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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시적이냐, 산문적이냐 (간지)
『월간문학』
독백 언어의 한계를 넘어
문득, ‘시를 배우지 않고는 말할 게 없다(不學詩 無以言)’는 공자의 말씀(『논어』 계씨편)이 떠오른다. 이는 단순하게 시(詩)와 언(言)의 관계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시를 배우는 것은 곧 말을 배운다는 지극히 간다한 논리가 성립한다. 시는 말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저, 시란 무엇인가. 이 낡은 질문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언어가 포괄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의 탐색 없이 일상적인 담론 같은 시들을 많이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법이나 시학에서 요구하는 이미지와 상징, 비유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넋두리만 늘어놓은 작품을 종종 볼 수 있기에 말이다. 시는 그 효용이나 위의(威儀)에서도 보편성 이상의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시는 진리이며 단순성이지만, 그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짜여 져야 한다는 누구의 말처럼 그냥 풀어헤쳐 놓은 언어가 아니다.
이제 고전이 되었지만, 공자가 시 300편을 두고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고 요약한 것을 보면 시의 효용은 인간적 감화력을 강조하고 있어서 이미 휴머니즘에 상응하는 존재의 이유를 자문(自問)하는 주제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대체로 정리를 해보면 자아를 인식하는 일, 인식된 자아에서 존재를 성찰하는 일, 현실과 성찰과의 사이에서 마찰하는 갈등과 고뇌를 해소하는 일, 그리하여 가치관을 다시 설정하기 위한 해법을 찾는 일 등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성이 정갈한 언어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형이상시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사물과 관념, 시간과 공간의 화해를 의미한다. 문예비평가 그리이슨의 「형이상 시인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형이상시란 완전한 의미에서 단테의『신곡』이라든가, 쿠크레티우스의『만상의 본질에 대하여』라든가, 괴테의『파우스트』와 같이 우주에 관, 또는 삶이라는 위대한 드라마로서 인간 정신을 나타내는 기능에 관한 철학적 개념에서 영감을 얻어 창조된 시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현대시의 위상은 어떠할까. 유종호 교수는 그의 저서 『시란 무엇인가』에서 ‘시인이 많고 좋은 시도 많이 나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시가 많다는 것은 시 앞에서 두려움과 외경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의 반영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전통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서 시 전통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적 어조로 시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하듯이 지난호 『월간문학』‘시 47인 특선’에서도 ‘두려움과 외경을 느끼지 못’하고 발표된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우리 시의 전통이나 독자들에게 기여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말하자면 독백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고나 사유를 지양하고 표현과 묘사가 속되지 않으면서 깊이와 멋이 있는 작품 몇 편은 읽을 수 있다. 이는 주관적인 시 정신을 그 내용에 투영하면서 체험과 감성 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우체국은 산속에 있다 / 이 가을에 나는 남루한 한 통의 편지 / 산길 초입 그리고 저물녘에서 / 느릿느릿 우체국을 찾아간다 / 블랙홀처럼 어둠은 황홀하다 / 문득 아찔한 절벽 위에 몸을 가눌 때 /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고 / 으깨어지면서 물은 / 맑고 깊어지는 흩날리는 꽃잎이다 / 바람은 또 이렇게 깊은 산에 들어야 / 솔내음을 풀어낼 수 있는 것 / 이 가을에 / 우체국 소인이 찍히지 않은 사람은 / 아무도 없다
--나호열의 「느리게」전문
가슴에 얼레무늬 새겨, 시간의 연 날린다 // 비 내리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 받고, 눈 내리면 눈 밟는다. 아니다. 고비마다 엉긴 속내 풀어헤쳐 탑돌이 문신(文身) 새긴다 // 내 사랑은 곤두박이치는 벌이줄무늬다.
--차윤옥의 「나이테」전문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시적 정황이나 구도에서 낯선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낯설어 보이지 않는 정감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나호열은 ‘이 가을’과 ‘저물녘’이라는 시간성과 ‘우체국은 산속에 있다’는 공간의 조화에서 ‘나는 남루한 한 통의 편지’로 분화하는 묘미를 이해하게 되고 결론으로 가을이 되면 ‘소인이 찍히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계절적 감응에서 추출한 이미지의 일단으로써 인간(혹은 인생)의 내면에 잠재한 존재의식이 시간과 화해하면서 떠나보내는(또는 어쩔 수 없이 밀려나는) 아쉬움이 투영되고 있다.
차윤옥의 시간적 분화도 동질의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나이테’는 시간의 상징이다. ‘비 맞고’, ‘바람 받고’, ‘눈 밟는’ 정황이 곧 풍상(風霜)의 시간이며 ‘나이테’이다. 이러한 인고의 시간이 ‘고비마다 엉긴 속내 풀어헤쳐 탑돌이 문신’을 새기는 것은 바로 자아 인식의 원형으로써 시적인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이처럼 시적 소재나 주제에 충만할 수 있는 작품들은 이미지와 연결되는 언어의 마력에서 찾아야 한다. 독백적인 요소가 배제되었다는 것은 시의 위의뿐만 아니라, 시인의 진실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며 독자의 공감영역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 섬이 「그리움이 번진다」에서 ‘소쩍새가 운다 / 저문 밤이면 어김없이 / 베란다 겹창문 틈새에 울음을 풀어 놓는다 / 소쩍새 울음 속에는 압축과 은유가 있다’라거나 방지원이「모자에 관하여」에서 ‘할인매장에서 할인할 수 없는 목숨을 산다’ 그리고 한선향이「휠체어 소녀」에서 ‘그 문을 열면 / 슬픈 눈동자 창문에서 / 하얀 얼굴의 소녀가 머문다’는 ‘압축과 은유’의 절묘한 언술들이 보편적 사유를 지양하는 그들의 존재에 관한 진실이다.
여기에서 신석정 시인은 말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해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결실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더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 . 갈망하는 데서 창작된다면 그 시인의 분신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독백 언어의 한계를 넘어가야 하는 교훈으로 새길 것이다. (월간문학 1908. 12.)
자성의 언어 혹은 인식의 미학
일찍이 괴테는 『잠언과 성찰』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도 오류를 인식하는 편이 훨씬 용이하다고 했다. 오류는 표면에 나타나 있으므로 쉽게 정리할 수 있지만, 진리는 깊은 곳에 숨겨져 있으므로 그것을 탐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언지이다. 우리 인간들이 한 생애를 통해서 성찰하는 과정에서 이미 표면화한 오류에 접근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런 오류들이 현실과 적응할 수 없는 갈등이 상존하게 된다. 이것은 생에 관한 진실의 탐구보다는 갈등의 화해를 구가하려는 인도주의적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인간의 진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물론 선험적인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중시하겠지만, 이는 단순한 심리적 변환에서 성취되는 것은 아닐터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치관의 정립은 보다 지적인 혜안과 형이상적인 정서의 중심축에서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고도의 정신세계와 합일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인식(erkenntnis)이란 이러한 지각과 경험에 바탕해 있으면서도 이 양자를 초월하는 사고방식이다. 한 가지의 감각적 파악으로 보편적인 의미와 일치시키는 것과 또 하나는 보다 더 보편적 성격을 띤 특징들을 통해 의미를 규정하는 특성을 가지게 된다. 현대 시인들은 이와 같은 인식의 근저에서 현현하는 자성의 언어를 탐색하거나 인식의 범주를 확대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철학쪽에서 보면 플라톤의 직관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그 속에 / 잠겼던 것이 / 긴 세월을 이고 일어섰다 / 그 속엔 / 숨었던 시간이 / 수줍게 일어섰다 // 태초(太初)에 있었던 것처럼 / 전혀 없었던 것 같은 / 그가 / 긴 시공(時空) 세월이란 / 명찰을 달고 / 그 빛 밝히려 일어섰다 // 내 속에 있던 그림자 / 그 속에 있던 빛 / 또다른 그와 내가 / 아련한 그와 내가 / 아련한 시간 건너 서 있었다 // 그는 그의 / 나는 나의 / 아득한 세월을 / 조용히 실눈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 바람도 없는 날.
--秋恩姬의 「그-그리움에게」전문
우선 ‘그 속’이라는 미지의 공간에서 유추하는 시간성과의 대위적 개념의 조화를 이해하게 된다. ‘그 속에 / 잠겼’거나 ‘숨었던’ ‘긴 세월’과 ‘시간’이나 ‘태초’와 ‘시공’에서 발현하는 ‘그 빛’과의 연결은 ‘그는 그의 / 나는 나’에 대한 고차원적 주제인 ‘그리움’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인식론에서 말하는 인식하는 자(인식주관)와 인식대상(객관) 그리고 인식내용의 3원적 상관성을 절묘하게 합일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내 속에 있던 그림자’와 ‘그 속에 있던 빛’으로 승화함으로써 시적효용을 극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의(인생의) 재발견에서 수용하는 연민의 양상이며 성찰의 언어라는 점을 간과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한 개인의 ‘그리움’이라고 단정하더라도 인식 미학의 측면에서 사유한다면 시인의 지적혜안으로 직관하거나 유추된 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마루 밑에 숨어 사는 어둠과 침묵은 곧잘 헌 고무신짝 속에 들어가 밀담을 나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안마당과 뒤꼍을 오가며 산책을 즐긴다. 저것들도 나만큼이나 늙었다. 왜 집을 떠나지 못할까. 어디 그거나 달려 있는지 거기 한 번 만져 보시게.
-- 金明培의「은거」전문
너는 푸른 여백이다 / 무슨 간절함이 있어 텅 비어 있는가 // 세상에는 아직도 / 며칠째 안개비 내리고 // 바람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황급히 가는가 / 말해다오 //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 / 끝내 / 저 섬의 몸에 닿지 못한다.
-- 김성춘의「섬-아, 구차한 나날이다. 오늘이여 . 장석남」전문
김명배의 ‘은거’는 ‘어둠과 침묵’의 ‘밀담’으로 시작한다. 과히 형이상적인 인식이다. 이 ‘은거’라는 의미에서 이미 우리들은 주제의 향방을 예측할 수 있겠으나 그는 ‘나만큼 늙었었다’는 단정으로 ‘어둠과 침묵’ 그리고 ‘은거’의 내밀한 상보성을 적시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하고 재인식하는 여과장치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성춘은 ‘푸른 여백’과 ‘텅 비어 있’음을 ‘섬’이라는 어느 공간을 설정하여 거기에 ‘닿지 못’하는 갈등의 요소가 표출되고 있다. 이는 그가 ‘우리들’이라는 공감의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인식의 세계를 존재의 본질로 접근하려는 시적사유의 발현이다.
이처럼 자아를 재발견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갈등과의 화해요소를 짐작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단계가 시적이냐 산문적이냐 하는 것은 일상인의 사유와 시인의 지적사유와 판이하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시 창작상의 각별한 필연이기도 하지만, 시인들의 시 정신의 원천이 되는 인식의 상황(사물이든, 관념이든)이 근원적으로 감성(感性)과 오성(悟性), 이성(理性) 등의 심리적인 체계가 정립된 인식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순길이 ‘배는 뜨기 위해 / 제 속을 다 파낸다’는「준비」나 임기원이 ‘길 위에 서면 / 또 하나 건너야 할 강이 있다’는 「허공」, 김성수가 ‘산이 산을 낳아 / 호숫물에 휑구고 있다’는 「처신」, 고정애의 ‘이 새벽 어둠 속 남몰래 엎드려 / 부시로 부싯돌을 세차게 치고 있는 / 실루엣’이라는 「불덩어리 열매」그리고 권선옥이 ‘내일이면 내 몸은 또 / 어제처럼 무거워질 것이다 /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 세상의 것들은 모두 독이 스미어 있다’는「독(毒)은 무겁다」등의 작품에서 고차원적 자성의 언어와 인식의 미학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배두순의 「달의 자식」에서는 요즘 성행하는 하나의 스토리를 전개하여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주제를 창출하려는 시법을 접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표현기법의 변화는 이제 실험단계를 지나 많은 시인들이 작품에 적응시키는 새로운 경향으로 안착하고 있다. 강준형의「나의 빈 무덤」과 곽현숙의「옥수수」그리고 김건일의「밭 만들기 . 1」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시는 현실 이상의 현실과 운명 이상의 운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아 성찰의 언어가 필요하며 존재를 인식하는 지적 상상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인들의 고뇌를 이해하게 된다.(월간문학 2008. 11.)
