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2)
월당 조경희 수필가
“장르가 무엇이냐? 어디 출신이냐? ......” 1987년 2월 하순 어느 날, 대학로 예총회관 예총회장실에서 신입 직원 면접에서 월당(月堂) 조경희(趙敬姬) 수필가를 처음 만났다. 그는 예총회장에 재선되어 새로운 예술 사업 집행을 담당할 직원을 선발하고 있었다. 즉시 출근해서 열심히 하자는 합격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 문화 예술계에서는 그를 여장부로 불렀다. 인사동에 있던 예총회관을 지금 대학로 자리로 옮겨오면서 당시 문화공보부와 서울시의 관료들뿐만 아니라, 정계, 경제계 등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예총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이러한 그의 역량은 발휘되어 예총 발전과 더불어 우리 문화예술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예총에서는 예술인들을 위해서 전국 예술인대회, 예술심포지엄, 예술강연회, 예술인 수련회 등 많은 행사를 실시했다. 그때마다 개회사나 회장 인사말의 순서가 있는데 한번도 원고를 보고 읽는 것이 아니라, 즉석 스피치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드는가 하면 예술이 당면한 현안문제들을 거론하여 참석한 장관이나 고위인사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예총에서 월간『예술계』를 창간하여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 무용 등에서 평론가를 배출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고 우리 예술계의 비평문화를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예총예술문화상’을 제정하여 당해 연도에 공헌이 많거나 우수작품을 발표한 예술인에게 포상하여 창작과 공연 등에 대한 노고를 기렸다. 지금까지도 이 상은 계속 시상되고 있으며 월간『예술계』는 어떤 사정에 의해서 월간『예술세계』로 제호를 변경하여 발행하고 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필자가 편집주간을 맡아서 그 정신을 계승하는데 노력하였는데 그가 예총회장에 재선한뒤 얼마가 지나 당시 집권한 노태우 정부가 정무 제2장관으로 발탁하여 예총을 떠났다. 주로 여성계의 현안을 담당했지만, 문화예술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축하를 하고 격려를 했다. 필자는 그동안 각 사보와 잡지에서 청탁받아 썼던 글들을 모아 산문집『지성이냐 감천이냐』를 내면서 장관께 서문을 부탁했더니 즉석에서 글 몇 편을 뽑아 읽고 나서 ‘훌륭한 수필’이라고 덧붙이면서 왜 수필집이 아니고 산문집이냐고 물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수필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등단도 하지 않았으므로 ‘수필’로 이름하기에는.....하고 얼버무렸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으며 후천적으로 피마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는 엄연한 진리를 김송배 시인은 이미 체질화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부지런하다. 바쁜 일상의 와중에서도 본업인 시창작 이외에 산문까지 써서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묶다니,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라는 요지로 써서 ‘한국수필가협회 회장 趙敬姬’라고 친필로 서명까지 해주고 당장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으로 입회를 하라는 엄명이었다. 그후 필자는 수필가협회 회원으로 또 이사로서 협회의 행사나 모임에 불려나가 진행 사회를 맡아 그를 도왔다. 이것은 예총에서 맺은 인연보다 필자의 인격을 신뢰하는 그의 인간적인 사고(思考)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다시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역임하고 1971년에 설립된 한국수필가협회가 사단법인으로 등록되면서 이사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그는 한국문인협회와 국제펜한국본부의 이사장에 출마하여 낙선하는 고배도 들었다. 이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원로문인이 단체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변 문인들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하리라.
내가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34년이다. 이화여전에 들어가서 졸업 때까지 내내 尙虛 李泰俊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상허 선생의『문장강화』는 내가 가르침을 받던 그 당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 강의하시던 내용이 후에 단행본으로 나와 오늘의 글쓰기의 고전으로 꼽고 있다.
그는 2005년 봄, 그러니까 타계하기 5개월 전에 펴낸『趙敬姬 隨筆集』‘책머리에’에서 그가 문학의 길로 입문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또 ‘이렇듯 잘되었던 못되었던 나는 일평생 수필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 싶다. 내 남은 생도 수필을 위해 사는 삶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어느 글에서 피력하고 있다. 그는 이화여전 재학시에 『한글』이라는 잡지에 <측간단상>이란 수필이 당선하여 문단에 나왔다. 졸업 후에는 조선일보, 매일신보, 서울신문, 등 언론 쪽에서 일하다가 한국일보에서 정년퇴임한 후 문인협회 이사장 권한대행, 예총회장, 여성문학인회장, 이대동창문인회장, 수필가협회 이사장과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문학과 예술의 중심에서 탁월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한국 수필의 진흥을 위해서 일생을 보냈다. 서울시청 뒤쪽에 있던 수필가협회 사무실을 찾아가면 그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간간히 찾아오는 회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보다는 좌중을 압권하는 유머가 더욱 진지한 지적 사유를 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수필가협회의 기관지『한국수필』을 격월간지로 격상하고 한국수필대상을 시상하여 수필 인구의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그리고 집필도 꾸준히 해서 수필집『우화』,『가깝고도 먼 세계』,『음치의 자장가』,『얼굴』,『골목은 아침에 나보다 늦게 깬다』,『웃음이 어울리는 시대』,『낙엽의 침묵』과 수필선집을 발간하였으며 2004년에는 자서전 『언제나 새길을 밝고 힘차게』를 간행하였다. 『조경희 수필집』이 나온 그해 초여름, 그의 그림자처럼 모시고 다니던 이 숙(李淑) 수필가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 고려대병원 중환자실에 조회장님이 입원했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는 물건을 구입해 급히 달려갔으나 문병 온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입원한 적이 있으나 그때는 병상에 누워서도 특유의 통쾌한 언변으로 문병객들을 웃음바다로 몰았는데 이번에는 ‘어렵다’는 주위의 말이다. 문득 그의 작품 <지푸라기의 철학>이 떠올랐다.
흔히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한다는 말이 있다. 지푸라기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엔가 의지하려는 심상을 말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허위적대다가 드디어 기운이 다 빠지고 죽을 지경에 이르러 반 시체가 되어 어느 암초에 걸치게 된 인간을 생각하고 싶다. 죽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살겠다고 발버둥쳤겠는가. 얼마나 살기 위해서 고생을 했겠는가. 그러나 그의 살겠다고 고함을 친 목소리도 그의 안간힘도 그를 구하지는 못하였고, 죽음 속에서 떠내려가다가 걸쳐진 암초 때문에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겠다.
그의 바싹 마른 손을 쥐고 김송배라고 외쳤다. 손에 힘을 주어 신호를 보내는 것을 보면 알겠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얼마 전 부군 홍태식 선생을 먼저 보내고 뒤따라가는 것일까.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까. 2005년 8월 5일 그는 영면했다. 그가 1918년 4월 6일 강화도 온수리 해랑당 마을에서 출생했으니까 향년 87세가 된다. 빈소에는 딸 홍성미와 사위 노진준 씨가 지키고 있었다. 조문을 온 많은 문인들이 그의 문학과 업적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의 문학관이 강화도에 세워지기 위해 소장품과 유품들이 정리되고 있는 중이었다. 개관을 눈앞에 두고 그는 눈을 감았다. 필자는 평소에 그를 회장님으로 불렀다. 회장, 장관, 이사장 등 직함이 많았으나 어쩐지 회장님 호칭에 정감이 갔다. 예총회장 재임시에 맺은 인연 때문인지 모르겠다. 영결식장에는 그의 평소 호탕한 모습과 함께 청조근정훈장과 은관문화훈장이 국화꽃 속에 쌓여서 충청도 선영으로 영원히 떠나고 있었다.
(문학공간 08.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