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신. 자는 자경(子慶), 호는 용계(龍溪). 사건(思建)의
아들. 손처눌(孫處訥)의 문인. 1620년(광해군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33년(인조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에 급제, 서학 교수(西學敎授)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김상헌(金尙憲)등과 함께
주전파(主戰派)로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강력히
반대했으며, 뒤에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거쳐 여러 지방관을 지내고 1656년(효종 7) 천안 군수(天安郡守)가 되었다. 당시 인평대군(麟平大君)이 베푼 연석회(宴席會)에서 승지(承旨) 유도삼(柳道三)이 취중에 대군에게
신(臣)이라 칭한 것을 듣고 왕실에 모반하려는 기미가 보인다고 과장하여
고변(告變)했다가 효종의 진노를 사서
장살(杖殺)되었다. 1680년(숙종 6) 신원(伸寃)되고,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대구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제향(祭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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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오(徐丙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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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철종13)~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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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가(書畵家). 호는
석재(石齋). 대구(大邱) 출신. 벼슬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글씨는 행서(行書)를 잘 썼으며, 그림은 매화(梅花)·죽(竹)·국화(菊花)·송(松) 등 4군자(四君子)에 탁월하였다. 시·글씨·그림·가야금·장기·바둑·의약(醫藥)에도 능통해서 팔능(八能)이라고
불리었으며 일찌기 중국과 일본에 갔을 때 그 곳의 명사들과 문묵(文墨)의 교유가
있었다. 대구에서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를 창설하여 후진 지도에 공이 컸고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서도부(書道部)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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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원(徐恩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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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명종 5)~1615년(광해군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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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학자.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낙재(樂齋), 전교(典校) 흡(洽)의 아들, 백부 형(●)에게 입양(入養).
이천(利川)출신. 정구(鄭逑)의
문인. 주자학(朱子學)
및 이황(李滉)의
문집(文集)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에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 때 학랭(學行)으로 감역(監役)·찰방(察訪)을 지내고, 1595년(선조28) 청안 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598년에 사임했다. 후에 개령(開寧)·옥과(玉果)·연기(燕岐)의 현감, 형조 정랑(刑曹正郞)·호조 정랑(戶曹正郞)·역학
교정(易學校正)등에 임명되엇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淸安)의
귀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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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徐相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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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고종24)~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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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정치가·호는 동암(東菴).
대구(大邱)출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09년(융희 3)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윤병호(尹炳浩) 등과
항일 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해방 후에는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 총무에 선임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 책임제(內閣責任制) 개헌안을 발기, 최초의 개헌안을
제기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신병으로 활동을 못하다가 서울에서
병사했다. 그 동안 한때 사회민주주의 정당활동을 벌여
진보당(進步黨)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등에 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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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영(徐 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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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는 노남(櫓南),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고려 때 문하시중 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를 역임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문장훈업(文章勳業)으로서 세상에 명망(名望)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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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응시(徐應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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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군망(君望), 호(號)는 창계(昌溪),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조선 때 조헌(趙憲)의 제자(弟子)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조헌(趙憲)을 따라 분전(奮戰), 7백
의사(義士)와 함께 금산(錦山) 싸움에서 순절(殉節)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 창원(昌原)의 숭절사(崇節祠)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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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충(徐仁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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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의병장(義兵將). 달성군(達城君) 영구(潁九)의 9세손. 1591년(선조24)
무과(武科)에 급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주사장(舟師將)이 되어
연전연승(連戰連勝)으로 수전·육전에서 많은 적을
살해했다. 어사(御吏)·원수(元帥) 등이 조정에 보고하여 그
공이 표창되고 부산진 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이르렀다. 1784년(정조 8)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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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승(徐在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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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고종13)~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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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성서(聖瑞), 호는
죽림(竹林), 목열(穆烈)의 아들이다. 유학(儒學)에 전념, 시(詩)와
예(藝)에 밝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말에 통사랑(通仕郞)으로
탁지부주사(度友部主事)가 되었는데
을사조약(乙巳修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15년 여름에 군자금을 조달키 위해 고향에
내려가 암약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헌병과 격투끝에 적의 흉탄에 쓰러졌다.
그후 사람들이 그의 충성심을 기려 충의(忠義)라 사시(私諡)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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