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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원면(珍原面) (1) 연혁 진원은 삼한시대에는 구사오단국, 백제시대에는 구사진혜현, 통일신라시대에는 진원현 지역으로 갑성군의 속현이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나주목에 예속되었다. 1600년(선조 33)에 장성현에 편입된 지역이다. 1789년 강행한《호구총수》에는 내동면은 16개마을 342호에 1.176인이 살고 있으며, 외동면은 17개마을 250호에 739인이 살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33개마을 592호에 1,915인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9월 30일 칙령 제357호로 「조선총독부 지방관제」에 의하여 군에 면을 두고, 면에 면장을 두되 면장은 군수의 지휘 감독을 받아 면행정사무를 처리하도록 되어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때의 마을은 47개 마을이었다 내동면은 현 진원리(고산, 연동, 묘동). 학전리(학전, 평촌, 덕촌), 선적리(덕천, 덕주, 남계, 매화, 선동, 석전), 산정리(용동, 수촌, 산정), 율곡리(율곡, 영신) 지역이었고 이때의 소재지는 산정리였다. 외동면은 산동리(작동, 산동, 능산), 학림리(학림, 모천, 옥동, 월정, 고내), 상림리(만수, 상림, 양유, 학동), 용산리(학산, 두월, 주평, 청룡, 용산, 초동) 지역이었고 이때의 소재지는 산동리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동면과 외동면, 남일면의 일부(평촌, 학전, 덕촌), 광주군 삼소지면 일부(해산, 고내, 월정) 담양군 대치면 일부(청룡, 환인) 지역을 합병하여 진원면이라 하고, 9개 법정리에 47개 마을이 되었다. 면소재지는 산정리 내동면사무소를 사용하였다. 1930년대에 사무소를 선적리 (덕천)로 옮기었다. 6.25 때 소실되고, 195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현재 9개 법정리 35개 자연마을에 1.314세대 3.611인이 살고 있다.
(2) 율곡리(栗谷里) 본래 장성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율곡리, 영동리, 점촌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율곡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율곡리, 영신리, 시목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시목리는 남면에 편입되고, 점촌리는 새로 생겼다. 1950년대에 점촌리는 없어져 영신리에 합병되었다. 영동리와 영신리는 같은 마을로 한때 영동으로 표기하였다. 현 행정이동은 1리는 율곡이고, 2리는 영신이다. ◦ 율곡(栗谷) 율곡은 400여년 전에 울산김씨인 김질(金晊)이 터를 잡아 들어와 울산김씨 자작일촌으로 수대를 이어왔다. 1900년대에 행주기씨․의령남씨․광산김씨가 차례로 들어왔고, 인동장씨와 진원박씨는 일제 말기에 들어왔다. 마을 형성은 울산김씨 8호, 창영조씨 3호, 의령남씨․행주기씨․진원박씨․한양조씨․전주이씨․경주최씨․인동장씨․광산김씨 등이 29호에 63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지내형국으로 지내는 밤나무 숲에서 잘산다 하여 밤나무를 많이 심어 밤실이라 하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율곡이라 하였다. 인물로는 사헌부 지평 김흥수, 진원단위농협장 김용보, 완주중학교장 김성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영신(永申) 영신은 고려시대 이전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되나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현재 살고 있는 성씨는 100여년 전에 서흥김씨․동래정씨․부안김씨․의령남씨․평산신씨․전주이씨․밀양박씨․장흥마씨․초계정씨․광주노씨․수원백씨․광산김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일제시에 여산송씨․전주최씨․해주최씨․장수황씨․김해허씨․진주강씨가 들어왔다. 마을 형성은 수원백씨 8호, 서흥김씨 6호, 해주최씨․의령남씨 5호, 연안차씨 4호, 김해김씨․전주최씨․경주이씨 3호, 평산신씨․남평문씨․여산송씨․부안김씨․진주강씨․장수황씨 2호, 김해허씨․장흥마씨․한양조씨․담양전씨․광주노씨 등이 84호에 203인이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은 오랜 옛날부터 영신역의 기록으로 보아 당초부터 영신으로 불렀으나 한말에 한때 영동으로 표기하였으며 일제시에 다시 영신으로 표기하였다. 