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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신학생의 첫 번째 편지
발신일 : 1842년 4월 26일발신지 : 마카오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우리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을 때 얼마나 외로워하고 애달파하였는지를 회상하시면, 제가 신부님의 여행에 대하여 얼마나 조바심을 가지고 염려하였는지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마카오 대표부 책임자로서 조선 신학생을 5년 동안 먹여주고 가르쳐준 르그레주아 신부는 1842년 초에 파리 본부 신학교 학장으로 전임)
저는 하루라도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신부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낸 일은 없다고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쓰라림을 하느님을 위해 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시오,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원의이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죽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천사로 하여금 경애하올 신부님을 무사히 인도하셨고 또 평안히 보호하고 계신 줄로 압니다.
신부님을 통하여 최대의 공경심과 충성심을 우리의 최고 목자이신 교황님께 바칩니다.
이곳 우리 주변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는 다른 것은 생략하고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서 떠나고 마침내 저의 유일한 동료 안드레아(김대건)와도 떨어져 있는 저는 작은 방에 외톨로 남아 있습니다마는 하느님과 홀로 있기가 소원입니다.
신부님이 떠나신 다음 우리 조국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온 것이 없습니다. 안드레아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군함이 마닐라에 기항한 후 아직 그 목적지를 향하여 떠나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파보리트라 불리는 다른 군함을 타고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외교관) 드 장시니(De Jancigny)씨와 함께 조국으로 가기로 되어 있어서 하루하루 그 군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의 동포들이 마침내 시온성으로 회두하여 우리의 창조주이시오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송할 날이 언제쯤 올 것인가요! 만일 우리가 부당하다면 적어도 당신의 사랑하는 성교회의 간곡한 기도와 애원으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쏟으신 당신의 피를 기억하시어 가련하고 불쌍한 우리를 굽어보시게 되기를 빕니다.
만일 신부님이 저더러 무엇을 청하라고 말씀하신다면, 다른 것은 말고 오직 당신의 작은 아들인 저를 항상 기억해주시기만을 청하겠습니다. 신부님은 저를 특별히 보살펴주시어 저에게 견진성사를 받게 하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신부님께 바라는 바는 진짜 십자가 나무(寶木) 한 조각이나 성인들의 유해를 주셨으면 합니다.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신부님, 항상 편안하십시오. 신부님께 대한 추억은 제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비천하고 순종하는 아들 토마스 양업이 엎드려 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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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신학생의 두 번째 편지
발신일 : 1844년 5월 19일
발신지 : 소팔가자(小八家子)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신부님과의 애절한 서신 교환을 못하고 지낸 지 어느덧 3년이나 흘렀습니다. 육신으로는 비록 신부님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나, 마음과 정신으로는 잠시도 신부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서툴고 어설프기 짝이 없으나 제 딴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격식에 맞게 쓴 편지를 신부님께 보냈는데 혹시 신부님께서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지 얼마 안 되어 저는 저의 조국을 향하여 파견되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요동(遼東)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지금 벨린(Belline) 명의(페레올) 주교님과 메스트르 신부님과 안드레아(김대건) 형제와 함께 있습니다.
언젠가 좋으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의 동포들을 만날 행운이 저에게 다가오기를 하루하루 바라면서 머물러 있습니다. 저의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을 쏟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실로 눈물겹지만 어떤 면에서는 매우 흥미 있는 조선의 소식에 대해서는 이미 신부님께서 장상들의 편지를 통해 더 자세하고 더 똑똑하게 들으셨을 줄로 믿기 때문에 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는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마치 아벨의 피처럼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만일 저의 미소한 지위와 능력 부족이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많은 글을 써서 우리 회의 장상들과 지도자들에게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형제 신자들에게 이 사정을 두루 알려드렸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우리가 마땅히 최대의 감사를 드려야 하고 또한 감사를 드리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즉 신부님께서 애덕과 지혜를 다하시어 우리 편의 많은 사정을 그분들에게 소개하고 널리 선전해주시어 저의 간절한 소원을 채워주시기를 청합니다.
끝으로 특별한 인연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는 경애하올 사부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통하여 간청하오니 이 소자를 잠시도 잊지 말아주십시오.
전번 편지에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 나무의 한 조각을 청한 일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그것을 장만하신다면 틀림없이 저에게 보내주실 줄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순종하고 부당하며 미약한 조선인 아들 최 토마스 엎드려 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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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부제의 세 번째 편지
발신일 : 1846년 12월 22일
발신지 : 심양(瀋陽)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벌써 오래전부터 큰 희망을 품고 신부님의 화답을 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편지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바심 없이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렇듯이 큰 염려와 자애로 아버지의 정을 베푸시는 신부님한테 편지까지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황송한 일이고, 또한 신부님께서는 언제나 지극히 많은 일로 너무도 바쁘시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12월 21일에 신부님의 편지와 거룩한 유해를 받고 더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우리 포교지 밖에서 떠돌고 있으니 저도 매우 답답하고, 신부님의 마음도 괴로우실 것입니다. 저는 이제야 겨우 저의 동포들한테로 가는 도중입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저로 하여금 신부님들과 형제들을 반가이 만나 포옹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주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무사히 조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신부님께 전한다면 이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실 신부님의 기쁨에 못지않게 저에게도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기뻐 용약하는 마음으로 더 자유롭고 더 자세하게 신부님께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이제 발걸음은 가볍게 뛰어 달리고 있으나 얼굴은 무겁게 푹 수그러지고 있습니다. 대단히 불리한 역경과 극도의 빈곤과 허약으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풍부한 자비심에 희망을 가지고,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너희는 잡혀갔을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하느님께서 일러주실 것이다.”(마태 10,19) 라고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비단 설교의 은사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저의 빈곤과 허약을 의식하고 있는 저는 매우 두렵고 겁이 납니다만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으로 굳세어져서 방황하지 않으렵니다.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저의 이 서원을 신부님의 기도로 굳혀주시고 완성시켜주시기를 청합니다.
고마우신 신부님을 통하여 신학교의 모든 신부님들과 특히 바랑(Barran) 신부님께 깊은 인사와 감사와 순종을 드립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비천하고 미약하며 순종하는 아들 최 토마스가 엎드려 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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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부제의 네 번째 편지
발신일 : 1847년 4월 20일
발신지 : 홍콩(香港)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지난해 12월에 조선으로 가던 도중에 봉천(奉天)에서 고대하던 신부님의 편지뿐 아니라 거룩한 유해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신부님께 짧은 (셋째) 편지를 올렸습니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며 변문(邊門)까지 갔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
조선에 들어가서 신부님께 알려드릴 기쁜 소식이 있을 때까지는 편지를 올릴 기회가 없으려니 여겼습니다마는, 아직도 어쩔 수 없이 이 귀양살이하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또다시 신부님께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근심을 신부님과 함께 나눔으로써 괴로움을 덜어서 마음이 좀 가벼워지려는 것입니다.
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김대건)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존경하올 페레올 고 주교님께서 프랑스어로 기록하시어 보내주신 순교자들의 행적을 읽는 것은 저에게 더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고 주교님도 원하시고 메스트르(Maistre) 이(李) 신부님도 권하시므로 제가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비록 모든 것을 알아듣지는 못하였고 라틴어도 겨우 초보자인 제가 감히 이 두 가지를 번역하려고 착수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처절한 상황에 대하여 너무나도 큰 걱정과 고통을 계속 받고 계시는 우리 자애로운 어머니이신 로마 교회로 보내어 조금이나마 위로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저의 이 청원서는 여행 중에 사전도 없이 쓴 것이어서 저의 능력이 너무나 빈약하여 문장도 서투르고 문법에 거슬리는 곳이 많을 것이므로 초라하여 저는 감히 로마로 직접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즉 신부님께서 (살펴보시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여기시면, 잘못된 곳을 정정하신 후 드높은 로마 교회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저의 가련한 조국을 위해 로마에 많은 인사와 순종과 기도를 전해주십시오. 1846년에 순교하신 9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마지막 부분은 메스트르 신부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지금은 지루하고 긴 여행을 한 후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홍콩으로 돌아와서, 하루하루 프랑스 함선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그 함선을 타고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하신 대로 조선에 상륙하는 길을 다시 찾아보려 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번만은 성공하여 지극히 가난한 우리 포교지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하간에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뿐입니다. 그 밖의 (소원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편지를 끝내면서 나약한 저와 불행한 저의 조국을 신부님과 이 소식을 듣게 될 모든 이들의 열절한 기도에 맡깁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통하여 미약하고 쓸모없으며 부당한 아들 조선 포교지의 부제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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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부제의 다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7년 9월 30일
발신지 : 상해(上海)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홍콩에서 조선으로 항해하려 할 즈음에 신부님께 짧은 (넷째)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그때 저는 신부님께 알려드릴 좋은 소식이 있을 때까지는 신부님께 다시 편지 쓸 기회가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희망은 좌절되어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신부님께 고통과 걱정을 더해드리고 있습니다.
황포에서 7월에 출범한 우리는 다행히도 조선 근해에서 첫 섬을 발견할 때까지 별 탈 없이 무사히 항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포구에서 심한 돌풍을 만나 함선이 파도에 휩쓸려 모래 위에 좌초되었고 이내 파선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섬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함장은 지체 없이 종선(從船)을 상해로 보내어 서양 함선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는 피신한 섬에서 한 달 이상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왕도(서울)에서 한 관장이 다녀갔습니다. 인근 고을의 관장들은 우리에게 매우 인정있고 너그럽게 대했습니다. 음식물도 풍부하게 공급하여 주었고, 우리를 중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거룻배와 식량과 기타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대신들은 세실(Cecile) 함장의 (그 전해에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의 살해를 문책한) 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만일 라피에르(La Pierre) 함장이 이에 대하여 명백히 썼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회답하였을 것입니다. 라피에르 함장은 우리가 머무르고 있던 지역인 전라도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주로 식량과 배만 청구하였고, 조선 왕국의 대신들의 회답을 요구하는 데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세실 함장의 편지에 대한 회답은 없었지만, 라피에르 함장이 그들에게 청한 것은 그대로 다 들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조선 해안에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는데도 조선 신자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혹시나 신자들에 대해 무슨 소식이라도 좀 알아낼 수 있을까 하여 날마다 탐문하여 기웃거렸습니다.
저의 동포들을 보기도 하고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니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제가 그들과 담화할 기회가 생겼을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저녁이 되면 혹시 신자의 거룻배가 우리에게로 오지나 않을까 하여 사방을 두루 살피면서 기대도 하고 기도도 하느라고 애가 바짝바짝 탔습니다.
하루는 우리가 가장 가까운 고을의 관원들한테 가서 어떤 일에 대해 협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조선 사람들 몇 명과 함께 그들의 작은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저는 그 조선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혹시 저의 본색이 탄로날까 봐 조선말을 하지 않고 손바닥에 한자를 써가면서 대화하였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저에게 가까이 와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아느냐?” 고 물었습니다.
“알고말고요! 잘 압니다. 당신도 압니까? 당신은 그들을 공경합니까?” 하고 제가 그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조급하게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시인하면서 우리 둘레에 있는 외교인들에게 들킬까 봐 조심스러워 이내 대화를 중단했습니다.
저는 몰래 기회를 엿보아 남에게 들키지 않게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 끌어당기고 한문을 써가면서 “당신 가족이 전부 신자입니까? 신자들이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혹시 신자 거룻배가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그의 온 집안이 모두 다 신자이고, 대공소라는 곳에 살고 있는데, 그곳은 우리가 있는 고군산(古群山) 섬에서 백 리가량 떨어져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레, 즉 우리 배가 출발하기 전날 신자의 작은 배 한 척이 이리로 올 것이라고 귀띔해주었습니다.
저는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물어보았으나 그는 손을 빼고 더 이상 대답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큰 희망과 조바심을 가득 안고 신자들을 기다렸지만 끝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조선 거룻배들이 사방에 횃불을 켜고 경비하였고, 낮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관원 한 사람을 따로 붙들고 “조선에 천주교 교인들이 있습니까? 임금님은 아직도 천주교를 박해합니까?” 하고 은근히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임금님이 천주교인들을 혹독하게 벌하고 많은 천주교인들을 죽였으며 아직도 죽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함장이 조선 대신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내면서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인 중국 도광(道光) 황제의 칙령 사본 한 통을 함께 보냈습니다. (1844년 10월에 청국과 프랑스가 황포 조약을 맺었다. 이로서 중국에서 천주교의 금지 조처가 완화되었다.)
그러고는 다음해까지 다른 함선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고군산 섬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함장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함장은 저의 뜻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원까지 하면서 간절히 소망하여 마지않았고 또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여기가지 왔는데, 이제 손안에까지 들어온 우리 포교지를 어이없게 다시 버리고 부득이 상해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아직도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
주여 보소서. 우리의 비탄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우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조선인 최 토마스가 엎드려 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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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신부의 여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9년 5월 12일
발신지 : 상해(上海)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3)
그리스도 안에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귀양살이하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신부님께 편지를 올립니다. 아직도 우리의 서원과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나 언짢은 소식만 전해드리게 되니, 저로서도 서글프고 이 소식을 들으시는 신부님의 마음도 틀림없이 무거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찾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비록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죽어 없어질 터이나 우리 자신을 위해 열망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고 우리의 도움이 아쉽지 않은 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이고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우리도 겸손하게 크나큰 고난을 참아 받은 다음에야 열매를 맺도록 미리 정해두셨습니다.
우리의 기대가 이루어지기를 참고 견디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탄원하는 우리의 항구심도 아직 짧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단 한 사람의 죄인의 회개나 어떤 특별한 은총을 얻기 위하여 10년, 20년, 30년, 40년 또는 더 오랜 세월 동안 열렬한 기도와 크나큰 희생과 힘들고 지루한 극기와 보속을 하느님께 바치셨습니까? 참으로 이러한 모범을 묵상하는 때에 저는 어떤 정신으로 고무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저는 천상의 도움을 애원하는 데에는 너무나 소홀하였고, 인간적 희망에 너무 의존하였으며 또한 무수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우리에게 오는 하느님의 자비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듯합니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저의 주님이시여, 만일 제가 당신 분노의 원인이라면, 저를 바닷속 깊이 던져주시고 당신 종들의 참상을 불쌍히 여기소서. 본시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치욕을 당하며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 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당신의 작품입니다. 저는 당신 안에서라야 겨우 당신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체하는 것뿐입니다. 오로지 저에 대한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이 제 안에서 저를 통하여 저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방금 우리는 두 번째 해로(海路) 원정을 시도하였습니다. 지난 1년 내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허송세월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작년에 우리가 파선했던 고군산 섬에 저의 이종사촌 형이 거룻배를 가지고 와서 여름 내내 우리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라피에르 함장이 조선 정부에 편지를 썼을 때, 그해 안에 반드시 다른 함선들이 그곳에 올 것이라고 거듭거듭 확고하게 다짐하였습니다. 그 소문을 전해들은 우리 신부님들과 신자들은 우리를 마중하기 위하여 사소한 것까지도 챙겨 빈틈없이 대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끔찍한 위험과 곤경을 겪었겠습니까?
만일 우리 편에서도 좀더 주의를 기울이고 좀 더 현명하였더라면 틀림없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미리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었고 또 강구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라피에르 함장이 그렇게 편지 쓴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즉 우리 신부님들이 그런 정보에 따라서 그 기회에 우리를 입국시킬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라는 것을 상당히 쉽게 예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배를 여기 상해로 인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 서로 연락이 닿지 못했기 이런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여하튼 하느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금년에는 양편에서 미리 약속을 하고 마카오의 선박 한 척을 타고 백령도로 향하였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친애하는 자랑스러운 전우였고 지금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충실한 천상 수호자가 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었던 곳입니다.
계절이 꽤 나쁜 때였으므로 위험과 노고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사슬이 끊어지고 닻은 잃어버렸으며 선장은 함선 전체를 파선당할까 봐 조바심을 하였습니다. 무진장 애를 쓴 끝에 우리가 그토록 찾고 바라던 포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도 상륙하지 못하고 곧 후퇴하여야 했을 때 우리 마음은 얼마나 비통했겠습니까!
우리의 선장은 영국인이 (1816년에) 작성한 해도를 따라서 항해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해도에 그려진 섬을 찾기는 하였으나 그 해도가 정확하지 못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앞에 처음으로 나타난 섬들 중의 하나는 그 해도에 교도라고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섬으로 내려가서 그곳 주민들에게 그 섬의 이름과 위치를 물어보니 (이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섬이 정말 다른 섬이지 또는 섬 주민들이 우리를 빨리 따돌리려고 거짓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만이 아니라 그 해도에 백령도라고 적혀 있는 다른 섬에 가보아도 중국 배거나 조선 배거나 아무 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 안드레아 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이 섬에는 많은 산동(山東) 어부들이 떼를 지어 모이므로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큰 선단을 만나게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하여간 이제 우리는 극도의 궁지에 빠졌습니다. 전혀 알 수 없는 생소한 곳이요 지극히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닻을 내릴 수도 없고 안내자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조선 사람이라도 외국인이게 심부름을 하기 위하여 접촉하는 것이 엄금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장은 라피에르 함장이 당했던 것과 같은 운명을 당할까 봐 시시각각으로 조바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 성녀께 구원을 청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온전히 하느님의 자애로우신 섭리에 맡길 따름이었습니다.
경황없이 허둥대는 동안에 어느덧 함선은 이 불길한 지역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상해의 귀양살이로 되돌아와 있습니다.
아마 우리를 영접하러 오던 저 가련한 신자들이 포졸들의 손에 붙잡혔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우리의 포교지 전체가 또다시 박해자들의 참혹한 광란으로 마구 난폭하게 찢겨졌는지도 모릅니다.
또 한 가지 심히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함선이 또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 신자들에게 크게 격분하여 분풀이를 할는지도 모릅니다.
이때까지는 프랑스인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감히 신자들에게 분노를 터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말로 단단히 약속하고서도, 지난 2년 동안 아무 군함도 조선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 프랑스 정부 측에서는 아무런 해명도 없습니다. 또한 이렇게 오랜 시일이 경과하여도 (1847년에 고군산도에서) 파선한 군함들의 잔해들이 물속에서 썩도록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조선 정부는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저 프랑스 놈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괜히 힘이 센 체하고 우쭐대더니 실제는 약속도 못 지키는 자들이다. 입으로는 큰소리 치지만 실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다시는 안 올 것이다. 장차 우리에게 아무 짓도 못할 것이다. 자, 때는 왔다. 천주학쟁이들을 깡그리 박멸하자. 다시는 움트지 못하도록 씨를 말리자. 프랑스 군함을 우리나라에 끌어들인 것이 바로 그자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저들을 치워버려도 우리는 프랑스로부터 아무런 보복도 받지 않을 것이다.” 고 판단할 것입니다.
전형적 그리스도교 국가인 프랑스는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이미 시작한 좋은 일을 계속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에게 최후의 파멸이 닥쳐온다면 확실히 (프랑스 정부의) 의도에 반대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프랑스 정부가 그) 원인이 된 것입니다. (1886년 가서야 조선과 프랑스가 수호조약을 맺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이신 자비하신 주님, 우리에게서 재난을 물리쳐주시고 영광스러운 프랑스 공화국에서 치욕을 물리쳐주소서.
금년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다시 한 번 육로로 다른 길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며칠 후 페레올 주교님께서 지시하신대로 요동으로 떠나겠고, 다가오는 겨울에는 변문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거룩한 순명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저는 벌써 우리 포교지인 조선에 들어가 있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순교하여) 저 세상에서 우리 신부님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저의 장상이 명하시는 것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만 붓을 놓으면서 다음번 편지는 조선에 들어간 후에야 신부님께 올리기로 다시 한번 약속합니다.
고마우신 신부님을 통하여 신학교의 모든 신부님들께 특히 우리의 (극동 대표부) 대표이신 바랑 신부님께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늑방 안의 심장으로부터의 순명과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이 자리에서 (강남 대목구장이신) 마레스카(Maresca) 주교님과 예수회 회원 신부님들의 지극히 자상한 보살핌에 대하여 우리 신부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회 회원 신부님들께는 제가 아주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아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 혼자서는 그분들에게 합당한 인사를 드리기에 부족합니다. 경애하올 우리 신부님들께서 저의 가난함을 대신하여 사례하여주십시오.
저는 사백주일(부활 제2주일, 4월 15일)에 지극히 공경하올 마레스카 주교님께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고귀한 품위에 언제나 합당한 자로 처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 미천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자비로 지극히 무능하고 가난한 제가 날마다 지극히 존엄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성제를 드리고 온 세상의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값진 대가를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권능을 수여받았음은 큰 위로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것은 과분한 것입니다. 미사 중에 하느님 앞에서 모든 신부님들과 저의 동료들을 더 자주 더 열렬히 기억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신부님들도 저와 우리 불쌍한 포교지를 위하여 같은 것을 하고 계시고 또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그리스도의 가장 미천한 종이며 신부님의 부당한 아들이고 쓸모없는 조선인 탁덕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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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신부의 일곱 번째 편지
발신일 : 1850년 10월 1일
발신지 : 도앙골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드디어 그렇게도 오랜 동안 소망하던 때가 왔습니다. 저의 가련한 조국에서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저의 형제들에 대해 사랑하올 신부님들께 편지를 쓸 수 있는 때가 마침내 왔습니다. 지난해에 상해에서 신부님께 편지를 썼을 때 제가 중국에서 마지막 편지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다가오는 겨울에 조선으로 들어갈 원정을 다시 시도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마지막 원정은 그 이전의 여행들에 비하여 지루하고 길었습니다. 필요한 것들이 더욱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희망은 훨씬 더 적어 보였습니다마는 그럴수록 저로서는 내적으로 더욱 큰 신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 안에서 더 미약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 안에서 더욱 강해지게 마련입니다.
