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그림자가 반짝이는 곳
2024101480 철학과 황누리
다시 가고 싶은 어떤 곳을 말할 때 장소에 대해서만 말해선 안 된다. 내가 어떤 곳에 다시 가고 싶은 이유는 그곳에, 그때, 그 사람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시간과 공간을 통칭하는 시공간이라는 개념에 사람까지 잠시 포함하도록 하자. 내가 다시 가고 싶은 그곳, 그 시공간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고등학생으로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한 친구와 함께 존재하던 그곳이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가톨릭 계열 미션스쿨이라는 성격에 걸맞게 마치 수도원처럼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 끝에 숨겨져 있다. 교정에 들어서면 운동장이 가장 먼저 보이는 다른 학교와는 달리, 우리 학교는 운동장마저 구석에 치우쳐져 있었다. 아담한 부지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우리 학교를 나는 꽤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느티나무 그늘이 드리운 야외 쉼터였다. 이곳을 좋아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로 새하얀 성모마리아상 맞은 편에 있는 벤치에 앉아 날씨를 즐기거나 생각에 빠져있기를 좋아했기 때문이 있다. 그러나 내가 이곳을 정말 사랑하고, 다시 가고 싶은 시공간으로 삼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따로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어느 하루의 점심시간이었다. 이과생이지만 시를 좋아하던 친구와 쉼터 벤치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한국 젊은 시인의 시집을 뒤적이던 때였다. 여름이라는 시절에 맞춰 여름의 이미지가 가득한 시들을 읽었다. 30분 남짓한 짧은 시간만 주어진 것을 알면서도 시집을 팔락이다가도 시집을 덮고 허공을 바라보기도 하며 느릿하게 계절을 즐겼다. 그러다 친구는 불현듯 그 느티나무 그늘의 그림자를 쳐다보며 “나무의 그림자가 반짝여-”라고 말했다. 어쩜, 여름의 느티나무는 잎이 무성하지만, 하늘을 한 치의 틈 없이 덮지는 못한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무성한 나뭇잎은 흔들흔들 움직이고 그에 따라 나무 그늘의 그림자도 흔들거린다. 그때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새 나오는 빛은 흔들리는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정말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단순한 시적 비유 표현이지만 나는 이 문장이 당시의 시공간 총체를 가리키는 상징인 것처럼 느껴졌고, 더 나아가 단순히 예쁜 기억으로만 남았을 수도 있는 장면에 의미를 불어넣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어준 것만 같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고등학교 생활 중 틈틈이 그런 낭만을 챙겼다는 게 지금으로썬 상상이 안 된다. 이런 추억은 나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우정과 여유를 잃지 않으리란 믿음을 준다. 그 믿음이 희미해질 때마다 자꾸 다시 꺼내보고 이내 단단한 믿음을 되찾는다.
내가 지내온 모든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아득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 과거 중에서도 특히 더 나의 삶을 지탱해 주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사람, 장소, 시간이 한데 어우러진 나의 학창 시절 중 한 장면은 가치관의 정립이나 생존 기술의 습득같이 직접적이고 선명하게 지금 나의 모습을 구성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매번 공부하기 싫을 때나 생각이 괜스레 복잡할 때면 친구의 이름이나 친구의 표현-나무의 그림자가 반짝인다-따위를 의미 없이 끄적이곤 한다. 혼자 하는 분신사바*처럼. 곁에 없는 그가 어느새 유령처럼 다가와 나를 움직이게 해준다. 반짝이는 나무 그림자 위에 그와 내가 서있는 모습은 나를 더 잘 살아가게 해준다. 그 시공간을 떠올리는 것으로 나는 자주 그곳에 간다. 삭막한 생활 속에서도 내 안의 감수성을 메마르지 않게 해준다. 매번 다시 찾으면서도 매번 다시 찾고 싶은 그곳이다.
*서윤후 시인의 시 “쉽게 말하고 여러 번 죽는다”의 표현을 빌렸다.
첫댓글 글에서 여름날의 순간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냥 예쁘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을 누리님만의 관찰력으로 더 생동감있게 기억하고 글로 표현하셔서 읽는 사람도 충분히 그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최근 학교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사람들과 풍경을 감상하면서 여유를 즐기셨는지 궁금해요!
누리님의 글을 읽고 저도 고등학교에서 그늘 아래에 앉아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당시에는 소중한 순간이라고 느끼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니 그때가 많이 그립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에 묘사된 순간이 매우 인상 깊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평소에도 여름의 청취를 좋아하는 편인지, 그렇다면 여름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함께 있었던 친구와 지금은 어떤 관계로 지내는지도 궁금합니다.
"나무의 그림자가 반짝인다"라는 표현을 보고 정말 감탄했어요! 역시 시를 많이 읽는 사람의 표현력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힘든 고등학생 시절 잠깐씩이라도 여유를 가졌던 경험을 떠올리며 '어떤 상황에서도 우정과 여유를 잃지 않으리란 믿음을 준다.'라고 표현하신 것도 인상깊었습니다. 제게도 고등학생 때 잠깐씩 즐거웠던 기억들이 많지만 그저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겨뒀을 뿐 나에 대한 믿음으로 잇진 못했거든요. 그리고 글에 언급된 친구분과 지금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좋은 추억을 나눴으니 대학에 와서도 우정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는 누리님과 공유한 기억이 단 하나도 없지만, 잠시나마 누리님의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한 것 같은 글이었습니다. 그만큼 누리님의 표현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바쁜 고등학교 생활을 버티게 해준 활력제에 대해 되돌아 보았는데, 룸메이트들인 것 같습니다. 특히 고3 시절 룸메이트들과는 1년 내내 동거동락하며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는데, 가장 힘든 시절을 함께 이겨낸 그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저는 아직도 그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누리님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믿음이 희미해질 때마다 다시 꺼내본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도 힘들때 행복했던 순간의 기분을 다시 떠올려보면
같이 있던 사람들, 분위기가 생각 나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힘을 얻거든요. 그리고 글을 읽으면서 저도 여름에 학교 장소를 상상하게 되는 것 같아 너무 좋았습니다!