한말에 마을 위쪽에 점촌이 생겼다가 1960년대에 없어지고 영신에 통합되었다. 인물로는 호남낙우회장 남철수, 해양수산부국장 김덕일․차재명, 사법고시합격 박창열, 의사 김희종, 육군 소령 조병수․최호진, 광산경찰서 경무과장 신길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 유적으로 고차종술처선씨절효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3) 산정리(山亭里) 본래 장성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동리, 수촌리, 산정리와 시목리, 점촌리, 남일면 덕촌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산정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수촌리, 산정리, 신제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제리는 없어지고, 용동리가 새로 생겼다. 용동리를 처음에 새터라 하다가 용동으로 표기한 걸로 보아 신제를 용동으로 개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현 행정이동은 산정 1리는 용동, 수촌이고, 산정 2리는 산정이다. ◦ 용동(龍洞) 용동은 200여년 전에 무안 박씨인 박중복이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여 자작일촌을 이루고 살았다. 일제초에 능성구씨가 들어오고 종방에 일본인이 들어와 양잠을 하였다. 마을형성은 무안박씨 7호, 전주이씨 2호, 능성구씨․교하노씨․보성선씨․의성김씨․인동장씨 등이 15호에 38인이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이 본래 새터 또는 용굴이라 하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용동이라 하였다. 인물로는 건설부 과장 차용득, 육군 중령 김낙생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수촌(水村) 수촌은 500여년 전에 울산김씨인 김응두가 이곳에 99간 집을 짓고 살았다 하나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양임씨가 300여년 전에 들어오고, 뒤에 김해김씨․밀양박씨․의령남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일제시에 강능유씨․여산송씨․순천박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조양임씨 15호, 의령남씨 4호, 김해김씨․밀양박씨․반남박씨․곡부공씨․강능유씨․순천박씨․여산송씨․탐진최씨․전주이씨․인동장씨․청주한씨 등이 32호에 82인이 살고있다. 마을 형국은 배형국이라 하여 샘을 파지 않았다 한다. 처음에는 수릿등(수류동) 또는 수리라 하다가 수촌으로 바뀌었다 한다. 인물로는 곡성군 산림과장 임태진, 진원면장 임형진, 금당중학교장 박내경, 강남여중교장 임현진, 곡성교육청 관리과장 임선진, 광주시기획관리실장 임우진, 산림청 비서실장 임삼진, 문화체육부 사무관 임노진, 화순광업소 화약과장 임동백, 광주시 감사계장 임판진, 화랑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박일규, 의사 임재남, 농촌진흥원 전작과장 남창조, 육군 대령 남정오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심연님열여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 산정(山亭) 산정은 주변의 출토유물로 보아 신라말기에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알 수 없다. 300여년 전에 진원박씨가 들어 왔으며 그 이전에는 구씨가 살았다고 한다. 1900년대에 김해김씨․나주정씨․전주이씨․청송심씨․제주양씨․함평이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진원박씨 12호, 김해김씨 5호, 전주이씨 4호, 밀양박씨․울산김씨․제주양씨 3호, 장흥고씨 2호, 하동정씨․함평이씨․청송심씨․나주정씨․평산씬씨․해주오씨 등이 46호에 128인이 살고있다. 마을 형국이 풍취라대(風吹羅帶) 또는 초두로지(草頭露地)라 한다. 대박동 산정상에 진원박씨의 정자가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아야 마을 형국이 보인다하여 산정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에 내동면사무소가 1910년에 개설이 되고 1914년 진원면의 소재지로 있다가 1930년대에 덕천으로 옮겨갔다. 1922년에 진남공립보통학교(진원초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금융기관으로 진남금융조합이 1907년에 설립되어 1972년 진원농협 발족으로 현재 창고만 남아있다. 인물로는 진원면장 박호연․박용주, 국회의원 박태영, 장성군 발전협의회장 김형렬이 이 마을 출신이다.