[계절문학]
자문(自問)의 시학, 현답(賢答)의 해법
현대시의 표현기법을 살펴보면 대체로 일반 문장법에서 볼 수 있는 평서문(平敍文)으로서 사물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마침표를 찍는 서술형 종결어미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종(大宗)을 이룬다. 가령 이민영의 「꽃씨」에서 ‘꽃씨를 땅에 놓고 / 기도처럼 흙으로 묻었습니다’와 또는 함홍근의 「농번기」에서 ‘일터를 잡고 / 보람으로 일으켜 간다’는 등과 같이 ‘습니다’와 ‘간다’로 종결하는 문장법이다.
우리의 문장법에는 이외에도 김성덕의 「이별 연습」에서 ‘허무의 곳간에 그리 많은 욕심 / 쟁여두지 마세’ 또는 한수종의「붉은 치마」에서‘붓끝에서 넘치는 부정(父情), 부정(夫情) / 학문에 힘쓰고 효도하라’처럼 명령형 종결어미인 명령문이 있는가하면, 감탄형 종결어미로 끝나면서 느낌표를 붙이는 감탄문도 잘 활용하면 좋은 시 문장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여기 『계절문학』 여름호(통권 15호)에서 심도(深度)있게 살펴본 문장은 주제에 대한 의문적 서술인 의문형 종결어미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문장뿐만 아니라, 시인들이 스스로 소재와 주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명징한 해법을 다양하게 찾으려는 시법(詩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타다 남은 불씨가 숨쉰다 / 침묵의 영혼들이 깨어나 / 검은 빛을 따라 / 저 넓은 광장을 응시하는데 / 그대는 누구를 만나려 왔는가
--이만근의「잿더미 속에서」중에서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 /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련다 / 이제 황혼이 나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데 / 이름 석 자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 나는 어디를 향해 / 더 가야 하는 걸까
--최정자의「묻지마라 내 갈 길을」중에서
몇 굽이를 돌아서야 / 세월의 굽이를 알고 / 몇 십 폭을 떨어져서야 / 인생의 깊이를 알까 / 계곡 고인 쪽빛 옥수가 / 시퍼렇게 멍든 상처였다는 / 고행(苦行)의 화두(話頭)를 깨달을 때 / 인생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장순휘의「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중에서
여기에 인용한 작품들은 모두가 의미심장한 주제를 탐색하고 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과 ‘인생의 깊이를 알까’ 또는 ‘인생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라는 등의 어조가 적시하듯이 우리들의 관념에서 깊게 흐르고 있는 ‘인생’에 관한 문제들을 ‘더 가야하는 걸까’라는 등의 의문형으로 시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상황의 설정은 시인들이 불확실성 혹은 미확인의 진실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제기하여 해법에 근접하는 담론으로 구성하는 그 시인의 테크닉이지만, 그 뒤에서 표면화하지 않은 그들의 심오한 철학이나 사상들은 상당한 설득력을 함구(緘口)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인생의 문제를 시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일반 담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적 단장」이란 글에서 ‘인간에게 영원한 것, 중요한 것은 불투명한 베일에 싸여 있다. 베일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베일에 대낮의 불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바와 같이 인생에 관한 ‘고행의 화두’를 위해서 미지의 불투명을 탐지하고 있다.
정일남도 그의「생(生)」이라는 작품에서 ‘여태까지 숨쉬고 살지만 내가 언제 / 숨쉬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라고 자문을 하고 있으나 ‘자책 없는 생은 민들레 홀씨만도 못하다’ 거나 ‘나는 울음의 귀재인 귀뚜라미만도 못했다’는 자조(自嘲)의 해법으로 자신과의 의미있는 메시지로 대화를 즐기고 있다.
해가 곤두박질하기 전에 / 얼크러진 매듭 / 저만치에 밀어 놓은 채 / 고운 실타래 / 그대 목에 걸어 드릴까
--김하은의「매듭」중에서
김하은 역시 ‘그대 목에 걸어 드릴까’라는 예측과 예상이 불가능한 현실적인 고뇌를 자문으로 적시하고 있으나 이러한 의문의 근저(根底)에는 그가 탐색하는 ‘생’이나 인생의 문제에서 적절한 해법을 발견하지 못한 고뇌와 갈등의 요소가 산재해 있다는 그의 내면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대체로 다른 작품에서는 이러한 자문의 설정이 없고 의혹과 문제점을 바로 자신의 견해로 답하는 경향도 엿볼 수 있다. 최원규는 작품「황사 속에서」에서 먼저 ‘저승의 날씨는 오늘 같을까’라고 전제하고 ‘짙은 안개 속에 서서히 침몰해가는 남루한 함정의 비운인가 시간을 잃어버린 흔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라 거나 ‘주체할 수 없는 인연의 사연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혹은 ‘난폭한 바람은 나를 볼 수 없고 설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때문이다.’라는 어휘로 결론을 적시하여 현답의 해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납작한 호박씨 한 개가 / 맨발로 흙을 밟고 자란 / 야성의 근성 때문이다 // 칠팔월 폭양 아래서도 / 할 일 다 마치려고 /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 / 필사의 정신 때문이다 // 그러니 늦가을 서리 내리면 / 생사지경 오간 마른 줄기에 / 엉덩짝만한 저게 열릴 수밖에 / 속에서 씨가 여물 수밖에.
--권달웅의「호박」전문
이 작품에서도 ‘때문이다’라는 종결어미로 앞의 시적 구도에 대한 해답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호박씨’가 자라는 ‘야성의 근성’과 ‘필사의 정신’이 곧 우리 인생에서 빚어지는 갈등이 화해하는 ‘열릴 수밖에’ 혹은 ‘여물 수밖에’라는 화자의 해법을 이해하게 된다.
박성철도 작품 「꽃의 전설」에서 ‘꽃들은 / 사람들이 꿈꾸기만 하고 / 잠 못 깨서 그렇지 / 세상이 천국이고 극락이라고 미소를 뿌린다 / 온갖 향기의 꽃이 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꽃의 이유를 역시 ‘때문이다’는 어휘를 종결하여 그가 지향하려는 ‘꽃 필 때 기쁨, 꽃 질 때 슬픔은 / 새 생명의 우렁찬 울음소리만 하리’라는 존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송진현도 ‘새로 지어도 새옷이랄 수 없는 / 오래 입어도 헌옷이라 수도 없는 / 통일대한민국이란 평상복 / 어거 어서 내놔내놔 / 노래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작품「평상복이 좋다」에서 그 의미를 밝히고 있어서 그가 사회성 짙은 내용의 일단으로 ‘행사장 출입 때나 입을 뿐’이거나 ‘재활용 수집함에 넣고 싶을 뿐’이라는 단정의 해법을 정리하고 있다.
옛길은 늘 집 밖에 있어 / 우산도 없이 / 가로등 아래 들꽃 사이로 낙엽을 깔고 / 내 발끝을 바라보고 있어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 고개를 들면 / 하늘 끝자락 붙들고 / 내 안을 걷고 있어.
--권혁수의「옛길」전문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라는 자문의 형식을 빌어서 과거의 시간성에서 생성하는 ‘옛길’이 권혁수의 상상력을 통해서 ‘내 안을 걷고 있어.’라고 함축적인 결론을 유로(流露)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전홍구가 ‘내가 몰래 먹는 까닭을 당신이 안다면-중략-왜 먹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거야.(「나중에」중에서)’라거나 김규봉이 ‘내가 / 바람 되어 찾아가면 / 소담한 가슴 / 열어 보여 주려나.(「붓꽃」중에서)’와 같이 예비적인 의문과 해답을 동시에 현현하고 있음도 특이하다.
한편 김기진은 작품「취해보니 알겠다」에서 ‘망각의 대가로 비워버린 주머니 채울 길 막막하듯 /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 허송한 세월들 돌이킬 길 막막하다는 것을’이라고 삶에 대한 몇 가지 제언을 ‘삶도 그로하지 않을까’라고 자문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지향적인 사유에서 추출한 해법을 ‘.....는 것을’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최현희는 「가을에 피는 꽃」에서 ‘그윽한 가을꽃들의 향연이 끝나면 / 다시 내년을 기다리며 침묵하였지 / 아쉬움도 그리움도 이겨 내리라.’는 단호한 어법으로, 금동건은「그렇게 살다가 갈 것을」에서 ‘삶은 그리 만만치 않은 사실 / 계절이 바뀌는 것도 비가 내리는 것도 눈이 내리는 것도 / 태어난 삶도 힘들고 무겁다는 증거가 아니던가’라는 어조로 ‘삶이 힘들어 자살한 친구를 보내면서’ 그의 감성이 실재(實在)에 대한 실증적인 시적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는 대문호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말한 것처럼 삶의 의문에 대한 탐구는 마치 깊은 숲속에서 길 잃은 사람이 경험한 것과 똑 같은 경험이라는 것과 같이 시속에 투영되는 자문의 시법은 인생에 관해서 새로운 해법을 탐색하는 근원으로 정립하는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대할 수 있었다. (『계절문학』 2011. 9. 제16호)
문예사조 시 월평 1
세모에 접하는 시간성의 이미지
‘2019. 근하신년’. 다사다난했던 무술년(戊戌年)을 떠나보내고 기해년(己亥年) 새해를 맞이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하장을 문구점에서 사서 보내거나 붓으로 직접 쓰고 낙관을 찍어서 맛깔나게 새해의 축하 인사를 했지만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이메일에 몇 자 적어 송신하는 문명이기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나 멋스런 향취가 없다.
우리는 해가 바뀌면 어김없이 새롭고 진취적인 일년지계(一年之計)를 구상한다. 과연 우리 시인들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우선 좋은 시 한 편 창작하는 꿈을 꾸게 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유(思惟)의 현장으로 활발하게 정중동(靜中動)의 세상을 넘나들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시의 창작을 위한 고뇌가 시인 자신에게 어떠한 충족의 기회를 제공하느냐 즉 시의 효용의 범주(範疇)를 생각하게 하는데 ‘나는 그냥 시가 좋아서’라는 우답(愚答)은 적절하지가 않다.
대체로 시는 일찍이 공자가 말씀하신대로 ‘시는 감흥을 일으키고 사물을 살필 수 있게 하고 불의를 나무랄 수 있게 하며-중략-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怨-多識於鳥獸草木之名=논어 계씨편)’는 사물 응시(凝視)에서 생성하는 감흥이 시가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찾아 오래도록 / 세상의 들판을 헤매었다 // 더러는 / 이방의 숲을 나는 새였고 / 더러는 / 머나먼 해변의 바람이었다 // 볼품없는 나의 내부로부터 / 쏟아낸 언어의 미아들에게 / 이제는 고해를 해야 할 때다 // 생애의 날것들을 익히며 / 깃든 새와 풀잎을 보듬으며 / 지는 꽃의 아름다운 눈물로 / 한 점이 된 격렬비열도쯤에서.
--강외숙의 「시에 관한 고백」 전문
이처럼 한편의 시를 위해서 강외숙은 ‘세상의 들판을 헤매’면서 다양한 사물들과 교감하고 있다. 숲과 새와 해변의 바람과 ‘지는 꽃의 아름다운 눈물’과의 상관성은 공자가 말씀하신 시의 효용과 흡사한 사유를 분사(噴射)하고 있어서 그가 시를 위한 처절한 고뇌를 감수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고백은 이러한 사물을 통해서 그의 내부로부터 ‘쏟아낸 언어의 미아들에게 / 이제는 고해를 해야 할 때’라는 어조로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성찰하는 시법(詩法)으로 문제의 해법을 탐색하고 있다. 그동안 그는 상당한 시력(詩歷)을 축적해오면서도 언제나 부닥치는 시적인 마력에 자신이 흡인하는 진실과의 화해를 위한 고뇌가 발현되고 있어서 이는 현실적인 시인들의 고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해에는 사회적으로(혹은 현실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성하였다. 우선 남북회담이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한 바 있으나 우리 국민들의 생각이나 반응은 어쩐일인지 시큰둥한 표정들이다. 이는 아마도 경제문제가 뒷전으로 밀려서 서민들의 의식주 걱정이 불안하다는 당면문제에서 기인된 것이 아닌가하는 아둔한 생각이 앞서는 것은 어인 일일까.