저는 5월에 함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 다시 요동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7개월 동안 머물면서 대목구장 직무대행이신 베르뇌 신부님의 명령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에게 주일과 축일에는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큰 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배령하게 해주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베르뇌 신부는 마카오에서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다가 만주 대목구에 배속된 선교사다. 그는 후에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저는 12월에 변문으로 해서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도 저와 함께 변문으로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비록 성공할 희망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마는, 어떻든지 무슨 기회가 오기만 하면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조선 안에 계시는)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신 밀사들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더불어 메스트르 신부님도 저와 함께 입국시켜드리려고 백방으로 궁리해보았으나, 현명하지 못한 처사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쓸쓸히 떨어져 슬퍼하시는 메스트르 신부님을 중국에 남겨둔 채 어쩔 수 없이 저만 혼자 (조선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과 함께) 조선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험악한 길을 계속하여 개척해나가면서 조선의 철통같이 굳게 닫힌 관문을 뚫고 통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관문 경비초소의 경계망을 들키지 않게 피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모든 기대와 희망을 하느님의 자비하신 전능에 의탁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고 체포될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밤중에 관문 경비 초소에 다가갔습니다. 압록강 강변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일상 업무는 성벽 위와 읍내로 들어가는 성문에서 경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고 거기다가 광풍이 참으로 거세게 불었으며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경비병들이 집 안에 꼼짝 않고 갇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관문 한복판을 지나왔는데도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눈치 채거나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위험을 모면하고 나서는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서울까지 갔습니다.
서울에서 하루를 묵고 나서, 그때 충청도에 머물고 계시던 주교님을 뵈러 길을 계속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중병을 앓고 계시는 다블뤼 신부님께 가서 병자성사를 집전해드려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주교님께로 가서 보니 주교님도 열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저는 하루 동안 주교님과 담화를 나눈 후 잠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전라도에서부터 공소 순회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 저는 6개월 동안에 5개 도를 무사히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두 군데에서만 약간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한 곳에서는 어떤 작은 마을에 여교우 3명만이 있었는데 외교인인 부모들과 남편들과 함께 역시 외교인들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방문하려고 미사 가방을 챙겨가지고 전교사를 데리고 저녁 무렵에 아주 초라한 집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제가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양 사람인 줄로 의심하고 즉시 마을 이장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마을 이장이 그날 밤 안에 저를 잡아 죽일 의논을 하자고 그 마을의 모든 연장자들을 소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온 마을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도망을 친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들었던 집에 대해서도 마을사람들의 성을 돋우어 광분하게 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 아래로 달려들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외교인들의 고함 소리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체하면서 밤새도록 저들이 쳐들어오기만 대비하고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우리가 아침에 그 마을을 떠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그 세 여교우들을 만날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의기소침한 그들을 외로움 속에 버려두고 떠나왔습니다.
또 한 곳은 거의 2백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공소 사목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마을 이장에게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 이장은 자기 마을에 서양 사람이 와 있다고 마을사람들에게 떠벌리면서 마침 바로 그 시각에 제가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있는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점심때부터 밤중까지 욕설과 저주와 협박 공갈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제가 아주 고약한 서양 놈이요, 프랑스 놈이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너는 큰 도둑놈이다. 너는 우리한테서 도둑질을 하려고 프랑스에서 온 놈이지? 너희 서양 놈들은 사기꾼들이요 프랑스 놈들은 선동꾼들이다. 우리를 이렇게 소란스럽게 하고 속이는 것이 너희에게 무슨 이득이 되느냐? 네가 어디 견딜 수 있나보자. 너는 내일 붉은 오랏줄에 꽁꽁 묶여 도둑놈들의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등등. 이렇게 그들은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마침내는 제풀에 지쳐서 잠을 자러 갔습니다.
저는 전교사와 공소 회장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밤중에 일어나서 날이 새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전날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 준비를 한 이들이 미사를 간절히 기대하였는데도 저는 미사도 못 드리고 도망쳤습니다.
성사를 받지 못한 다른 신자들은 다음날 저를 뒤쫓아 백 리나 되는 험준한 길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우촌까지 와서 성사를 받았습니다. 마을에서 나올 수 없었던 그 밖의 신자들은 실망과 한숨 속에 그냥 내버려졌습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습니다.
동포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처럼 고난에 찬 예를 한두 가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양반집 출신의 처녀가 열다섯 살 때에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처녀는 천주교를 봉행할 마음이 간절하나 자기 아버지 집에서는 종교를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집에서 도망쳐 나와 교우들을 찾으러 가던 도중에 길에서 어떤 외교인 남자에게 납치를 당하여 억지로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 납치자의 집에서 12년 동안 살았으나 자기 부모한테도 어느 교우한테도 아무런 소식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다시 도망할 궁리를 하고 있었으나 어디로 도망가야 피신처를 찾아낼지 몰랐고 또 혹시 도망치다가 다른 납치자의 손에 떨어질 위험도 있었습니다.
우연히 교우 하나가 어떤 외교인 친구가 이 여인에 관하여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친척으로 가장하여 그 여자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로 위로해주고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배우라고 책 몇 권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 성사를 받게 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저는 또 양반집 출신인 안나라는 여교우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19년 동안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만 갇혀 지내면서 신자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성사를 받지 못한 채로 지냈습니다.
바로 올해에 그 여인은 친척 되는 어떤 신자에게 소식을 전할 수가 있어서, 이 신자가 안나를 찾아가서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안나가 사는 집에서 50리 떨어진 공소 집에 있었습니다. 그 신자가 저를 찾아와서 안나가 얼마나 열심하고 또 얼마나 간절하게 저를 기다리며 또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서 얼마나 처량한 처지에 있는지를 얘기해주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온갖 미신을 숭상하는 곳에서 혼자서도 그렇게 요랜 세월 동안 신자의 본분을 조금도 궐한 적이 없었답니다. 끊임없이 성사 받기를 간절히 원하며 자기에게 사제 한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하느님께 줄기차게 애원하여 기도하였답니다.
안나는 외로움을 스스로 달래느라고 가끔 유럽에서 생산한 자그마한 천 조각을 집어들고 들여다보면서 유럽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생각하곤 하였답니다. 그 물건이 유럽에서 운반되어온 것이니만큼 머지않아 선교사 신부님들도 다시 올 것인즉, 언젠가는 신부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위로했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그냥 참고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이 충실한 여교우에게 가까이 가서 성사를 집전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저는 온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안나의 진심을 신뢰하였습니다. 지극히 착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마침내 그토록 간절한 안나의 애원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처럼 충실한 당신의 여종에게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집전해줄 수 있는 방법을 제게 알려주시리라고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인 성체를 모시고 저에게 안나의 얘기를 들려준 그 신자를 데리고 허둥지둥 서둘러 황급히 안나가 사는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그 마을 전체가 외교인들이었고 그 집 안 식구들도 모두 외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즉 고해소를 꾸밀 곳도 마땅치 않았고 성체를 안치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마치 길 가다가 피곤하여 노독을 풀고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잠깐 쉬는 것처럼 강가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한편 제가 그 여인을 상면할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 보도륵 저와 동행하여 온 그 신자를 정탐으로 보냈습니다. 그 신자가 안나의 집에 들어가보니 그 집 남자들은 모두 밭에 나가서 집 안에는 어른이 아무도 없고 안나 혼자 자기 딸과 어린아이 몇 명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신자는 그 열심한 여교우가 성찰한 것을 적은 쪽지를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저는 앉은 자리에서 그것을 읽고 즉시 안나의 집으로 들어가 안나를 바깥 사랑방으로 불러내어 재빨리 사죄경을 염해주고 성체를 영해준 다음 곧바로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최상의 감사를 드리면서 빠져나왔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거룩한 우리 종교를 실천할 자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사방에 궁핍 투성이요 사방에 투쟁뿐입니다. 우리는 마치 지극히 큰 죄나 저지르는 듯이 항상 전전긍긍 떨고 있으며, 사람들은 공연히 우리를 미워하고 마치 우리를 흥악범들처럼 멸시합니다.
만일 누가 신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즉시 온 가족과 친척들과 이웃사람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공격하고 그를 인간 중에 가장부도덕한 자로 여겨 저주를 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못살게 괴롭힙니다. 결국은 그를 멀리 쫓아내고 다시는 자기 동족들 가운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양반들은 그들 중에 누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을 더욱 격렬하게 핍박합니다. 가족 중의 어떤 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의 가문 전체가 불명예로 낙인이 찍히고, 그 집안의 모든 영광과 모든 희망이 걸려 있는 양반의 칭호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많은 신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크나큰 악표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회가 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치욕 속에서 영광을 찾기보다는 헛된 칭호를 누리기를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떤 품계에 오르게 되면 악표의 바위가 더욱 단단해집니다.
어떤 신입 교우가 최근에 친구들의 영향력으로 5품 관직에 올랐는데, 그로서는 이 승진을 위해 손을 쓴 일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본인은 아무런 공로도 없고 한 번도 청하지 않았는데 순전히 친척이나 친지들의 영향력만으로 관직을 얻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직이 어떤 경로로 내려졌든지 간에, 반드시 수락해야 합니다. 만일 (임금님이 내린 관직을) 사양했다가는 철저하게 망신을 당하거나 죽음까지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신입 교우는 신앙을 잃어버릴 크나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사람은 어떤 도나 큰 도시의 관장으로 발령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관장의 직책을 받아들이면 미신적인 의식에 자주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 직분을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만일 그 관직을 수락하지 아니하면 반역자로 몰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의 온 가족은 극도로 큰 환난에 휘말릴 위험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반집 부녀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합니다. 여자들은 자기 집 문밖에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아주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마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얼굴을 보이게 되면 큰 죄악으로 돌립니다.
과부가 되면 비록 혼인한 지 단 하루 만에 남편을 잃었다 하더라도 본인이 원하든 말든 상관없이 반드시 수절을 해야 합니다. 만일 재혼하려고 하면 자기 자신은 물른이고 그녀의 불명예로 말미암아 온 가문도 망신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부들도 같은 예절을 지켜야 하며 별로 더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항상 밤에 성사를 받으러 옵니다. 이렇게 여자들이 밤길을 다니는 모험을 하는 중에 얼마나 많은 비극을 당할 위험이 있는지 모릅니다.
한번은 두 여인이 공소 순회하는 사제한테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들은 길을 잘 모르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은 칠흑같이 캄캄한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들이 집을 떠난 지 조금 후에 그만 길을 잃어버려 밤새도록 길 아닌 험한 곳을 헤맷습니다. 이렇게 암흑 속에서 방황하는 동안에 폭포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몸이 흠뻑 젖어 춥고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걸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두 여인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언 몸을 서로 꼭 껴안음으로써 체온을 간신히 유지하였습니다.
그 두 여인은 새벽녘이 되자 간신히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 집에서 불과 10리밖에 안 되는 곳에서 이런 고생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라도 성사를 받을 수 있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으로 여깁니다.
외교인 부모나 남편의 슬하에 있는 여교우들은 대개가 성사를 받으러 올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성사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애만 태웁니다. 어느 때가 되어야 저렇게도 천상 음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실컷 포식시킬 수 있겠습니까.
단 한 번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것이 큰 은총입니다. 더 자주 그러한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이틀이나 사흘 길을 걷는 것쯤은 오히려 가깝게 여깁니다. 우리는 신자들이 사제를 보기 위해서나 미사성제에 참여하려고 떼를 지어 한꺼번에 급히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매우 엄격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명령을 위반하는 신자들에게 아무리 벌을 내려도 신자들은 이 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막무가내로 순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이고 아이고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모두 새 옷을 갈아입고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그리고 사제가 그들의 인사를 받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그들은 조금도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들은 공소회장들을 연방 들여보내어 어서 인사를 올리고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졸라 댑니다.
교우촌을 떠날 때에는 우리가 여행할 옷차림으로 갈아입을 때부터 공소 집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고 탄식소리로 진동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를 못 떠나게 붙들려는 듯이 옷소매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제 옷깃에 그들의 애정의 정표를 길이길이 남기려는 듯이 제 옷자락을 눈물로 적십니다.
그들은 저를 따라 나서서 제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며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좀더 오랫동안 제 뒷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야산 등성이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한번은 한 공소에서 다른 공소로 가야 했습니다. 제가 지나가기로 예정되었던 길 근처에 사는 신자들이 와서 자기들 마을에 잠시 들러달라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간청에 감동하여 소원을 들어주마고 약속했습니다.
그들 마을에 도착하여보니 그 근방에 사는 신자들이 모두 다 모여서 더할 수 없이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사람은 15리나 떨어진 곳에서 왔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그곳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기 집을 비워두고 아내와 열 살쯤 되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 길도 없는 험한 산을 넘어서 저를 만나러왔던 것입니다.
오! 만일 또 한 사람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이나 베르나르도 성인이 여기 나타나신다면 저렇게도 빈궁한 이들한테서 얼마나 큰 열정으로 환영받을 것이겠습니까!
제 마음을 극도로 아프게 하는 문제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불타는 열성을 가진 많은 처녀들이 하느님을 더욱 순수하고 더욱 열렬하게 섬기고 싶어서 평생토록 동정을 지킬 작정을 하는 사례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법률과 풍속은 이 천사적인 정결의 덕행을 위하여 변호나 보호를 해주는 피난처가 전혀 되지 못합니다.
조선 백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지 아니하는) 동정생활을 불효로 매도합니다. 모든 이가 정결을 지키는 삶을, 순전히 기만적인 위선에 불과한 것으로 야유합니다.
신자들을 반역도당으로 여겨 누구든지 마음대로 핍박할 수 있고, 가장천한 백성까지도 천주교 신자를 마구 박해합니다.
신심 깊은 열심한 여인이라도 결혼하지 아니하고 남편이 없으면 외교인들에게 납치되어 갈 위험이 있고, 따라서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태롭게 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 생활을 찬양하는 설교자인 우리 사제들이 오히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권유하거나 강제로 명령하는 자가 되어야 할 지경입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을 더 잘 설명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바르바라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오빠가 8명이 있는 막내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오빠는 다 죽고 오빠 둘만 남았습니다. 바르바라는 일곱 살에 책을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하루는 올케가 옷 한 벌을 지으면서 바르바라에게 말했습니다. "이 옷은 아가씨 옷입니다. 아가씨 혼인날에 입으실 거예요. "이 말을 들은 바르바라는 즉시 집 안의 가장 으슥한 곳으로 피해 가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달래면서 앞으로 너를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다음에야 간신히 바르바라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열한 살 되던 해 어느 날 자기 방 벽에 글 몇 줄을 써놓고 나서 책 2권과 쌀 얼마를 싸가지고 몰래 빠져나가 같은 나이 또래의 소녀 한 명과 함께 밤중에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갔습니다. 아침이 되어 부모들이 깨어나 보니 바르바라가 보이지 않자 찾던 중에 벽에서 바르바라가 직접 손으로 써 붙인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올 부모님, 저를 당신들의 자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동정 성모 마리아의 딸로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짧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허망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자를 영원히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저를 찾지 마십시오. 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집 사람들이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사흘 만에 어느 굴속에서 바르바라를 발견하였는데 그곳은 거의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만큼 험준한 곳이요, 사나운 짐승들이나 출몰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겨우 열 살 지난 어린 바르바라는 그 굴속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기도하고 기도하기도 하며 자기 동무를 가르치기도 하고 끝까지 마음이 변하지 말자고 권면하기도 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따금씩 굴에서 나와 풀뿌리를 캐어 식량 대신으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그 황량한 곳에서 더할 수 없는 만족한 즐거움을 한껏 맛보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행복이 뜻밖에 오빠가 나타남으로 해서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오빠가 오는 것을 보고 호랑이를 본 것보다 더 무서워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자기가 갈망하는 낙원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오빠는 동생을 타이르고 달래고 엄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작은 몸뚱이의 온 힘을 기울여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빠의 힘에 져서 억지로 아버지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집으로 끌려오니 어머니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한단 말이냐? 너는 마귀한테 놀림을 당하는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너 같은 어린애가 호랑이도 무섭지 않고, 굶어 죽는 것도 겁이 안 난단 말이냐?" 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니까 바르바라는 "어머니, 걱정 마셔요.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셔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부터 바르바라는 규칙적으로 1주일에 두 번씩 금식재를 지키고, 고기와 생선 같은 것들은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사순절 동안에는 날마다 하루에 한 끼만 약간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기도하는 정신이 결코 중단된 적 이 없었습니다. 집안일을 할 때나 들일을 할 때나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는 일상 기도문이 짧지 아니한데, 바르바라는 그것을 모두 암송하였습니다. 또한 교리 문답책과 신자 교리책 그리고 성녀 바르바라, 성베드로와 바오로의 성인전 및 조선의 여러 순교자들의 행적과 그 밖에도 조선 사람들이 고상하고 신심 깊게 언문으로 쓴 다른 작은 신심서들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바르바라가 성을 내기나 짜증을 부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고, 더워 죽겠다. 아이고, 추워 죽겠다. 웬 바람이 이렇게 세게 부나, 웬 비가 이다지도 쏟아지나 !"하는 소리와 이와 비슷한 다른 말은 매우 자연스러운 감탄사지만, 이런 말이 바르바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아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부모로서는 바르바라에게 종교 일이거나 세속 일이거나 무엇을 시키려고 명령하거나 권고하거나 지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언제나 부모의 뜻을 미리 알아차리고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큼 모든 일을 잘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바르바라의 과도한 열성과 지나친 육체 노동을 억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르바라는 "시간은 짧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활동해야 합니다. 이 육체는 머지않아 구더기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이런 육신을 아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 힘껏 일해야 합니다. "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도 신심수업이나 고신극기를 조금도 변함없이 실천했습니다. 사흘거리로 학질을 앓을 때에도 결코 자리에 누워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그렇게 육신을 학대하지 말라고 어머니가 꾸중을 하면 바르바라는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하느님께 의탁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르바라가 그렇게 늘 고신극기하고 힘든 일로 몸을 학대하면서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가 있는지 모든 사람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르바라는 자기 동료들 중에서 가장 건강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바르바라가 열네 살 났을 때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고해 사제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고해 사제께 동정을 지키려는 결심을 말씀드렸습니다. 고해 사제는 그러한 신분에 따르는 위험을 설명해주면서 그러한 계획을 만류하며 결심을 바꾸어 결혼을 하라고 명령까지 했습니다.
그 다음해에 바르바라는 다시 같은 고해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기 생각에 변함이 없고 자기 뜻을 계속 지키겠다고 그 신부님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동정의 위태로움을 다시 설명하고 동정을 지킬 결심을 바꾸어야 될 이유들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사를 받고 싶으면 동정을 지킬 결심을 바꾸고, 그러하지 아니하면 성사를 받지 말아라.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잘못 알아듣고 신부님이 내세운 조건을 충실히 지키지 못하고 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해 사제가 제시한 선택을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서야 자기가 잘못 알아들은 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슬피 통곡하였는데 아무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어떤 외교인한테서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이 외교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썼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하는 수 없이 폭력을 써서 바르바라를 강제로 납치해 가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바르바라의 부모와 오빠들은 엉뚱하게도 갖은 비방과 행패로 수모를 당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부모와 오빠들은 바르바라의 결심을 꺾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 "네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제발 이웃 신자 청년과 결혼하기를 동의하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헛수고였습니다. 바르바라의 결심은 한결같이 확고부동하고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오히려 바르바라는 아버지와 오빠들의 겁이 많음을 비난하였습니다. "만일 오빠들이 저 외교인들의 핍박에서 저를 보호해주실 수 없거나 보호해줄 마음이 없다면 저를 혼자 내버려 두세요. 저 혼자 어디든지 갈 테니까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외교인들이 납치하려고 쳐들어오자 바르바라는 산 속으로 달아나 수풀 속에 숨었습니다. 납치하러 온 자들은 바르바라를 찾아내지 못하자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분풀이로 행패를 톡톡히 부리고 갔습니다.
욕설과 행패를 견디다 못한 한 오빠가 바르바라를 찾으러 나섰습니다. 그 오빠는 밤새껏 큰소리로 바르바라를 불렀습니다. 바르바라는 오빠의 목소리 인 줄을 잘 알았지만, 오빠가 배반할까 봐 못 미더워서 숨은 데서 감히 응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오빠가 다시 바르바라를 부르면서 찾아 나섰습니다. 바르바라가 숨은 곳에서 나와서 오빠를 위로했습니다.
바르바라가 혹시 호랑이한테 잡혀 먹히지나 않았을까 하여 밤새도록 걱정하였던 오빠는 바르바라가 눈앞에 나타나자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슬에 흠뻑 젖은 바르바라가 오빠의 인도로 근심에 잠겨 있는 어머니 앞에 왔습니다. 바르바라는 밝은 낯으로 명랑하게 "어머니, 왜 근심하십니까? 지극히 선하신 하느님께서 보호하시어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나갈거예요. 저는 아무 탈 없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그런 후에도 한 번 더 산 속으로 도망가서 위험을 모면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바르바라는 모든 것을 버리고 부모와 오빠들과 함께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핍박을 당한 후 바르바라는 훨씬 더 무서운 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그의 항구한 결심은 더욱 굳어질 뿐이었습니다.
세 차례나 고해소에 들어갔다가 성사를 거절당하고 네 번째 고해소에 들어갔으나 또 그냥 쫓겨 나왔습니다.
주교님께서 바르바라를 여러 차례나 부르셨습니다. 타이르기도 하시고 권고도 하시며 위협도 하셨으나 바르바라가 듣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바르바라와 그의 부모들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도록 성사금지의 처벌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라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날이 더욱 열렬하고 더욱 철저하여져서 어떤 때는 자기의 가흑한 시련이 야속하여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하고, 자기의 가련한 신세가 서글퍼 흐느껴 울기도 하면서 날마다 고신극기를 배가하였습니다.
