬문화축제 역시 그의 기획작품입니다.
구좌읍 행원리에 조성한 풍력발전단지 역시 그가 주도해 일군 국내 첫 상용·상업풍력발전이란 지점에 이르다보면 지금 21세기 제주도가 먹고 사는 그 많은 먹거리가 고인의 두뇌와 손끝에서 나왔다는 건 과언이 아닙니다.
고인은 그의 삶 말미에 한편의 유고를 남겼습니다. 『삼다수하르방, 길을 묻다』가 그의 마지막 유고입니다.
그 책의 본문을 시작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가 떠오를 때 난 제주의 비상을 꿈꾼다. 해가 질 무렵 난 제주에 지혜의 샘이 솟고 있다고 믿는다. 성공도 있었지만 과오도 많았다.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제주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책의 말미엔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둠이 너무도 짙었기에 그만큼 우리에게 지혜의 샘도 깊다. 우리 제주가 다시 나래를 펼 찬란한 여명도 그만큼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일흔을 넘긴 나는 지금도 다시 비상(飛上)하는 제주도를 꿈꾼다.”
이제 고인이 못다 이룬 꿈을 다시 펼치고자 합니다. ‘위대한 제주시대’의 새로운 전진을 선언합니다. 그의 유지를 받들어 제주가 다시 한번 세계에서 웅비(雄飛)하는 그 날을 꿈꾸고자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그 꿈을 받들어 제주의 새로운 도전과 도약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제주의 자존과 번영’을 다시 설계하고 나아가려 합니다.
‘신구범’이 일군 ‘지구촌, 작지만 강한 자존의 제주’를 향해 다시 새로운 전진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계자임을 감히 자처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제주’를 이끌 미래세대에게 다리를 놓아줄 전승자가 됐음을 오늘 선포합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1월11일
신구범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 기념사업회 발기인모임 참여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