(4) 선적리(善積里) 본래 장성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재동리, 덕평리, 공세리, 석전리, 선동리, 남계리, 남일면 학전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선적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선동리, 건천리, 신덕리, 공세촌, 갈마촌, 대장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대장리는 없어지고, 건천리는 덕천리로 신덕리는 덕평리로 바뀌고, 재동리, 석전리가 새로 생겼다. 뒤에 재동리는 매화동으로 덕평리와 공세리는 덕주리로 갈마촌은 남계로 바뀌었다. 현 행정이동은 선적 1리는 선동, 석전이고, 선적 2리는 덕천, 덕주이고, 선적 3리는 남계, 매화이다. ◦ 선동(善洞) 선동은 마을이 생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홍씨가 살았는데 마을에 화재가나 전소되어 현재 저수지 쪽으로 옮겼다 하나 알 수 없다. 400여년 전에 울산김씨가 들어오고, 이어서 광산이씨가 들어왔으며, 1900년대에 제주양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이씨 6호, 울산김씨 5호, 전주이씨 2호, 경주김씨․제주양씨․진원박씨․해주오씨 등이 30호에 84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선인독서(仙人讀書) 형국이라 하여 선동이라 하는데 표기는 선(善)자를 쓰고 있다. 인물로는 전남대학교 교수 신기남, 황룡중학교 교장 김기영, 호남신문 편집국장 김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석전(石田) 석전은 200여년 전에 영천이씨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다. 뒤에 광산이씨와 옥천조씨 제주양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영천이씨․광산이씨 3호, 제주양씨 2호, 광산김씨․옥천조씨․청주한씨․하동정씨․진원박씨․의령남씨․교하노씨 등이 15호에 46인이 살고있다. 마을 형국은 배형국으로 마을 안에 샘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돌이 많아서 돌밭인데 석전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경찰 경감 이병권, 면의원 이재원, 전라남도 계장 이동호, 경찰 경위 한인수, 육군대위 양인해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덕천(德川) 덕천은 100여년 전에 달성서씨가 터를 잡아 왔으며, 바로 뒤에 울산김씨․김해김씨가 들어 왔다. 1930년대에 면사무소가 산정리에서 옮겨오므로 마을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마을형성은 울산김씨․밀양박씨 4호, 김해김씨․전주이씨 3호, 행주기씨․광산김씨․진원박씨․평택임씨․한양조씨 2호, 경주김씨․영천이씨․광산이씨․의령남씨․나주나씨․여산송씨․순흥안씨 등이 58호에 174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조리형국이라 하고, 마을 이름은 본래 여울내(灘)를 건천리(乾川里)로 또는 여우래(如雨來)로 표기하였다. 인물로는 진원면장 기동희, 육군 소령 김용원, 장성중앙초교장 김행규, 자연보호협회장성군지회장 김광배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덕주(德舟) 덕주는 백제 시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진원현의 세금을 받던 곳이다. 전대의 입향 성씨는 알 수 없고, 500여년 전에 여산송씨와 황씨가 살았다 하며, 200여년 전에 울산김씨가 들어왔다. 뒤에 광산김씨․청송심씨․함평이씨․밀양박씨․청안이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울산김씨 8호, 김해김씨 5호, 전주이씨․밀양박씨․여산송씨 3호, 제주고씨 2호, 함평이씨․행주기씨․나주나씨․청송심씨․제주양씨 등이 124호에 243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배형국이라 하여 샘을 파지 않는다 한다. 본래 덕천과 한 마을로 여울(灘)내의 동편에 새로 생겨 신덕이라 하였는데 덕주로 개칭하였다. 마을 동쪽에 공세촌이 있었는데 덕주가 커지면서 한 마을이 되었다. 1951년에 현 면사무소가 옮겨오고 이어 지서, 농협, 우체국, 보건지소, 농촌지도소 등이 들어와 면소재지가 되었다. 인물로는 삼서초등학교장 김정규, 진원면장 김덕규․김면규, 대동고등학교장 김종대, 경찰서장 김복규, 한국통신공사 과장 김종화․김종산, 우체국장 이계방, 장성군의원 김종권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면장 김경호청덕기념비, 충효비, 미륵불이 있다. ◦ 남계(南溪) 남계는 500여년 전에 백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 하나 알 수 없다. 300여년 전에 울산김씨가 들어오고, 1900년대에 함평이씨․황주변씨․여산송씨․초계정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울산김씨․광산김씨 5호, 경주최씨․함평이씨․밀양박씨 2호, 황주변씨․의령남씨․밀양손씨․전주이씨․초계정씨 등이 29호에 114인이 살고 있다. 마을 여울내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계라 하였다 한다. 본래 장문동에서 나환자가 생겨 폐촌이 되고 접천들에 이주했다고 한다. 《호구총수》에 남계의 동남간에 갈마촌이 있었는데 이곳이 접천들로 뒤에 남계와 한 마을이 되었다고 본다. 