책의 한 페이지를 읽은 것처럼 글의 구성과 표현이 매끄럽고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저도 마치 누리님이 말씀하신 그 장소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정말 누구와 그 공간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고등학교 생활 중 틈틈이 그런 낭만을 챙겼다는 게 지금으로썬 상상이 안 된다.' 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그렇게 바쁜 고등학교 생활 중에 찾은 낭만이라 누리님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틈내서 시를 읽는 학생이 흔하지는 않아서, 친구 분과 시를 읽으실 때는 각자 다른 시집을 읽으신 건지, 아니면 함께 같은 시를 읽으며 감상하신 건지, 혹은 함께 소리내어 낭독하시지는 않으셨는지, 그런 구체적인 모습이 궁금합니다.
"나무의 그림자가 반짝인다" 라는 표현이 정말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림자는 늘 어두워서 반짝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요! 고등학교 시절 낭만 가득한 추억을 가지고 계신 것도 부럽네요 ㅎㅎ 저는 노래와 장소를 연결짓는 것을 좋아해서 정말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으면 한 노래를 반복 재생해 두고 그 장소에 가고 싶을 때마다 그 노래를 듣곤 합니다. 시 읽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혹시 누리님이 직접 쓰신 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과생이라면 문학적인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을 거라는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과생인 저보다도 더 누리 님의 친구 분은 예쁘고 다정한 표현을 사용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여름을 싫어하는데 누리 님의 글을 읽으면서 여름이 너무 잘 느껴지고 편안해서 여름이 갑자기 기다려지는 것 같아요!
누리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장소가 좋은 이유는 그 장소에서 함께한 사람과의 추억 때문인 것 같아요. 글 처음에 말씀하신 부분에 깊은 공감을 합니다. 저도 이 글을 읽고 힘든 고등학교 생활이 떠올랐는데, 친구들과 함께했던 가끔의 짧은 추억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이 정말 좋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가고 싶은 장소에 대해 설명하실 때 직접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실감나게 표현한 부분이 좋았어요 또 누리님은 바쁜 고등학교 생활 속에서 꾸준히 읽을만큼 시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누리님이 생각하는 좋아하는 공간에 대해 정말 공감합니다. 단순 공간이 좋다기보단 때와 함께 한 사람, 그곳에서의 추억이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분신사바에 비유하여 표현한 부분 또한 굉장히 인상이 깊어요! 대학교 와서도 누리님에게 새로운 공간이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나무의 그림자가 반짝여'라는 친구분의 표현, 정말 낭만적이네요. 그 시절의 추억과 낭만은 그때만의 고유한 향기가 묻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소중하고 기억에 더 오래 남아요. 읽으면서 세세하고 자연스러운 글의 구성이 느껴져 몰입이 잘 되었어요.
글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따뜻해서 너무 좋았어요! 친구의 나무의 그림자가 반짝인다는 표현은 참신하고 몽글몽글하네요. 저는 입시를 할 때에만 시를 읽었던 것 같은데 이제 평소에도 시집을 찾아서 읽어야겠어요. 혹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 야외 쉼터에 다시 가실 때 친구분도 같이 오시는지 궁금합니다!
누리님의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해요.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하던 중에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불러내서 보여주신 잊지 못할 황혼이 저를 지탱해주거든요!
그 가장 좋아하던 친구와의 관계는 아직까지 잘 이어지고 있나요? 아니면 이제 추억처럼 꺼내 생각해야하는 관계가 되었나요?
누리님께서 다시 가고 싶어하는 좋아하는 장소를 예쁘게 표현해주셔서 저도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요. 누리님을 더 잘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장소가 있는 게 한편으론 부럽기도 해요. 누리님에게 낭만은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지금까지 시를 읽어보면서 시적으로 허용되는 모순적인 글을 보면 왜인지 모를 감동을 느꼈는데, 친구 분과 고등학교 점심 시간에 시적 감성을 느끼면서 "나무의 그림자가 반짝여"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조금 벅차올랐네요. 또한 다시 가고 싶은 장소에 대해서 얘기를 할 떄, 다시 가고 싶은 이유를 얘기하며 서론을 시작한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글이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 같아서 읽기 너무 편하고 좋았어요!! 또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이 너무 멋있으신 것 같아요!! 혹시 그 장소에 얼마나 자주 다시 가시는지 궁금해요!
나무 그림자가 반짝인다는 표현이 처음에는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그림자와 햇빛의 묘사를 통해 아름다운 순간을 저런 표현으로 쓸 수 있구나 감탄했습니다. 그 뒤에 이런 고등학교 시절동안 낭만을 챙겼다는 표현을 썼는데, 저도 최근 들어 어딘가 놀러가거나 20대에만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면 낭만이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누리씨에게 최근에 가장 낭만을 안겨줬던 경험은 무엇이었나요?
'내가 지나온 모든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왔다'는 내용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한순간의 우연이 인간관계를 형성해주고 하나의 순간으로 성공과 실패 여부가 바뀐다는 것을 경험해왔는데 이 글을 통해 다시금 공감하게되었습니다.
표현이 자세하고 아름답고 다채로워서 제가 마치 그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듯한 기분으로 글을 읽었어요. 저도 장소가 그 장소만으로가 아닌 여러 요소들이 합쳐져서 장소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저도 요즘 시에 관심이 생기고 있는데, 좋아하는 시나 시인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