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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20세기 초반에 학문적, 사회적으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거인이었다.
당대의 유명인들 가운데 어떤 식으로든 프로이트와 연관된 에피소드를 가진 사람이 많다.
(아돌프 히틀러/ 칼 융/ 살바도르 달리/ 빌헬름 라이히-오스틴 파워/ 마리 보나파르트)
1. 아돌프 히틀러(1889~1945):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을 때, 그가 살던 빈(Wien)에는 화가 지망생이던 백수청년 아돌프 히틀러가 살고 있었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식으로 가득찬 이 청년은 30여년 뒤 프로이트가 경계한 인간의 '광기'를 교묘히 활용하여 나찌당을 조직하였고 그의 청년단(돌격대)과 공식 군사조직인 친위대원들은 '유대인' 프로이트를 향하여 광적인 공격과 테러를 감행하였다.
'히틀러의 분서갱유'로 불리는, 빈과 베를린에서의 책 불사르기에서 프로이트의 저작은 거의 전체가 표적물이 되었고, 히틀러 정권의 탄압으로 1938년 프로이트는 결국 정든 빈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프로이트의 누나들은 이후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
2. 칼 융(1875~1961):
프로이트가 가장 아낀 제자는 칼 융(1875~1925, 스위스)이었다. 1906년 서신교환을 시작으로 학문적 동반자가 되었고, 1909년에는 미국 클라크대학으로부터 함께 초청을 받아 명예박사학위까지 함께 받기도 했다. 융은 프로이트를 열렬히 존경하고 따랐으나, 함께 한지 6년 만에 그의 곁을 떠난다.
칼 융이 프로이트를 견디지 못한 이유는 좀 복합적이지만, 프로이트가 리비도의 개념을 좀 '젊잖게 들릴만한' 다른 개념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융의 시도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도 주 이유 중 하나였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기독교 신앙에 독실했던 융은 1911년 국제정신분석협회가 발족했을 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곧 정신분석 학계를 떠나 ‘분석심리학’이라는(유사하지만 다른) 학문을 창시하고 자신만의 이론들(내향성과 외향성 구분, 집단 무의식, 원형이론-Archetype의 제안 등)을 세워 또 한 사람의 거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프로이트에게서 자라난 ‘정신분석’의 대가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1912년 융이 뮌헨에서 프로이트를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프로이트는 대화 중 기절해 쓰러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융이 프로이트를 '극복하려고' 애쓴 이유는 표면적으로도 여러가지 근거가 보이지만, 내면적인 이유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모범시민으로서 거의 약점이 없어 보이는 융은 자신의 그런 캐릭터에 자부심이 강했고, 그것을 고수하고 싶어했다. 그는 전통있는 개신교 신앙의 집안이었고, 의심할 바 없는 아리안이었고, 뛰어난 지능을 지녔고, 모범적인 학자로서 모든 면에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리비도'에 대한 프로이트의 고집스러운 자신감, 그에 따른 보수적 기존 학계의 조롱은 융에게 필시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독일-오스트리아에 확산되고 있던 민족주의(아리안의 자부심)의 영향으로, 유대인에 대한 우생학적 편견이 대두하고 있었다. 파격적인 이론으로서 '학문적 권위'에 자주 공격을 받는 데다가 유대인이란 '약점?'까지 가지고 있는 프로이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내면적 동기가 작용했을 수 있다.
이러한 내면적 고민을 감추면서 정당하게?('배신'이 아니라는) 프로이트를 벗어나는 명분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새로운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만년에 나치의 압박으로 고초를 겪고 런던에 망명할 무렵에도 융은 어떤 형태로도 관여하지 않은 것 같다.
3. 살바도르 달리(1904~1989):
프로이트의 꿈 이론을 시각화하여 설명할 때 가장 흔히 인용되는 그림이 초현실주의 작가의 그림들이다(달리 샤갈 피카소 등등). 인간 의식의 내면을 이론으로 분석한 프로이트와 달리 등의 초현실주의적 그림들이 상관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달리(Salvador Dali)는 스페인 카탈루냐 사람으로 20대에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어울렸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디즈니와 협업으로 영화제작에도 참여했다.
