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라졌다.
그는 항상 내 곁에 있어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한시도 내게 눈을 떼지 않았고 언제나 나를 지지해 주었다. 아니 어쩌면 인기 연예인 매니저같이 내 중요한 사생활뿐 아니라 내 인생 곱이 곱이마다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기록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감이 유별나게 뛰어났었다.
그러던 그가 사라졌다.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얼마 전 일이었다. 그는 이전처럼 매사 철저하지도 않고 자주 멍하니 밖을 응시하며 그저 내 곁에 앉아있었다. 말수도 적어지고 분위기도 우울하다. 그의 이름은 기억이다.
기억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툭하면 잊어버린다. 도시에서 구입한 전기 돌 찜질기는 이번 겨울 내게 일등공신이었다. 시골집은 외풍이 심해서 그 비싼 기름보일러 등유를 종일 틀어놓아도 온도만큼은 멱살 잡고 휘어잡질 못했다. 도시처럼 때면 두 드럼 짜리 기름통에 한 달에 한 번 배달을 시켜야 하고, 북극 기지 연구원으로 살 작정을 하고 내 집이 이글루다 하고 믿으면 추워도 따뜻했다. 이번 겨울 돌 찜질기는 내게 옥돌 같았다. 한번 충전하고 배에 붙여 놓으면 임신한 여자처럼 불룩해서 꼴불견이지만 그걸 배에 대고(감싸는 복대가 있어서) 책상에서 일을 하거나 소파에서 책을 읽으면 조금도 춥지 않았다. 난 애초부터 시골집을 캠핑하우스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기억이는 그걸 잊어버린다. 매번 충전기에 꽂아놓고 책상에서 일하다 보면 충전 완료하고도 한참을 지나 돌이 식어있었다. '이런 멍청한.." 나는 기억이에게 욕을 한다. 이젠 머리에 돌만 들었냐, 대가리에 똥만 찼구나, 사생활이라 험한 욕도 불사하며 기억이를 나무란다. 전기돌만 문제가 아니다. 기름 아낀다며 낮에는 온도를 낮추고 견디기 힘들 때만 삼십분 정도 돌리곤 수동으로 꺼야 하는데 기억이는 또 나를 배신한다. 어, 왜 이리 따뜻하지? 보일러는 한 시간째 돌고 있다. 이런 멍청한 놈, 대가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또 기억이에게 욕지거리다. 여동생에게 기억이 학대 이야기를 들려주니 더 심한 말을 한다. " 말도 마, 난 차 시동 끈줄 알고 잠그고 나왔는데 계속 공회전으로 네 시간째 돌고 있었어. 다행히 딸이 퇴근하다 그걸 보고 알려주었지. 시동 안 꺼도 문이 잠기나? 했는데 그러기도 하나 봐. 미친 거지. 이런 미친년 하고는..." 그녀가 기억이를 잡아 죽이는데 조카가 말했다. "그래도 엄마, 내가 발견한 게 다행이지. 안 그러면 밤새 엔진 돌다 차가 터질지도 몰라" 맞다. 차가 폭발할지도 모르지 나는 맞장구치며 나보다 젊은 그녀의 기억이 폭력이 나의 기억이 학대보다 더 심한 것을 발견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구나. 하하.
기억이의 기강을 다시 잡기로 했다.
주변의 늙은 지인들이 나이 들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뇌 건강이나 잘 챙기라며 영양제 먹으라 고언을 주지만, 빌어먹을 나는 아직 젊단 말이다. 어제도 자전거로 40킬로 주파하고, 애드빌 진통제를 먹긴 했지만, 아무렴 거뜬하지, 암튼 스스로의 건강을 확신했다.
기억이 기강 확립의 첫째는 메모하기였다.