저녁이 되면 혼자서 집을 나가 호랑이를 만날 것도 무서워하지 않고호젓한 개울가로 가서 기도로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저는 저의 관할 구역 교우촌을 순회하다가 바르바라가 사는 마을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전교사인 레오의 집에서 잠시 동안 쉰 다음 기운을 차려 다시 공소 순회를 시작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르바라는 그곳에서 한 마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제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 기쁨에 넘쳐 저를 보려고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그러고서는 저에게 시중을 들기 위해 레오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저를 븐 후에는 성사를 받을 방법 외에는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윤리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곳은 제 관할 구역 밖이었고 따라서 저는 그 여자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그 가엾은 처녀는 주교님이 내리신 성사 금지 처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설명을 들은) 바르바라는 한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바르바라는 자기의 양심을 성찰하여 (자기가 범한 죄를 적은) 쪽지를 동무들에게 보여주면서 "대관절 이 죄들을 어떻게 하면 용서받게 될까?"하고 한탄하였습니다. 또 병들어 앓고 있는 한 친구에게는 "나도 너처럼 병들어 앓기나 했으면 신부님이 나에게도 성사를 주시련만!"하고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고서는 바르바라는 기도와 눈물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날이 새자 바르바라는 갑자기 끙끙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날에는 산꼭대기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힘든 일을 하던 그녀가 오늘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자리에 눕게 된 것이었습니다.
(불가피한 상황이니만큼) 저는 이날 바르바라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다음 날에는 성체를 받아 모시게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심한 고통 중에서도 쉴새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계속 불렀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르바라의 죽음이 임박한 줄로 여기고 병자성사를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아직은 그리 서두를 것 없다고 대답하며 자기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루가 지난 다음 저는 전교사를 바르바라에게 보내어 병자성사를 받아야 할는지 살펴보고 또 권유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바르바라는 다시 미루었습니다.
그날 밤에 바르바라는 곁에 둘러 있는 사람들에게 신부님을 모셔다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은 급박하지 않고 임종이 가까워오지 않았으며 틀림없이 이튿날까지 죽지 않고 견딜 것이니 아직은 신부님을 모져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르바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렀군요. 이렇게 캄캄한 밤중에 그 험한 길을 걸어오시도록 하는 것은 신부님께 너무나도 번거롭게 구는 짓임을 저도 잘 압니다. 신부님께 그다지도 큰 불편을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렇지만 신부님을 꼭 뵈어야 할 급한 일이 있으니 귀찮게 여기지 마시고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신부님을 모셔다주세요.“
저는 곧 바르바라에게로 가서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해주고 또 임종자를 위한 성모 청원미사를 드렸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바르바라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몸을 깨끗이 씻겨주고, 명절 옷으로 갈아 입혀서, 공소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청했습니다. 바르바라는 놀랍게도 무릎을 꿇고 노자 성체를 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르바라는 그날도 하루 종일 몹시 앓았으나 정신은 조금도 흐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더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맑은 정신을 보존하게 해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하였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어 평소보다 훨씬 더 맑은 정신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항상 기도중에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지금 이 시각에도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특별히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아직도 충분히 감사드리지 못하는 것 외에는 다른 고통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건강이 회복되면 맨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바르바라는 "저는 이 병든 육체를 떨어버리고 하늘에 계신 천상 아버지께로 가서 제가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드리는 것 외에 다른 원이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바르바라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 네 영혼의 안식을 위해 미사를 드려줄 터이니, 그 대신 너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복되신 동정 성모님 앞에서 나를 기억해다오."라고 말했습니다. 바르바라는 더할 수 없이 평온하고 맑은 얼굴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바르바라가 마지막 숨을 거둘 즈음에 의원들이 여러 가지 침을 놓고 뜸을 뜨려고 하니까, 바르바라는 "저는 지금 숨을 거둘 참인데 이런 치료가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를 생각하고 이런 치료를 참아 받으라고 타일렀습니다. 바르바라는 그 말을 받아서 이 고통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참아 받겠다고 복창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십자고상에만 눈을 고정시켜 똑바로 쳐다보면서 의원들이 하는 대로 내맡겼습니다. 바르바라는 전에는 침과 뜸을 맞아본 적이 없었지만 온몸을 마구 찌르는 침과 뜸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견디어냈습니다.
바르바라는 여러 가지 구원에 유익한 말로 비애에 젖어 있는 부모를 위로하고 삼종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고서는 문 가까이 가서 잠시 동안 문지방에 팔을 짚고 있다가 몸이 땅바닥에 푹 쓰러지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때는 1850년 9월 23일 저녁 6시쯤이었습니다. 바르바라의 나이 겨우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의 아름다운 모습과 열절한 신심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르바라는 앓기 시작한지 나흘 만에 죽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죽은 지 열흘이 지났으나 아직도 우리의 얼굴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고, 상금도 그녀를 애도하는 말들이 우리 입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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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절골에서 1851년 10월 15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조선에서 신부님께 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1850년 5월 10일에 신부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금년 2월에 받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제 편지를 신부님께서 받으시기를 간절히 희망했는데 이제 신부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배달부들이 매달 신부님들에 대한 소식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날이 언제쯤이나 올까요? 모든 분들이 지금 편안히 지내고 계시는지요?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이 무사하시고 만사에 편안히 지내고 계시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가련한 우리 조선 포교지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인자로 그럭저럭 잘 되어나가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박해에 들볶이지는 아니하고 그런데로 안정을 유지하고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금년에 추천장을 가지지 않은 사람 편에 편지를 보내드리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이 되겠습니다마는 한마디도 없이 잠자코 있지는 못하겠고 신부님께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금년에는 지난해보다 일찍 10월 부터 공소 순회를 시작하여 저의 관할구역 전체의 순회를 8개월 안에 끝마쳤습니다.
짧은 휴식 기간을 이용하여 전교길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서 열심을 일으키고, 성사를 받고 감격해하는 모양은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이런 천상 보화를 얻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아끼지 않습니다.
공소 순회를 하려고 길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마터면 공소 순회 여행을 중단할 뻔하였습니다. 어떤 여관집 주인 내와가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밉살스러운 자기 남편을 골탕 먹이려는 심보로 그 여관에 12명의 서양 사람들의 유숙하였다고 떠벌렸습니다. 즉시 그 여인과 남편이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서양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비밀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혹독한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가 전국적으로 퍼졌고 그래서 저는 공소 순회를 일단 중단하고 조금 안전한 고장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얼마 후 그 허황된 소문은 가라앉았고 지나친 공포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무사히 공소순회를 마쳤습니다. 작년에는 사탄이 너무나 큰 소란을 일으켜서 저는 부득이 교우촌을 두 군데나 순회하지 못하였는데 금년에는 사탄이 저에게 마주쳐 오지 않았습니다. 다블뤼 신부님은 언제나 신병을 앓아서 여러 교우촌을 순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약한 어깨에 힘에 겨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소를 급하게 순회하느라고 통상적 성무를 너무 서둘러 집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강론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희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을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제가 담당하는 그러한 공소, 즉 교우촌이 자그마치 127개나 되고, 그러한 촌락에서 세레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
한 공소에 고해자가 40명 내지 50명이 있어도 그들 모든 신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집전해주어야 합니다. 그 반면에 고해자가 2명이나 3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하여야 하고, 한밤중에 공소순회의 모든 것을 끝마치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교우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곳에 단지 두 집이 있었는데, 한 집은 가족 중 일부만 신자였고 한 집은 가족 전부가 외교인이었습니다. 신자는 겨우 3명인데 남자가 한 명이고 여자가 두 명이었습니다. 남자는 얼마든지 집을 떠나 멀리 가서 성사를 받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양반 신분이어서 집 밖에 나가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에 이 두 여교우들은 성사를 받은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가야만 했으나 그 일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여간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한 가지 계책을 궁리해냈습니다.
외교인 집의 남편에게 그럴듯하게 어떤 사업을 제안하고서 얼마 동안 외출시켰습니다.
그 외교인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 제가 그 여인들에게 갔습니다. 제가 도착하자 신자들이 손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그 외교인 집의 여자들에게 하루동안만 집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비어 있는 그 외교인집을 임시 공소집으로 차리고 밤중에 외교인들이 잠든 동안에 신자들이 모여 성사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할 일을 꾸미는 때에는 악의에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하여 비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거짓말로 폐를 끼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즉시 천주교를 비난하거나 그 자리에서 모두가 순교로 끌려가고야 맙니다. 신부님이 이 이야기를 들으실 때 우리의 성사 집행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기들이 신자인 것을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내색을 아니하고 삽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배교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전혀 내색을 아니하고 삽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이 신자인 것을 남이 눈치 채지 못하게 살고 있으므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비신자에게 직접 교리를 설교함으로써 전교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사제들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가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비신자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비신자들은 천주교의 진리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을 듣거나 또는 신자가 당한 어떤 환난 등의 사건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교리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여 신앙을 가지게 되고 신자들 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조씨라는 매우 지체 높은 양반이 입교한 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나, 그때에는 천주교를 한낱 지극히 사악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종교로만 알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을에서 멀지 않은 (충청북도 보은 지방의) 멍에목이라는 한 산골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양반이 신자들이 사는 근처 골짜기에 살고 싶어서 집을 지으려고 그곳에 왔습니다. 그때 마침 우연히 신자 마을이 몽땅 화재로 타버리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조씨는 즉시 그 마을에 가서 화재를 당한 신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씨가 보기에 신자들은 조금도 근심하거나 마음이 동요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서도 신자들이 평온한 낯으로 태연하게 있는 것을 본 조씨는 매우 이상히 여기며 탄복했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왜 그러한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물었더니 신자들은 (양반이 질문한 까닭에 평민이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여러 가지 말로 대답은 하였으나 신앙에 대한 것만큼은 털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답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조씨는 도무지 납득을 할 수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이 사람들이 무슨 도를 믿는구나 하고 눈치 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화재를 당하고도 그렇게 태연할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꼬치꼬치 캐어물었습니다. 그때서야 신자들은 어쩔 수 없이 실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항상 의탁하며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안배를 칭송할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조씨가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고 만족하여 곧 천주교를 믿기로 결심하고,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우며 천주교회 법규를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넘어야할 태산이 너무나 험준했고, 깨뜨려야 할 장벽이 너무나 두터웠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위패를 많이 모시고 있었고 친척들과 친지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최후의 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선 온 집안 식구들을 이런 핑계 저런 구실을 대어 여러 곳에 분산시키고나서 자기는 산골에 지은 그 집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몇몇 신자들을 데리고 자기가 전에 살던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외교인들이 보기에 우연히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믿게끔 꾸미고 그 집과 우상들을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조씨는 마치 실성한 것처럼 꾸미고 사회 생활을 떠나 친척들과 친구들과의 교제를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나 진배없게 되었으니 여러분도 모두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주시오." 하고 선언하였습니다.
제가 그 교우촌에 가서 조씨에게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나 개종하여 주님의 사도가 되고, 특히 이방인들을 가르친 뛰어난 스승이 되셨습니다. 당신도 온 집안과 친지들 중에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십시오." 하고 책임지웠습니다.
조씨에게 동생이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학자요,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갈 희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조씨는 동생을 신앙의 첫번째 동참자로 만들고 싶어서 그를 신자들에게 인도하여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동생은 자기의 세속적 지식만을 과신하고서, 진정한 지혜를 듣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또 비록 진리를 인정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갖 오류와 기만의 궤변으로 천주교 교리를 뒤엎으려고 기를 썼고, 오로지 자기 형 바오로를 배교시킬 일에만 골몰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법도에 따라 동생들은 맏형을 아버지 대신으로 공경하여야 합니다.
바오로는 형이기 때문에 동생은 형에게 난폭한 행동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더 음흉하고 강력한 압력을 썼습니다. 동생은 자리에 누운 후 "나는 형님이 천주교를 배교하겠다는 맹세를 하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사지도 않겠습니다." 하고 굶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식한지 8일이 지나자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 바오로가 다급히 달려가서 동생에게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왜 이다지도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 내가 멍에목에 가지 않기를 네가 원하는 것이냐? 그럼 내가 그리로 안 갈 터이니 안심하여라. 어서 일어나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 목숨을 회복하여라."고 타일렀습니다.
사악한 동생은 되살아 나기는 했으나 자기의 먼젓번 계략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서 자기 형을 입교시킨 신자들한테 분풀이를 하였습니다. 그러고서 그는 신자들에게 극단적인 악으로 엄포를 놓았습니다. "나는 포졸들을 불러 너희를 몽땅 잡아 결박하여 감옥으로 끌고 가도록 고발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애써 시작하였던 농사일을 팽개쳐 버리고 공소집을 헐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참혹한 궁핍 속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변변치 않은 사소한 원인이 큰 혼란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큰 걱정거리가 생겨납니다. 비신자들은 신자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을 더 잘 소상히 듣고 알며 신자들을 더욱 쉽게 의심합니다. 그들은 모함과 악의에 찬 중상의 소문만 들을 뿐이고 진실은 한마디도 듣지 못합니다.
비신자들 사이에 돌아가는 이야기들은 신자들의 체포, 투옥, 형벌, 사형 등 처참한 이야기뿐입니다. 또는 (부유하였던) 신자들의 집안이 몰락하여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산다는 것, 사람이 살 수 없는 산 속이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비참하고 치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모든 공적 사회 생활에서 격리되고 백성으로서의 제사와 가정 생활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잊혀져 산다는 것 등등입니다.
비신자들 사이의 이러한 험담은 날이 갈수록 더 커져서 증오와 멸시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어떤 신자든지 불행히 다른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알려지면 주변 사람들 전체가 온갖 방법으로 신자들을 괴롭히려 달려듭니다. 신자들을 불경스럽고 불충한 자들로 여겨 그들한테서 전염되지 않으려고 기를 씁니다.
"신자들은 부모와 친척도 몰라본다. 제사와 위패도 배척한다. 금수만도 못하다. 삼강오륜에서 벗어난 놈들이다." 이렇게 신자들을 욕하고 증오합니다.
이런 공적 박해와 위험 외에도 흉년이 닥치면 신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해집니다.
우리 형제들의 처참한 상태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1839년 박해 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기아와 추위 때문에 죽었는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그 재난의 여파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이 겪은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동정심의 고통으로 마음이 갈갈이 찢어집니다. 조선에서는 온갖 법률이나 관습이나 풍속이 한결같이 오로지 천주교 계명의 준수를 저지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처럼 보입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라고는 오직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모의 초상부터 탈상까지 입어야 되는 상복의 풍속과 한글이 전교활동과 교리 공부에 큰 도움을 줍니다.
첫째, 상복이 전교 활동을 도와주는 풍속입니다. 부모의 상을 당하면 자식들은 3년 동안 대죄인으로 자처하고, 최대한으로 죄를 뉘우치는 보속 생활을 합니다. 어느 장소에서든지 상복만 입어야 합니다. 장례식과 제사 외에는 일체 다른 공식적인 예식이나 회합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노래와 춤이나 잔치 등 오락을 즐길 수 없습니다. 방갓을 머리에서부터 어깨까지 덮어 써서 땅만 내려다볼 수 있게 하고, 또 막대기로 끼워 만든 얼굴 가리개로 입에서부터 코와 눈까지 얼굴 전체를 전부 가리고 다닙니다.
이러한 풍속은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을 위해 발명된 도구라 할 만 합니다. 만일 이러한 풍속이 없었더라면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이 전교하기 위해 한 발짝도 외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조선에 머물러 있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둘째,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우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조정은 신자들에 대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정의 내부 사정과 당파 싸움에 휩쓸려 다른 사안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중국으로 간단없이 사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파견한 사신은 중국 황제께 현재의 조선의 임금님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려 보낸 사신입니다. 현재의 임금님이 천주교 신자 집안 출신이고 역적의 후손이라는 누명을 벗겨달라는 것입니다.
현재 조선 왕국을 통치하고 있는 임금님은 왕족 출신이기는 하지만 매우 불명예스러운 가문에서 태어난 열아홉 살 된 청년입니다.
1801년 신유(辛酉)년에 전국적인 대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때 천주교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자기들보다 더 지혜롭고 임금님의 총애를 더 받을며 나날이 더욱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몇몇 유력한 천주교 신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전혀 터무니없이 날조된 중상모략을 꾸며냈습니다. 천주교의 원수들은 임금님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합법적인 금상 왕을 폐위하고 이인(李絪)이라는 왕족을 새 임금님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모함하였습니다.
이인은 그 당시 임금님(순조)의 형이고 지금 임금님 (철종)의 조부입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고, 다만 그의 아내(宋 마리아)와 며느리(申 마리아)가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인이라는 사람이 천주교 신자들의 두목이고 반역자들의 주동자라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으며 그의 아내와 며느리도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전체가 강화도로 귀양 갔습니다.
그로부터 가족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천대와 터무니없는 중상으로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아들들은 사형을 당하였고 어떤 자손들은 극단적인 비참 속에 버려졌습니다.
현재의 임금님은 사냥꾼으로 불리웠고 자기 친척 집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하였고 인정머리가 털끗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전 임금님이 승하함에 따라 군인들 한 패거리가 강화도에 몰려가서 그를 현재 임금님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즉 조선 왕조의 창업 이래 5백년 역사상 왕가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족의 공개된 수치와 치욕을 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권위로 그러한 불명예를 척결하고 조선 왕에게 영예를 회복시켜주기를 청하는 사신을 중국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 청원서에 천주교를 허위로 가득차고 정도와 도의를 전복하려는 극악한 이론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중국 새 왕조의 황제는 조선 왕족의 내부 사정을 알 길이 없었으나 조선 왕의 청원을 윤허하여 황제의 권위로 조선 왕의 모든 불명예를 척결하고 그에게 영예를 회복시켜준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신부님, 동양의 현인들이라는 자들이 장난치는 꼴 좀 보십시오.
금년에 제가 집행한 성무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사규 고해자가 3,360명이고, 영성체자가 2,753명이며, 재고해자가 235명이고, 재영성체자가 220명입니다. 그리고 어른 영세자가 197명이고, 예비자로 등록된 이가 229명이며, 유아 영세자가 54명입니다. 또한 대세받은 아기 293명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고, 대세받은 어른 28명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죽을 위험중에 있는 비신자 아기 255명에게 대세를 주었습니다.
세월이 좀더 편안하다면, 또는 우리는 날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집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있으면서도 이 진리를 추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여 자기들의 가엾은 처지에서 한숨 짓고 있는 지극히 가련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에 관한 한 가지 실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상도 언양이라는 고을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오씨라는 관원이 있었습니다. 그의 동생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안드레아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씨는 동생이 영세한 것을 알고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단숨에 한손에 칼을 잡고 한손으로는 동생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당장 목을 자르겠다고 위협하면서 천주교를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목을 내밀고 어서 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동생의 굳센 태도에 흉악한 형이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 잔인한 오씨의 아내는 이런 용감한 힘을 주는 천주교 진리에 탄복하여 자기도 전심전력으로 천주교를 믿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키고 신자 생활을 실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전혀 불가능하였고 그렇다고 하여 그 집을 빠져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틀림없이 기뻐 용약하면서 그리스도의 양무리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싹 말라버린 우리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낙비를 퍼부어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해주소서.
조선 정부가 세실 함장의 편지에 대한 회답을 라피에르 함장에게 보낸 것을 신부님들에게 소개합니다. 이것이 원문과 똑같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조정이 다음과 같이 발표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난해에 조선 왕국의 영토인 외연도에서 어떤 주민이 외국 함선에서 건네준 편지라고 말하면서 우리 조정에 전해왔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편지를 펼쳐보니까 당신들 왕국의 세실 함장이 우리 대신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왕국의 고귀한 인물인 앵베르, 샤스탕, 모방 등 어른 세 분이 불행하게도 당신들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그분들을 죽였는지를 묻고자 하여 온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마 당신 나라의 법률이 외국인의 무단 입국을 금하는데, 그 세 분이 이 법률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조선에 입국하는 일이 있으면 당신들은 감히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각기 그들을 자기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나라 사람 그 세 분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처럼 대우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분들이 살인이나 방화나 그와 비슷한 다른 죄악을 범했다면 그분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죄가 없었는데 당신들이 부당하게 사형에 처하였으니 프랑스 국가에 대하여 중대한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세실 함장이 보내왔는데 이 편지에 대하여 우리 조선 정부는 다음과 같이 분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기해년 (1839년)에, 어떤 외국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느 때에 조선에 몰래 잠입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조선 말을 하며, 밤에만 나다니고 낮에는 집 안에서 꼼짝 않고 지내며, 얼굴을 변장하고 흔적을 감추면서 국가 반역자들과 불충한 자들과 흉악무도한 불량배들과 사귀고 어울려 다니므로 우리가 체포하여 문초하였습니다. 그들이 관가에 끌려와서 심문을 받을 때 자기들의 이름이 한 사람은 나 베드로고 또 한 사람은 정 야고보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당신들의 함장의 편지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혹시 이 사람들입니까?
심문을 받을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프랑스인들이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들 왕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자백했더라도 우리는 지금에서야 당신들 나라에 대해서 듣게 되었으니 우리가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우리가 어찌 비밀 입국을 금지하는 우리 법을 적용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그들이 옷도 갈아 입고 이름도 바꾸는 등 변장하면서 흉악한 무리와 어울려 다닌 행동은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악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넉넉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연히 파선을 당하여 우리 왕국에 상륙하게 된 자들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왕국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가끔 외국인들이 풍랑에 파선하여 우리 해안에 표류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들이 낯선 사람이라도 죄가 없고 긴급한 사정이 있으면 우리는 그들을 구조해주고 입히고 먹이고 보호하며 또 할 수 있으면 각기 자기 나라로 돌려보냅니다. 이것이 우리 왕국의 법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말하는 저 세 사람들도 파선을 당해서 우리 왕국에 상륙했다면 왜 우리가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과 달리 대우하였겠습니까?
또 당신들 편지에 보면 왜 우리가 그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죽였는지 문책하고 또 당신들 나라에 중대한 모욕을 끼쳤다고 항의하는데, 그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의외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서양과 조선이 수만 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모르고, 편지로나 차편으로나 내왕과 상종이 없습니다. 그런즉 무슨 이유로 서로 원수가 될 짓을 할 것이며 또 무슨 까닭으로 당신들에게 모욕을 끼치겠습니까!