프로이트가 영국에 망명해 있을 때, 프랑스와 영국의 많은 예술가들이 프로이트를 만나러 갔는데, 40세가 채 안된 달리 또한 존경심을 가지고 프로이트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달리를 시큰둥하게 대했다. 대화에도 신경을 집중하지 않아 달리를 섭섭하게 했다. 프로이트가 당시 암 투병중인 데다 매일 이어지는 방문객들로 심신이 피로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달리는 당시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5~1950)의 표현을 빌리면 '훌륭한 기초자이면서 역겨운 인간'이었다. 양면적인 평가다. 조지 오웰은 1944년에 달리의 자서전을 분석해 비평한 글을 썼는데, 여기에서 스페인 내전(1936~37) 당시 재빨리 모국에서 출국한 달리의 행태를 지적하며 '쥐새끼처럼 달아났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조지 오웰 자신은 공화주의자로서 이 '국제전쟁'에 가담했던 사람이므로 편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프로이트로서도 달리의 방문이 달가웠을 것 같지는 않다. 바로 히틀러 숭배자였기 때문이다. 달리가 파시스트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히틀러의 등장을 반기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모국에 등장한 독재자 프랑코에게 밀착하여 그를 찬양하는 글을 쓰고 개인적인 친분도 가졌다. 원자폭탄을 찬양하는 그림도(Melancholy, Atomic, Uranic idyll,1945) 그렸다.
어쨌든 살바도르 달리가 프로이트를 만나고 그린 그림은 낙서에 가깝게 흐트러져 있다. 내심 인간 무의식과 초현실주의의 역사적인 만남을 기대?하고 갔을 지도 모를 달리가, 예상밖의 홀대에 상심한 마음을 이 스케치에 드러낸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다.
4. 빌헬름 라이히(1897~1957):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로, 나중에는 '성(性) 과학자'로 분류 된다. 그는 한 마디로 별종의 인간이었다.
빈 대학에서 프로이트에게 직접 사사했는데, '리비도 에너지'에 집중한 나머지 곁길로 흘러갔다. 학생시절 '오르가즘의 기능'이란 논문을 제출했다가 프로이트 교수에게서 큰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1928년부터 33년까지 '성-정치(Sex-Pol) 운동'이라는 걸 펼치다가, 소속해 있던 공산당으로부터도 퇴출당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인간의 性的 에너지(쉬운 말로 '정력')에 대해 꾸준한 연구를 계속했으며, 2차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1939).
그는 인간의 성적 에너지에 대해 '오르곤 에너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을 생명의 원소에 해당하는 기본 에너지로 보았으며, 이 에너지를 따로 모으거나 강화하고 축전지 같은 장치에 저장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강화 저장장치'를 스스로 고안하여 발명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동료 학자나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환자들을 이 장치에 넣어 실험하다가 의료법인지 사기방지법인지 등의 위반으로 수차례나 소송 당하고 실형을 살기도 했다.
결국 나중에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는데, 끝내 '제 정신'을 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세칭 '프로이트 좌파' 중에서도 극단적인 변종으로 불린다.
흥미롭게도 그의 '오르곤 에너지' 아이디어는 헐리우드의 대표적 코미디 영화에서 차용된 것으로 보인다.
제이 로치 감독이 007영화의 뼈대를 패러디 하여 만든 '오스틴 파워'라는 영화의 제목은 명백히 '오르곤 파워'의 변용이다. 주인공 오스틴 파워(마이크 마이어스)는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 닥터 이블에게 그 파워('파워 제로' '파워 O' 또는 '오조' 등이 같은 개념이다)를 빼앗겨 남자구실을 못하게 된다는 설정도 있다.
5. 마리 보나파르트 (1882-196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의 가장 반항적인 동생이었던 무시냐노의 아들 피에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손녀인 마리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제국 왕조의 일원이 아니었음에도, 그 혈통 때문에 왕녀(princess)로 불린다.
외할아버지인 몬테카를로의 부동산 재벌 프랑스아 블랑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아 귀족이면서 부호가 되었고, 2차대전 중에는 나치나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탄압받는 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정치적, 재정적으로 돕고 후견하였다.
S. 프로이트의 런던 망명에도 마리 공주의 후원은 큰 역할을 했다. 비엔나에서 프로이트의 재산이 지켜지도록 막후에서 지원했고, 모든 재산을 나치에 차압당한 프로이트가 런던에 가는 데 필요한 비용과 정착때까지 소요되는 자금들을 지원했다. 그 자신이 '성기능 장애'와 관련하여 연구하는 동안 프로이트 제자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것이 프로이트를 직접 지원하게 되는 인연의 계기가 되었다.