인물로는 광주교육대학장 김태규, 진원면장 김경호․김창규․이근학, 순천대 교수 김형용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매화(梅花) 매화는 150여년 전에 울산김씨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다. 1900년경에 진주강씨․김해김씨가 들어오고, 일제시에 광산이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울산김씨 6호, 진주강씨․현풍곽씨 2호, 연안차씨․제주양씨․광산이씨․경주김씨․담양전씨․청안이씨 등이 25호에 69인이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은 본래 재동(齋洞) 또는 매동이라 하였는데 마을 형국이 매화낙지의 형국으로 매화동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전남대학교 농대학장 김동호, 문교부 장학관 김동욱, 남대문세무서장 김동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5) 학전리(鶴田里) 본래 장성군 내동면과 남일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동면의 덕촌리, 남계리, 외동면 금곡리, 남일면 평촌리, 학전리 일부를 병합하여 학전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남일면에 평촌리, 접천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접천리는 없어지고, 학전리와 금곡리가 새로 생겼다. 금곡리는 1975년 담양댐 수로공사로 편입 폐촌되었다. 현 행정이동은 학전 1리는 학전이고, 학전 2리는 덕촌, 평촌이다. ◦ 학전(鶴田) 학전은 150여년 전에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이어서 여산송씨․홍주송씨․광산김씨가 차례로 들어오고, 일제시에 보성선씨․황주변씨․하동정씨․진원박씨․김해허씨․상산김씨가 들어왔다. 마를 형성은 홍주송씨 5호, 여산송씨․보성선씨 4호, 하동정씨 3호, 문화유씨․밀양박씨․김해허씨 2호, 김해김씨․상산김씨․황주변씨․전주이씨․전의이씨․한양조씨 등이 44호에 110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백학하전(白鶴下田)이라 하여 학전이라 하였다. 일설에는 마을 뒤 학정봉에서 이장을 하는데 학 세 마리가 나와 날아갔다고 한다. 한 마리는 밭으로 날아가서 그 곳이 학전이 되고, 다른 한 마리는 숲속으로 날아가서 그 곳이 학림이 되고, 또 한 마리는 산골로 날아가 앉으니 그 곳이 학동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초등학교장 송태식, 진원면장 박종현, 도경 상황실장 유기현, 파월동지회 장성지부장 송태근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평촌(平村) 평촌은 400여년 전에 의령남씨가 진원현의 현청 가옥을 매수하여 이 곳에 이건하고 살기 시작하니 해주오씨․김해김씨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1800년대에 울산김씨가 1900년대에 진원박씨․진주강씨․하동정씨․서산유씨․광산이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김해김씨 4호, 진주강씨․울산김씨․진원박씨 3호, 옥천조씨․홍주송씨․서산유씨 2호, 광산김씨․함평이씨․광산이씨․전주이씨․하동정씨․밀양박씨 등이 30호에 70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와우형국이라 하며, 하전들(하전평야)의 가운데 위치하여 평촌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진원면장 김봉수, 국회의원 김병수, 진원단위농협장 김상표, 육군 중령 강창원, 한국전력 광주지점 부장 강성욱, 열사 박은주, 서강정보대학 이사장 김상우, 서강정보대 교수 김병인, 검사 정희영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덕촌(德村) 덕촌은 120여년 전에 황대보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여 뒤에 김해김씨․전주이씨․광산김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김씨 4호, 하동정씨 3호, 한양조씨․김해김씨․밀양박씨․전주최씨 2호, 진원박씨․이천서씨․광산이씨․청송심씨․죽산안씨․제주양씨․고령신씨 등이 26호에 79인이 살고있다. 마을 형국이 와우형국이라 하여 우동 또는 덕구몰이라 하였는데 뒤에 덕촌으로 개칭하였다. 인물로는 육군 중령 김길호, 경찰 경감 안선중이 이 마을 출신이다.
(6) 진원리(珍原里) 본래 장성군 내동면과 외동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동면의 월송리, 고산리, 흥동리, 광안리, 회룡리, 중흥리, 연동리, 묘동리, 덕촌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옛 진원현 소재지였으므로 진원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내동면에 고산촌, 창촌리, 주동리, 남학리, 외동면에 월송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흥동리, 광안리, 회룡리, 중흥리, 연동리, 묘동리가 새로 생겨나고, 창촌리는 흥동리에 주동리는 중흥리에 합병되고, 남학리는 없어졌다. 현 행정이동은 진원 1리는 고산(창촌, 담대, 직동, 중동, 광안)이고, 진원 2리는 연동, 묘동이다. ◦ 고산(高山) 고산은 부족국가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삼한시대의 구사오단국 백제의 구사진혜현 진원현의 소재지 마을이다. 전대의 성씨 입향은 알 수 없고 조선초기에 최씨와 박씨가 살았다하나 상고할 수 없다. 