헤아려보시오. 만일 우리나라 사람이 당신 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변장을 하고 악행을 하면 당신들은 그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겠습니까? 만일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당신들 나라 사람들처럼 우리 법을 거슬러 범행하였다면 그들도 우리 법에 따라 처벌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어떤 중국인(周文謀 야고보 신부)이 변복하고 몰래 우리 왕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법대로 잡아서 사형에 처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항의도 없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 국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살인자나 방화자들의 행동보다 더 큰 죄가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국적을 모르므로 극형에 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정은 극히 분명하여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에 보낸 당신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으러 당신들이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편지는 필요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요식 절차 없이 전달된 것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대한 답장을 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개 도의 관찰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왕국은 중국 황제에게 종속하여 있으므로 외국인들에 관한 문제는 중국 천자께 품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의 동의없이 당신들이 어찌 회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이 당신들에게 대답하더라도 그 내용은 이상에 말한 것과 다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당신 나라 상관에게 보고하십시오. 그리고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의외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상이 조선 조정에서 세실 함장에게 보낸 회답의 요지입니다.
(조선과 프랑스는 1886년에 가서야 수호조약을 맺었다.)
1847년에 페레올 주교님께서 1839년 박해 때에 순교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작은 책 한 권을 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 책은 신자들이, 특히 앵베르 주교님의 명을 받은 현석문(玄錫文) 카를로가 수집한 것을 벨린 명의의 (페레올) 조교님이 (프랑스어로) 저술한 것입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현석문에게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확히 수집하도록 특별히 분부하신 다음 당신도 순교하셨습니다.
이 책은 여러 신자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수집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대체로 목격 증인들이 별로 없는 것이지만 그 중에 진실로 여겨지는 것만 추려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대체로 목격자들이나 증인들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작은 책의 끝쯤에 가서는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이 간략하게 기록되거나 어떤 것은 아예 몽땅 빠졌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완전한 역사를 위해서나 신자들의 교화를 위하여 재미있고 중요한 것이 적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밖의 것에 대하여는 아직 충분히 흡족할 만큼 조사하거나 더 정확히 심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의 자비로 오랫동안 서원으로 맹세했던 대로 저의 동료들에 대하여 더욱 주의 깊게 고찰하고, 조상들의 순교 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위에 언급한 순교록에 보면 저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매우 정신차려 기록되어 있는 반면 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순교록을 중국에서 처음 읽었을 때 조국에 돌아가면 신부님들께 그 보고서에 관하여 더 정확히 써드려야겠다고 진작부터 별렀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온 저는 우선 명확한 개념을 정립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성무를 집행하느라고 항상 바빠서 전혀 조용한 짬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께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써보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금년에는 하느님의 허락하심으로 다행히 연례 공소 순회를 일찍 마쳐서 잠시 동안 휴가를 얻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렵니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러 증인들의 말을 토대로 하여 정확한 진실을 기록하려 합니다.
저의 형제들과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제공한 증언들도 포함하여, 순교자들과 함께 살았던 증인들, 또한 순교자들과 함께 감옥에서나 형벌을 당할 때 함께했던 동료들로부터 들은 증언들, 그리고 순교자들이 순교하기 전에 살았던 생활에 관한 증언들을 가능한 대로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충실하게 서술하도록 제 능력껏 힘쓸 작정입니다.
이 삼처리 강토를 아름답게 꾸민 수많은 순교의 꽃들 중에서 어느 꽃다발을 먼저 신부님께 드릴까요? 자식된 도리로 보나 신부님의 관심사로 보나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당연할 줄로 압니다.
저의 아버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이고 저의 어머니는 이성례 마리아 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고결하고 부유한 신자 부모한테서 출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 (최인주)는 첫번째 박해(1791년) 때 많은 고초를 받은 후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순박했고 신심이 뛰어났습니다.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미리 알아서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자세도 유별났습니다. 자기 집 종들에게 자기들을 영감님이나 마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세 아들에게 3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서로 무엇을 줄 때 거저 주어라.
보증을 서거나 혼인 중매를 절대로 서지 말아라. 이웃들과는 항상 화목하게 지내라는 3가지였습니다.
1801년 박해와 주 야고보 신부님의 순교 후 최 프란치스코의 집안은 재물과 비신자 친척들과 상종함으로 점차 천주교 계율 준수의 열심이 식어 갔고 쾌락과 악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천주교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기 가족의 신앙심이 냉담해진 것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부모와 형제들을 권고하여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고향 마을을 떠나서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자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자 한층 더 용감한 행동을 시도하여 혼자 집을 떠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집에는 모친과 세 형제와 누이들과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 편지를 써서 집안의 한 아이에게 주면서 자기가 떠난 후 엿새 되는 날에 펴보라고 하더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신앙을 열심히 실천하고 교리에 더 밝은 신자들을 찾아 집을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집에서 안 보이자 가족들이 수선을 떨며 찾는 바람에 아이가 프란치스코의 편지를 내보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형제들이 그 편지를 읽자 온 집안 식구가 대성통곡하였고 대책을 세울 수가 없어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프란치스코를 찾아 나서서 그를 데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족 전체가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모두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가족 전부가 왕도(서울)로 이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3년이 지나자 이웃 사람들한테 신자집이라는 것이 탄로되어 관가에 붙잡혀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친지 중에 세력있는 고관들이 프란치스코 집안을 외교인들의 술책으로부터 구출하려고 세도와 압력으로 그들의 주동자를 중하게 처벌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악을 악으로 갚거나 박해자들을 폭력으로 격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합치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여 친지의 도움을 사양하고 산 속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다니면서 그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돌자갈밭을 개간하여 연명해나갔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거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서원으로 나날이 더욱 열심하여 졌습니다. 비록 한문 교육을 별로 받은 바가 없었으나,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열변과 달변으로 천주교 진리를 강론하거나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강론을 들으러 왔고, 매우 까다롭게 꼬치꼬치 따지는 비신자들까지도 그의 변론에 설복되어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밭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일할 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를 할 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심신 사정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가꾸는 일이나, 세속적인 평판이나 세속적 관심이나 현세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을 보러 갈 때에는 물건 중에서 제일 나쁜 것이나 흠있는 것을 골라 사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그의 애덕은 자라나서 재난이 닥쳤을 때는 영웅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어느해 추수할 무렵 굉장한 폭우가 쏟아져서 곡식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그러한 재난을 당하여 눈물로 탄식하며 실망하고 있을 때에 프란치스코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평소보다 더 명랑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기는 교우들에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절망에 빠져 있고 이처럼 비탄에 잠겨 있습니까? 모든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 일이 다 하느님의 안배대로 되는 것임을 왜 믿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탓과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면 모르거니와 하느님의 섭리로 추수를 망친 것인데 슬퍼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으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보살펴주었습니다.
매일 규칙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아니하였고 아침 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안양의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서울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가 유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인근 지방에 살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피신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박해와 기근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지쳐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매장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자기 마을에서 신자들을 권고하여 의연금을 거두고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찾아 매장하고, 또한 불쌍한 교우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자기 마을 신자들에게도 순교를 준비시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신자들을 모아놓고 열성적인 말로 격려하면서 용감히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거룩한 의무에 전심하고 있던 어느날 아직 날이 밝기 훨씬 전에 포졸들이 문밖에 와서 주인을 찾으므로 프란치스코가 그들 앞으로 마중 나가며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포졸들이 "서울서 왔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어째서 이리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오래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잠시 좀 쉬시고 새벽에 식사를 해서 기운도 돋우도록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질서 정연하게 떠나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말을 들은 포졸들은 감탄하여 "이 사람과 이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다. 이런 사람들이 달아날 염려는 조금도 없다. 우리는 안심하고 잠을 좀 잘 수 있겠다." 고 말하고는 교우들을 묶지 않고 풀어놓은 채 모두가 한적한 곳에 가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 동안에 신자들은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고,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들을 권면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렸습니다. 포졸들이 잠에서 깨어나서 식사를 마치자 프란치스코는 장롱에서 옷을 모두 꺼내어 포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입혀주었습니다.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40명이 넘는 남녀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다음 오랏줄에 묶이지 아니한 채 길을 떠났습니다. 앞에는 남자들이 큰 아이들을 데리고 걷고 그 뒤에는 여자들이 젖먹이들을 등에 업고 걸었습니다.
때는 마침 7월이라 찜통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작열하는 뙤약볕 아래 걸어가자니 이내 모두가 지쳐버려 일행은 노인이거나 젊은이거나 터벅터벅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었고, 지쳐빠진 어린이들은 울음보를 터뜨렸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앞정섰고 그 다음에 일행이 뒤따랐으며 포졸들은 맨 뒤에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았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 내내 구경꾼들이 이 기이한 한 무리의 행진을 보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불쌍하다고 혀를 차며 한숨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열 맨 앞에 서서 가던 프란치스코의 목소리는 이런 요란스러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용솟음치는 용맹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고 갈바리오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 하고 격려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줄곧 일행을 돌아보면서 더욱 열렬한 목소리로 격려하기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열렬한 애덕에서 나온 격려의 소리를 들으며 교우들은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가깡이에 이르자 포졸들이 신자들을 5명씩 오랏줄로 묶었습니다. 5명씩 한 무리가 되어 서울 한복판 큰 길을 지나 감옥으로 향해 갔습니다.
이렇게 오랏줄에 묶인 여인들은 어린애들을 업거나 팔에 안고 갓난아기들에게는 젖꼭지를 입에 물린 채 끌려 갔습니다. 이처럼 처절한 광경을 보는 구경꾼들은 증거자들에게 악담을 퍼부으면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졌습니다. 외교인들 중에는 너무나 끔찍하게 여겨 "이 몹쓸 모진년들아, 이 인정사정 없는 독한 년들아, 그 연약하고 애처롭고 귀여운 어린 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죽음을 자청하러 간단 말이냐?" 하고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내 마리아와 다섯 아들과 함께 갔는데, 큰아들인 야고보가 열 네 살이요 막내가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마침내 옥 문이 열려 저의 가족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런 악담을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은 도둑들과 무서운 쇠사슬이었습니다. 감옥으로 인도된 그들은 도둑들의 감방으로 투옥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 프란치스코는 맨 먼저 법정으로 끌려나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판관들이 그에게 배교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심문하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 하물며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대주재(大主宰)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저는 결단코 배교는 못하겠습니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대답하자 팔주리와 다리주리의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팔과 다리뼈가 어그러졌고 곤장을 110대나 맞아 온몸의 살이 한치도 성한 데가 없이 뭉그러지고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은 채 감방으로 운반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40여 명이 모두 고문을 받았는데, 모두가 끝까지 항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편태와 곤장의 고문을 받아 정신과 의식을 잃은 상태의 신자들에게 천주교를 안 믿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옆에서 있던 고문자들이 을러댔습니다. 그러면 초죽음이 되어 자기들이 무슨 대답을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된 그들은 관원들이 불러준 배교의 말을 받아 그대로 중얼거린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즉시 자유로운 몸으로 석방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제 동생 야고보도 곤장 3대를 맞을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고문에 못 이겨 정신을 완전히 잃고 아무 의식이 없을 때 배교의 말이 나왔습니다. 고문자들은 야고보가 의식이 깨어나도록 약을 주고 풀어 주었습니다.
첫번째 심문이 다 끝나자, 관원들과 포졸들은 관청에 모여서 의논하였습니다. 그러고서 프란치스코를 감옥에서 불러내어 천주교 책 한 권을 내밀면서 "여기 네가 믿는 천주교 책이 한 권 있는데 네가 읽는 것을 우리가 듣고 싶어서 이렇게 모였으니 한번 읽어봐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마치 잘 차린 훌륭한 잔치에 초청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웃으면서 책을 펴들고 목청을 가다듬어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가 하도 열심으로, 하도 감격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가 읽는 것을 듣던 외교인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그 처참하고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조차 그렇게도 자유롭고 깨끗한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극구 찬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읽기를 끝마친 다음에 포졸들이 마리아에게 책을 주면서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핑계로 읽기를 거절하자 관원들은 "아니 저렇게 훌륭한 회장 부인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빈정거렸습니다.
프란치스코는 40일 이상 참혹하고 혹독한 고문을 헤아릴 수 없이 여러차례 당하였으나 끝까지 요지부동한 항구심으로 견디어냈습니다. 그래서 고문자들은 그에게 바윗덩어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이 박해 중에 이러한 별명이 붙여진 찬란히 빛나는 순교자가 두 분 있었습니다. 즉 프란치스코와 조신철(趙信喆) 카를로 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함께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자기가 죽을 시간을 미리 예언한 대로 1839년 9월 12일에 감옥에서 영광스럽게 순교하여 서른여덟의 나이로 운명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 이 마리아는 조선의 유명한 이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가문에서 유명한 인사들이 여러 명 배출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이 단원 이존창(李存昌)이었습니다. 그는 첫 선교사 신부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조선에 오기 전에 시골 지방에서 전파하는 사제의 직분을 집행했던 분입니다.
1784년의 일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나온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하여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터득한 이벽(李檗)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 가서 그곳 주교님을 찾아갔습니다. 북경 주교님은 이승훈을 반갑게 맞이하고 그에게 주요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천주교 서적도 주면서 조선에 돌아가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북경에서 조국에 돌아온 이승훈은 열성은 많았으나 교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탓으로 조선에서 천주교회를 잘못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을 사제로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이존창이었습니다. 이존창은 후에 이와 같은 일이 잘못임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영화로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존창의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들이 탄생된 것입니다. 그의 딸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모이고,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이 마리아는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는데 열여덟 살 때에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집안을 지혜롭게 꾸려나갔으며 식구들간에 불화없이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 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하였는데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습니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갈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리면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오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주었습니다.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며 부부가 한 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 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집을 덮쳤을 때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남은 물건들 중에 무엇이든지 좀 좋은 것들을 모아서 썼습니다. 그리고 포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먹였습니다.
포도청으로 출발하던 날 일행은 벌써 떠났는데, 마리아는 어린 것들을 데리고 먼 길을 걸어가야 하므로 그 준비를 위해 집 안에서 물건을 조금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포졸 하나가 마리아에게 접근하여 점잖지 못하게 치근거리며 "다른 이들은 다 떠났는데 너는 왜 꾸물거리고 서 있느냐? 가기 싫은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관원이 여자에게 짓궃게 구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겨 엄중한 소리로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당신은 정말로 망측한 사람이군요. 내가 가거나 말거나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것이 내 자유인데,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남편과 내 자식들이 갔는데 내가 왜 안 간단 말입니까? 당신은 상관 말고 당신 갈길이나 가십시오." 하고 그의 야비한 행동을 나무랐습니다. 포졸이 떠나가자 마리아는 아기를 팔에 안고 일행을 뒤쫓아 갔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마리아는 남편과 큰 자식들과 격리되어 여인들 감방에 갓난 아들과 함께 수감되었습니다. 다음날 다른 이들과 더불어 법정에 섰습니다. 문초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주리를 틀려서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고 팔과 다리가 부어서 유혈이 낭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언하였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문 외에도 가장 큰 마음의 고통은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였습니다. 갓난아기가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은 안 나오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데 먹일 것이 없어서 엄마의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줄곧 꿋꿋이 버티어나갔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극도의 고문을 받은 끝에 마침내 죽고, 또 어린 것이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운 것을 보며 자식에 대한 그릇된 자비심으로 마리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하였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살덩이와 핏덩이들이 더럽게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해야겠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배교하는 말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배교하여 풀려나 집에 가 있는 동안에 맏아들 최 토마스가 모방 신부님의 주선으로 마카오에 보내져 라틴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가 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 즉 형조(形曹)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에 갇혀 있던 용감한 신자들이 마리아에게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 말에 감동되어 마리아는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불충실한 배교를 용감히 취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내고 또 모정에서 오는 모든 나약한 생각을 끝까지 물리쳤습니다.
이 재판소에서 마리아는 자기의 아기가 기아와 비참으로 말미암아 눈 앞에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두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이 기뻤습니다. 마리아는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습니다.
야고보는 한 달 이상 감옥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갇혀 있는 그리스도의 포로들을 위하여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지켜보면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인 형조에서 관례대로 세 차례의 고문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당할 날이 가까워오자 평온한 모습으로 야고보를 불러 마지막 훈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이 십자가 형틀을 만들고 감옥 전체가 형구들로 가득찼습니다. 마리아는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 야고보에게 어머니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같이 감옥에 갇혀 있는 증거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나라고 명했습니다. 마리아는 야고보에게 최후의 형벌을 행하는 형장에 나오지 말도록 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나이 어린 야고보는 보호자도 없고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고아로 남겨질 어린 세 동생들을 거느리고 살아야 될 처지에 있었는데 마리아가 형장에서 그 어린 야고보의 뒷모습을 보고서 모정에 끌려 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려 최후의 전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덜 된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모정에 눈물 짓는 어머니에게 영생의 작별 인사를 하고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야고보는 최후의 형벌을 받고 순교하는 현장에 있어야 하는 감옥의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보살펴드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지켜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다른 6명의 증거자들과 함께 순교로 개선할 십자가 형틀에 올라갔고,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형장에 이끌려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휘광이의 칼을 받고 1840년 1월 31일에 서른 아홉의 나이로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이제 편지를 마치면서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에게 지극히 겸손되고 정에 넘치는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와 저의 가련한 신자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중에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극히 미약한 조선 대목구의 교황 파견 선교사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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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편지, 즉 1854년 9월에 르그레주아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는 분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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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 번째 편지
동골에서 1854년 11월 4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리부아(Libois) 신부님께
우리의 착한 선교사이신 장수 양 신부님의 너무나 슬픈 별세 소식과 그 밖의 소식 등에 대해서 신부님께 반복하여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보내드린 제 편지를 읽으시길 바랍니다.
장수 신부님이 도착하심으로써 1853년 8월 12일자 사부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의 별세로 우리가 실의에 빠져 슬퍼하고 있을 때, 새 선교사 한 분이 입국하여 우리한테 오시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신부님 편으로 사부님의 편지도 받아 읽었고, 다른 여러 신부님들과 그분들의 활동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항해에서 얻은 병으로 지치고 탈진하신 불쌍한 선교사 신부님의 모습을 대할 때 우리는 무척 두렵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련한 포교지는 왜 이다지도 불행합니까! 장수 신부님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시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고초를 그처럼 여러 해 동안 겪으시다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입국하셨으나 단 하루도 성한 몸으로 편안히 지내지 못하고 고생만 하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조선에서는 조정이나 온 백성이 우리 선교사들과 우리 성교회를 몹시 비난합니다.
왜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하고 몰래 가르치면서 은밀히 신앙을 실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천주교가 가증스럽고 수치스러우며 서양에서조차도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종교와 우리 서적에 기록된 교리는 어떤 내용이든지 한결같이 백성을 기만하기 위해 발명해낸 교활한 속임수라고 조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천주학쟁이들은 서양 나라의 군주들이 모두 열심한 천주교인들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이라면 왜 그 군주들이 사소한 일을 위해서는 많은 함선을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 자주 보내면서, 왜 인생의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인 종교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가?
만일 선교사들이 굉장한 함선을 타고 공개리에 떳떳하게 조선에 들어오고 또 저들이 조선에서 전교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충분한 증명을 들어서 조선 정부에 부탁한다면, 그들의 임무 수행에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프랑스 정부가 천주교를 조선에서 공인받기를 원한다면, 틀림없이 조선 정부는 이것을 들어줄 것으로 확신한다."고 조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조선과 프랑스는 1886년에 수호조약을 맺었다. )
지난 봄에 세 학생을 강남 거룻배를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그들이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건강하게 잘들 있는지요? 신학교 교장 신부님은 우리 신학생들 각자의 성격을 지금쯤 잘 파악하셨을 줄로 압니다마는 제 편에서 교장 신부님에게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학생들 중 김 요한이라는 학생은 잔재주가 많고 성격이 불안정합니다. 일찍 바로잡아 주지 아니하면, 버림받을 위험이 있어서 상당히 염려가 됩니다.
또 학생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잘 깨닫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겸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참된 인간성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정당하게 평가할 줄도 모르며 오로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세속적이며 외적인 영화와 부귀 공명에서 찾을 줄만 압니다.
우리 포교지의 상태는 신자들 중에서 신분의 계급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므로 분열이 일어나서 큰 걱정입니다. 그리스도교 신덕과 형제애가 부족하고, 계속되는 논쟁과 암투와 증오로 신자 공동체가 와해되고 비건설적으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이 폐단을 시정할 무슨 대책은 없는지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 포교지에 큰 손실을 초래하겠습니다.
사부님의 편지에 보면 장수 신부님 편에 상본과 십자고상과 성패등을 보내신다고 쓰셨는데 저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여간 다음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언젠가는 천국에서 만나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적어도 하느님 아버지를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도록, 저와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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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한 번째 편지
베론에서 1855년 10월 8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금년에는 신부님들한테서 아무 편지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찌된 연유로 우리 연락원들이 상해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올 거룻배를 하나도 만날 수 없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연락원들을 거룻배에 태워 상해로 보내 놓고 오롯한 마음으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연락원들은 상해에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새 주교님을 영접하는 동시에 신부님들에 대한 기쁜 소식과 또한 새로운 우리 협력자 선교사들을 모셔오기 위해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 연락원들이 탄 거룻배가 강남에서 오는 신자 배를 만났습니다만, 그 사람들의 말이 주교님 일행이나 편지 등을 실은 배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거룻배는 연락원들을 강남 신자 배에 옮겨 실은 후, 서양에서나 중국에서나 소식을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원컨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신부님들이 편안히 계시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연락원들이 강남까지 무사히 도착해서 머지않은 장래에 새 주교님과 선교사들을 무사히 우리 포교지에 모셔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혜로 우리는 모두 웬만큼 건강하고 제법 평온히 지내고 있습니다. 금년은 풍년이 들어서 불쌍한 우리 신자들이 한시름 놓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더욱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밭에도 풍년이 들었습니다. 저 혼자서 어른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한 숫자만 해도 자그마치 24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톤이 터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영세자들 중에 양반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하고 굳세어 보였습니다만, 지금은 다른 이들보다 더 쉽게 가시덤불이 무성해져서 숨이 막혀 시들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양반 계급의 사람들은 대개가 한가로운 생활을 합니다. 아무리 찌들고 가나해서 먹고 살아갈 것이 없어도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결코 일을 해서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횡령과 사기와 착취로 살아갑니다. 희생으로 삼을 제물감을 찾아 다니면서 한데 어울려서는 도박과 주색잡기에 푹 빠져 지냅니다.