1938년에는 유대인들의 처지를 동정하여 미국의 바하 캘리포니아를 구입하여 새로운 유대인 국가(또는 자치주)를 세우도록 제안하였으나 프로이트는 이것을 새로운 '식민지 건설계획'으로 생각해 거절하였다. 당시 마리 보나파르트는 비용의 상당부분을 스스로 기부할 의향을 가지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등에게 직접 동의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바하 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샌디에고 바로 아래 있는 길쭉한 반도 지역의 북쪽 지역으로, 당시에는 스페인-멕시코령 자유주권국가였다(1952년에 멕시코의 한 주로 편입됨). 만일 당시 유력한 유대인들이 건국을 결심하였다면 이스라엘이 북아메리카의 네번째 독립국으로 시작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20세기 내내 골치 아팠던 '중동전쟁'도 없지 않았을까.
(6). 자끄 라깡 (1901-1981)
20세기 후반 인문학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 중 한 사람이던 프랑스 정신분석가 자끄 라캉(1901~1981)의 프로이트 해석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라캉은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한 정신과 전문의로 당시 파리의 아방가르드와 초현실주의에 깊이 공감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의 선두주자인 파블로 피카소와도 주치의를 맡을 만큼 가까이 지냈다. 정신분석가로서 초현실주의의 여러 특징들을 살피기도 했다. 프로이트와 직접 관계를 갖지는 않았으나 1932년 빈의 프로이트에게 자기 논문의 사본을 보낼 정도로 존경심을 가지고 프로이트 이론을 계승하였다.
물론 자끄 라캉의 철학 세계는 거대하기 때문에 다 아울러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정신분석학의 범주에 관련된, 즉 프로이트와 연관된 한 부분만 살펴보자.
라캉은 ‘자신의 시간에 살아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명제로 시작하여 인간이 완벽하고 온전하고 전능한 것에 대한 강박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인간이 초자아적인 요구들에 의해 억압된 욕망을 언급한 것에 대한 응답이다.
사람은 대개 어려서부터 최초의 양육자로부터 ‘너는 잘할 수 있어’ ‘너는 잘 될 거야’ ‘무엇이든 바라는 것을 해봐’와 같이 격려를 받으며 자라난다. ‘전능성’에 대한 환상이 주입되는 것이다. 부모는 내가 필요한 것을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는 존재라는 환상도 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그 믿음은 깨어진다. 어머니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깨닫고, 아버지가 가장 힘센 사람이 아니라는 진실도 깨닫게 된다. ‘불편한 진실’을 깨달을 때마다 어린아이는 정신적으로 성숙되며 그 결핍을 스스로 보완할 방법을 찾고 스스로 능력을 기르는 것이 정상적인 성장의 과정이다. 이 과정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전능성’의 환상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왜곡된 거짓 신념으로 호도될 때, 자아는 빗나간 성장을 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원리를 라깡은 제대로 살을 입혀 나갔다.
정상적인 자아로 성장하여 독립성을 갖추는 과정을 라깡은 ‘젖떼기(離乳)’에 비유했다.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어느 날 젖을 그만 먹어야 할 때가 될 때 이것은 양육자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지만, 정상적인 경우라면 젖떼기는 그리 힘든 과정이 아니다. 이유식으로 시작해서 어른들의 음식을 자연스럽게 먹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의 젖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때로, 마치 대여섯 살이 되어서도 젖을 포기하지 않거나 어른들의 등에 업혀 다니기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다. 같은 원리로 종교에 대한 태도나 정치권력을 대하는 태도, 어떤 이념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다 같이 미성숙한 태도가 문제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라깡은 현대에도 ‘젖을 떼지 못한 어른들이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성장을 거부하는 현대인, 미숙함에 안주하려는 종교, 그러한 미숙함을 이용하는 정치,
이것은 필요할 때마다 군중 속에 거짓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손쉽게 ‘단순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조합이 된다. 종교나 정치는 이용하고 대중은 이용당한다. 그 전형적인 사건이 바로 프로이트 당대에 벌어진 나치즘의 광기였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로 침공해 들어왔을 때, 프로이트는 나치 돌격대와 나치 정부의 공식적 비공식적 공격과 협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78년 동안 살았던 고향 빈을 등지고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인들이 그를 열렬히 응원했고, 영국은 그에게 명예로운 학자의 예우를 다하면서 만년의 평온을 지켜주려고 애썼다. 이듬해 9월23일 독일군의 공습에 대비하느라 분주한 런던 도심의 메어스필드가든 자택에서 구강암의 통증으로 기운이 다한 프로이트는 딸과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모르핀 주사에 의존하여(*조력자살: 프로이트가 자신의 주치의에게 편안한 임종을 위한 도움을 부탁했다)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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