현재는 400여년 전에 진원박씨가 들어 왔고, 300여년 전에 황주변씨․광산이씨․행주기씨․탐진최씨가 차례로 들어왔으며, 1900년대에 전주이씨․광산김씨․서산정씨․옥천조씨․홍주송씨․밀양박씨가 들어왔다. 일제시에 연안차씨․고령신씨․수원백씨․장수황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이씨 11호, 진원박씨 9호, 행주기씨․연안차씨․옥천조씨 6호, 밀양박씨․황주변씨․홍주송씨 5호, 창영조씨․전주이씨 3호, 김해김씨 2호, 영천이씨․진주정씨․인동장씨․달성서씨․제주양씨․장수황씨․고령신씨․울산김씨․탐진최씨․금성나씨․하동정씨 등이 92호에 254인이 살고 있다. 마을은 본래 12개 마을로 주동, 중동, 광안, 창촌, 상고, 하고, 월송, 흥동, 담대, 회룡, 연동, 묘동 등을 총칭하여 고산이라 한다. 인물로는 기린도 찰방 변세린, 진사 이재원, 진원면장 차기주, 공한의원장 박남순, 나주경찰서 경감 박수채, 사무관 차기봉, 진원농협장 송세근, 사무관 박옥현, 의학박사 조경종․조성현, 육군 중령 박창순․차정호․박상천, 해군 중령 박병환, 농협 전무 이강로, 농림부 서기관 김덕호, 가수 한세일(박지현)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진원성, 고산서원, 선정비군 등이 있다. ◦ 연동(硯洞) 마을형성은 서산정씨․연안차씨․전주이씨 3호, 광산이씨․황주변씨 2호, 김해김씨․진원박씨․평산신씨․창영조씨 등이 18호에 54인이 살고있다. 마을 형국은 달 형국이라 하며, 본래 마을 이름은 덕촌이라 하였는데 1900년대에 연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진원면장 차기옥, 차은종이 이 마을 출신이다. ◦ 묘동(畝洞) 묘동은 150여년 전에 광산이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 광산이씨 집성촌으로 타성은 근래에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광산이씨 13호, 광산김씨․진원박씨․금성나씨․연안차씨 등이 17호에 52인이 살고 있다. 마을 뒷산이 풍수설에 말발굽에 해당한다 하고, 뒷산에 고양이 명당이 있어 처음에는 묘(猫)자를 썼는데 뒤에 묘(畝)자로 바꾸었다 한다. 문화유적으로 진원리 5층석탑과 입석이 있다.
(7) 산동리(山東里) 본래 장성군 외동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동면의 신촌리, 능산리, 진장리, 주암리, 산동리, 작동리, 금곡리, 내동면 묘동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산동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외동면에 삼소리, 신촌리, 종능촌, 작동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진장리, 주암리, 산동리가 새로 생겨나고, 삼소리는 광산군 본촌면에 편입되고, 종능촌은 능산리로 바뀌고, 주암리는 없어졌다. 진장리는 1975년 담양댐 수로의 부실공사로 마을에 물이 들어와 살 수 없게 되어 1980년에 타지로 이주 없어졌다. 현 행정이동은 산동 1리는 작동이고, 산동 2리는 산동, 산동 3리는 능산이다.
◦ 작동(芍洞) 작동은 400여년 전에 울산김씨인 김덕환이 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이 생겼다 한다. 울산김씨 동족마을로 내려오다 1900년대에 김해김씨․전주이씨․순흥안씨․경주정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울산김씨 33호, 순흥안씨 4호, 밀양박씨․경주정씨 3호, 함평이씨․김해김씨 2호, 광산김씨․파평윤씨․홍주송씨․전주이씨․평산신씨 등이 60호에 136인이 살고 있다. 마을은 사주(巳走)형국으로 청광등이 뱀의 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본래 마을 이름이 작굴인데 작(雀)동으로 썼는데 일제말기에 작(芍)자로 쓰기 시작하였다. 인물로는 임곡면장 김종운, 광산경찰서 보안과장 김권수, 대한주택공사소장 안승인, 의학박사 안승현, 경제학박사 안승우, 변호사 안승규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울산김씨의 영향재가 있다. ◦ 산동(山東) 산동은 500여년전에 진원박씨가 들어와 살았다 한다. 뒤에 전주이씨가 들어오고, 1900년대에 청주김씨․홍주송씨․신창표씨․광산김씨․해주오씨․서산정씨․평산신씨․강능유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전주이씨 5호, 진주강씨 4호, 청주김씨․신창표씨 3호, 현풍곽씨․진원박씨․홍주송씨․강능유씨․해주오씨 2호, 김해김씨․광산김씨․평산신씨․서산정씨․탐진최씨 등이 53호에 158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반월형국 또는 배형국이라고 한다. 본래 신촌(새몰)인데 뒤에 산동리가 새겨 두마을을 합하여 산동으로 표기하고 있다. 인물로는 청계 박원순, 진원면장 이보응, 광주컴퓨터학원장 김일두, 홍농초등학교장 이재인, 육군중령 이종영, 전남의대 교수 이삼용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청계정이 마을에 있다. ◦ 능산(陵山) 능산은 고려시대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전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재 살고 있는 성씨는 1800년대에 김해김씨와 밀양박씨가 들어 왔고, 뒤에 행주기씨와 전주이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밀양박씨․행주기씨 3호, 김해김씨 2호, 진원박씨․전주이씨 등이 8호에 16인이 살고있다. 