저들이 입교하여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게 되면 하느님의 법에 따라 그전의 방탕한 생활을 버리도록 강요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직한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꾸려가기에 유익한 전문 기술이 전혀 없거나 전문 기술자가 될 소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먹을 것이 없는 처지이니 만큼 굶주림에 못 이겨 이전의 못된 버릇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보다도 더 나쁜 사람들이 됩니다.
요즈음 우리 조정에서는 신자들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많아서 늘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왕(철종)의 조상들의 8개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땅의 길흉을 관찰하는 우리나라 지관(地官)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지금 임금님의 조상들의 묘자리가 불길하여 그 후손들이 번창할 수 없으므로 그 묘들을 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손들이 훨씬 더 크게 번성할 묘자리를 지관들이 찾아다녔는데 공교롭게도 꽤 큰 읍내에 있는 어떤 곳이 가장 좋은 명당자리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읍내에 사는 주민들이 송두리째 쫓겨나서 다른 데 가서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죽은 지 여러 해가 지난 현 임금님의 고조부(사도세자)에게 왕의 칭호를 추존(追尊)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이 몇 달 전에 있었습니다.
지금 임금님의 고조부는 대신들의 당파 싸움의 와중에서 반란을 모의한 역적으로 몰려 그의 부친(영조)이 살아 있을 때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 왕자를 처형하는 데 주동자들이었던 대신들의 후손들이 지금 조정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조상들이 무죄한 왕자를 불의하게 사형에 처하였다는 유죄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그 추존을 완강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추존 문제를 제일 먼저 주장한 자는 귀양을 갔고, 그 추존을 찬동한 나머지 천여 명은 벼슬 자리를 잃어버리고 형편없이 처량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도 세자는 영조의 아들이고 정조의 아버지다. 사도세자의 추존 운동은 그때에는 실패했으나 1899년에 가서야 장조로 추존되었다.)
우리 대신들은 이러한 일이나 이와 비슷한 일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서로 헐뜯는 일로 날을 보냅니다. 또는 아무 쓸 데도 없는 무의미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일에 골몰합니다.
최근 몇 달 전에는 한 가지 법을 정하였는데 교자를 타고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법률을 어긴 탓으로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어떤 사람들은 귀양을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쳐 이 법이 흐지부지되고, 몇 달 전부터 누구든지 교자를 마음대로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를 볼 때 신부님은 이 따위 정치인들이 다스리는 정부가 얼마나 한심스럽고, 또 이런 못난 사람들에게 통치되는 불쌍한 백성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상상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받은 신부님의 마지막 편지에서 저의 부모님, 즉 최 프란치스코와 이 마리아의 순교 행적에 대해 더 자세히 보고하라고 신부님께서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의 체포, 투옥, 고문, 문초, 순교 등에 관한 모든 경위를 더 자세하고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증인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증인들을 두 명 찾아내기는 했습니마는, 제가 이미 신부님께 보고드린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프란치스코가 죽었을 당시에 감옥에는 프린치스코와 함께 체포된 사람 중 신자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어서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마지막 고문을 당한 후 반죽음을 당하여 감옥으로 운반되어 왔습니다. 차츰 정신을 되찾고 프란치스코는 신음하는 소리를 하며 자기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고문을 못 이겨 배교한 자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마지막 처절한 고문을 받은 지 사흘 후 함께 잡힌 동료에게 "나는 오늘 죽을 것입니다.목이 아주 마르니 마실 것을 좀 주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가져다준 물을 마신 다음 다시 한번 배교자들에게 대하여 동정하는 말을 하고 조용하고 평안하게 운명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해서는 마지막 형벌을 당하던 순간 목이 잘리던 순간의 목격 증인을 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의 유일한 증인으로 남아 있던 야고보라는 아들마저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십자가 형틀에 동여매어져 소달구지에 실려 형장으로 떠나려 할 때 유일한 증인으로 남아 있던 아들 야고보를 내보냈습니다. 그것은 서로 바라보다가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했던 때문입니다.
다만 마리아가 감옥의 하인 한 명을 가르쳐 예비시켰는데, 그가 아직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하느님을 믿었고 형장에까지 따라가서 마리아가 흔연한 낯으로 형벌받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고, 또 그 이야기를 아들 야고보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의 시체는 아들과 친척들이 다 찾아서 매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머니 마리아의 시체는 함께 참수된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묻혔으며 또 비신자들이 무서워서 밤중에 비신자들 무덤 가운데 묻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무덤이 어디인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신자들 무덤 사이에 똑똑히 구별할 수 있게 묻혔습니다.
신부님께서 또 다른 순교자들과 그 밖의 주목할 만한 사건에 대하여서도 적어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건에 대해 글로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들을 많이 찾아내기는 했습니다만, 아직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부님께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이 다음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면 빠뜨리지 않고 신부님게 보고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신부님께 말씀드릴 것이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는 새 주교님 오시기만 초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 주교님을 통하여 신부님들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듣게 될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너그러우신 신부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에 신부님께 청한 것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도착하면 다른 물건들을 또 청하겠습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중에 저와 저의 불쌍한 조선 신자들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신부님을 통하여 모든 신부님들과 지극히 공경하올 대표 신부님께 간곡한 인사를 드립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사부님께, 가장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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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한 번째 편지
베론에서 1855년 10월 8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금년에는 신부님들한테서 아무 편지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찌된 연유로 우리 연락원들이 상해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올 거룻배를 하나도 만날 수 없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연락원들을 거룻배에 태워 상해로 보내 놓고 오롯한 마음으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연락원들은 상해에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새 주교님을 영접하는 동시에 신부님들에 대한 기쁜 소식과 또한 새로운 우리 협력자 선교사들을 모셔오기 위해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 연락원들이 탄 거룻배가 강남에서 오는 신자 배를 만났습니다만, 그 사람들의 말이 주교님 일행이나 편지 등을 실은 배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거룻배는 연락원들을 강남 신자 배에 옮겨 실은 후, 서양에서나 중국에서나 소식을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원컨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신부님들이 편안히 계시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연락원들이 강남까지 무사히 도착해서 머지않은 장래에 새 주교님과 선교사들을 무사히 우리 포교지에 모셔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혜로 우리는 모두 웬만큼 건강하고 제법 평온히 지내고 있습니다. 금년은 풍년이 들어서 불쌍한 우리 신자들이 한시름 놓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더욱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밭에도 풍년이 들었습니다. 저 혼자서 어른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한 숫자만 해도 자그마치 24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톤이 터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영세자들 중에 양반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하고 굳세어 보였습니다만, 지금은 다른 이들보다 더 쉽게 가시덤불이 무성해져서 숨이 막혀 시들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양반 계급의 사람들은 대개가 한가로운 생활을 합니다. 아무리 찌들고 가나해서 먹고 살아갈 것이 없어도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결코 일을 해서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횡령과 사기와 착취로 살아갑니다. 희생으로 삼을 제물감을 찾아 다니면서 한데 어울려서는 도박과 주색잡기에 푹 빠져 지냅니다.
저들이 입교하여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게 되면 하느님의 법에 따라 그전의 방탕한 생활을 버리도록 강요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직한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꾸려가기에 유익한 전문 기술이 전혀 없거나 전문 기술자가 될 소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먹을 것이 없는 처지이니 만큼 굶주림에 못 이겨 이전의 못된 버릇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보다도 더 나쁜 사람들이 됩니다.
요즈음 우리 조정에서는 신자들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많아서 늘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왕(철종)의 조상들의 8개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땅의 길흉을 관찰하는 우리나라 지관(地官)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지금 임금님의 조상들의 묘자리가 불길하여 그 후손들이 번창할 수 없으므로 그 묘들을 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손들이 훨씬 더 크게 번성할 묘자리를 지관들이 찾아다녔는데 공교롭게도 꽤 큰 읍내에 있는 어떤 곳이 가장 좋은 명당자리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읍내에 사는 주민들이 송두리째 쫓겨나서 다른 데 가서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죽은 지 여러 해가 지난 현 임금님의 고조부(사도세자)에게 왕의 칭호를 추존(追尊)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이 몇 달 전에 있었습니다.
지금 임금님의 고조부는 대신들의 당파 싸움의 와중에서 반란을 모의한 역적으로 몰려 그의 부친(영조)이 살아 있을 때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 왕자를 처형하는 데 주동자들이었던 대신들의 후손들이 지금 조정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조상들이 무죄한 왕자를 불의하게 사형에 처하였다는 유죄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그 추존을 완강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추존 문제를 제일 먼저 주장한 자는 귀양을 갔고, 그 추존을 찬동한 나머지 천여 명은 벼슬 자리를 잃어버리고 형편없이 처량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도 세자는 영조의 아들이고 정조의 아버지다. 사도세자의 추존 운동은 그때에는 실패했으나 1899년에 가서야 장조로 추존되었다.)
우리 대신들은 이러한 일이나 이와 비슷한 일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서로 헐뜯는 일로 날을 보냅니다. 또는 아무 쓸 데도 없는 무의미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일에 골몰합니다.
최근 몇 달 전에는 한 가지 법을 정하였는데 교자를 타고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법률을 어긴 탓으로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어떤 사람들은 귀양을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쳐 이 법이 흐지부지되고, 몇 달 전부터 누구든지 교자를 마음대로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를 볼 때 신부님은 이 따위 정치인들이 다스리는 정부가 얼마나 한심스럽고, 또 이런 못난 사람들에게 통치되는 불쌍한 백성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상상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받은 신부님의 마지막 편지에서 저의 부모님, 즉 최 프란치스코와 이 마리아의 순교 행적에 대해 더 자세히 보고하라고 신부님께서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의 체포, 투옥, 고문, 문초, 순교 등에 관한 모든 경위를 더 자세하고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증인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증인들을 두 명 찾아내기는 했습니마는, 제가 이미 신부님께 보고드린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프란치스코가 죽었을 당시에 감옥에는 프린치스코와 함께 체포된 사람 중 신자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어서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마지막 고문을 당한 후 반죽음을 당하여 감옥으로 운반되어 왔습니다. 차츰 정신을 되찾고 프란치스코는 신음하는 소리를 하며 자기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고문을 못 이겨 배교한 자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마지막 처절한 고문을 받은 지 사흘 후 함께 잡힌 동료에게 "나는 오늘 죽을 것입니다.목이 아주 마르니 마실 것을 좀 주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가져다준 물을 마신 다음 다시 한번 배교자들에게 대하여 동정하는 말을 하고 조용하고 평안하게 운명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해서는 마지막 형벌을 당하던 순간 목이 잘리던 순간의 목격 증인을 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의 유일한 증인으로 남아 있던 야고보라는 아들마저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십자가 형틀에 동여매어져 소달구지에 실려 형장으로 떠나려 할 때 유일한 증인으로 남아 있던 아들 야고보를 내보냈습니다. 그것은 서로 바라보다가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했던 때문입니다.
다만 마리아가 감옥의 하인 한 명을 가르쳐 예비시켰는데, 그가 아직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하느님을 믿었고 형장에까지 따라가서 마리아가 흔연한 낯으로 형벌받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고, 또 그 이야기를 아들 야고보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의 시체는 아들과 친척들이 다 찾아서 매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머니 마리아의 시체는 함께 참수된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묻혔으며 또 비신자들이 무서워서 밤중에 비신자들 무덤 가운데 묻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무덤이 어디인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신자들 무덤 사이에 똑똑히 구별할 수 있게 묻혔습니다.
신부님께서 또 다른 순교자들과 그 밖의 주목할 만한 사건에 대하여서도 적어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건에 대해 글로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들을 많이 찾아내기는 했습니다만, 아직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부님께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이 다음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면 빠뜨리지 않고 신부님게 보고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신부님께 말씀드릴 것이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는 새 주교님 오시기만 초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 주교님을 통하여 신부님들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듣게 될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너그러우신 신부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에 신부님께 청한 것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도착하면 다른 물건들을 또 청하겠습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중에 저와 저의 불쌍한 조선 신자들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신부님을 통하여 모든 신부님들과 지극히 공경하올 대표 신부님께 간곡한 인사를 드립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사부님께, 가장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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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두 번째 편지
소리웃에서 1856년 9월 13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오랫동안 소식이 격조하였습니다. 이럴수록 더 많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펜을 들기만 하면 모든 생각이 달아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기쁨을 표현하지 아니하고서는 못 배길 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착하신 목자 갑사(Capsa) 명의의 베르뇌 장 주교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일찍이 큰 서원으로 갈망하였으나 그 갈망이 실망으로 변하여 잊어버린 지 벌써 오래된 주교님을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마침내 우리 안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장 주교님께서 새 선교사 두 분을 우리의 새로운 협조자로 동반하고 오셨으니 한층 더 기쁩니다. 원컨대 그렇게 엄청난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부당한 자들로 여겨지지 안히하기를 바랍니다.
1854년 9월에 신부님께 보내드린 저의 편지에서 제가 신부님의 편지와 성물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존경하올 우리 주교님이 오시는 편에 신부님의 회답이 없어서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혹시 저의 편지가 신부님께 전달되지 못하였는지요?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요?
(최 신부님의 9번째 편지는 분실되었다)
그런데 경애하올 바랑 (극동 대표부) 책임자 신부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참으로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매우 부당한 기도이지만 기도 중에 바랑 신부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어 저 세상에 계시는 바랑 신부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 못지않게 우리 가련한 포교지를 위하여 보살펴주시는 관리자가 되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금년에는 하느님 자비의 허락하심으로 사목 순회를 별 탈 없이 평온하게 무사히 마쳤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고기잡이 그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무려 180명이 넘는 어른이 거룩한 샘터에서 몸을 씻고 그리스도의 양우리에 스스로 끼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가로막으려고 기를 쓰고 계속 소란을 피워대는 사탄의 난동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전라도 진밧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마을 사람 거의 전부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받을 준비를 다 마치고 선교사 신부님이 오기만 초조하게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저녁나절에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 다음, 유아 세례에 이어서 대세받은 아기들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닭이 울 때 일어나 미사를 드릴 예정을 하고서,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떼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 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아 가기 위해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함께 있던 신자들이 비록 숫자는 그들보다 적었으나 그들의 침입을 완강히 대항하여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문을 빙 둘러싼 그들은 온갖 폭력을 휘둘러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하고 신자들은 죽을 힘을 다해 그들을 물리치느라고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쌍방간에 부상자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 안에 있었는데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짐을 챙겨 들고, 뒤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바위와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서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는 북새통에 양편에 부상자가 많이 났고, 결국에는 외교인들이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격렬하게 싸우고 나서도 아무것도 강탈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마을을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장은 그 마을의 유력자 5명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 바오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7,8년 전에 신자가 된 그는 다른 신자들보다 더 열심하고 덕망이 높아서 그 마을(진밧들)의 회장으로 선임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하 아우구스티노라는 사람인데 그 고을 원님인 관장 다음으로 제일 높은 관리였습니다. 그는 겨우 3년 전에 영세했는데 벌써 많은 외교인들을 천주교로 이끌어들였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주동자이고 천주교를 전파하는 자라 하여 체포되었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은 1년 전쯤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예비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외교인들이 우리를 습격하러 왔을 때 저한테서 세례를 받으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첫째 사람은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양반 가문에 속하느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를 깨달은 후 집안에서 천주교를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자기 고향을 떠나 이곳 산 속 교우들한테로 이사와서 살고 있던 사람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우리 공소에 포졸들을 데리고 왔던 배교자의 친척들이었습니다. 그 배교자는 첫 배반자인 유다 이스가리옷을 본받아 저를 체포하려고 공소를 습격한 것이었습니다. 그자는 배교한 후 내통자와 박해자로 변신하였습니다. 그 배교자는 이번 습격을 하기 전에도 자기 친척들인 두 사람의 예비 신자에게 온갖 방법으로 모욕과 핍박을 가하면서 자기를 본받아 배교자가 되도록 강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내심이 강한 그 두 예비 신자는 끝끝내 요지부동으로 항구하였습니다.
관가에 잡혀간 우리 신자들은 용감하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관원으로부터 하느님을 저주하라고 재촉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 세상의 임금님을 비방하여도 죄악이 되거늘 하물며 우주 만물을 영원히 지배하시는 하늘의 임금님이신 창조주께 욕을 한다는 것은 천상천하에 용납받지 못할 극악 대죄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그런 큰 죄악을 범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차례 문초를 받은 후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각자가 자기 부담으로 먹을 것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집안이 몹시 가난하므로 그들에게 옥바라지를 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저에게 여유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저 사람들의 궁핍한 사정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하지 못하니 한숨밖에 보낼 것이 없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셨을 때 유럽 신자들에게 감동이 되거나 표양이 될 만한 조선순교자들의 행적이 있으면 적어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건들을 수집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필요한 증인이 없어서 확증된 것을 많이 수집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한 사람에 대해서만 신부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1839년에 조선 교회 전체를 휩쓴 기해 대박해 때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골 지방에 살았던 관계로 왕도(서울) 사람들에게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해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던 때에 그 순교록(기해일기)에서 빠졌습니다. 다행히 그의 행적에 대한 구술 내용을 적어 놓은 종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또 그의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 그리고 친구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충분한 증명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교자의 이름은 최해성(崔海成) 요한입니다. 그는 충청남도에서 신자 부모로부터 출생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하므로 모든 이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첫번 박해 때 그의 조부가 귀향을 가게 되어 온 집안이 그 조부를 따라서 귀양소까지 갔습니다. 그곳 고을에서 요한이 장성하였는데, 주위 정세로 보아 외교인들 한가운데 살면서는 천주교를 합당하게 실천할 수가 없어서 산 속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작은 교우촌을 형성한 다음 모든 이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착한 표양으로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극도로 비참한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항구한 인내심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런 가난 중에서도 자기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애긍 시사와 자선 사업 등을 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 뛰어난 열성을 다하고, 신자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권면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자기 마을에 선교사 신부님이 오셔서 성사의 은총을 받을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 모든 덕행에 감동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그를 그 마을 회장으로 선임하셨습니다. 그는 견진성사를 받은 후 성신 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증표가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위한 순교로써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바칠 의욕이 나날이 커졌습니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己亥)박해가 날로 더욱 악랄하게 되자 요한은 부모와 가족들을 좀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들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가던 중 포졸들과 마주쳤습니다. 포졸들이 요한을 신자인 줄 알아보고 체포하여 그에게 이웃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자 그를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그는 포졸들한테서 얼마나 매를 많이 맞았던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상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러자 잡혀가는 길목인데도 느닷없이 힘과 활기가 용솟음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관가에 끌려가서 관장 앞에 섰을 때 관장이 "네가 사악한 종교를 신봉한다니 참말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나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 아니합니다.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천주교를 믿을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형리들이 그를 고문하는 동안에 관장이 "너와 함께 천주교를 믿는 자가 몇 명이냐? 그들이 누구 누구인지 이름을 대라. 그들이 어디 사는지 말하라." 하고 다그쳤습니다. 요한은 "저는 제 형제들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천주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1차 문초가 끝난 후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서 포졸들과 군중들한테 무수한 행패와 매를 맞아 기진맥진해졌습니다
그는 며칠 후 다시 끌려나와 문초를 받았습니다. 관장이 "네가 천주를 배반하면 나라의 착한 백성이 되겠고, 너의 모든 재산을 되돌려줄 것이며 상금까지도 보태줄 것이다." 라고 구슬렀습니다. 요한은 "저는 관장께서 온 고을을 다 주신다고 말씀하셔도 하느님을 결단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편태를 자그마치 백 대 이상이나 맞고 감옥에 다시 갇혔습니다.
그후 다시 재판관이 호출하여 "네가 정말 죽기를 바라느냐?"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요한은 "저도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죽기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재판관이 크게 분노하여 곤장과 편태의 가공할 만한 형벌을 명하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종교를 위해 죽겠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네가 죽을 때까지 치도록 하마." 요한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살아 갈기갈기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으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습니다. 그는 지겹게도 21차례나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얼마나 모질게 고문을 당하였는지 살과 가죽이 해어져 창자가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뼈가 으스러졌습니다. 문초중에 당한 형벌 외에도 포졸들과 악당들에게 온갖 폭행을 다 당하였습니다.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39년 9월 29일에 목이 잘려 스물 아홉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천국으로 개선하는 마당으로 내려갈 날이 밝아 왔을 때 그는 기쁨의 표시로 자기와 옥사쟁이들에게 작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영광스럽게 최후의 형장으로 끌려나갈 때에 그동안 욕설을 퍼붓고 매질하고 형벌하던 포졸들과 백성들이 그를 뒤쫓아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하였습니다.
다른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많으나 아직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게 되는 때에 신부님께 더 자세히 보고하겠습니다.
저는 며칠 후 여기서 7백 리 떨어진 새 교우촌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이 교우촌은 귀양간 어떤 신자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려 최근에 교우촌을 형성한 곳입니다. 그 신자가 사람을 보내어 선교사 사제를 모셔 오도록 청한 것입니다. 제가 이 교우촌을 방문하고 나서 혹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다음 기회에 신부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신부님의 또 다른 분부가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아쉬운 것이 있으면 청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전에 아쉬워서 청했던 것과 같은 것들을 다시 청합니다. 무엇이든지 보내만 주시면 저에게는 다 필요하고 소용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저와 우리에게 필요하니다. 이를 위하여 저와 저의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신부님의 사랑이 넘치는 기도에 다시 의탁합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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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세 번째 편지 (1)
불무골에서 1857년 9월 14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해마다 하느님의 풍성한 은혜로 신부님께 보내드릴 기쁜 소식이 생깁니다.
지난해에는 베르뇌 장(張) 주교님과 두 분의 새 선교사 신부님들이 입국하신 소식을 신부님께 전해드렸습니다. 금년에는 페롱(Feron) 권(權) 신부님의 극적이고 기적적인 입국 소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권 신부님은 이미 사부님께서 저에게 두 번씩이나 편지로 미리 알려주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다블뤼 신부님이 (1857년 3월 25일에) 우리 포교지의 (다음 대목구장이 되실) 부주교위에 오르신 소식도 전해드립니다.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 소식입니까!
