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영남대 1학년 때(74년), 외국어 교과목이 영어와 중국어가 개설되어 있었는데, 중국어는 오00 라는 중국인 강사선생님한테서 배웠습니다. 그분은 대만에서 영남대 대학원으로 유학 와 정치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분은 대만 문화대학 한국어과를 나온 분이었는데, 한국어 실력이 좋은 편이었지만, 외국인임을 금방 알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 분은 나중에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였고 부산 경성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줄곧 한국에서 살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경성대 교수로 부임하여(88년) 반갑게 인사하며 잘 지냈습니다.
14년 만에 만나 보니, 한국어 실력이 엄청 늘어 외국인인 줄 잘 모를 정도였습니다.
당시에는 외국인이 그렇게 많지 않을 때라 교통경찰관들이 외국인이 교통법규 위반으로 걸리면 좀 봐주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한국말을 잘하게 되면서, 교통경찰관이 외국인인 줄 모르고 잘 안 봐주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한국말을 안 하고 영어와 중국어를 번갈아 가며 한다는 농담도 하곤 했습니다.
부산의 몇 개 대학 중문과 학생들과 교수들이 연합하여 중국으로 단기연수를 갔습니다.
다른 대학 학생들은 중국 도착 전까지 그분이 중국인인 줄 전혀 몰랐다가, 북경공항에 도착한 다음 유창한(ㅋㅋ) 중국어로 수속을 밟으니, 그분의 중국어 실력에 깜짝 놀라, 경성대 학생들을 보고,
"너그 대학 저 교수님 중국어 정말 잘하시네."
라고 하였다는 얘기를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ㅎㅎㅎ
그런데
거의 한국어 토박이인 줄 알 정도로 한국말을 잘하는 분이었지만, 저한테 그만 헛점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당시 경성대 교수 중에서, 이분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헛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한국어 의미화용론을 전공한 저뿐일 겁니다.
ㅎㅎㅎ
하루는 그분과 교수식당에서 마주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 당시 총장선거 후보로 나선 어떤 분에 대해 뒷담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분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 000 저 사람 영 별로더라."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한국말의 지시 관형사는 독특하게 '이, 그, 저' 삼원체계이고, '저'는 그 지시대상이 되는 인물이 말하는 현장에 있을 때 씁니다. 사진이나 그림으로라도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30대 젊은 교수인 제가 총장후보로 나온 그 원로교수가 식당 안에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뒷담화를 내뱉고 있었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그 총장 후보 교수는 식당에 없었습니다.
오00 교수님은
'000 그 사람 ~' 이라고 해야 할 상황에서
'000 저 사람 ~' 이라고 하여 제가 놀란 것입니다.
한국말 '이, 그, 저' 같은 말은 외국인에게는 덫이나 함정 같은 것입니다.
ㅎㅎㅎ
저는 그 때 속으로,
"오00 교수님의 한국어 실력은 완벽에 가깝지만 이런 실수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어 토박이 화자의 언어능력과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는 에피소드였습니다.(성인이 되어 외국어로서 배운 한국어 구사능력이 오00 교수님 정도 되면 대단한 최고의 실력이고, 한국어로 하는 여러가지 공적인 업무 수행에 아무런 제약이 없을 것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