마을 이름은 본래 종능촌이라 하였는데, 능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왕자의 무덤이 있는 곳을 능동이라 하여 능산이라 하였다는 설과 비단바위가 있어 능(綾)자가 능(陵)자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인물로는 광주고속 부장 박일구, 육군 대위 박부용, 여자하키 국가대표선수 기숙현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8) 학림리(鶴林里) 본래 장성군 외동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학림리, 모천리, 중천리, 월정리, 옥동리, 고내리, 삼소지면 고내리, 월정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학림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외동면에 고내촌, 성산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모천리, 중천리, 월정리, 옥동리가 새로 생겨나고, 성산리는 학림리로 바뀌었다. 현 행정이동은 학림 1리는 학림, 모천, 옥동이고, 학림 2리는 월정, 고내이다. ◦ 학림(鶴林) 학림은 600여년 전에 진원박씨인 위남 박희중이 성산동에 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진원박씨 집성촌으로 1850년경에 장성서씨가 처가를 따라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진원박씨 21호, 장성서씨 2호, 진주하씨․문화유씨 등이 17호에 49인이 살고있다. 마을 형국은 학형국이라 한다. 본래 성산이라 하였는데 학림으로 개칭하였다. 학림은 새름(鳥)이었는데 학형국이라 하여 학림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직제학 박희중, 진사 박곤생․박진생․박근지․박서, 변호사 박태운, 장학관 박귀현, 초등학교장 박태성, 부천교육보험국장 박관우, 한국종합금융 지점장 박훈, 대한교육보험 국장 박태승, KBS송신소장 박중구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학림서원지에 유허비와 재실이 있다. ◦ 모천(慕泉) 모천은 300여년 전에 함평이씨가 거문고등에 터를 잡고 살았다 한다. 이 곳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여 폐촌이 되고 지금의 마을로 이주하였다 한다. 1850년경에 김해김씨와 한양조씨가 들어오고, 1900년대에 영양천씨․금성나씨․전주최씨․여산송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영양천씨․김해김씨․금성나씨 2호. 여산송씨․전주최씨․광산김씨․진원박씨․한양조씨․천안전씨․상주엄씨․원주이씨 등이 20호에 55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자라형국이라 하고 동산 밑에 거문고등과 옥여봉이 있어 옥여탄금형인데 거문고를 등지고 있어 인물이 나지 않는다 한다. 마을 이름은 본래 만촌 또는 모고라 하였는데 마을 샘이 좋아 모천으로 바꾸었다 한다. 인물로는 여천종합산부인과원장 송재천, 육군 대령 김병현, 증권감독관 나상권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입석 2기가 마을 앞에 있다. ◦ 옥동(玉洞) 옥동은 160여년 전에 전주이씨가 월정에서 이주하여 살았다. 뒤에 달성서씨와 안동권씨가 들어오고, 이어 밀양박씨․해주오씨․여흥민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달성서씨 7호, 전주이시 4호, 안동권씨․해주오씨․여흥민씨 2호, 밀양박씨․김해김씨 등이 21호에 62인이 살고있다. 마을 서북쪽에 옥여봉이 있어 옥자를 따서 옥동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현대자동차 상무이사 서동혁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입석 2기가 마을 앞에 있다. ◦ 월정(月汀) 월정은 500여년 전에 여씨가 서당골에 살았다 하고 뒤에 전주이씨가 들어왔다고 하나 한말 이전의 기록에 마을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1800년대에 풍산홍씨․경주정씨가 들어오고, 1900년대에 안동권씨․해주오씨․영천이씨․강능유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전주이씨 11호, 경주정씨 9호, 풍산홍씨․달성서씨 3호, 영천이씨․안동권씨․밀양박씨․해주오씨․진주강씨․김해김씨 2호, 강능유씨․남평문씨․순창설씨․진주하씨․평산신씨․여산송씨 등이 68호에 198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반월형이라 하는데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 월정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옛 기록에는 월정(月亭) 또는 월점(月店)으로 표기되어 있다. 인물로는 의병장 강사문, 의학박사 홍후식, 신용보증기금 지점장 이정남, 해군 대령 정영천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월파경주정공행적비, 유인김해김씨추모비 등이 마을에 있다. ◦ 고내(古乃) 고내는 300여년 전에 해주오씨와 진주하씨․안동권씨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1900년대에 전주이씨․광산김씨․경주김씨가 차례로 들어 왔다. 마을 형성은 광산김씨 6호, 김해김씨 3호, 경주김씨․한양조씨 2호, 안동권씨․행주기씨․금녕김씨․밀양박씨․전주이씨․담양전씨․파평윤씨 등이 26호에 82인이 살고 있다. 마을 앞들을 바다로 보고 마을은 고래로 보아 고래라 하였는데 고내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물로는 국회의원 박종태의 출신 마을이다.