가련한 우리에게 이렇듯이 풍성한 은혜와 각별한 축복을 내려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어떻게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부님을 비롯하여 저의 목소리가 미치는 한에서 그리스도 안의 모든 신부님들과 사랑하올 형제들이 다 함께 우리를 축하 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감사드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오랫동안 쓸쓸한 심정으로 초조하게 고대하던 신부님들 의 편지 두 통을 페롱 권 신부님 편에 받았습니다. 또 신부님들에 대해서도 페롱 신부님으로부터 직접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두 번이나 페롱 신부님을 찾아가서 여러 날 동안 묵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서 미리 알려주신 덕분으로 벌써 페롱 신부님을 잘 알고 있었고, 페롱 신부님도 저의 외로운 처지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우정이 싹터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필연적 인연으로 함께 묶여 있음을 미리 맛보고 있는 터였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페롱 신부님이 얼마나 위태롭게, 또 많은 손해를 입으면서 외교인 거룻배를 타고 하느님이 특별히 인도하시는 손길을 따라 조선에 들어왔는지는 페롱 신부님이 직접 사부님께 더 자세히 알려드릴 것입니다.
작년에 제가 우리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 많은 자료들을 찾아내서 신부님께 보고드리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였으나 그것을 존경하올 다블뤼 안 주교님께 모두 드렸습니다. 안 주교님께서 모든 순교자들의 전반적 역사(조선 천주교 순교사)를 편찬하고 계십니다. 다블뤼 주교님께서 그 사적들을 신분님도 읽어보시도록 보내드릴 것이 확실하므로 제가 따로 신부님께 보고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지난번 편지를 신부님께 드리던 때는 멀리 떨어져 있는 새 교우촌으로 떠날 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으면 공소 순회를 마친후 신부님께 다음번 편지를 쓸 때 보고 드리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오늘 그 약속을 이행하겠습니다.
이 교우촌은 귀양간 여인과 어떤 신자 가족이 신앙의 씨를 뿌린 곳입니다. 이 여인은 1839년 대박해 때에 왕도(서울)에서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이 고을로 내려와서 어떤 부잣집에 종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인 마나님이 이 종을 통하여 차차 천주교의 진리를 알게 되어 열심으로 신앙을 실천하던 중 남편에게 발각되었습니다. 남편이 분노하여 엄포와 매질까지 해가면서 자기 아내의 마음을 천주교에서 멀어지도록 노력하였으나 아내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남편이 그 아내를 읍내 가운데로 끌고 가서 배교하지 아니하면 관가에 고발하여 죽게 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실한 이 여종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위하여 죽기로 마음먹고 재판소인 관가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광분한 남편은 자기 아내의 굳센 용기에 굴복하여 관가로 끌고 가던 도중에 마음을 바꾸고 아내를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습니다.
이 남편의 행동에서 나온 유일한 결과는 이 읍내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멀리까지 퍼진 것뿐입니다. 이 가엾은 귀양살이 여인의 일가친척들이 이웃 읍내에 살고 있엇는데 이 소문을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해 전부터 신자들과 일체의 연락이 끊어지고 신자들의 소식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체 자기들의 서글픈 운명을 한탄하면서 지내던 터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진리를 더 철저히 배우기 위해서 교리 지식에 더 밝은 신자들을 만나기를 무엇보다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을 이제서야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살던 마을을 떠나 이 읍내로 이사 와서 귀양 온 여교우가 종살이하는 집 곁에 와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정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 집안처럼 지내며 신앙을 실천하고 힘을 합쳐서 그 읍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마을 유지 중 한 사람의 부인도 끼여 있었는데,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용감한 투사로서 주님을 위해 싸웠습니다. 이 여인도 남편에게서 엄포와 공갈과 매질과 핍박 등 온갖 괴로움을 당했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굳세게 저항하여 신앙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고장에 갔을 때, 이 가련한 여인이 얼마나 거룩한 원의와 열정과 회한으로 제 말을 듣고 성사를 받았는지를 아무리 묘사하여도 믿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그 여인은 "언제쯤이나 내 눈으로 하느님의 사제를 뵈올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나는 사제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 귀로 들을 수 있게 될까! 이러한 은혜가 내게 내려지는 날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으련마는." 하고 언제나 탄식으로 날을 지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련한 교우촌에 불행히도 예기치 않은 무서운 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제가 떠나기 전날 어떤 노파가 다른 신자들의 뒤를 따라 처음으로 공소집에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사 집전에 참석하고서 더 할 수 없이 감격하였습니다.
그 노파의 한 친구는 그때까지 아무리 복음을 들려주어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노파는 그 친구를 찾아가서 그 여인을 설복시켜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심산에서 자기가 방금 공소집에서 보았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 노파는 자기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예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큰 기쁨이 가슴에 넘쳤다고 장황하게 떠벌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여인은 미쳐 날뛰면서 자기 남편에게 이것을 모두 고자질하였습니다. 이 남자는 공소집에 다니는 여교우들의 남편들을 모두 밤중에 불러다 놓고 방금 들은 비밀을 폭로하였습니다. 그 공소집에 다니는 여교우들은 남편과 부모들 몰래, 또는 가족들이 싫어하는데도 비밀히 하느님을 공경하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자기 아내들의 비밀을 알게 된 남편들은 몹시 흥분하여 날뛰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웃 읍내에서이사와서 살던 그 귀양살이 여인의 가족을 즉시 추방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집안만이 다 신자였으므로 자기 집을 공소집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초대받았던 그 공소집에서 성사 집행을 끝내고 읍내에서 막 벗어난 참이었고 저를 배웅했던 그 집의 젊은 주인이 아직 귀가하지도 못한 때였습니다. 그 청년이 막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돌연 읍내가 떠들석하게 소란한 한 무리의 군중이 공소집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러고서 이 불쌍한 가족의 살림살이를 모두 약탈하거나 파괴하고 공소집마저 때려부수고, 그 집 식구들을 읍내에서 쫓아냈습니다.
앞으로 이곳의 신자들이 어떻게 선교사를 다시 모시고 공소를 꾸밀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온 식구가 다 신자인 집은 이 공소집 한 집뿐이고, 읍내에서 쫓겨난 그 집 외에는 신자들의 집회 장소를 마련할 수 있는 집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머지 여인들은 전부 남편과 부모 몰래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들뿐이어서 앞으로 공소로 쓰일 만한 집이 없습니다. 그런데다 여인들은 읍내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저 불쌍한 여인들을 인자하신 눈으로 굽어보시고 그들의 착한 뜻을 굽어보소서.
가장 가까운 교우촌에서 사흘길을 걸어 또 다른 교우촌에 왔습니다. 그 마을에는 극도로 가난한 신자들 다섯 가정이 사는데, 그들은 머넞 살던 고장에서 천주교를 실천할 수가 없었으므로 얼마 전부터 이곳에 이사하여 정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작은 촌락은 험준한 산 속에있는데 이름을 만산(아마도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만산리)이라고 합니다마는 가히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라고 말해야 적절할 만큼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제가 찾아가서 성사를 집전해주어야 할 곳이 그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110리 떨어진 곳에도 가련한 몇 가족이 사는 작은 교우촌이 있습니다. 그 가족들은 금방 이사를 와서 아직 거처할 만한 움막 하나도 짓지 못하였고, 따라서 공소집을 마련한 시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자 가족들은 모두가 성사를 받기 위해 만산으로 와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 교우가 20명가량이 있었는데 신자들이 두 배로 나뉘어 만산으로 왔습니다. 한 패가 먼저 만산에 가서 성사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다른 패는 그들의 조그마한 움막과 살림살이를 지키기 위해 집에 머물렀습니다.
두 번재 오는 신자들은 도합 6명이었는데, 그 중에 남자가 2명이고, 16세의 처녀가 한 명이며, 열세 살과 열한 살의 소녀가 2명이고, 끝으로 아홉 살의 남자 어린이 한 명이었습니다. 이 연약한 무리가 단지 하루 사이에 110리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꼭두새벽에 집을 떠나 반 이상을 지나서 어떤 촌락을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그 마을의 장정 20여 명이 지팡이와 몽둥이를 갖고 나타나 어린 처녀와 소녀들을 겁탈하려 덤벼들었습니다.
저들은 처녀들을 빼앗으려 하고 이 편에서는 대항하려 옥신각신하는데 홀연히 그 마을에서 점잖은 노인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 노인이 이고삐 풀린 망나니들의 파렴치한 행패를 준엄하게 꾸짖고 우리의 불행한 포로들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이 용감한 신자들은 비록 피로와 허기와 불의의 공격의 충격으로 아주 지쳤지만 불량배들로부터 구출된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면서 다시 걷기 시작하여 저녁나절에야 아주 의기 양양하게 공소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마을의 신자들과 제가 얼마나한 기쁨과 연민의 정으로 그들을 맞이하였으며, 얼마나 서둘러서 다 함께 하느님께 가장 깊은 감사를 드렸겠는지 신부님께서 상상해보십시오.
저는 또 다른 마을에 갔는데, 외교인들 마을에 단지 서너 명의 신자들이 숨어 지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저녁때 그 마을에 들어갔더니 그곳의 외교인들은 선교사가 온 줄로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숨어 있는 집 주위를 다음날까지 온종일 엄중히 감시하였고 저를 체포하기 위해 그 집에 침입할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다행하게도 우리 예비 신자 중 한 사람이 저들과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가 백방으로 그들의 잘못된 계획을 막으려고 노력하였고 그들의 계획에 크나큰 위험이 내포되어 있음을 경고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자네들이 이렇게 섣불리 남의 집을 습격하였다가 만에 하나라도 예상이 빗나가서 선교사 신부를 잡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 무모한 짓 때문에 자네들만 관가에 끌려가 극형까지도 받게 된다." 하고 만류하였습니다.
저들은 이 경고를 듣고 겁이 나서 감히 그 집에 침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저들은 제가 그 집 밖으로 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마을에서 떠나는 저를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에 어두움을 이용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불쌍한 신자들은 거의 2년 동안 이나 성사를 못 받고 안타깝게 선교사를 기다려왔습니다. 이 가련한 신자들에게 그렇게도 갈망하던 성사를 집전해주지 못한 채 저는 실망과탄식으로 우는 신자들을 버려두고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다지도 심술 사나운 불량배들의 소동 때문에 이렇게 굶주린 불쌍한 사람들을 만족시켜줄 수 없고, 또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들을 그러한 곤경에서 구해낼 방법이 전혀 없는 저 자신의 무능한 모습을 보는 것은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이제 슬픈 소식은 이쯤에서 끝내고 좀더 기분 좋은 소재로 넘어가겠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읍내에서 걸어서 여러 날 걸리는 간월이라는 마을에, 일반 종교와는 색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알아볼 마음이 생겨서 직접 그 마을의 회장을 찾아가 그 좋은 교리를 가르쳐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교우촌 회장은 그 청년의 진심을 모르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주기를 원치 않아서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핑계하고 그 청년을 그대로 돌려보냈습니다. 젊은이는 얼마 후에 다시 그 공소 회장을 찾아가 자기 마음의 진실함을 증명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이번에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한 번 거절당하고 갔다가 세 번째 또 왔습니다.
마침내 공소 회장은 젊은이의 성화에 못 이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해주고 기본 교리서와 기도서와 교리문답책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마침내 이 청년은 그가 바라던 진리를 알게 되었고 필요한 책들을 직접 자기 손으로 베껴 썼습니다. 이 대단히 귀중한 보물을 얻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온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자기가 방금 받은 진리를 전하여 그 은혜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리고 즉시 그와 그가 입교시킨 사람들이 모두 함께 여러 가지 많은 장애 때문에 천주교의 본분을 마음놓고 자유롭게 지킬 수 없는 고향 읍내를 떠나 간월 가까이로 이사 왔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성사를 집전하려고 그곳에 갔을때 이 청년은 자기 자신과 함께 세례받을 준비가 아주 잘 된 어른들을 5명이나 공소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해에는 그의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세례 받을 준비를 시키고 또 그의 마을에 공소집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섯 가족이 사는 또 다른 마을 하나도 마을 사람 전체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천주교의소문을 듣고서 개종하여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특히 한 가족의 입교 이야기를 신부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가정은 몇 대째 내려오며 마귀에게서 괴롭힘을 당해왔습니다. 이 집안 식구는 남자거나 여자거나 어린이거나 갓난아기거나 할 것 없이 모두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해왔습니다. 귀신이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주 그들의 어깨나 등을 무지무지하게 큰 짐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고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속수무책이었고 같은 장소에서 얼마 동안 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귀신들이 그 가족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하도록 못살게 굴고, 집 안에서 쓰는 가재도구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귀신의 뜻을 어기고 무엇을 가지고 이사 가게 되면 도중에 마귀의 괴롭힘으로 그것을 도로 갖다놓지 않고는 못 배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비참하고 가난하게 되어 온 가족이 그 불행한 처지를 개선할 길이 전혀 없어서 탄식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신입교우가 그들의 가엾은 처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신자는 만일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마귀의 괴롭힘에서 해방될 것임을 확신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교우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거기서 이 가족은 훨씬 좋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열심히 기도와 교리문답을 배우면 조금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고, 그 반대로 교리 공부를 조금 게을리하고 냉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다시 그전처럼 마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마귀가 그들의 신심을 단련시켜 더욱 열심해지도록 자극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집안 식구들이 모두 영세한 후에는 마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지금은 건강하게 잘 살며 기쁘게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이러한 예가 많습니다마는 이런 종류의 얘기를 일일이 다 말씀드리고자 하면 이 편지가 너무 길어질 것입니다.
올 일 년 동안에 저는 2,867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였고, 어른 171명에게 세례성사를 주었으며, 대세받은 어른 17명에게 세례성사의 보례를 하였고,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가입시켰습니다. (傳敎會 sodalitas propagandae fidei는 1822년에 프랑스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이다. 그 단체의 목적은 기도와 모금으로 전교 활동을 원조하는 것이다.)
제 관할 구역의 신자는 모두 합해서 4,075명이고, 예비 신자는 108명입니다.
작년에 제가 어느 마을에 가서 성사를 집전했을 때 배교자들이 포졸들을 데리고 나를 습격하기 위해 쳐들어왔다가 신임 교우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배교자들은 그 후에도 교우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모와 방법을 연구하며 천주교의 이름을 조선에서 완전히 뿌리 뽑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자 이번에는 고관들한테 가서 우리의 거룩한 종교를 비방하고 모함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섬멸할 권한을 청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창피스럽게 퇴짜를 맞고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비록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은 꺾어지 않았다 해도, 적어도 그들의 세력은 모두 꺾인 것 같습니다. 이 기회에 불잡혀 옥에 갇혀 있던 신입 교우들이 석방되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우리 원수들이 불러일으킨 이 소요가 있은 후 오히려 그 덕택으로 한 마을 전체가 개종해서 천주교에 입교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제 제가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저에게 보내주신 많은 선물을, 페롱 신부님이 갖고 오시다가 불행하게도 외인 거룻배에서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페롱 신부도 저도 가난뱅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물들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교우들의 요구를 달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즉 신부님께서 우리 신자들의 아우성을 들어주시어 신부님의 마음에 드신다면 저에게 아래와 같은 성물들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 교우들의 눈에 점잖게 보이며 될 수 있는 대로 얇은 종이에 색채 없이 잘 그린 조금 큰 상본을 보내주십시오. 성모님 상본을 많이 보내주시고 다른 성인들의 상본은 조금씩 보내주십시오. 요셉, 베드로, 바오로, 요한, 야고보, 프란치스코, 안나, 아가다, 막달레나, 바르바라, 루치아, 세실리아, 아나스타시아 등의 상본 약 100프랑 어치를 보내주십시오. 또 작은 십자가와 성패 등을 보내주시되 묵주는 보내시지 마십시오.
묵주는 조선 교우들도 아주 잘 만듭니다.
또 여행중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견고하고 가볍게 만든 자명종을 하나 보내주십시오.
그 밖의 것들을 약 100프랑 어치, 도합 200프랑 어치를 보내주십시오. 성물값은 베르뇌 주교님께 통지하십시오. 제가 주교님께 성물값을 올리겠습니다.
이제 편지를 끝내면서 또다시 저와 우리 불쌍한 교우들을 신부님의 신심 깊은 기도에 맡깁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하고 순종하는 아들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추신 : 성해를 담은 합을 밀봉하기 위한 스페인 밀초 한 덩어리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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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네 번째 편지
불무골에서 1857년 9월 15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리부아 신부님께
어제 제가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편지를 쓰면서 다 말씀드렸기 때문에, 신부님께는 따로 드릴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드린 말씀은 곧 신부님께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그러이 양해해주십시오. 그리고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보낸 저의 편지를 신부님께도 보낸 것으로 여기시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신부님이 1856년 8월에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만일 신부님께서 가끔이라도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시지 않으신다면 저는 외로움과 적적함을 어떻게 달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어지간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베르뇌 주교님만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으십니다. 더 큰 병에 걸리시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시지나 않을까 하여 매우 걱정이 됩니다.
주교님은 우리를 위해 너무 많이 일하시고, 당신의 목자 직무에 너무 골몰하십니다. 만일 이렇듯 위대한 목자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주교님의 과감한 혁신과 건설로 교우들이 크게 고무되어 있으며 모든 이가 주교님을 다정한 마음으로 우러러 공경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주교님을 장수케 하시면 조선 교회는 굉장한 발전을 이룩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존경하올 다블뤼 안 주교님께서는 조선 교회의 역사 특히 우리 순교자들의 역사 편찬에 전력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푸르티에 신부님은 신학교 교장이시고, 페롱 신부님은 아직 말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으며, 매스트르 신부님과 프티니콜라 신부님과 저, 이렇게 셋만이 베르뇌 주교님을 도와 신자들의 사목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직접 상관없고 주제넘는 사항을 신부님께 편지로 말씀드린다는 것은 저의 직분을 넘는 짓으로 보이고 더구나 비방하는 것으 무분별한 짓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저는 신부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부득이 진정한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신부님께서도 이런 것을 아셔야 앞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겠고 또 다른 분들에게도 유용할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장 주교님의 선임자이신 고 주교님이 생존하셨을 때 신자들 사이에 말이 많아 주교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 주교님께서 당신을 보좌하는 복사(服事)들을 잘못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사들은 크게 비난받을 짓을 많이 범하고서도 양반임을 내세워 항상 너무 거만한 행세만 부리므로 모든 교우들한테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유독 고 주교님께서는 그들만 사랑하시고 신임하시어 그들하고 모든 일을 의논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이를 그대로 두면 주교님께도 해로울 것이고, 일반 교우들에게도 손해가 되겠기에 주교님께 여러 번 편지도 올리고 직접 면담하면서, 그들을 내보내시라고 진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는 주교님한테 큰 꾸중만 들었고, 저들 복사들로부터는 큰 미움을 샀을 분이었습니다.
페레올(고) 주교님께서 별세하시자 다시 신자들 사이에 저들을 추방하자는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저들이 얼마 동안 메스트르 신부님한테 붙어 있다가 공개적인 물의를 일으켜서 결국에는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날이 더욱 큰 악표를 신자들에게 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우 행세도 못 합니다.
이제 그 원인을 곰곰이 살펴보면 고 주교님께서 양반 계급에 너무 편을 드시고 신임하시다가 이런 불상사를 자초하신 것입니다.
우리 조선에서 양반이라는 자들에 대한 여론을 말하면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양반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백성이 양반 계급의 독선, 오만, 횡포, 부도덕이 모든 (사회) 악의 근원이고 (백성들의) 온갖 비참의 원인임을 시인하며 지겨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페레올) 주교님은 양반 계급만 너무 편애하시어 이미 너무도 높아져 있는 양반들을 더 높이 추어주고, 그 반면에 이미 너무나 비참하고 억눌려 있는 서민들을 더욱 억누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 사이에 나날이 더욱 불화가 심해지고 많은 이들이 의분을 느끼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또한 교우들의 열심이 나날이 감퇴되어가고 악한 사정이 더욱더 악하게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신부님께 드리는 이유는 신부님께서 우리 조선 백성의 정신상태와 현실정과 풍속을 미리 완전히 파악해두시고, 장차 조선으로 파견되는 모든 선교사 신부님들에게 이런 지식을 미리 넣어주는 것이 무익하지 아니하리라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선교사들이 이러한 정보를 미리 제공받지 못한 채 조선에 오게 되면, 자기의 측근에서 시중 드는 복사들 말만 듣고 판단을 그르치거나 또는 그 밖의 그릇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과 신자들에게 많은 해를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중의 감정과 정서를 해침으로써전교에 지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불행한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의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기 의견이 풍부하니만큼 많은 일에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무방하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하기야 조선 백성의 사회 구조가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현재 조선의 양반 제도는 일부 양반에게 모든 권리를 인정해주어서 그들 자신만을 위하여 남용할 수 있게 해주고, 그 반면에 일반 서민은 양반들의 온갖 부당한 횡포를 에누리 없이 완전히 당하도록 강요하는 제도 입니다.
그리하여 교만한 양반들을 언제나 더욱 오만방자해지도록 부추기고, 비참한 백성들을 언제나 더욱 비참해지도록 내리누르는 것이 조선의 사회 구조입니다. 이러한 사회 구조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하에서는 형제의 우애와 애덕이란 것이 있을 수 없고, 천부적 인권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오로지 양반 계급만 치켜세우고 양반 계급이 아닌 일반 서민은 마치 내버려진 자처럼 억압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제도는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실행으로 항상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드시고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에게는 혹독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본래 부자와 세력가에게는 아부하고, 가난뱅이와 비천한 자들은 외면하고 뿌리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선의 사회 제도는 인도의 브라만 신분계급처럼 비합리적이고 고질적 제도로 구성되어있지는 아니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쉽사리 합리적인 순리를 수긍하고 이성과 정의의 바른길을 잘 파악합니다. 만일 한 마음 한 뜻으로 백성에게 동일한 이론을 가르치고 계몽한다면 백성들은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계몽을 받아 이에 정통한 자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외교인 양반들 중에서도 정신이 건전한 사람들은 현 양반 제도가 전적으로 나쁘다고 시인합니다. 이러한 양반 제도가 계속되는 한 조선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질적인 신분 차별은 쉽게 시정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높은 벼슬에 사람을 등용할 때 그 사람의 출생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 평가하여 등용한다면 양반 제도는 강제적인 노력이 없더라도 저절로 쉽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에 관한 말씀을 드리자면, 육신으로는 어지간히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만 정신적으로는 날마다 점점 더 약해지고 있습니다. 옛 청춘의 활기를 몽땅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옛날에 신부님과 드 라 브르니에르 신부님 슬하에서 지내던 시절의 유쾌한 추억을 하루라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해마다 몇 주간씩만이라도 옛날에 누렸던 대로 신부님 곁에서 지내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정신적으로 훨씬 젊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저와 저의 모든 궁핍을 알고 계시는 좋으신 신부님의 기도에 저를 거듭거듭 맡깁니다.