냉장고 문에 하얀 보드를 붙이고 책상 앞에도 한 개, 현관 앞에도 한 개. 그리고 휴대폰에 메모 앱을 두 개나 깔았다. 난 미국 휴대폰 한국 휴대폰이 두 갠데 한곳에 메모하면 서로 호환되는 MS ToDo가 좋았다. 리마인드 도 활성화시켰다. 기억이 바람피우지 않도록 철저하게 문단속부터 했다. 요즘 기억이의 문제점은 한눈팔기라는 진단 때문이었다. 무슨 일을 하다 앞에서 벌려놓은 일을 까맣게, 양심도 없이 잊는다는 것이다. 라면을 인덕션에 올려놓고, 전기 돌 안 잊어야지 하며 충전 불 꺼지는 거 구경하다가 주방에서 고소한 라면 국물이 타들어가고, 난 인덕션을 거울같이 관리하는데, 그거 닦을 때 기억이에게 또 저주의 울분을 토했다. 우리 집 화장실에는 온풍기가 있다. 모양 찾아 삼만 리, 디자인에 꽂혀 소비전력을 무시한 바람에 구매한 첫 달 전기 폭탄을 맞았다. 그것도 용변 보고 안 꺼서 생긴 일이다.
기억이의 기강 잡기 두 번째. 손흥민처럼 이강인처럼 살기다. 축구선수가 거기서 왜 나와?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 두 사람은 공을 잡기 전에 항상 주위를 둘러본다. 그 결과 그들은 창의적인 패스나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았다. 선수에게 생명인 이 둘러보기를 나는 기억 기강 잡기에 사용했다. 집안을 둘러본다. 전기가 돌아가는 곳은 없나. 충전 중인 것은 없나, 보일러는 조용한가, 어디서 뭐 돌아가는 소리는 없나. 나는 인프제INFJ라 조금 예민한데 추가 수당 받을 일이 생긴 셈이다.
처가의 어른들은 연세가 있어도 두 분 다 아직 건강하게 지낸다.
그런데 그분들을 가까이서 보면 기억이 자주 가출하는 것을 본다. 얼마 전에 같이 이야기해놓고 하얗게 눈에 묻어두고 기억을 못 한다. 어머니는 무척 섬세한 분이었는데 말과 생각의 템포가 빨라지고 아버지는 더 느려졌다. 두 분은 젊을 때 발을 묶고 뛰는 이인삼각 경기를 그렇게 잘하다가 요즘은 수시로 넘어지고 서로를 원망한다. 남의 일 같지 않다. 뇌 건강책자에 영양제, 여러 가지 뇌 운동법을 알려주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다. 치매 안 걸린 걸 감사하지만 현대인의 치매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나는 요즘 메모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오늘 할 일을 지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떤 날은 할 일을 다하고 다 지우고 나니 심심해서 "물 마시기"라고 적고 물 한 잔 마신 뒤에 메모를 지우고는 히죽 웃었다. 바보 같은 놈...
나는 어제 자전거를 진탕 타고 시내로 들어가 시골에서 먹기 힘든 나의 최애 식품 버거킹을 우저우적 먹었다. 그리고 한국의 명품관 다이소에 들러 아주 손바닥만 한 메모 노트를 원 달러 주고 구입했다. 이건 자전거 탈 때 떠오르는 창작 메모를 하기 위해서다. 글 재료는 항상 어디서나 훅 나타나기 때문에 잊고 넘어가면 평생 쓸 수 없어서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새벽에 일어나 메모를 한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주변을 둘러보고 " 에브리싱 오케이" cross checking 확인하면 하는 일에 집중한다.
나의 절친 선배가 평생 해오던 민항기 기장을 일찍 은퇴했다.
왜 일찍 그만둬? 응, 이전 같지 않더라고. 비행 전후에 해야 하는 모든 작업이 느려지고 판단도 희미해져서 그만하려고.
선배는 무거운 비행 가방 들고 747계단 오르는 것도 지치고 관절도 아파 못하겠고 시차 적응도 지겹다고 했다.
항공기 기장들은 나이가 들수록 경험은 출중하지만 반응이 느려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듯했다.
나는 남아있는 시간 동안 기억을 살리고 또 시간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수한 시간들을 바쁘다며 무참이 살해한 것을 생각하면 직장이 내게 허접한 돈벌이였는지, 보람 때문인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요즘 기억이와 욕하지 않고 잘 지낸다.
잉~ 알람이 울린다.
"혈압약~ 먹기~"
난 오늘도 혈관 터져 죽는 일, 뇌졸중 경험자, 은 모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