우리 문단에서도 크고 작은 많은 행사들이 있었다. 특히 12월에는 2018년을 마무리 하면서 연말행사가 줄줄이 열였는데 이 중에서도 각종 문학상시상식, 송년회, 사화집 출판기념회, 정기총회 등등이 시선을 끌었다. 여기 『문예사조』에서도 ‘제29회 문예사조문학상 및 사화집 출판기념회’가 전국의 문예사조문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각설하고 지난 12월호 『문예사조』에는 많은 시인들의 작품이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12월에 관한 시간성의 작풍(作風)을 다수 읽을 수 있어서 눈길을 흡인하고 있다. 대체로 시인들은 그가 착목(着目)하는 사물들에서 발상하거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 무형의 시간성에서 탐색하는 시법이 세모(歲暮)와 더불어 잘 어울리고 있다.
메마른 통증에 삐걱거리는 뼛소리 // 소리 없는 울음 / 다 채워주지 못한 냉가슴이다 // 어려운 시절 배곯지 않게 / 살점을 당신에게 떼다 먹이던 그들 / 지금도 변함 없는데 / 예전이 싫은 당신은 / 초라하게 남은 시간의 흔적을 발라내고 있다 // 초록물 빠진 나뭇잎처럼 / 쩍쩍 갈라지는 소리 / 아이고, 소리를 지팡이처럼 짚고 일어선다 // 수북한 상체기 굴곡진 몸으로 / 저 미안해만 하는 그들 / 부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 그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 12월이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이희국의 「12월」 전문
이희국은 떠나는 12월이 아쉽기만 한 회억(回憶)으로 가득 차있다. 그가 동원하는 시어(詩語)가 대체로 과거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생성한 체험의 분출로 혹은 삶의 궤적(軌跡)의 언어로 재생하는 그의 어조는 독자들의 공감을 유로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메마른 통증’이나 ‘소리 없는 울음’, ‘다 채워주지 못한 냉가슴’, ‘어려운 시절 배곯지 않게’ 그리고 ‘살점을 당신에게 떼다 먹이던 그들’이라는 시적인 상황도입이나 전개가 그의 뇌리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불망(不忘)의 언어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비조(鼻祖) C.P.보들레르는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좇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는 말로 시를 옹호하고 있다. 이희국도 ‘초라하게 남은 시간의 흔적’이 시적인 범주에서 자신의 내면에 잠재한 ‘기도’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함께 발표한 「승부역」에서도 ‘삶에 떠밀려온 막장’과 ‘막장 안의 시간은 더디고 / 거친 호흡의 곡갱이들은 캄캄한 어둠을 허물고 있었다’라는 어조로 시간성에서 분사하는 인간들의 노고를 투영하고 있다. 그러나 ‘막걸리 한 사발, 몇 개비의 담배로 / 검은 가슴을 풀어내던 사람들 /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는 지난 시간의 ‘시름’을 현현하고 있어서 무형의 시간(혹은 세월)과 인간의 현실이 교차하는 그의 지향점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가끔씩 입동에 이는 바람에 / 가랑잎 지는 흔적조차 지우고 / 사랑채 아버지의 밭은 기침소리와 / 언년이 부르는 할머니의 목쉰 소리는 / 입동의 문전에 이는 바람에 / 기억의 흔적마저 지운다 // 이제는 홀로 세월의 무게를 안고 / 어쩌다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며 / 정겹게 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 피안으로 향햐여 도피하는 / 이승에서 소멸 되는 / 또 하나의 흔적이어라.
--가경진의 「12월의 소회」 전문
가경진의 ‘12월’도 시간성과 동시에 생성한 ‘기억의 흔적’에 관한 이미지의 재생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창출은 그의 체험(혹은 궤적)에서 회상하는 가운데 그의 실생활(real life) 속의 사유와 상관하는 ‘세월의 무게’가 바로 ‘사랑채 아버지’ 또는 ‘언년이 부르는 할머니’로 전이하여 이제는 그가 결론으로 적시한 바와 같이 ‘피안으로 향햐여 도피하는 / 이승에서 소멸 되는 / 또 하나의 흔적’으로 흡인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의 이미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상황에서 창출하는 시창작의 모태가 되는 부분이다. 일찍이 ‘시간은 영혼의 생명이다’라고 까지 고차원으로 언급한 저 유명한 롱펠로 시인의 명언처럼 ‘세월=흔적’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는 세모의 언어로 흡인되고 있다.
한 해의 끝자락이다 / 길어진 밤처럼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 자르지 못하는 생각의 꼬리는 / 도마 위 비린 고등어 한 손이다 / 무딘 칼 한 자루 손에 들고 밤이 깊다 // 새벽녘 연탄불 갈기 위해 윗목 아버지 옷을 슬며시 걸치고 / 조용히 밖으로 나가던 어머니의 모습은 / 잠을 털고 일어나 소금에 절인 김장배추를 뒤집으러 나가던 / 뒷모습과 닮았다 / 연탄을 넉넉히 들여놓고 / 가을무를 땅 속에 묻어두고 그 위를 자근자근 밟아주던 어머니 // 오랫동안 한쪽으로 비껴서 있던 / 이부자리 끌어당기는 그 무는 바람이 들고 / 바람이 그리움처럼 창문 틈으로 들어온다.
--조경숙의 「무는 바람이 들고」 전문
조경숙의 시간은 어떠한가. ‘한 해의 끝자락’에 다시 챙겨보는 ‘그리움’의 재생이 고즈넉하게 현현되고 있다. 그는 새벽녘 연탄불을 갈기 위해 밖으로 나가던 어머니의 모습과 ‘가을무를 땅 속에 묻어두고 그 위를 자근자근 밟아주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통해서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다시 생성하는 그리움이 바람든 무와 세월을 상관하고 있다.
이처럼 이미지는 체험의 산물이며 체험을 성립시키는 존재나 대상에 의해서 떠올리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직접 외계의 자극에 의하지 않고 기억과 연상작용에 의해서 마음속에 생성하는 상(像)을 이미지라고 하는데 상상에는 우리의 의식의 주체가 되는 오욕(五慾)칠정(七情)에 의해서 발현된다.
시작이 언제였는가, 어느새 재현일까 / 보내고 맞이하는 시간이 가까워질 때가 / 다가오면서 모여드는 인파가 촘촘히 메워진다 // 이따금 이만큼 더 크게 더 높게 / 성당에서 오는 바람이 구름에 길어 나르며 /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들판을 달려 메아리쳐 간다 // 눈이 내리는 날에도 어김없이 들려주려고 / 그와의 만남이 언제였는가를 생각하며 / 온 세상 축복을 위한 제야의 기도 소리가 // 저 먼 동구 밖에서 타고 온 종소리와 함께 / 새벽 바람에 실려 들려오곤 했지 / 제야의 굴레는 바람에 실려 솟는 시점이 // 조각조각 온 세상을 샅샅이 누비면서 / 되돌아보는 순간에도 미지로 이어지는 / 사랑의 종소리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
--홍중완의 「제야의 종소리」 전문
홍중완의 시간은 ‘제야’이다. 이 제야는 한 해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그는 ‘보내고 맞이하는 시간’에서 탐색하는 것은 ‘온 세상 축복을 위한 제야의 기도 소리’를 ‘사랑의 종소리’로 전이시키고 있다. 이처럼 그는 청각적인 이미지를 시간과 화해하면서 투영하는 영하의 매서운 날씨를 훈훈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되돌아보는 순간’이라는 상황설정에서 실재(實在)의 상황보다는 순간적으로 요약된 회상의 심리적인 그림 즉 이미지가 작품의 동기로 되살아나는 그 기능을 언어의 감촉으로 심상(心象)의 세계를 발현하는 것이다.
그는 함께 발표한 「수다 삼매경」에서도 ‘지나온 시간들을 더듬거려 보고는 / 숱한 기억들을 돌아보곤 되묻고 / 여느 고요함도 말수가 많아져 간다’거나 ‘시간 속으로 창문의 색깔도 잊은 채 / 한나절 밤낮 사이로 올 한 해 계절은 / 수다 삼매경에 후다닥 저물어 간다’는 시간성 어조로 그의 세모 언어가 다양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상고대 서리꽃 필 무렵이면 / 오색빛 물든 단풍잎새도 / 한 잎 두 잎 바람에 흩날리고 / 내 나이 나이테도 / 한 바퀴, 두 바퀴 왕거미 집을 짓듯 / 늘어만 간다 // 깊게 패인 밭고랑 따라 / 귀밑머리도 갈대숲을 닮아 가는데 / 한세월 지나면서도 단풍잎 산수화의 뜻을 / 터득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 그 언제인가 / 하찮은 내 묘지 위에 잠시나마 머물다 갈 / 단풍든 잎새이기에 / 밟지 못하고 빗겨간다.
--향로 오윤근의 「단풍든 잎새」 전문
오윤근은 ‘단풍’이라는 소재에서 ‘내 나이’나 ‘내 묘지’ 등의 표현으로 시적인 화자 ‘내’를 대입하여 세월과의 상관성을 심도(深度)있게 추적하고 있다. 특히 ‘그 언제인가 / 하찮은 내 묘지 위에 잠시나마 머물다 갈 / 단풍든 잎새’라는 자신의 인지(認知)를 통한 성찰의 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더구나 ‘한세월 지나면서도 단풍잎 산수화의 뜻을 / 터득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자의식(自意識-self consciousness)은 그가 함축하는 시간의 의미를 충족시키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함께 발표한 「백년 손님」에서도 ‘인생이란 누구나 한 번 오고 갈 백년 손님 / 타고난 전생의 업보 따라 / 천태만상(千態萬象)을 겪고 / 천고만난(千苦萬難)을 두루 감수하며 / 망구(望九)에 이르기까지 삶을 영위하지 않았던가’라는 어조로 인생과 세월을 융합해서 의미심장한 인생론을 적시하고 있어서 우리들 공감을 유로하고 있다.
이처럼 작년 12월에는 시간과 교감하는 작품들을 다수 접할 수가 있었는데 대체로 과거의 행적에서 형상화한 이미지들이 대종을 이루었다. 이는 바로 시간성이 우리 인간에게 제공한 소중한 체험들이 불망의 언어로 현현되었다는 시적 정황들이 아늑한 정서로 작품이 창작되었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었다.
지난호에는 이 밖에도 원로 김종상 시인이 「머리를 숙이면」 외1편으로 ‘시로 쓴 역사 이야기’를, 오동춘 시인이 「이태리를 여행하며」 연작 4편을 ‘유럽 기행시’로 발표하여 시를 통한 교양과 교시적인 기능을 전달하고 있어서 시 읽기에 많은 도움을 제공하여 우리 모두를 훈훈한 2019년 새해로 인도하고 있었다.(문예사조 2019. 1.)
‘삶과 죽음의 경계선’ 그리고 인생론
2월이다. 지난 1월은 신춘문예의 애환이 서린 희비(喜悲)의 달이었다. 매년 1월 1일이 되면 신문 가판대에서 일간지를 모두 사와서 신춘문예 당선작을 스크랩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집에에 편히 앉아서 확인할 수도 있어서 그만큼 지난 세월과 더불어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편리함에 익숙해졌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중앙일간지를 비롯해서 각 지방지까지도 신춘문예 당선작을 발표하고 있어서 지금도 신춘문예의 열풍이 넘치고 있는 듯하다. 당시에는 일반 문학지보다는 신춘문예 당선이 최고의 인생목표로 설정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문학지망생도 많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신춘 당선작품들이 일반 서정성을 초월하여 언어의 활용과 표현기법이 1980년대까지의 잔잔한 구도가 보이지 않고 지적(知的)인 주제의 창출을 높이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너무나 낯선 이미지와 생소한 언어로 시를 난해(難解)하게 직조(織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인 일일까.