(9) 상림리(上林里) 본래 장성군 외동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학동리, 죽산리, 동산리, 상림리, 양유리, 만수리, 대치면 환인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상림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외동면에 상림촌, 양유촌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학동리, 죽산리, 동산리, 만수리가 새로 생겨나고, 죽산리는 양유리로 합병이 되고 동산리는 없어졌다. 현 행정이동은 상림 1리는 만수, 상림이고, 상림 2리는 양유, 학동이다. ◦ 만수(萬水) 만수는 마을 안에 고인돌이 있어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마을은 100여년 전에 서산정씨․인동장씨․죽산박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생겼다 한다. 뒤에 경주정씨․탐진최씨․경주이씨․창녕조씨가 차례로 들어 왔다. 마을형성은 서산정씨 6호, 경주정씨 4호, 광산김씨․진원박씨 3호, 창녕조씨 2호, 인동장씨․죽산박씨․경주이씨․탐진최씨․밀양박씨․김해김씨 등이 32호에 83인이 살고있다. 마을 형국은 배형국이라하며, 본래 다나몰이라 하여 오래 전부터 마을이 있었는데 중년에 없어 졌다가 다시 마을이 생겨나 마을 앞 샘물이 좋아 만수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해남경찰서장 장춘배, 초등학교장 장춘식, 진원면의회의장 장두만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고인돌 4기와 박일구독립투사공덕비, 현부이흥례여사기적비가 있다.
◦ 상림(上林) 상림은 오래 전에 형성된 마을로 시기는 알 수 없다. 400여년 전에 함평이씨가 살았다 한다. 뒤에 평택임씨가 들어오고, 1900년대에 강능유씨․전주이씨․광산김씨․울산김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평택임씨․광산김씨 5호, 전주이씨․강능유씨 2호, 영천이씨․평산신씨․달성배씨․인동장씨․함평노씨․창영조씨․울산김씨․서산정씨․풍천임씨 등이 22호에 61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숙조투림 형국이라 하며, 마을에 시누대가 많아 화살대로 상부에 보내졌다 하여 상림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장성부군수 김이경, 외환은행 과장 서성복, 전대병원 의사 신진옥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양유(楊柳) 양유는 500여년 전에 함평이씨와 진원박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 하나 지금은 살지 않고, 300여년 전에 전주최씨가 들어오고, 뒤에 전주이씨․밀양박씨․청안이씨․반남박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전주이씨 14호, 청안이씨 4호, 금녕김씨․밀양박씨 3호, 반남박씨․풍천임씨․진주강씨․흥양이씨 2호, 광산김씨․금성오씨․전주최씨․문화유씨․광산노씨 등이 40호에 120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동풍양유 형국이라 하며, 마을에 버드나무가 많았다 한다. 본래 양구쟁이 인데 양유로 표기하였다. 대매는 죽산으로 일제말기에 양유에 합병하였다. 인물로는 경북대학 교수 박용구, 대한지적공사 전주지사 과장 이흥로, 의학박사 박균명, 아세아자동차 총무과장 김관진, 삼양사 업무과장 이병로, 목사 이송로, 남도건설 부사장 박균환, 무역회사 전무이사 박창구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한인석지도사기적비와 입석 2기가 있다. ◦ 학동(鶴洞) 학동은 300여년 전에 해기에 연안차씨와 추계추씨가 들어와 살다가 현 위치로 옮겨 왔다 한다. 1800년대에 경주정씨와 선산김씨가 들어오고, 1900년대에 경주최씨와 진주강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경주정씨 22호, 경주최씨 3호, 진주강씨․흥양이씨 2호, 평택임씨․광산김씨․선산김씨․전주이씨 등이 41호에 145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송학하전 형국이라 해서 학동이라 한다. 일설에 학정봉에 학이 이곳에 날아 왔다하여 학동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인물로는 사창초등학교장 정권조, 장성군청과장 정병현, 곡성여고교장 정원조, 장성군의원 정희권, 진원농협장 정북조, 외무부 사무관 정병후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창은정원조송덕비가 모정 앞에 있다.