이제 그만 붓을 놓으면서, 성체의 형상 아래 숨어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 아래 그리고 자비로운 옥좌 앞에서 또한 자애로우신 성모님과 함께 신부님의 기도를 바랍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제가 해마다 짧게나마 페낭에 있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저들이 한 장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편지가 중간에서 분실되거나 신학교 교장 신부님이 이 편지들을 가로채고 학생들에게 전해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저들의 마지막 편지를 보면 자기들이 고독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데도 여러 해 동안 저 한테서 한번도 위로의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였다고 몹시 원망하고있습니다. 저는 이 소리를 듣고 마음이 크게 언짢았습니다.
한 가지 청을 드리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조선의 모든 교우들에게 줄 만큼 많은 묵주를 갖고 계시지는 못하실 줄 잘 압니다. 신부님께서 주실 수 없는 것을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신부님께서 주실 마음이 있으시기만 하다면 주실 수 있는 것을 청합니다. 묵주를 견고하게 잘 만드는 도구를 뭐라고 부르는지 잘 모르지만, 하여간 묵주 만드는 집게를 구하실 수 있으면 하나나 여러 개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신부님께서는 성모님께 바치는 묵주를 조선 교우들에게 최대한으로 많이 선물하시는 셈이 되겠습니다.
또 할 수 있으면 묵주 만드는 금빛 나는 구리 철사를 많이 보내주시면 매우 유용할 것입니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붉은 색 나는 구리 철사 만들 줄 밖에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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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다섯 번째 편지
오두재에서 1858년 10월 3일
예수 마리아 요셉,
파리 외방 선교회 신학교 학장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공경하올 신부님,
지난 2년 동안에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서 즐거운 소식만을 신부님에게 전하게 허락하셨는데 금년에는 매우 슬픈 소식을 주셔서 이것을 신부님께 전해드립니다. 이것도 역시 언제나 지극히 좋으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만사에 항상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복종시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근심하는 당신의 종들을 자상하게 위로도 해주시고, 또 어떤 때에는 슬픔으로 단련시켜 우리를 지혜롭게 겸손해지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베르뇌 장 주교님과 두 분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기쁨에 도취되어, 페레올 주교님과 장수 신부님의 별세에 대한 슬픔을 너무 빨리 잊어버렸습니다. 작년에는 메스트르 신부님의 별세로 또다시 쓰라린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은 말할 수 없는 노력과 인내로 견뎌내셨는데 마침내 하느님의 허락하심으로 기적적으로 조선에 입국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사시기를 희망하였는데 입국하신 지 겨우 만 4년이 지난 작년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겪으신 온갖 고초를 잘 알고 있으며, 그분의 인내심과 양순한 성격 때문에 그분을 지극히 사랑하여왔습니다. 그런즉 신부님께서 저와 모든 신자들의 슬픔이 얼마나 큰 지 가히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외에도 이제는 다른 선교사들의 건강도 크게 걱정이 됩니다. 특히 베르뇌 주교님께서 너무나 노심초사하기고 과로하시므로 나날이 생명이 꺼져가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주교님을 잃게 되면 누가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무수한 죄과를 불쌍히 여기시어, 지극히 좋으시고 조심성이 많으신 우리 주교님을 장수케 하시며 덕화가 날로 융성케 해주시기를 빕니다. 만일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신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재난으로든지 벌하시더라도 다만 우리 목자만은 앗아가지 마사기를 빕니다.
또 큰 흉년이 들어 가뜩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못 살 지경입니다. 전에는 쌀 한 말에 20푼이나 25푼에 살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은 80푼이나 90푼까지 올랐고, 어떤 곳에서는 120푼이나 그 이상에 팔립니다.
그뿐 아니라 하늘에 (1857년 10월 7일에 혜성이 나타나서) 변칙적인 별자리(星座)를 보고 조선 전체가 인심이 흉흉합니다. 머지않아 서양 함선들이 쳐들어와서 조선을 정복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전국적으로 나돕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서양 함선들이 빨리 오기를 조급하게 기다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조선은 이 상태로는 지탱할 수 없고 자멸할 것이다. 차라리 서양 함선들이 빨리 와서 더 좋은 상태로 철저하게 개혁할 필요가 있다. 우리 조정을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벌써 지난해부터 많은 점쟁이들이 나타나 서양 함선들이 언제 오고 또 몇 척이나 올 것인가를 예언하는 소문이 떠들썩합니다. 어째서 민심이 온통 이렇게 돌아가고 마음의 동요가 심하게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 전체가 장차 천주교 나라가 된다고 그럴싸하게 예언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느님의 어떤 암시나 예시일까요? 현 조정은 이제까지는 우리 천주교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현 정권을 잡은 대신들은 안동 김씨 집안 출신들인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신자들에게 지나친 적대감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 있는 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인 잔혹한 박해는 없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를 전하고, 천주교에 입교하는 데 자유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를 금하는 박해령(迫害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자기 마음대로 신자들을 괴롭힙니다. 즉 마음이 착한 관원들은 천주교인들을 묵인하지만, 마음이 악한 관원들은 교우들을 괴롭히거나 그들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박해합니다.
더구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즉시 모든 세속적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가 올 때까지 망설이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동되어 한편으로는 신앙을 포용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박해를 만나면 극도의 어려움과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므로, 차라리 종교의 완전한 자유가 공식적으로 선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머지 않은 장래에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리라고 예언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왔을 때 별다른 손해 없이 자기의 구원을 얻으리라고 계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박해의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모든 난관을 극복하여 용맹하고 굳세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예로, 우리나라 최고 양반 집안 출신인 김 베드로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옛날에 중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 왕이 김씨라는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군대를 중국에 보내어 중국 천자를 돕게 했습니다. 김 장군이 용감히 싸워서 반란을 진압했고 또 다른 혁혁한 공훈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중국 황제가 김씨에게 큰 벼슬을 내려 요동의 방백 영주로 삼았고, 그 후손들에게도 대대손손이 찬란히 높은 벼슬을 내려서 그 집안이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 후손 중 하나가 왕도(서울)에서 부유하게 살았는데 그들은 삼 형제였습니다. 맏형은 고관이 되어 따로 나가 살고, 두 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둘째가 지금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 베드로입니다.
김 베드로는 스물네 살이 될 때가지 그와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처지의 사람들이 흔히 살아가는 방식대로 온갖 악덕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나이 또래들보다 훨씬 더 주색잡기로 방탕하였습니다. 그는 호기심과 사치심에서 여러 시골 지방을 유랍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여인을 첩으로 삼았는데 자기 말로는 넷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하여 처음에 토속 신앙을 믿었다가 조선 안에 떠돌아다니는 그 밖의 모든 종교를 다 믿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종교에서도 마음의 만족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 종교 안에서 합당한 진리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천주교 교리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천주교 교리를 처음 들었을 때 전부가 다 진리인 듯이 보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천주교 신앙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순교자들이 많은 것을 보고서 그 종교 안에 무슨 위력이 있는 줄로 깨닫고 깊이 심사숙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줄 신자를 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베드로는 자기 친구 하나가 그가 살던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시골에 내려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자기 고향을 버리고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험악한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 날만에 그 친구가 몇몇 교우들과 함께 살고 있는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을 이장과 주민들이 그를 대하는 눈초리가 사나웠습니다. 그 친구는 한편으로는 (천주교를 알고 싶어하는) 베드로의 생각을 전적으로 물리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베드로의 (진리에) 굶주린 영혼을 최대한 진정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친구가 참말로 천주고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 친구는 처음에는 베드로의 성실성을 믿지 못하여 속마음을 주지 않고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찾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정신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친구와 그 마을의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서 베드로는 그날로 천주교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천주교에 입교할 결심을 세우고 이 결심을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음날부터 천주경, 성모경, 천주십계,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을 배워 암송하였습니다.
독실한 신자가 된 후 그는 친구와 작별하고 다시 길을 떠나 서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가 길에 많은 친구들과 여러 연인들을 만났으나 그들과의 지난날의 사귐을 단호히 물리치고 자기 자신을 극복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또 끊어버리고 싸워서 더 큰 승리를 거두어야 할 대상이 많았습니다.
그는 모친과 형제들, (아내는 이미 사망하였으나) 첩들, 남종, 여종, 가문의 세력, 조상들의 위패, 많은 친구, 친척, 굉장한 논밭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라도 남겨두면 적을 정복하지 못하고 승리가 위태롭게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모친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결심을 모친에게 밝히면서 천주교의 주요한 진리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모친도 자기와 함께 천주교 신앙을 믿기를 바란다고 권고하였습니다. 모친은 그러한 협박이 아무성과가 없음을 보자, 그의 큰아들에게 일러서 동생을 죽이라고 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전혀 겁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형님에 의하여 기쁘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해서 저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지도 않으시면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는 모든 가족을 영원히 작별하고 먼 지방으로 가서 천주교를 믿겠습니다." 마침내 모친이 설복되어서 아들과 화해하였고, 아들에게 "네가 좋게 여기는 것이라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조상의 위패와 미신 물건들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밤중에 일어나 모친과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 집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 전에 자기가 복음을 들어던 마을로 갔습니다. 이리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갑자기 부자에서 가난뱅이로 되었고, 교만한 양반에서 비참한 시골뜨기로 변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지루하지 않으시다면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어느 관장이 한 관아의 관기(官妓) 중 한 사람을 첩으로 삼았습니다. 조선에는 오랜 관습에 의한 제도로서 각 고을마다 관기라는 여자 단체가 존재합니다. 그 단체는 사춘기 소녀들이 고을 관장에게 시중을 들게 될 나이에 이를 때 까지 교육받고 관기가 되는 기관입니다. 그 어린 처녀들은 원님이나 어떤 남자가 나타나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기적(妓籍)에서 제적하여 자기의 첩으로 삼기 전에는 각 고을 관청에 매여 있어서 합법적인 서방도 가질 수 없고 다만 관장이나 아전들의 성욕을 만족시켜줄 준비를 하는 기생들입니다.
조선에는 또 통인(通引)이라는 단체도 있습니다. 이 단체는 관장에게 시중들기 위하여 사춘기 소녀들을 뽑아둔 단체입니다. 통인들은 통상적으로 아전들의 아들들인데 장가들기 전에 통인 노릇을 합니다. 그들 중에서만 아전이 됩니다.
그런데 관장의 첩이 된 이 관기가 관내의 어떤 통인과 눈이 맞아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관장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첩을 그녀의 기적이 있는 본 고을로 내쫓았습니다. 그 첩은 그 통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몰래 그곳에 다시 돌아와 그 통인과 함께 도망쳐서 어느 산 속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거기서 이 남녀는 교우들을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한 교우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화려한 옷을 입고 노래와 춤으로 즐기고 온갖 정욕에 방종하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험악한 산 속에서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으며 악의악식(惡衣惡食)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심한 신앙 생활은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어느 여인 하나가 여러 해 전부터 천주교를 믿으려 하였으나 남편이 결사적으로 포악하게 금하였습니다. 또 천주교 교리를 몰래라도 가르쳐줄 신자를 만나지 못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여러 차례 집을 몰래 빠져나와 어느 친척 교우한테 가서 교리와 기도문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큰 노력 끝에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이를 안 남편이 크게 분노하여 자기 아내에게 미신 행위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충실한 여종은 끝끝내 거부하였습니다. 마침내는 남편이 자기 아내를 때려 죽이려 하자 그 여인은 몰래 도망쳐 나와 교우 집으로 돌아다니면서 걸식하며 살아갑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남편과 자식들과 가정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전번의 제 편지에 어떤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청년이 소문으로 천주교 교리를 듣고, 어느 공소 회장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번 거절을 당하였으나 마침내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자기의 가족들이 이사하여 다음해에는 세례받을 준비를 다 마치고 자기 마을에서 공소집을 차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가 약속한 그 해에 제가 그 새 공소집에 도착하였을 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그들의 집에 들어가서 인사하자마자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교우들 전체가 어떤 감정이 북받쳤는지 모르겠으나, 목을 놓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시켰고 그들의 눈물이 얼굴과 옷을 적셨습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서 그들에게 잠잠하라고 소리를 질렀고, 한참 만에야 그들을 간신히 진정시켰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성저으로 기도와 교리문답을 익혔는지 제가 공소 방에 들어가 찰고를 받을 때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겨우 8,9,10세밖에 안 된 어린 꼬마들이 교리문답 전체와 굉장히 긴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경문을 청산유수로 외우는 광경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그 중에도 특히 노파들이 우둔함을 무릅쓰고 열성을 부리는 모습을 바라볼 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재능도 부족하고 기억력도 흐려서 경문을 하루 종일 배우면서도 한 마디도 입에 담지 못하며 애를 쓰는 모습이 안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 마을과 연관을 맺고 지내는 이웃 근방의 12가족도 이들의 영향으로 전부 입교하였습니다. 이 마을에 식구가 꽤 많은 집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집 식구들이 천주교 교리를 들었으나 외인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천주교 믿기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열세 살 된 아이가 자기 부모와 형들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 미신 단지와 미신할 때 쓰는 기구 등을 내동댕이치고 깨뜨리면서 "왜 이 따위 괴악한 물건들 때문에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꼬마가 한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 온 집안이 천주교를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해에 예비교우들이 상당히 많아서 4백 명이 넘었으나, 영세자는 많지 않아습니다. 왜냐하면 주교님께서 사본문답(四本問答)을 전부 완전히 배우지 못한 자에게는 세례성사를 주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교리문답책(Catechismus)은 천주교의 주요한 교리를 묻고 대답하는 문답(問答) 형식으로 설명한 천주교의 공식 교리책이다. 세례성사문답, 고해성사문답, 성체성사문답, 견진성사문답을 합친 것을 사본문답이라고 일컫는다. 그 중에서 견진성사문답이 빠진 것을 삼본문답이라고 말한다. 1931년에 조선 천주교회에서 새롭게 발간한 천주교 교리문답은 320개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사실 사본문답 전체를 완벽하게 익혀서 세례 준비를 마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사본문답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교리공부를 하여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편지의 첫머리에 1858년 7월 26일에 신부님께서 보내주신 편지와 회람 공문에 대해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려 했는데 깜빡 잊었습니다. 이 공문을 보고 동료 신부님들한테서 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주교님의 허락을 받고 신부님께 여러 가지를 청구하였는데, 아직도 보내시지 않았다면 신속히 구하시어 기회 있는 대로 빨리 보내주십시오.
이번에 또 한가지를 청하겠습니다. 서양음악에 여러 가지 음향으로 소리가 잘 나게 연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악기를 하나 보내주십시오. 여러 개의 건반이 있는 약 30프랑짜리 되는 것으로 보내주십시오. 대금은 제가 주교님께 올리겠습니다.
또 무엇보다도 저 자신과 저의 신자들을 위해 신부님께서 열절하신 기도를 많이 드려주시기를 청합니다. 또 가장 훌륭한 선교사 신부님들을 될수 있는 대로 조선에 많이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아마 주교님께서도 신부님께 부탁하셨을 줄로 믿습니다만, 조선으로 배정되는 각 선교사 신부님들에게 사천(四川) 대목구 시노드 회의록을 한 권씩 주시고, 특히 회의록 제10장과 부록 14조부터 끝가지 잘 읽게 해 주십시오. 미리 잘 읽어두어야 할 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 대목구에서는 1857년에 처음으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에이 회의에서 결의된 것 외에는 모두 사천 대목구 지도서를 조선에서도 따르기로 결의하였다. 중국 사천 대목구 지도서의 제10장에서는 신자들에 대한 선교사의 행동 지침이 규정되어 있고, 부록에는 여자들에 대한 선교사의 행동 지침이 규정되어 있다.)
페롱 신부님께 대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페롱 신부님께 대하여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한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며, 우리 둘은 서로 단짝입니다. 페롱 신부님은 지금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 신자들한테 사랑도 아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공경하올 신부님께, 지극히 순종하는 조선 포교지의 아들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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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여섯 번째 편지
오두재에서 1858년 10월 4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리부아 대표 신부님께
작년에 신부님께 편지를 보내고, 또 르그레주아 신부님과 페낭에 있는 우리 신학생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는데 신부님께서 다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부님께 대해서는 파선당하였다가 생환한 제주도 사람한테 들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상해에서 중국 관원에 의하여 북경으로 인도되었고, 거기서 조선에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바울리노가 전해준 편지와 신자들을 찾기에 필요한 안내 정보를 가지고 교우들을 찾았습니다. (바울리노는 페낭에서 공부하던 조선 신학생인데 그 당시 홍콩에 소재한 파리 외방 선교회 대표부에서 요양중이었다.)
그는 크게 고생은 하였으나 하느님의 은혜로 다행히 교우촌을 발견하고, 또 그곳을 거쳐 저와 페롱 신부님이 함께 있던 교우촌에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님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자기가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후 저한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오늘까지 그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혹시 그가 바다를 건너다가 또 파선이 되어 죽지나 않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제주도에서 전교하다가 관헌에 잡혀 죽지나 않았는지 몹시 걱정이 됩니다.
제주도라고 하는 섬은 옛날에는 독립되어 있다가 후에 조선에 합병되었는데 상당히 크고 비옥한 섬입니다. 각 관장이 다스리는 행정 구역이 셋으로 나누어져 있고, 인구는 저의 계산으로 약 4만 명이며 주민들 성품이 사납다고 합니다.
정부로부터 파견된 관원들이나 관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장사꾼들 외에는 누구도 제주도 상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가는 것도 남자들에게는 관청의 허가가 있어야 하고, 여인들에게는 엄금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섬에 교우가 있다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선교사 사제가 들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께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 받을 은혜를 주신다면 선교사 사제가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 밖의 것에 대하여서는 신부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미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어제 쓴 편지에) 다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도 그 편지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를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신부님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순종하는 아들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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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일곱 번째 편지
안곡에서 1859년 10월 11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르그레주아 신학교 학장 신부님께
1858년 7월 22일자로 보내주신 신부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작년에 보내드린 저의 편지도 신부님께서 받으셨을 줄로 믿습니다. 작년 내내 새 선교사들과 신부님들에 대한 새 소식들을 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접하기 위해 우리 주교님께서 보내신 거룻배가 강남에서 오는 배를 만나지 못하였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배가 여러 날 동안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 배로 새 동료 선교사들이 입국할 줄로 바라고 있습니다.
신부님들이 해적을 만나 것은 아닌지? 바다 소용돌이에 휩쓸리지나 않았는지? 우리는 크게 염려하고 근심하여 하느님께 간절히 기원하였습니다. 그리고 혹시 다른 배로 우리나라 해안에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렸습니다만 지금까지는 우리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나날이 우리의 걱정이 커지고 몹시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중에서도 신부님으로부터 지극히 큰 기쁜 소식을 받고 더할수 없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즉(1857년에 82명의) 우리 조선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 성하의 인정을 받고, 우리 자모이신 교회의 전면에서 공적으로 온 세계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된 소식 말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순교자들도 성인 반열에 오르시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적으로 공경을 받으시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기쁘고 영광되겠습니까? (1984년 5월 6일에 103위 한국 순교자들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원컨대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서 이다지도 야만적인 지역에서도 큰 영광을 받으시고 전능하신 당신 팔의 능력을 당신 종들의 전구를 통하여 드러내시어, 예전에 그들의 충성심을 통하여 공경을 받으셨듯이 그들의 공적 경배를 통하여 모든 이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는 조선 순교자들의 전구(傳求)로 공적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아마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우리의 정성이 미약하고, 우리가 순교자들에게 전구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또한 그것을 우리 신자들에게 계몽하는 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먼젓번 박해 때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어떤 기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신빙할 만한 증인이 없어서 분명하고 확실한 정보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앞으로는 신부님의 지시에 따라 신자들에게 순교자들의 전구하심으로 하느님이 주시는 기적을 얻도록 가르치면서 순교자들을 더욱 열절히 공경하도록 인도하겠습니다.
금년에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임금님의 맏아들, 즉 원자(元子)의 탄생을 계기로 다른 유배자들과 함께 귀양갔던 우리 교우들이 둘만 빼놓고는 모두 다 풀려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금님의 맏아들의 탄생은 우리 왕국에는 큰 경사를 가져다주었고 유배자들에게는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자가 얼마 살지 못하고 이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그들이 그에게 영원한 기쁨과 자유를 얻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한 괴악한 여인이 일으킨 박해도 다 가라앉았습니다. 어떤 교우촌이 그 여인의 고발로 거의 마을 전체가 체포되었으나 얼마 후에는 예전의 자유로 되돌아왔습니다.
사목 순회중 내내 저는 악인들 때문에 거의 항상 반무장을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악인들은 처음에는 신자들 사이에 형제처럼 착하게 어울려 다니다가 나중에는 약탈하는 이리로 변하여 몹시 사나운 원수로 소동을 피우고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박해를 일삼아 진땀을 빼게 합니다.
한 번은 특히 아주 위험한 지경에 처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 교우촌에서 걸어서 이틀 걸리는 다른 교우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쌓여 걸음이 더뎌져서 이틀이 지난 후에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읍내로 들어가 주막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그 교우촌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막 주인이 불량배들과 같이 저를 수상한 인물로 여겨 그 고을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들은 온 읍내가 떠들썩하게 몰려와 저희 일행에게 욕을 하고 매질을 하고 나서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저 혼자만 미사짐을 가지고 주막에 남아 있었습니다.