또 한편으로는 현대시가 정형적인 운율을 배제하고 산문화하고 있다는 특이성을 발견하게 된다. 시작법에는 산문시의 영역도 있다. 우리의 산문시는 대체로 근대 자유시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1919년 2월, 김동인, 전영택 등과 함께 만든 동인지 『창조(創造)』의 창간호에 발표된 주요한의 「불노리」를 말하고 있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西便)하늘에, 외로운 江물 위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西月)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주요한의 「불노리」 앞 부분인데 이 작품은 4월 초파일 대동강에서 벌어지는 불놀이를 보며 죽은 애인을 그리워하던 젊은이가 죽음의 유혹에 휩싸이다가 삶의 의지를 회복하는 이야기가 담겼다. 이는 신체시의 시발점으로 잡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다분히 계몽적이고 설교적인 데 반해 이 시는 서정적이며 대담한 표현을 쓰고 있어서 종래의 한국 시가(詩歌)의 율격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산문조의 긴 호흡을 시도했기 때문에 언뜻 산문형태로 보이지만 3음보의 자유시이다.
이 시의 표현상 특징은 구태의연한 정형성을 탈피하고 자유로운 시형을 선택하고 있으며 내부에 응축된 감정을 절제 없이 격렬하게 토로하여 산문적인 형식으로 표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당시의 주된 경향이었던 한문투를 쓰지 않고 순수한 우리 말을 쓰려고 노력한 점과 순수한 예술성을 추구하고 영탄법과 반복법, 상징법 등을 사용하여 창작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서정주의 「신부」, 조지훈의 「석문(石門)」, 정지용의 「슬픈 우상」, 정진규의 「뼈에 대하여」 그리고 필자의 「나와 너의 장법(章法)」 등에서 산문형태로 창작된 산문시를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 망할 것이다 //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 그런 예측은 쉽다 / 다영 씨가 웃는다 /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K신문 당선작 「너무 작은 숫자」 전문
별이 깃든 방, 연구진들이 놀라운 발견을 했어요 그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별 가운데 가장 크기가 작은 별을 발견했습니다 그 크기는 목성보다 작고 토성보다 약간 큰 정도로, 지구 열 개밖에 안 들어가는 크기라더군요 세상에 정말 작군요, 옥탑방에서 생각했어요 이런 작고 조밀한 별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말이죠 핵융합 반응 속도가 매우 낮아서 표면은 극히 어둡다고 합니다 이제야 그늘이 조금 이해되는군요 // 이 별의 천장은 매우 낮습니다 산소가 희박하죠 멀리서 보는 야경은 아름다울지 몰라요 어차피 낮에는 하늘도 추락하겠지만 그래도 먼지가 이만큼 모이니 질량에 대해 얘기할 수 있군요 그건 괜찮은 발견이에요 // 먼 곳에서 별에 대해 말하면 안 돼요 다 안다는 것처럼 중력을 연구하지는 말아야죠 피아노 두드리듯 논문을 쏟아내지 말아요 차라리 눈물에 대해 써보는 게 어때요 별의 부피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레를 더듬는 일이죠 옥상난간을 서성거리는 멀미처럼 말이에요 // 여기 옥탑에서는 중력이 약해서 몸의 상당부분이 기체로 존재해요 그래요 모든 별들은 항상 지상으로 언제 떨어질지 숨을 뻗고 있는 거죠
--S일보 당선작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전문
일찍이 산문시의 형태를 개척한 C.P. 보들레르는 ‘산문시란 율동과 압운이 없지만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와 같은 의식의 도약에 적합한 유연성과 융통성을 겸비한 하나의 기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산문시는 어쩐지 삭막한 감정이 앞서는 것은 어인 일일까.
요즘 신문사는 하나의 스토리를 적시(摘示)하는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의 기법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경우는 많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난해해지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러시의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가 주장하는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의 시법을 원용(援用)한 것인가. 독자들의 접근 자체가 매우 난감해해진다.
어떤 이는 생소화(生疎化) 내지는 모순어법(oxymoron)이라고 말하면서 작품을 합리화할지 모르지만 우리 시가 이처럼 광활한 이상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이밖에도 H일보, S신문 등 다수의 신문에서도 산문시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고 있어서 시의 언어 함축이나 절약에서 탐색하는 어조, 색조(色調) 등의 묘미가 자칫 왜소해질까 우려되기도 한다.
각설하고 지난호 『문예사조』에 발표된 작품들을 일별해보기로 한다.
무덥던 여름의 폭염이 점차 스러지고 / 가을이 무르익어 초겨울을 문턱으로 손짓하네 / 낮과 밤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듯 / 세월 따라 가 버린 청춘 / 되돌릴 수 없는 그 젊은 시절이여 /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이승의 고개는 아득하여 / 황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그 시절 / 모든 만물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 걸어온 길도, 걸어갈 길도 막막한데 /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가깝고 멀어 지나간 그 시절이 밀려오는 / 파도처럼 가슴 아프게 그리워지네.
--강순매의 「가 버린 청춘」 전문
강순매의 ‘세월 따라 가버린 청춘’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서 탐색하는 삶에서 회상을 통한 인식과 성찰이 조화를 이루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예비하는 인생론이 주제로 투영(投影)하는 일말의 생사(生死)의 시점(時點)을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인간 내면에서 분사(噴射)하는 삶의 고뇌가 성찰의 진지한 그리움으로 전이(轉移)하는 심리적인 현상을 목도(目睹)하게 된다.
일찍이 독일의 전기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노발리스는 ‘삶은 죽음으로의 출발이다. 삶은 죽음을 위해서 있다. 죽음은 종말이자 출발이며 분리인 동시에 한층 밀접한 자기 결합이다. 죽음에 의해서 환원은 완성된다.’라는 명언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박목월 시인도 그의 글 「행복한 얼굴」에서 ‘삶도 시와 같다. 왜 사느냐? 즐겁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 삶의 본질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삶의 속성을 어느 일면에서 풀이한 것이다.’라는 삶에 대한 명징(明澄)한 변명(辨明)을 하고 있어서 삶의 의미가 어떤 생의 소멸과의 소성을 깊게 성찰하게 한다.
세상만사 오만가지 뜻대로 된다면야 / 굳이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살아갈 필요가 있겠느냐 / 애당초 인생이란 하늘이 점지한 대로 살아야지 / 그 어찌 팔자소관(八字所關)을 뒤집을 수 있으랴 / 하루 세 끼 밥을 먹든 죽을 먹든 간에 / 잠자리 악몽이든 길몽이든 꿈을 끄긴 매한가지 / 잘난 사람 잘난 대로 못난 사람 못난 대로 / 서로가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게 세상 이치인 것을 / 삶이란 장기판 인생이라 한 치 앞을 모르기에 / 장땡을 잡아도 삼팔따라지를 잡아도 어느 한 순간 / 양수겸장(兩手兼將)에 패가망신 당하기 십상이니 / 미완성인 인생은 바둑판 소탐대실(小貪大失)을 교훈 산아 / 구(九)자보다 못한 팔(八)자 대로 두 다리 쭉 뻗고 / 잠자리 편안한 것이 곧 행복의 지름길이라 사료된다.
--오윤근의 「삶이란 장기판 인생」 전문
오윤근의 삶은 어떠한가. 그는 결론적으로 ‘삶이란 장기판 인생’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어떤 묘수(妙手)를 써서 이기느냐와 같은 하나의 단편적인 인생론이다. 그것은 그가 동원한 시어에서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듯이 ‘이전투구’니 ‘팔자소관’이니 ‘양수겸장’, ‘소탐대실’ 등의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삶이란 장기판 인생이라 한 치 앞을 모르기에’ 오늘도 ‘행복의 지름길’을 찾아나서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 유명한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 멀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가 떠오르는 것은 왠일일까.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얼굴 / 흙먼지 이는 바람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라고 / 온갖 서러움을 안으로안으로 삼키다가 벗겨내지 못한 / 삶의 때로 묵은 냄새만 난다 // 눈 속에 들어차는 모래처럼 아직도 그 묵은 속을 / 새까맣게 파먹고 있는 이 철 없는 자식을 / 겨우내 기다리며 참바람 끝자락에서 거죽만 남은 / 어머니의 저 마른 시울.
--김재훈의 「무시래기」 전문
김재훈은 사물 ‘무시래기’를 통해서 ‘삶의 때로 묵은 냄새’를 절실하게 감지하고 있다. 작중화자(作中話者)를 자식과 어머니를 설정하고 전개한 시법도 공감하지만 하찮은 ‘무시래기’의 일생이 적출하는 삶의 이미지가 더욱 의미를 충전시키고 있다.
그는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말라비틀어진 ‘무시래기’의 형상에서 ‘거죽만 남은 / 어머니의’ 늙은 모습을 대입하여 형상화하는 의식의 흐름은 아마도 인생이나 삶의 지향점에서 성찰하는 진정한 진실을 구현하려는 시혼(詩魂)을 엿보게 하고 있다.
빈틈 보이는 사람에겐 / 인간미가 흘러 / 상대방도 허물을 드러내고 / 보듬어 준다 // 빈틈 사이로 / 친근감이 배어나고 / 진솔함이 흘러 / 사람들이 마음을 연다 // 그런 빈틈의 매력이 / 삶을 여유롭게 한다.
--이정섭의 「빈틈의 신비로움」 전문
이정섭도 삶에 대한 매력과 여유를 일목요연하게 토로(吐露)하고 있다. 이러한 삶에서 보여주는 인간미가 바로 ‘상대방 허물’도 수긍하는 친근감으로 서로 교통하는 것이 그는 ‘빈틈의 신비로움’으로 간명(簡明)하게 주제를 정리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도 인생을 불안정한 항해라고 했는데 이것은 삶과 동행하는 행로에서 다변적인 상황들이 속출하면서 상호 교감이 없는 오로지 이기적인 자만심이 팽배한 무의미의 삶이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삭막한 현실에서도 ‘빈틈’이라는 다소 허술하지만 그 ‘진솔함’이 바로 생의 지표로 현현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무 좋다 / 이래도 한세상 / 저래도 한세상 // 자네도 빈 손 / 나 또한 빈 손 // 있다고 더 오래 살고 / 없다고 다 적게 사는 / 그런 세상도 아닌데 // 천년을 살 것처럼 / 크게 욕심을 내지만 / 백년도 못 사는 / 우리네 짧은 인생 //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거 / 웃으며 즐겁게 살다 보면 / 여행은 끝나겠지.