(10) 용산리(龍山里) 본래 장성군 외동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동리, 신기리, 옹점리, 주평리, 용산리, 만수리, 청룡리 삼소지면 해산리 대치면 청룡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산리라 해서 진원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외동면에 소용산, 신용산, 신기촌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옹점리, 주평리, 용동리가 새로 생겨나고, 신기촌은 두월리로, 옹점리는 학산으로, 청룡은 용동으로, 소용산 신용산은 용산으로 바뀌었다. 현 행정이동은 용산 1리는 학산, 두월이고, 용산 2리는 주평, 청룡이며, 용산 3리는 용산, 초동이다. ◦ 학산(鶴山) 학산은 170여년 전에 김해김씨와 파평윤씨가 터를잡아 살기 시작하였다. 뒤에 전주이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김해김씨 7호, 전주이씨 6호, 파평윤씨 3호, 광산김씨 2호, 하동정씨․달성서씨․신안주씨 등이 23호에 51인이 살고있다. 마을 형국은 키(치)형국이라 하여 재산을 모으면 타지로 떠나야 한다는 설이 있다. 본래 마을 이름은 옹기를 구어 옹점 또는 점촌으로 불렀으나 1952년에 학산으로 바뀌었다. 인물로는 교육청 서무과장 김희중, 경찰서 교통과장 김인태, 진원면 예비군 중대장 윤태병, 전라남도 교육감 정영진, 의학박사 김경일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두월(斗月) 두월은 300여년 전에 곡갱이골 위에 전주이씨가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어 신기라 하였다 한다. 1800년대에 현 위치에 진원박씨가 새터를 잡아 살면서 신기는 자연적으로 없어지고 뒤에 경주정씨․밀양박씨․달성서씨가 차례로 들어 왔다. 마을형성은 광산김씨․밀양박씨 5호, 밀양손씨 4호, 전주이씨 3호, 경주정씨 2호, 진주강씨․순천김씨․남평문씨․죽산박씨․진원박씨․달성서씨․청송심씨․해주오씨․전의이씨․탐진최씨․김해김씨․양천허씨․장수황씨 등이 59호에 201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동반월 형국이라 하고 마을 앞에 북두칠성에 해당하는 돌무더기가 있어 신촌을 두월이라 1940년대에 바뀌었다. 인물로는 진원면장 박정구․박영구, 독립투사 박일구, 변호사 김형민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1934년 진원동초등학교가 개교되어 마을이 크게 형성되었다. ◦ 주평(舟坪) 주평은 1850년경에 김해김씨와 은진송씨가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고 뒤에 전주이씨․평산신씨․한양조씨․이천서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은진송씨 6호, 전주이씨․김해김씨 4호, 밀양박씨․전주최씨 2호, 진원박씨․평산신씨․남양홍씨․이천서씨 등이 29호에 82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배형국으로 주평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광주교도소 과장 송종호, 의정부경찰서 최근열, 정형외과의사 송민우, 변호사 송봉룡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청룡(靑龍) 청룡은 300여년 전에 서산정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 뒤에 경주최씨․평택임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 형성은 경주최씨 6호, 평택임씨․광산김씨 3호, 진주강씨 2호, 남평문씨․전주이씨․청송심씨․밀양박씨․순흥안씨․파평윤씨․담양전씨․달성배씨․연안차씨 등이 22호에 63인이 살고 있다. 마을 용형국으로 청룡에 해당하여 청룡등이라 하고, 청룡 아래 언덕 엉밑을 용동으로 부른다. 용동을 청룡과 합하여 청룡이라 한다. ◦ 용산(龍山) 용산은 300여년 전에 서산정씨가 터를 잡아 들어오고, 뒤에 밀양손씨․순흥안씨․김해김씨․진주강씨․평산신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 형성은 김해김씨 8호, 밀양손씨 6호, 평산신씨 3호, 순흥안씨 2호, 전주이씨․서산정씨․울산김씨․진주강씨 등이 19호에 53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와룡형국으로 마을 이름을 소용산 신용산으로 2개 마을로 형성되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한마을이 되면서 용산으로 바뀌었다 한다. ◦ 초동(草洞) 초동은 1957년 경주정씨인 정신조 정운조가 일본소유의 종방의 토지를 불하받아 살기 시작하였다. 뒤에 경주최씨․영천이씨․제주고씨․밀양박씨․광산김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 형성은 경주정씨 16호, 광산김씨 4호, 전주이씨 3호, 경주최씨․경주이씨․신안주씨․밀양손씨 등이 40호에 133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무중와우 형국으로 소바탕 또는 섶전으로 불리었으나 소가 풀이 필요하다 하여 1970년대에 초동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청와대 경무과장 정병만, 하나로통신 경영혁신과장 정성문, 포항제철 연구관 정구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