관장은 신자들에 대하여 대체로 적개심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안동(安東)김씨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더 자세히 심문할 마음이 없었는지 당장 그날 밤 안으로 그 읍을 떠나 자기 관할 구역 밖으로 나가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속박에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또 그 포졸들이 거의 모든 읍내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우리 일행을 주막까지 데리고 와서 집이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며 옷을 찢고, 신발과 갓을 빼앗고 상처투성이로 만든 후 우리를 읍 밖으로 추방하였습니다.
우리는 한밤중의 매서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유숙했던 주막에서 쫓겨나 매를 흠씬 두들겨 맞고 또 의복이 찢어져 반쯤 나체가 되었고, 강추위로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눈이 깊이 쌓여 발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고, 능욕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기진맥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중이라서 우리의 처참한 꼴을 감출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면서도 관가에서 풀려난 것만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후에 포졸떼가 다시 쫓아와서 우리를 습격하며 미사짐에 손을 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아니하고 성모님의 보우하심으로 저는 그들을 협박하였습니다. "안된다. 우리 다 같이 관가로 다시 가서 관장 앞에서 짐을 풀어보자. 여기서는 절대로 너희 마음대로 짐에 손을 댈 수 없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자들이 감히 더 이상 우리를 추적하지 아니하고 내버려 두고 떠나갔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성사를 받기에 필요한 마음 준비가 모자라기 때문에 제가 성사 주기를 거절하면 그들은 저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저를 잡으려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저는 또다시 그들의 손에서 요행히 빠져나오곤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가 언제나 박해와 환난만 당하고, 또 우리 조선 사람들은 전부 극악한 사람들이요, 배신자들이요, 강도들이요, 잔학무도한 난동자들이요, 폭도들인 줄로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다른 편에서 이러한 비참을 능가하는 더 큰 위안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노고와 고난 중에서도 그 안에 최고의 위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도적 생활의 보람이요, 화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의 다른 위안과 다른 종류의 하느님의 자비하신 축복을 신부님께 나누어드리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비록 배신자들도 만고 원수들도 많지만, 좋은 친구들도 많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한 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렇게 악착스런 마귀떼 같은 원수들을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우리의 동료 전우들을 우리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위한 군인들로 만들기도 합니다. 더구나 우리의 반대자들까지도 좋으신 하느님의 은덕으로 우리 편으로 데리고 오기도 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동네에 열두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2년 전부터 세 가족만 빼놓고는 전부 다 천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그런데 남은 세 가족은 천주교에 나오기는 고사하고 천주교에 입교하기 시작한 새 교우들과 원수가 되어 그들의 신앙 생활을 방해하고 여러 가지로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새 신자들은 이에 대항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인내와 친절과 겸손으로 저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정다운 권고까지 하여주었으므로 저들도 감동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도 그리스도의 우리 안의 양들이 되어 모두 힘을 합하여 새 공소집을 건축하였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그 공소집에 갔을 때에 그들은 거의 모두가 기도문과 교리 문답을 잘 배우고 영세 준비를 훌륭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공소에만도 어른 영세자가 32명이고, 유아 영세자가 10명이며, 예비자가 17명이나 됩니다.
최근에 또 어떤 사람은 교리를 배워 세례받을 준비를 다하였으나 오래전부터 병에 걸려 문밖 출입도 못하였습니다. 그의 집에서 공소까지는 이틀이나 걸리는 먼 거리여서 세례받기 위해 공소까지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 병자는 자기와 함께 입교하여 세례를 받으러 가는 동무들을 불러모으고 하느님 앞에서 장황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동료들이 병자에게 가마를 타고 가자고 제안하자 병자는 "나 같은 죄인이 가마를 타고 편안하게 간다면 오만불손한 짓이 될 것이요, 차라리 나를 지게에나 싣고 가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병자가 첫날은 지게에 실려 갔습니다. 집에서는 문밖 출입은 커녕 누워 있어도 편안해하지를 못하였는데 다음날에는 지게도 버리고 자기 발로 걸었습니다. 눈이 두 자나 쌓인 험한 산길을 걸으면서도 별로 힘겨워하지도 아니하고 춤추다시피 성큼성큼 뛰어서 공소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공소에서열흘 이상 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 고통이나 불편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열절한 마음으로 세례받은 후 그는 천상의 환희에 가득 넘쳐 영혼도 낫고 육신도 나아서 이중으로 건강하게 되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또 한 사람은 위에서 말한 사람의 친척입니다. 그는 어떤 새 신자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자기도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우선 자기 집의 우상들과 미신을 치워버리기 위하여 귀신단지를 힘껏 땅바닥에 내팽개쳤습니다. 그런데 단지는 깨지지 않고 땅 위에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이때 그는 성호를 긋고 나서 그 단지를 다시 집어들고, 이번에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내던졌는데 단지는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이런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새 군사는 모든 미신 물건들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랬더니 평소에 온순하던 말이 별안간 광증을 부려 사람을 물어버렸습니다. 이 착한 예비교우는 귀신이 말에 접한 줄로 여겨서 격분하여 말을 당장 죽였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귀신의 요상스러운 장난이 뚝 그쳤습니다. 그 예비교우는 더욱 굳센 신앙과 열심으로 세례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또 어떤 읍에 사는 한 사람은 몇 년 전에 입교하였는데 그의 모친과 아내가 결사 반대하며 날마다 핍박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큰 항구심으로 신앙으로 버티어내면서 열심으로 수계하였습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계속 뒤쫓아 다니면서 다른 때보다 더욱 큰 소리로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착한 새 신자 아들이 귀찮아서 밭으로 피해 가서 하루 종일 굶어가며 일을 하였습니다. 한편 어머니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함지에 음식을 담아가지고 굶주리고 고달픈, 농사일로 지친 아들한테 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길에서 미끄러져서 땅바닥에 벌렁 나자빠졌습니다. 그 바람에 머리에 이고 가던 함지까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런데 밥그릇도 말짱하고 음식도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머니는 제정신을 차리고 "내가 잘못했다. 아들이 나보다 옳다. 내가 공연히 아들을 괴롭게 들볶았다. 그 벌로 나는 낙상하여 중상을 입었으나 하느님을 공경하는 내 아들이 먹을 음식만큼은 쏟아지지 않았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감동되어 자기도 교우가 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간월이라는 교우촌에는 교우들이 상당히 많으나 모두 가난하고 공소집도 너무 초라했습니다. 어떤 외교인이 와보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집꼴이 이래서야 쓰겠는가" 하며 자기가 더 좋은 공소집 하나를 지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작년에 그 외교인은 자기 비용으로 훌륭한 공소집을 지어주었고, 장식품으로 화려한 촛대까지 사주었습니다. 저의 관할 구역뿐 아니라 조선 전국적으로도 이곳만큼 훌륭한 공소집은 없을 것입니다.
금년에 다블뤼 부주교님께서 저의 관할 구역 내에서 너무 넓고 가장 멀리 퍼져 있는 일부 공소들을 대신 맡아 순회하시어 저의 짐을 덜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공소들을 제외한 저의 관할 구역 연말 성무집행 보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규고해자가 2,124명이고, 재고해자가 844명이며, 어른 영세자가 201명이고, 예지가가 361명입니다.
조선에서는 성영회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선에서는 자기 자식을 버리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가난한 자들이 자녀를 데리고 과부가 되거나 또한 어미를 잃은 갓난아기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자기 자녀들을 양육하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선뜻 맡깁니다. 그러나 아주 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죽어가는 아기의 위험 대세를 집전하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조선 풍속에 따라 낯선 남자는 안채에 결코 들여보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사랑방에만 드나드는데 아기 엄마와 아기는 거기에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여인이라도 신분계급이 가장 낮은 여인이 아니면 타인의 집에 드나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위험에 있는 아기에게 접근하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죽을 위험중에 있는 아기에게 대세를 줄 기회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사업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하는 것뿐입니다. 가합한 것과 불가한 것을 거스르지 않도록 공포에 떨면서 몰래 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구적으로나 항구적으로나 정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신자들이 잘 지내던 교우촌이 내일 불시에 쑥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동료 사제들이 어느 곳에 거주한다든가, 무슨 성물이나 물건을 맡긴다든가 할 때 1개월 동안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 모양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물뿐 아니라 돈이나 재물이나 다른 물건이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최대한 남롤래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외인이나 양반이나 포졸들한테 빼앗기고 맙니다. 대체로 외인들마저 아무리 부자라도 가난한 사람처럼 입고 먹고 삽니다. 부자로 드러나면 양반들한테 수탈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도처에서 신자들과 외인들이 약탈과 착취를 일삼는 양반들과 포졸들한테서 억울한 처사를 당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니 실로 통탄할 동정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련한 참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이기에 이번에는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사부님과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께 청하오니 우리를 잊지 마시고 인자하신 하느님께 더욱 간절히 탄원하기를 그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2년 전에 전번 편지에 제가 신부님께 청한 물건들을 다 장만하였다고 말씀하셨으나 아직 받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작년에 청한 것은 돈이 좀 더 들더라도 견고한 것으로 마련하여 보내주십시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비천하고 순종하는 아들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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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여덟 번째 편지
안곡에서 1859년 10월 12일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경애하올 리부아 신부님께
1858년 5월 28일부터 쓰기 시작해서 8월 29일에 마친 신부님의 편지는 변문으로 보낸 연락원 편으로 받았습니다. 이 편지를 보고 신부님의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께서도 다른 신부님들처럼 저를 남겨두고 먼저 가시지나 않을까 크게 염려되고 걱정이 됩니다.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하신 존경하올 우리 베르뇌 장 주교님께 대해서도 무척 걱정이 됩니다. 우리 생활이 조금만 더 자유롭게 되어도 주교님이나 신부님들의 건강을 한결 더 잘 돌보아 드릴 수 있을 터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항상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나 진배없는 상태로 지내고 있으므로 그저 가슴만 치고 있을 따름입니다.
어떤 선교사 신부님들은 여름 더위에 매우 지쳐 계시지만 다른 신부님들은 그럭저럭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저는 항상 건강하게 잘 지냅니다. 그러나 저 혼자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허약합니다. 하루에 고작 40리밖에 못 걷습니다. 그래서 갈 길이 먼 공소 순회 때에는 항상 말을 타고 갑니다. 멀리 떨어진 지방들은 다 제가 순방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제가 다니는 거리는 7천 리가 넘습니다.
저의 관할 구역이 넓어서 무려 다섯 도(道)에 걸쳐 있고, 또 공소가 1백 개가 넘습니다. 그렇지만 여름철에 장마나 무더위나 농사일 때문에 순회를 할 수 없는 몇 달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허가가 있어도 제가 쉴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페롱 신부님의 관할 구역으로 가서 안곡이라는 교우촌에서 여름 휴가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도 머지않아 쫓겨날 처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근처에 사당이 하나 있는데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안 쓰고 버려져서 폐허가 되어갑니다. 백성들의 착취와 가렴주구(苛斂稠求)로 살아가고 있는 어떤 양반 하나가 백성들을 등쳐먹을 심산으로 사당을 개축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사당을 개축한다는 말은 백성들한테서 돈을 긁어모으고, 노동력을 착취하겠다는 뜻입니다. 만일 이 제안이 실현에 옮겨진다면 사당 근처에 살고 있는 안곡 교우들도 돈을 내야 하고, 노동과 부역을 해야 합니다. 안곡은 그 사당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양반의 약탈에 항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는 또 다른 먼 곳으로 쫓겨가야 할 판입니다.
난파선에서 구출된 제주도 사람은 왕도(서울)로 올라와서 판공성사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자기 집안이나 제주도 사람을 입교시키기 위한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답니다.
그곳에 천주교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그들이 현 정세하에서는 천주교를 믿고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한답니다. 앞으로 신앙의 자유가 오면 그때 가서 신자가 되겠다고 약속할 뿐입니다. 그 제주도에서도 조선 건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좋으나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참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이 구원되기를 원하면서도, 천주교를 엄금하는 조선 법령에 대한 공포 때문에 천주교 신앙을 고백할 만한 용기와 담력이 모자랍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특히 남편과 부모들 지배아래 있는 여인들이 장애를 받고 날마다 울음으로 지내며 한숨으로 쇠약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천주교 국가의 군주들이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많은 영혼들의 안타깝고 참혹한 처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지체없이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마련해주기가 별로 어렵지 않을 텐데 말씀입니다. 프랑스 정부에서 한 번만 공식으로 우리 조선 정부에 대해 백성들에게 천주교를 믿을 신앙의 자유를 주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경고문을 보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 조선 조정에서 이 요구를 감히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 확실합니다.
전능하시고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이 여기소서. 모든 마음이 달려 있고 구원받을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더욱 강하고 더욱 감미롭게 인도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신부님의 서원과 기도를 끊임없이 이 목적으로 지향하여 주십시오. 우리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 대한 신부님의 열정과 진정한 호의를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좋으신 신부님께 미사중에 허약하다고 소문이 퍼진 친구와 아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저도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결코 빠뜨리지 않고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보내드리는 편지를 동봉하오니 읽어보시고 그분께 전해주십시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비천하고 순종하는 아들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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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의 열아홉 번째 편지
죽림에서 1860년 9월 3일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과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께 공동 편지를 보내드리는 것에 대하여 용서를 청합니다.
이 작은 편지를 두 분께뿐 아니라 모든 경애하올 신부님들께 이렇게 한꺼번에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겨져, 그분들이 아직 살아 계신지 어떤지 조차도 모릅니다. 이 편지도 중국에까지 전달될 수 있을는지도 의심됩니다.
(1859년 말에 서울에서 시작하여 1860년에 전국적으로 파급된 경신박해)는 그 박해의 발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아직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체포된 신자들은 많지 않고 감금된 여인들도 거의 없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선교사 신부님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할 구역에서 17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14명이고, 여자가 3명이라는 소식을 저에게 알려왔습니다. 그 밖의 교우들도 특히 이 도(道)의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자기 마을에서 쫓겨났고, 집과 전답과 생활 필수품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 데도 없고 몸붙여 지낼 곳도 없이 극도로 처참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교우들이 잡혀 감옥으로 끌려간 마을에서는 포졸들이 모든 것을 약탈하고 불질러 버렸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친척이나 천주교 신자인 친구들을 피신시켜주었던 외교인들도 천주교 신자와 같은 운명을 당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의 주민들은 같은 고장에서 이웃으로 함께 사는 천주교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대책을 세웠습니다. 즉 천주교 신자들이 마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몰아내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대단히 많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감옥에 가둬둘 수도 없고, 일일이 모두 다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깊은 산골짜기마다 꼭꼭 숨어 사는 천주교 신자를 몽땅 체포할 뜻은 없어 보입니다. 그 대신에 포졸들을 여기저기 사방에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천주교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또 주민들을 선동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핍박하도록 충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박해 방법이 우리들에게는 훨씬 더 가혹하고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체포된 17명 중 3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2명은 왕도(서울)로 압송되었고, 한 명은 이 도의 수도인 대구(大邱)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요즈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도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 아주 열심한 노파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노파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여 많은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우촌을 세웠고 철저한 교리교육과 신심의 모범으로 그 교우촌을 지탱하여왔습니다. 그 노파는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를 용맹히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그 상처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10명이 경주(慶州)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들은 세 차례나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문초를 당할 때마다 용감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였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처참하게 고생하면서도 신앙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 중 열여섯 살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굳세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으며 비신자들조차 탄복하였습니다.
스물네 살쯤 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이 특출하여 모든 교우들 중에서 뛰어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하고 감옥에 끌려가기를 간절히 자청하였습니다. 아버지와 다른 교우들이 체포될 때 그는 포졸들 주변을 맴돌면서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교우들의 강요에 따라 마지못해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두 처녀들과 함게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두 처녀는 하나는 열일곱 살이고, 하나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이 동정녀가 선생처럼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지도하던 처녀들이었습니다.
포졸들이 오자 그녀는 자기도 아버지와 오빠와 같은 종교를 믿고 있으니 함께 감옥으로 잡아가 달라고 자원하였습니다. 이때 두 처녀들도 이 동정녀를 본받아 같아 잡혀가기를 자청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세 처녀의 엄지 손가락을 묶어가지고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포졸들은 그 처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농락하거나 다른 데 팔아먹으려 하였습니다. 포졸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포졸들에게 자기들을 놓아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포졸들의 짐승 같은 욕정을 진정시키셔서 처녀들은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그들 중에서 큰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는 아버지와 오빠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돌봐주는 이나 의지할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숱한 위험을 겪으면서 이리저리 헤매다니다가 결국 저에게로 피신하여 왔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사를 신심 깊게 받은 아가다는 둘러 있던 교우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다 함께 임종경의 마지막 경문을 끝내자 아가다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에서 많은 외교인들 중에서 예비자들이 속출하므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저의 관할 구역에서만도 세례받을 준비가 된 등록된 예비자가 거의 천 명에 이르렀을 정도입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기도경문과 교리문답을 얼마나 열성적으로 배우는지 서로 경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박해로 인하여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되었고, 마을마다 천주교의 상습적 동조자들을 추방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지고, 아직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은 실망하며,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냉담자로 보입니다.
오늘까지 굳세고 용맹하게 신앙을 지킨 교우들까지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나이 어린 젊은 과부나 처녀들은 더욱 큰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벌써 한 교우 과부가 외인한테 납치를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감옥에 갇힌 젊은 부인 한 명과 처녀 한 명도 납치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여자들은 몸의 순결을 보존한 채 풀려났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교우 처녀들을 어쩔 수 없이 외인들에게 정혼시켜버렸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이미 외인들과 정혼한 처녀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납치와 능욕의 위험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제가 위에서 언급한 아가다에게 다음과 같이 허락할 수 있다고 여겼을 정도였습니다. 즉 저는 아가다에게 비록 기적이 없이는 굶어 죽을 것이 뻔하지만, 어떤 동굴에 숨어서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가다는 이 허락을 받고서도 죽을 병에 걸리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 피난처에서 또다시 강제로 추방된 다음 저와 떨어져서 다른 구원의 피난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조씨 성을 가진 양반이요, 학자요, 상당한 부자인 가족이 자기 가문의 여러 후손들과 더불어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가옥과 모든 것을 팔고 나서 출생지인 고향을 떠나 십여 일 전에 교우촌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포졸들한테 모든 것을 다 빼앗겼고, 또 포졸들이 집에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열여섯 식구가 거의 알몸으로 쫓겨나 어떤 빈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집은 교우 가족이 살다가 포졸들의 등쌀에 못 이겨 버리고 떠난 집이었습니다. 조씨는 이 집에서 어떤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당분간 살아가기에 꼭 필요한 세간살이를 장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집에서도 쫓겨나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고 다른 데로 피신할 수밖에 없어서 친구들에게 구걸하면서 처참하게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전에 그는 아무것도 아쉬움 없이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 착한 예비교우들은 자기의 영광스러운 불행한 신세에 대해 크게 한탄하거나 원통해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박해의 북새통에 아직 세례받지 못한 것만이 유일한 고통이랍니다. 이 집안 식구가 열네 명인데 집에 선교사 신부님을 모셔다가 세례받게 되는 날만 고대하고 있습니다.
조선 조정과 온 백성들은 천주교 신자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무슨 음모나 꾸미는 자들이 아닌가 하고 의심합니다. 저들은 다음과 같이 추리합니다. "자기네 종교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 종교이고, 또 천주교의 겉모양은 그럴듯하고 멋있게 보이는데, 그 겉모양 아래 흉칙한 음모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면, 왜 비밀리에 전도하는가? 특히 선교사들이 남의 나라에 몰래 잠입하여 비밀히 자기 교리를 전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의 나라가 매우 강력하다고 떠벌리나 겁낼 것이 아무것도 없을 터이다. 그들의 교리대로라면 그 종교는 모든 이가 구원받기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의 군주들이 그 종교의 신봉자들로서 그 종교의 포교를 힘껏 뒷받침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그들 신봉자들인 군주들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그 종교의 팽창을 조선 사람들에게 억지로라도 강요하고 밀어붙여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가) 왜 합법적으로 행하지 아니하는가? (프랑스 선교사들이) 왜 공개적으로 오지 아니하는가? 왜 정부끼리 우호적이고 합법적으로 행하지 아니하는가? 왜 몰래 입국하여 모든 것을 비밀히 행하다가 그다지도 처참한 지경을 당하는가? 그들의 행동 방식을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무슨 흉계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등등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론으로 조선 조정과 백성들은 신자들과 서양 함선들에 대하여 큰 경멸과 증오와 적개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주 오는 서양 함선들이 천주교 신자들인 줄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서양 함선들을 무서워했고, 그 함선들에 대하여 굉장한 무엇이 있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여러 해 전부터 서양 함선이자주 나타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서양 함선들을 해적선으로 여깁니다.
조선 백성들은 자기들끼리 다음과 같이 수군거립니다.
"저 큰 함선들은 틀림없이 해적선이거나 범죄자들의 선박이다. 만일 그 함선들이 합법적으로 성립된 권력을 가진 어떤 국가에 속한다면 어떻게 공공권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이유 없이 남의 나라에 이처럼 자주 침범할 수 있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유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아무 말오 하지 않고 그냥 나간다면 어찌되는가? 예의를 모르는 야만인이거나 강도질을 할 기회를 엿보는 도둑임이 틀림없지 않겠는가?"
모든 이가, 일반 서민이거나 시골 농사꾼들까지도 이와 같이 추리하고 이러한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이나 백성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하여 최대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2년 안에 프랑스 함선들한테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천주교 신자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이 나라에서 말살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1886년에 가서야 조선과 프랑스는 수호조약을 맺었다.)
주여,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마소서. 우리 눈이 모두 당신의 자비에 쏠려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이 당신의 자비 안에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과 죄과를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우리는 죄를 지었고 너무나 많은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우리의 불의를 헤아리신다면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 즉 우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옛 자비를 기억하시어, 우리와 당신의 모든 성인들의 기도를 어여삐 들어 허락하소서.
우리를 재난에서 구원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하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 거듭 맡깁니다.
금년에 저의 사목 순회 도중 중단된 성무 집행의 연말 보고를 드립니다. 1,622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어른 203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어른 임종자 13명에게 대세를 주었고, 예비자 398명이 등록하였습니다.
지극히 비천하고 순종하는 종, 조선 포교지 탁덕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최 양 업 신부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