--이준순의 「인생여정」 전문
이준순의 ‘우리네 짧은 인생’도 그의 여정애서는 ‘빈 손’이라는 개념은 앞의 ‘빈틈’과 동일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는데 이 모두가 어쩌면 무(無)이거나 허무(虛無)와 상관하는 깊은 심지(心智)에서 발상한 인생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조중곤의 「옷 한 벌」 중에서 ‘이 세상 온 인생 / 빈 두 주먹 쥐고 알몸으로 온다 / 등 뒤에서 갈 길이 없이 서성이던 남남이 / 돌아서서 꾸밈없이 얼굴을 마주 대고 / 힘을 나누며 바보처럼 살아가다가 / 두근거리는 가슴 서로 쓰다듬는다’거나 홍승룡의 「자화상」 중에서도 ‘술잔에 비춰진 얼굴을 바라보다가 / 그렇게 다치고 도 살아남은 게 용하다던 / 박씨가 이제는 죽었을 거라는 말 / 육십이 넘도록 홀로 떠돌다 / 얼마 전에 죽은 장씨를 생각하며 / 우리도 그렇게 떠나는 것이라니 / 인생은 그런 거라니 눈앞이 흐려진다’는 등의 어조로 삶에 대한 허무와 덧없는 인생론을 경청(傾聽)하게 한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는 실생활에서 현실적으로 감응하는 시인들의 의식에는 대체로 성찰적인 인식을 이탈하지 않는다. ‘삶의 원점에서 멀리 떨어진 / 너들은 / 얼마나 숨가쁘랴?(박길호의 「나의 빛 나의 길」 중에서)’거나 ‘앙상한 가지마다 황홀한 불빛 / 인생의 삶 속에서 만남의 꽃이었다(김나현의 「해어름 찻집의 여운」 중에서)’는 인생의 애환이 스민 이미지의 절대성으로 창출하는 자애(自愛-self love)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문예사조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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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정경(情景)과 서정적 시혼
3월이다. 3월 1일은 기미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일제에 항거한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지금까지도 서울 탑골공원과 전국에서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의 낭낭한 외침과 함께 ‘대한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 민족은 위대했다. 잔악한 일제에게 말과 글을 빼앗기고 문화와 미풍약속을 말살당한 압박 만행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을 실행하려 했던 3.1만세운동은 우리 역사상 영원히 남을 민족적 항거였다. 이제 백년을 맞아서 다채롭게 그날을 기리는 행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우리 민족의 대명절인 설날이 있었다. 음력으로 정월 초하룻날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박목월 시인은 그의 글 「나무를 나무로 볼 수 있는 나이의 의미」에서 ‘정월 초하룻날은 한 해가 비롯되는 우리들의 생활의 시작이요, 그 출발점이다. 우리는 새로운 생활의 설계와 사업에 대한 구성과 그것이 실천으로 옮아가는 제일보를 내딛게 되는 순간이다. 그 처녀성, 그 순수성, 그 정결성-- 그 엄숙하고 숙연한 실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설날 새벽이다.’라고 설날은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설계하는 뜻깊은 명절이다.
우리 시인들은 이 설날을 테마로 해서 많은 시를 썼다. 김종길 시인은 「설날 아침에」에서 ‘매양 추위 속에 /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 파릇한 미나리 싹이 / 봄날을 꿈꾸듯 // 새해는 참고 /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 오늘 아침 / 따뜻한 한 잔 술과 /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 세상은 /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 //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 좀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 한 해가 가고 / 또 올지라도 /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 고운 이빨을 보듯 /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라는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지난 달 『문예사조』의 시편들은 자연에서 추출한 서정적인 시혼을 투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약간 지적인 주제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정감이 넘치는 자연 정경을 소재로 잔잔하게 흡인해나간 시편들을 많이 대할 수 있어서 모처럼 안온한 감정으로 시 읽기를 진행했다. 먼저 책에 수록된 순서대로 감상해보면 다음과 같이 계절의 시간과 동질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낙엽은 떨어져 / 코트 깊이 목을 감추는 / 가을은 깊어 // 아려오는 내 가슴 / 병원에서 투명 사진을 찍었다 // 가슴앓이 흔적이 여럿이라네 / 옛 사랑의 흔적인가 // 더 이상 / 가슴 아픈 일 없는 게 좋다는 데 // 또 나를 슬프게 하는 / 사랑의 추억.
--배영재의 「가슴앓이」 전문
배영재는 ‘낙엽’을 통해서 ‘가슴앓이’라는 주제를 탐색하고 있는데 보편적인 사물 ‘낙엽’의 이미지가 ‘옛 사랑의 흔적’으로써 그의 가슴앓이는 정립되고 있다. 단시형(短詩型)의 4연이지만 그가 착목(着目)한 사물(낙엽)에서 창출한 이미지는 그의 인생에서 절감하는 하나의 아픔이 남모르게 내재되어 있어서 그 주제의 근원을 아주 가까이에서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시법(詩法)에는 어떤 사물이 한 시인의 곰삭은 관념과 동질성을 형성하게 될 때 좋은 작품으로 탄생하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되는 데 배영재는 함께 발표한 「호수공원은 ‘예술의 전당’」과 「눈내리는 밤」 에서도 이러한 정서와 사유의 지향점을 여실하게 감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얀 꽃 피면 하얀 감자 / 붉은 꽃 피면 붉은 감자 / 꽃 따라 파 보면 붉은 감자 // 명료한 근원을 사랑하였을까 / 꽃도 줄기도 한 몸인 순수로 / 올망졸망 꿈꾸는 붉은 얼굴들 // 가난한 줄기에 기대었어도 / 둥글고 겸손한 풍요의 얼굴들 / 어머니가 사랑한 붉은 감자밭.
--강외숙의 「붉은 감자밭」 전문
강외숙은 어떠한가. ‘감자밭’에서 추적해본 이미지는 ‘어머니가 사랑한 붉은 감자밭’이다. 이 감자밭에서 사랑의 근원을 탐색하는 그는 이 세상 만유(萬有)의 사물에서도 숭고하고 근엄한 인간애를 접목할 수 있다는 시법은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사물과 관념을 융합시키는 시적 상상력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소박한 정감의 시혼은 단순하고 일상적인 사유에서도 얼마든지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는 시적 연륜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그의 진실은 언젠가 ‘시를 찾아 오래도록 / 세상의 들판을 헤매었다 // 더러는 / 이방의 숲을 나는 새였고 / 더러는 / 머나먼 해변의 바람이었다 // 볼품없는 나의 내부로부터 / 쏟아낸 언어의 미아들에게 / 이제는 고해를 해야 할 때다’라는 어조로 ‘시에 관한 고백’을 한 바가 있어서 더욱 그의 내면에 잠재한 시적 진실을 이해하게 한다.
누군가는 / 잡초라 불렸을 풀에서 / 피어난 꽃 // 키가 땅에 붙어 / 허리 굽히고 / 들여다보아야 하는 // 가장 흔한 것 / 척박한 땅에 / 흔히 보이는 풀 // 편견에 토달지 않고 / 땅바닥에 낮게 깔려서 / 때 되면 어김없이 피는 꽃.
--전홍구의 「들풀 꽃」 전문
전홍구도 ‘들풀 꽃’이라는 자연 사물에서 응시하는 그의 순정적인 대사물관을 읽을 수 있다. 흔히 대할 수 있어서 더러는 무관심에 속하는 ‘잡초’에서 시간성을 발견하게 되고 낮게 임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진정한 의식을 창조하게 되는 평범한 사유에서 그가 적시하는 진실이 ‘들플 꽃’에서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눈과 눈이 맛닿아 /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 마른 낙엽 몇 개 석양에 꽂고 걸어간다 / 한 줌 햇살 / 눈보라에 쓰러진 저녁을 이고 / 몇 날 며칠 익은 흰 머리카락이 / 차거운 입술의 말수를 줄이게 하면 / 꽃잎처럼 내리는 눈발 / 그 끝 한쪽에 앉아 / 아침으로 길을 내고 있는 손님이 / 하늘보다 낮은 침묵들을 모아 / 작은 꿈들을 / 바삐 쓸어안는다 / 허물도 못 벗겨 낸 겨울밤이었는데.
--서동안의 「겨울밤」 전문
서동안의 자연관은 어떠한가. 그는 ‘마른 낙엽’과 ‘석양’의 대칭에서 체감(體感)하는 사유는 ‘겨울밤’과 동시에 사물과 시간성이 형상화함으로써 시적인 효과를 상승하고 있다. 이는 그가 ‘눈보라(혹은 눈발)’와 ‘흰 머리카락’이 상호 희다는 개념의 ‘겨울’을 상징으로 하여 ‘낮은 침묵’과 ‘작은 꿈들’ 그리고 벗겨내지 못한 ‘허물’이 시적상황을 전개하여 ‘겨울밤’의 이미지를 한결 더 높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의 겨울은 무엇인가 아쉽기만 하다. ‘겨울밤이었는데’하고 말문을 닫은 것은 남아있는 여백에 무엇을 채워야만 된 빈 공간을 은연중에 적시하고 있다. 그는 다시 함께 발표한 작품들도 「겨울새」 「겨울의 집」으로 이 ‘겨울’이 제시하는 이미지나 메시지가 그가 설정하고자하는 주제가 ‘한 겹 천으로 휘감은 그리움의 나이테’이며 ‘어머니의 손길로 울다 간 아침’으로 승화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파란 하늘에 / 흰 구름 몽실몽실 / 하얀 물감 떨어뜨리고 // 먹구름 몰려오면 / 밀대로 밀어 / 검은 물감 옅게 바른다 // 떨어지는 노을 / 가지에 걸려 피멍 들대면 / 두어 색깔 물에 적시어 / 옅게 , 덧칠하고 //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 매일 다른 하늘 수채화 / 여백 남기고 마음 남긴다.
--이성기의 「하늘 수채화」 전문
이성기는 ‘파란 하늘에 / 흰 구름 몽실몽실 / 하얀 물감 떨어뜨’려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과 먹구름과 노을이 서로 다른 색깔로 변하는 하늘 수채화는 모두 ‘여백’이라는 또 다른 공간을 형성하고 자신의 동심어린 이미지를 투영시키고 있다.
그가 선호하는 시어는 ‘하늘’인가 보다. 작품 「창 안에 들어온 겨울」에서는 ‘수직으로 뻗은 / 겨울나무 오르내리며 / 눈보라 걷어차 / 하늘로 으로는 / 비장한 새들의 비행’이나 작품 「생명 너머」에서도 ‘하늘 가르고 / 천둥 몰아쳐도 / 생명 시작되었다’는 어조는 ‘하늘 수채화’처럼 다양한 이미지가 창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밤 사이 / 당신을 향한 그리움 / 흰 눈 되어 수북수북 쌓였네 // 발자욱 자욱마다 / 소담스럽게 담아 온 날들 / 은빛나래 속 깊은 정 // 함박눈 펑펑 / 섣달 스무아흐레 깊은 밤 / 눈부신 미소로 품에 안기네.
--홍나금의 「정」 전문
홍나금도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섣달 스무아흐레 깊은 밤’에서 그의 사유는 ‘은빛나래 속 깊은 정’으로 전이하고 있다. 이렇게 시의 주제는 보편성으로 존재하는 자연 상관물이 우리들의 심중(心中)에서 깊은 내면의 진실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M.E.몽테뉴의 말대로 모든 일에 자연이 좀 거들어 주지 않는다면 인간이 영위하는 기술이나 기교는 조금도 진전을 보지 못하리라는 명언처럼 우리 인간과 자연의 교감은 생명과도 같은 상관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모깃불 피워 놓고 평상에 누워 / 밤 하늘 쳐다보며 별을 세고 / 네 별, 내 별 차지하며 놀던 밤 // 작은 별 평상 위 날아다녀 / 별인가, 잡으면 반딧불이었지 / 호박꽃 초롱불 만들어 놀던 밤 // 보고 싶다, 그리워라.
--박봉남의 「반딧불」 전문
박봉남의 ‘반딧불’도 순수 자연에서 목도(目睹)한 사물에서 그의 정서는 정착되어 있다. 모깃불과 평상과 밤 하늘과 그리고 별이 그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정서의 중심이다. 그는 안온한 밤을 사유하면서 회상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보고 싶다, 그리워라.’이다. 이것은 시간성에서 과거를 재생하는 이미지의 결집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동심의 세계가 있고 이를 상기하면서 시적 이미지를 창출시킨다. 이와같이 ‘반딧불=그리움’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다. 그는 ‘호박꽃 초롱불 만들어 놀던 밤’에 ‘평상에 누워’ 별을 세면서 빈딧불이와 교감하는 자연 정경에서 진솔한 그의 시적 진실을 조망할 수 있게 한다.
또한 그의 자연관은 ‘두릅나물’이나 ‘고사리’ 등 산촌에서 지천으로 볼 수 있는 자연 사물들이 시적인 소재로 등장하고 있어서 그의 자연 사랑과 동시에 자연서정의 범주를 확대하고 있어서 자연과 사정시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식성 좋은 / 떡붕어들이 / 어젯밤에 / 삼킨 달을 토하고 / 아랫목 노숙한 수초는 / 조용히 이빨 닦는다 // 나는 말없이 / 철새들과 수화로 / 사랑한다고....// 나는 / 평생토록 / 날개 하나 달지 못한 채 / 뚝가에서 꿈도 없이 / 허허롭게 울고 섰구나.
--공정식의 「갈대숲에서」 전문
공정식의 자연(갈대숲)은 어쩐지 서글픔이 배여 있는 정감이 엄습한다. 의인화한 ‘갈대숲’의 허망과 아쉬움이 절절하게 넘치고 있다. 떡붕어와 철새들과 상관하는 상황의 전개나 시적 결론이 ‘허허롭게 울고 섰구나’라는 어조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비애가 동승한 자연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시인들이 자연과 상면(相面)하면서 재생하는 이미지는 대체로 자연이 그 존재 근거를 신이나 인간정신에 두고 일차적으로 낙관론(樂觀論)이 가능해진다. 여기에는 비정적 타자성이라는 심적 유동이 성립하는데 이것을 시론가들은 감상적 오류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 자연관의 두 가지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연의 인격화이다. 먼저 동화(同化-assimilation)인데 시인이 모든 자연을 자신 속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것이다. 도 하나는 투사(投射-project)라는 원리인데 이는 시인이란 정체가 없기 때문에 그가 계속해서 어떤 다른 존재를 채우는 것, 곧 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법이 우리들은 자연과의 대화에서 자주 응용하는 보편적인 이미지의 창출이며 자연 정경을 형상화하는 서정시의 시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문예사조 20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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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미디어]
시의 구도 혹은 시인의 ‘기상도’
올해 벽두부터 문화관광부와 조선일보, 한국문인협회, 대한출판문화협회 등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책, 함께 읽자’라는 행사가 펼쳐져서 우리 문인들과 일반 독자들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시가 안 쓰이는 한철 / 벼랑에 세워져 사납게 흔들리는 / 기이한 공포..... 이런 때 / 우리는 어떤 예배를 올릴 것인가 // 어느 날 시가 쓰여진다 / 혈액처럼 고여 오는, / 아니 혈액 자체인 그것을 / 원고지 위에 공손히 옮긴다 / 한데 야릇한 가책과 의문이 섞여 치받는다 / 더 오래 절망에 잠겼어야 / 옳았지 않을까 / ‘여러 세대에 걸치는 / 소수의 진정한 독자‘ / 저들의 가슴을 관통하기엔 / 참담할 만치 화살이 허약한 게 아닌지 / 시적 진실성의 함량미달로 / 친구인 시인들에게 / 환멸을 끼치지 않겠는지 // 시인이여 / 우리는 시에게 잘못하는 일이 많다 / 하면 오늘밤 각자의 시 앞에 / 속죄의 등불을 켜고 / 새벽녘까지 / 천 년 같은 긴 밤을 / 시와 참 배필로 있자.
--김남조의 「시에게 잘못함」전문
지난 2월 어느 날 대학로 예총회관에서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남조 시인을 초대하여 ‘책, 함께 읽자’ 행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김남조 시인을 직접 모시고 그의 작품을 후배들이 읽어주고 그의 ‘나의 시에 관하여’라는 짧은 강의와 해설이 곁들여졌다. 여기에는 김후란, 허영자, 오세영, 김선영, 이향아, 김송배, 한분순, 이승하, 김귀희, 장충열, 홍금자, 이오례, 송연주, 배기정, 차윤옥 시인과 민지원 소설가, 홍성훈 아동문학가 등이 낭독하고 특별 출연으로 연극인 박정자(예술원 회원) 씨가 김남조 연작시 「촛불」을 낭독하면서 박정이 시인의 ‘詩춤’과 어우러져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외국에는 이러한 문학 전 장르에 걸쳐서 책 읽기 운동을 국가적인 행사로 벌인다는 소식은 접했으나 우리나라에서 문광부가 직접 시도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날만 해도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이루어졌고 매월 첫째 수요일에 계속해서 행사를 한다는 것이다. 각 단체나 모임, 개인에 이르기까지 조선일보사로 신청하면 선정해서 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각설하고 지난호 『문학미디어』에 수록된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나’라는 화자를 중심으로 시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물론 ‘나’의 정서가 반영되고 ‘나’라는 주체가 작품의 근원으로 작용한다는 기준에서 보면 별것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나’를 지나치게 주체로 내세우게 되면 시의 구도는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이미지의 투영이 약해지거나 주제가 객관적인 사유를 여과하지 않으면 자칫 개인의 독백에 머물 수 있다는 위험이 상존하고 있어서 현대시에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되는 연유에서이다.
나는 안다. 나를 통해 태어났으나 영원으로부터 달려 온 영혼임을. 사랑은 줄 수 있지만 생각은 줄 수 없다는 것도, 꿈을 꾸는 그의 영혼이 내 꿈속에 살 수 없다는 것도. 그래도 무슨 연유일까. 그녀가 웃으면 기분이 좋다. 그녀가 웃으면 따라 웃고 그녀가 울면 마음도 바쁘다. 눈물도 말라버린 듯 이제는 웬만한 일에도 무심하던 내가 그 영혼 앞에서 가슴이 뛴다. 흔들린다. 기상도가 된다.
--이길원의 「기상도」전문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안다’라거나 ‘나를 통해 태어났’다는 화자가 바로 ‘나’이다. 그러나 ‘영원으로부터 달려온 영혼’이라는 객관적 상상물과 흡착함으로써 시적 구도를 완전하게 바꾸어 놓고 있다. 더구나 대칭 화자인 ‘그녀’가 등장하여 상호 갈등구조를 ‘영혼’과 대입하여 시적 본령을 정립하고 있어서 이길원이 의도적으로 현현하려는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그의 특성이거나 실험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현대시의 구도에 만만찮은 기법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가 구상하는 ‘기상도’는 ‘나’와 ‘그녀’ 사이에서 ‘꿈을 꾸는 그의 영혼이 내 꿈속에서 살 수 없다는’ 어떤 현실적 갈등 요소를 ‘영혼’이라는 상관물에 의해서 화해하고 조화를 이루려는 ‘무슨 연유’를 그의 내면에서 탐색하고 있다. 그것이 그가 그리는 ‘기상도’의 등고선이며 기상 기호가 된다.
함께 가자고 조르면 가줄걸 그랬다 / 그래도 괜찮았는데 / 함께 머물자 조르면 머물걸 그랬다 / 그래도 괜찮았는데 / 다른 길로 달려와도 이만큼 / 다른 곳에 머물러도 이만큼 / 두 손 뻗어 양껏 품을 수 있는 것보다 / 어쩌면 그 애틋한 인연이 더 맑은 시간 흩뿌려 / 깊게 뿌리박은 나무 한 그루 만들 수 있었을 텐데 / 작지만 후회 없는 집 한 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 마른 꽃 한 아름 걷어낸 뒤에나 / 바보같이 깨닫게 되었다.
--이윤경의 「아름다운 하루」전문
그러나 이윤경은 화자가 모두 그 형체를 돌출시키지 않고 있으나 그 화자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금방 알 수 있게 시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라는 화자를 은폐하고 있지만, ‘나’의 정서이며 사유의 한 단면임을 파악하게 되는 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시법이 앞에서 말한 독백이나 넋두리를 피해 갈 수 있는 한 방편인지도 모른다. 그의 ‘아름다운 하루’는 대체로 ‘바보같이 깨닫게 되었다’는 자아 성찰로 조율되고 있는데 현실적(혹은 표피적)인 잠재의식이 고고한 정서의 부동으로 동화하지 못한 것들을 ‘마른 꽃 한 한 아름 걷어낸 뒤에’ 그는 이해하게 되는 갈등 구도를 화해하지 못한 것을 ‘바보’로 현현하고 있다.
거친 밤잠을 안고 잔 나 / 어둠 반의 밤을 깨워 들여다보니 / 귀속을 때리는 소리 지렁이 걸음이다 / 아스콘 깨는 소리에 / 밤사이 다녀간 지구에 대한 이야기 / 산맥은 안식년에 들어가 / 바람은 숲을 외불처럼 뉘운다 / 하루의 막노동을 마다하고 / 도심 한 복판에서 / 돌 깨는 소리에 땅굴 파는 소리에 / 공사명은 한전 지중화 사업이라며 거친 눈발이다 / 불안에 떨며 안부를 묻는 민초들의 새벽 / 밤을 낮 삼아 깨고 깨는 여백의 나이들 / 지구의 사나이들 / 누가 뭐라든 어쩌다 눈 감긴 새벽의 능선에 / 올곧게 서서 능선을 깨치며 평화의 불 속으로 뛰어드는가. / 그래도 눈 감긴 새벽은 내 삶에 꽃 핀 새벽이다.
--홍윤표의 「눈 감긴 새벽」전문
여기 홍윤표의 ‘나’는 완전히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하기야 모든 작품들이 ‘나’를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 나아가서는 우주까지를 함축하는 것이겠으나 ‘거친 밤잠을 안고 잔 나’가 설정하는 시적 상황은 자아가 감지하는 현실적 상황의 전개에서 적시하는 이미지의 추출은 또 다른 시법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결론에서 ‘눈 감긴 새벽은 내 삶에 꽃 핀 새벽’으로 형상화하여 현실과 자아와의 상간성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불안에 떨며 안부를 묻는 민초들’에서는 다분히 갈등의 구조를 대입하면서 해법을 탐색하는 시적 구도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물을 ‘나’로 의인화하지 않고 실제 관념 속에서의 화자 ‘나’는 스스로 독백을 자초하는 우를 낳게 하는 모험이 항상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들은 사랑시나 종교시 등에서 ‘나’를 중심으로 한 작품을 대할 수가 있는데 이는 좀더 적극적이거나 친밀감에의 접근을 시도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는 시법으로써 시적 효용을 충만시키고 독자들의 공감을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지(燒紙)하지 못하는 미련 / 어디에선가 내 영혼의 이름도 / 반 토막이 났는지 / 매캐한 냄새가 나는 시간.
--김대근의 「수첩을 새로 산 날」 중에서
김대근은 평범한 소재 ‘수첩을 새로’ 사고 새 수첩에 ‘몇 명은 그나마 / 새 이름을 얻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옮겨놓고 헌 수첩은 ‘서랍에 넣고 봉인’하는 상황이 시간성에 따른 인간의 어제와 오늘을 유추하게 하는 이미지의 형상화에 기여하고 있다.
더구나 ‘내 영혼의 이름’이 적시하는 이미지는 서랍에 봉인된 헌 수첩(또는 옛 수첩)에서 ‘혹여 죽었던 그들이’ 밤마다 다그락 거리는 소리를 듣는 형상은 과거와 현재의 상충되는 현실 상황에서 자아를 반추하면서 ‘매캐한 냄새’를 정서속으로 흡인하고 있다.
이 밖에도 송보영이 「어느 봄날의 단상」에서 ‘아직도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터무니 없는 욕심 때문에 오늘도 나는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거나 이문연이 「매미 소리」에서 ‘매미 소리 한 옥타브에 / 내 삶이 부끄러워지던 여름날’ 또는 임난희가 「가을엔 내가」에서 ‘가을엔 내가 꿈꾼다’ 등의 어조는 실제의 자신으로 전환된 ‘나(또는 ‘내’)’라는 개념을 떨칠 수가 없다.
요즘 현대시에서 흔히 말하는 형이상시(形而上詩)의 원형은 사물과 관념의 이미지를 적절하게 배합하는 시적 구도를 말하는 것도 너무 관념속의 ‘나’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미디어』 2019. 봄호)
시간성에 관한 시적 의미
2008년이 저문다. 한국 현대시 100년의 뜻 깊은 한해가 우리 시인들의 가슴에 별다른 각인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문학단체나 시인 단체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이를 기념할만한 행사(심포지엄, 시낭송 등)나 논점(論點-issue)이 없었다. 다만, 연초에 한국문인협회에서『계절문학』특집으로 ‘기획좌담-현대 한국문학 100년을 점검한다-시 100년’을 게재하여 필자와 성찬경, 성춘복 시인이 우리 시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을 점검한 바가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보수와 진보라는 양분된 문단이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불식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일과 앞으로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통일문학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한국문인』에서도 특집으로 ‘현대시 100년의 미래에 대한 고찰’(홍금자, 김 종, 김송배, 유자효, 배상호, 황금찬)을 게재하였다.
21세기 우리 시의 전망에서 외적으로 절대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시의 글로벌화이다. 이를 위해서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하여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하나는 국토분단의 역사적 통한을 어떻게 승화해서 앞으로 다가올 통일시대의 문학을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지성적 고뇌이다
--필자의 ‘다원화 시대와 현대시의 전망’ 중에서
한편 지난 여름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린 ‘2008 만해축전’에서 현대시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고 지난 11월에는 한국문협이 문학강연회를 전국 주요도시에서 열었던 던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1월 1일 ‘시의 날’을 맞아 KBS Media가 주관한 ‘한국 현대시 탄생 100주년 기념-시인 만세-’가 국립극장에서 성대하게 열려서 많은 시인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우선 지역 예선을 거쳐서 올라온 전국 시낭송 경연대회가 주목을 받았으며 시 퍼포먼스, 축하공연, 자작시 낭송, 한국인의 애송시 낭송, 작고 시인 육성 낭독 등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행사들만으로는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고 그 의미를 기리는 것은 미흡하다. 적어도 전국의 시인들이 모여 ‘시의 날’ 잔치를 벌이면서 시와 대중들과의 만남을 시도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문인단체도 국가도 모두 무관심했던 것은 오점으로 남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지난호 『문학미디어』에서는 9명의 작품 18편이 수록되었다. 여타 문학지보다는 적은 편이다. 질보다 양을 중요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좋은 시를 더 많이 게재하여 우리 시의 저변확대에 기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필자만의 욕심일까.
코스모스가 피었다고 / 가슴 달싹이는 소녀의 무제(無題) // 한적한 모퉁이 길에 서서 나지막이 / 강 너머 가을을 불러내는 추억의 목소리 / 맥없이 연고도 없는 풀꽃에게 / 그 사람의 안부를 묻는 추억의 떨림 / 늘 달아나기만 하는 물살을 / 걷어차는 세월의 꼬리지느러미 / 이어 놓고 끄나풀도 없는데 / 먼 하늘 감아 들이는 인연의 얼레질 / 풀 향기 따라 외진 길 접어드는 / 목련꽃잎 같은 추억의 발자국 / 겨드랑이에 숨어 든 가을바람까지 수소문해서 / 원근법에 길들여진 캔버스 길로 접어드는 / 추억의 귀향 // 어언 / 강 건너 가을을 탐하는 / 정분의 보랏빛 점 하나가 팽창한다 // 펑
오양수는 「추억의 비구상」을 통해서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불러오고 있다. ‘코스모스가 피었다고 / 가슴 달싹이는 소녀’의 ‘추억’은 끝까지 긴장을 풀지 못한다. 과거가 현재에 접목되면서 ‘비구상’으로 그려 나가는 시적 정황들이 한 행마다의 이미지로 구성하면서 김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러나 ‘추억’이라는 어휘를 삽입하여 시의 의미나 정황들을 감도 높게 현현하려 했지만, 오히려 설명하는 부분으로 나열될 우려가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추억의 목소리’, ‘추억의 떨림’, ‘추억의 발자국’ 그리고 ‘추억의 귀향’ 등의 언술은 그 빈도수에 따라 이미지를 저하하는 작용도 있게 하고 있다.
품속에 잠깨고 눈 떴어도 / 괴롭도록 그날들이 들락거린다 / 측량할 수 없는 그리움의 무게 / 종지부를 찍기에는 너무나 큰 하늘 // 끝 곡을 연주하는 삶의 고개에서 / 바람처럼 애절함이 배일(排日)하고 있다
김솔아도 역시 「오월 애모」에서 ‘그날들이 들락거린다’거나 ‘삶의 고개에서’ 등은 시간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오월’이라는 특정의 계절적 이미지가 ‘그리움의 무게’로 투영하는 것을 보면 그 ‘애절함’에 대한 중심축은 역시 시간성과 상관관계에서 시적 발상이 현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함께 발표한 「비 개인 새벽길-동해로 가며」에서처럼 시적 공간이 없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이 적절하게 융합되지 않으면 관념적 이미지로만 작품을 완서하게 되는데 이때 유의할 점은 한 개인의 독백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언어의 조합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가을엔 / 진하게 녹여진 저린 사연 / 찬바람 서리 전에 / 지우고 싶다 // 문구점을 가니 / 연필을 지우는 지우개도 있고 / 잉크를 지우는 지우개도 있는데 / 나를 지우는 지우개는 없다한다 // 너와 나와 만들던 사랑 / 불보다 뜨겁게 달구었던 / 그 아픈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 지우개는 그 어디에도 없다한다 // 가을이 되면 / 바람을 지우듯이 너를 지운다 / 너와 내가 함께한 사랑 / 그 아픈 흔적을 지운다
유병택의 「공연한 다짐」도 ‘가을’과 ‘서리 전’, ‘아픈 흔적’ 등은 시간성에서 발현된 언어들이다. 그는 ‘너와 내’라는 화자를 등장시켜서 ‘함께한 사랑 / 그 아픈 흔적을 지’우려는 지움의 미학을 창출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시에서 시간성은 중요하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존재론적 시간의 의미 이외에도 춘하추동의 계절적 의미와 낮과 밤(혹은 조석) 등 그 시간에 따른 사물의 변화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시적구도를 형성하는 동인(動因)이 되기도 한다.
뜨거워질수록 끈질기게 매달리는 / 매미의 울음 / 울컥울컥 터져 나오고 있다 // 여름 불꽃 쏘아올린 빛과 빛 사이로 / 반지하 단칸방에서 노파가 빨대로 요구르트를 / 마셔댄다. 수 십 년의 언덕을 쪽쪽 빨아댄다 / 목숨을 다해 지나왔던 꽃자리는 / 흙 속의 젖어 있던 날개였을까 // 누구나 하늘의 뿌리였다 // 한낮의 정오, / 그늘이 조용히 숨 거둘 때까지
/ 렇게 슬피 울던 날개를 아스라이 펼쳐드는.
한승엽의 「지상의 매미」에서도 ‘여름’과 ‘정오’라는 시간성을 전제하면서 ‘매미의 울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수 십 년의 언덕’과 ‘지나왔던 꽃자리’ 등의 언술도 시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현대시의 구도는 시간과 공간의 조화에서 이루어진다. 삶의 궤적에서 추출하는 과거의 시간과 공간, 현실적 갈등과 고뇌를 해소하려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은 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소재이며 주제로 승화하는 요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간성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김재분이「호수와 달」에서 ‘호수는 / 달을 안고 있어요 / 당신처럼 // 달은 / 호수를 / 몽땅 차지하고 있어요 / 나처럼’에서 알 수 있듯이 ‘달’은 밤의 시간이다.
또한 김학순의「까치밥」에서도 ‘깊은 잠에서 / 깨어나 보니 / 해는 / 앞마당 / 감나무 끝에 매달려 있다’거나 「대평원-미국서부에서」‘태양은 종일 작열하고 / 상처 위로 / 긴긴 수로 / 평원을 다독인다’에서 ‘해(태양)’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한편 김영채의 시간도 암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생굴 장수」에서 ‘하얀 눈길 위로 스며 오던 / 낮은 목소리’와 ‘눈송이 툭툭 털고 들어서던 / 영감님’, ‘정겨우시던 화롯가 / 곰방대 한 모금 긴 연기’로 겨울의 시간을 언술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성에 관한 시적 의미는 무한하다. 어쩌면 현대시의 양상이나 형태가 모두 시간을 배제하고는 성립될 수 없을 정도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시간은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도 시집『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 ‘시인의 말’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불투명한 변주곡이기에 무엇을 속단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속에 어느 날 내가 홀로 서 있음을 알았다’며 ‘나에게 배당된 시간은 얼마일까’하고 고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소유한 비방(秘方)은 사랑(졸시「시간에 대하여 . 7」중에서)’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기 까지는 6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것이 시간성에서 시적 의미를 창출하는 충분조건인지도 모른다.(『문학미디어』 2008. 겨울)
시적 서정성, ‘세월’과 동화와 진실
시의 사전적 해석은 ‘문학을 형식상으로 크게 분류하여 산문과 운문으로 나뉘어 지는데 운문의 대표적인 형식이 시이다. 시의 정의는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그 일반적인 공통점을 추려서 말한다면-시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운율과 이미지로 결합하여 압축 통일시켜 표현한 문학의 한 장르-’라고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장황하게 시의 정의를 하는 것보다 카알 샌드버그(C.A. Sandburg-미국의 시인)는 ‘시란 무지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사라지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환상의 대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지개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순간의 환상(fantasy)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찾아나서는 시인들의 상상력은 무한의 우주를 헤매어야 한다는 심경의 고뇌가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너무나도 재빨리 수평선 저쪽으로 사라져 가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인생에 관한 일련의 설명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어떤 시각적이나 우리의 외관(外官)에서 보거나 듣거나 할 수 없는 불투명한 마력(魔力)을 지니고 시인들에게 인생문제 등을 탐색하는 책무를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대체로 시창작에서 소재나 주제의 창출은 자신의 체험을 중시하면서 거기에서 제생하는 상상력이 우리 인간들의 진정한 내면의 노래를 도출하는 경향을 자주 대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인생론이 동행하고 있어서 이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지개의 환상 같은 내적인 관념의 형상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난 여름 『문학미디어』에 발표한 작품들은 우선 서정성과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엿볼 수 있으나 외적(外的)인 표현에 집중함으로써 사물이미지만 노출되고 관념인 주제가 미약(微弱)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어서 이미지의 적절한 혼용(混用)이 필요함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숲에는 샘이 있다 / 땀 흘림으로 인하여 / 목마른 자만이 / 마실 수 있는 샘물이 있다 // 숲에는 터가 있다 / 일함으로 인하여 / 지친 자만이 / 쉴 수 있는 쉼터가 있다 // 숲에는 둥지가 있다 / 베풂으로 인하여 / 그리워하는 자만이 / 꿈꿀 수 있는 아랫목이 있다 // 숲에는 꽃이 있다 / 숲에는 향이 있다 / 숲에는 아늑한 마을 / 풀잎 속삭이는 꽃동네가 있다.
--박영춘의 「숲에는」 전문
박영춘은 ‘숲’이라는 전형적인 자연 사물에서 획득하는 이미지는 다양하게 현현되고 있다. 자연 친화에서 흡인된 정감의 이미지는 보는 바와 같이 ‘마실 수 있는 샘물’, ‘쉴 수 있는 쉼터’, ‘둥지’, ‘ 꿈꿀 수 있는 아랫목’, ‘꽃’, ‘향’, ‘아늑한 마을’ 그리고 ‘풀잎 속삭이는 꽃동네’로 분화하고 있어서 만유(萬有)의 대자연 ‘숲’에서 취하는 사유(思惟)의 갈래는 모두가 생명성과 상관하는 풋풋한 내적인 향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내면에는 ‘땀’과 목마름, 일함, 지침, 베풂, 그리움, 꿈, 그리고 속삭임 등등의 일상적인 동화(同化)와 상호 유대적인 언어로 관념의 의미를 교감하는 시법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함께 발표한 작품 「유책곷 풍경」 에서도 ‘맨발로 왔다 맨발로 가는 / 그 바람 뒷모습 쌀쌀하네 // 노랑나비 노랑꽃에 앉아있거늘 / 눈길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네 // 유책곷에 파묻힌 둥그런 돌덩이 / 그 바위 구름처럼 꽃에 붕 떴네.’라는 어조로 어쩐지 ‘그 바람 뒷모습 쌀쌀하’다는 부조화의 자연에서 무엇인가 고립되고 고독한 상념이 교감하고 있다.
쓸쓸함이 범람하는 허리 휜 백사장 / 밀려온 파도가 몸을 푸는 모래톱에 / 아직 잠들지 않은 야윈 햇살이 / 푸석한 얼굴 포개고 있다 / 푸른빛으로 노래하던 해조음은 / 먼 길 더듬는 바람의 연골에 부딪쳐 / 거친 파도소리를 뱉어내고 / 절정을 향해 치닫던 뜨거운 몸짓들 /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기억의 저편에서 / 부다듯한 시간의 뼈를 줍는데 / 언제였나 / 진실한 사랑으로 부르던 노래들도 / 물때에 부대끼는 흰 거품이 되었다가 / 모래성처럼 무너져 흩어진다 / 지금은 출렁이는 꿈을 좇아 퍼덕이던 / 은빛 날개를 조용히 접을 때 / 저만치 달아난 꿈꾸던 시간들은 / 왜바람의 발치 아래 파도로 뒤척이다 / 시린 가슴속 동굴 하나 만든다 / 이제 얼마 뒤엔 서릿발 하늘 / 허공에 꿈 한 점 떨구고 가는 갈매기들 / 시나브로 짚어가던 저무는 계절은 / 키질 하는 바람의 울음으로 적시겠지 / 그러나 꿈은 늘 가지런한 것 / 멀리 불 켜진 등대 너머 / 저녁별 하나 반짝 떠오르고 / 집어등 밝힌 오징어 잡는 배들이 / 만선의 꿈 바다에 풀어놓는다.
--우덕호의 「바다, 그 저물 무렵」 전문
우덕호도 ‘바다’라는 유형(有形)의 사물과 ‘저물 무렵’이라는 무형(無形)의 시간성을 조화함으로써 그가 여망하고 기원하는 ‘꿈’의 승화를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법에서는 먼저 시각적인 이미지의 활용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다가 다시 청각으로 변용하는 다변적인 이미지를 접할 수가 있다. 이는 ‘허리 휜 백사장’이나 ‘몸을 푸는 모래톱’, ‘야윈 햇살’, ‘부대끼는 흰거품’, ‘서릿발 하늘’, ‘갈매기’, ‘불 켜진 등대’, ‘저녁별 하나’, 그리고 ‘집어등 환하게 밝힌 배들’로 사물을 응시하면서 분사하는 시각적인 측면에는 ‘해조음’, ‘파도소리’, ‘부루던 노래’, ‘바람의 울음’ 등의 청각적인 예리한 음율(音律)을 투영하면서 작품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
다만, 작품의 도입부분과 상황설정 그리고 사물과 관념의 융합을 위한 작품의 전개가 대단히 복잡하다는 결론에 이르면 사유의 산만한 정감이 약간 결집이 되지 않는 모순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몰입하는 주제는 ‘출렁이는 꿈’과 ‘꿈꾸던 시간’ 그리고 ‘만선의 꿈’에서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시적 진실을 지향하는 ‘집어등’처럼 환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달빛 부서져 / 물결 위에 춤추는 소리 / 두 손바닥 가득 담아 듣는다 // 사방팔방 튀어 오르는 소리 / 돌돌돌 미끄러져 흐르는 소리 / 해맑은 소리 흘러 어둠 속으로 숨는다 // 달빛 한 웅큼 / 별빛 한 웅큼 // 움켜 담아도 / 움켜 담아도 / 눈부심은 가시지 않는다 // 시간을 잊고 / 부서져 반짝이며 흐르는 / 달빛 / 달빛 닮은 // 소리.
--정광지의 「여울 소리」 전문
정광지는 ‘소리’를 통해서 특유의 청각적 이미지를 발현하고 있다. 그는 물결 위에서 달빛이 부셔져서 춤추는 소리가 다양한 선율로 서정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 소리를 ‘두 손바닥 가득 담아’도 끝내는 ‘어둠 속으로 숨는’ 시적 정황이지만 여기 ‘여울 소리’에서 적시하는 의미성은 무한의 시간과도 상관하면서 우리들의 정서에 잔잔한 울림으로 들려주고 있다.
환갑 아들 앞에 응석부리며 / 일상이 동화로 돌아가 / 스스로 어린아이 되어 / 떼장이가 된 아흔의 노모 // 그 길었던 / 헌신의 아픈 세월 어이 다 버려두고 / 오직 동공에 담은 영상 / 그리운 어린 날 하나만 맴돌고 // 수염 허연 자식 앞에 분별없는 / 딱한 다섯 살 고집으로 / 삶의 마감 유예받으며 / 의식을 던져버린 아픔까지 잊었다 // 아기의 떼 뒤에 숨어버린 의식 / 어찌 받들어야 할까 / 안타깝게 잡아주는 손 뿌리치며 / 투정으로 정 구하는 애달픔.
--정광지의 「망각한 세월」 전문
함께 발표한 「망각한 세월」에서도 시간성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전개하고 있는데 ‘아흔의 노모’를 위한 헌사를 ‘헌신의 아픈 세월’과 ‘삶의 마감 유예받으며 / 의식을 던져버린 아픔까지 잊’어버린 사모(思慕)의 정을 애달프게 노래하고 있다.
코스모스가 피었습니다 / 며칠 내 비바람이 몹시도 몰아닥치더니 / 서서히 꽃으로 피어났나 봅니다 / 그 자리에 피고 또 피고 지더니 / 매마른 땅에 향기를 가득 실어 옵니다 // 코스모스가 피었습니다 /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며칠밤 잠을 설치더니 / 가녀린 모습으로 피어났나 봅니다 /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또 흔들리더니 / 메매른 가슴에 설레임을 심어줍니다 // 코스모스가 피었습니다 / 너의 모습을 / 너의 향기를 / 닮고 싶던 소녀는 / 세월의 향기 속에 / 어느새 머리에 흰꽃물이 들었습니다 // 그때는 몰랐습니다. / 저만치 그리움이 가을을 몰고 올 때 / 어느새 삶도 가을이었다는 것을..
--정성원의 「코스모스가 피었습니다」 전문
정성원도 ‘세월의 향기’라는 시간성에서 후각적인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는데 그의 결론적인 의미는 ‘어느새 삶도 가을이었다는 것’이라는 세월과의 동화하는 시법이 ‘코스모스’라는 사물에서 흡인하는 ‘설레임’과 ‘그리움’으로 형상화하는 전개가 상당한 공감을 불러오고 있다.
그는 ‘코스모스’와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동일한 이미지로 작용하지만 ‘너의 모습을 / 너의 향기를 / 닮고 싶던 소녀는 / 세월의 향기 속에 / 어느새 머리에 흰꽃물이 들었습니다’라는 어조는 세월의 아쉬움이 적나라하게 현현되고 있어서 삶(혹은 인간)과의 밀점한 상관성을 적시하는 자연과 세월과 인간과의 동화를 정감을 이해하게 된다.
함께 발표한 「세월호」에서도 ‘’잊지 않으려는 약속을 할 수 없어도 / 바람 따라 왔다 갔노라 / 풀꽃에게 소식이나 남겨놓고 가게나‘ 라는 어조로 ’그리움‘이 세월에 묻혀지는 아쉬움이 절절하게 현현하고 있어서 그가 내면에 굳게 새겨두는 세월은 어쩔 수 없이 동행하면서 수용해야 하는 정감(情感)을 이해하게 된다.
한 움큼씩 손에 쥐고선 / 거센 바람이 / 건너뛰며 들어선다 // 껍질 벗기니 / 속살 향기가 / 입 안 가득 소리내고 있다 // 한뜸한뜸 / 한올한올 / 마음을 내려놓아 / 오늘 혼자가 아닌 / 함께함이 //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 하루가 기울어져 가는 시간 / 아랑곳하지 않는 / 수없는 이야기 / 힘든 어제를 토하고 있다.
--이 샘의 「사랑심기 2」 전문
이 샘도 ‘하루가 기울어져 가는 시간’을 통해서 그가 감지하는 이미지는 ‘속살 향기’와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 하루’에서 후각과 청각을 동원한 신선한 정적인 이미지를 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정원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상당한 의미를 적시했지만 ‘힘든 어제를 토하고 있다.’는 어조는 ‘어제’라는 시간성으로 그의 ‘사랑심기’가 심도 있게 진행되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현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발표한 「사랑심기 1」에서도 ‘추억들이 흐느적거리’거나 ‘숨결 건져 올린 / 푸른 눈망울 꺼내어 / 정을 쏟아내고 있다’는 어조에서도 ‘추억’이라는 삶의 궤적(軌跡)에서 창출된 시간(혹은 세월)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부각(浮刻)됨으로써 ‘하나님의 정원 쉼터에서’ 만끽(滿喫)할 수 있는 사랑의 주제를 명징하게 현현하고 있다.
바위가 말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 바위는 할 말이 너무 많아 / 자신의 몸속에 많은 언어를 가두고 있을 뿐 // 수다쟁이 바위를 상상해보라 / 작고 수많은 알갱이들 / 바위가 되기 전의 각양각색의 사연과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서 있는 것이다 // 우리는 바위 곁을 지나칠 때면 / 두 귀를 막아야 한다 / 한번 터지기 시작하는 이야기들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 그래서 어느 날, 나는 / 바위의 모래알 같은 작은 알갱이들이 / 동시에 말하기 시작하자, / 그 바위를 두 팔로 안고 / 조용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서현진의 「바위」 전문
서현진은 묵언(默言)의 ‘바위’에게 ‘바위가 말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 바위는 할 말이 너무 많아 / 자신의 몸속에 많은 언어를 가두고 있을 뿐’ 이라는 전제로 ‘바위’가 간직한 묵시(默示)나 묵음(默吟)에 대한 또다른 의미를 창조하고자 다변적인 스토리를 구현하려는 그의 내심(內心)을 엿보게 한다.
그는 ‘수다쟁이 바위’라고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바위가 되기 전의 각양각색의 사연과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서 있는’ 정황(情況-sitution)은 약간 생경(生硬)한 이미지를 대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모순어법(oxymoron)을 러시아의 평론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 또는 생소화(生疏化)라고 해서 문학이론을 말하고 있다. 이는 흥미나 긴장감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학의 한 기법이다.
그가 함께 발표한 「안개」는 요즘 흔히 말하는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의 시법을 잘 활용하고 있는데 어떤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주제를 구현하려는 기법이다. 근래에 우리 시인들이 ‘낯설게 하기’와 함께 이 ‘스토리텔링’의 시법을 자주 응용하고 있어서 새로운 시적 흥미를 감응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장 콕토가 시는 진리이며 단순성이라고 했다. 그것은 대상에 덮혀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시론으로 시를 정의하고 있어서 지금도 우리들은 시 창작에서 참고자료로 삼고 있는 것이다.(『문학미디어』 2008. 가을.)
고독과 독백의 간극, 그 화해의 해법
지난 여름 우리 시단에서는 영원히 잊지 못할 행사가 있어서 이를 환영하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의 문화재청에서 윤동주(1917~1945)시인과 이육사(본명 이원록. 1904~1944)시인의 친필원고를 문화재로 등록했다는 소식이다. 윤동주의 친필원고는 그가 남긴 유일한 원고로 개작한 작품을 포함해서 1934년부터 1941 사이에 쓴 시 144편과 산문 4편이 담겼다고 한다.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같은 개별 원고를 묶은 시집 3책과 산문집 1책, 낱장 원고로 구성되었는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부제가 달린 「서시(序詩)」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작품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1941. 11. 20.)
한편 시인이면서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의 친필 원고 「편복(蝙蝠)」은 그가 1939년부터 40년 사이에 쓴 시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현실을 동굴에 매달려 살아가는 박쥐에 빗댄 시로 이육사의 시 중에서 가장 무게 있고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이 작품은 사전 검열에 걸려 발표하지도 못하다가 해방 후인 1956년 『육사시집』에 처음 수록되었다. 작품 「편복(蝙蝠)」 전문을 독자들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옮겨 본다.
광명을 배반한 아득한 동굴에서 / 다 썩은 들보라 무너진 성벽 위 너 홀로 돌아다니는 / 가엾은 박쥐여! 어둠의 왕자여! / 쥐는 너를 버리고 부잣집 곳간으로 도망했고 / 大鵬도 북해로 날아간 지 이미 오래거늘 / 검은 세기에 喪裝이 갈갈이 찢어질 긴 동안 / 비둘기같은 사랑을 한 번도 속삭여 보지도 못한 / 가엾은 박쥐여! 고독한 유령이여! // 앵무와 함께 종알대어 보지도 못하고 / 딱따구리처럼 고목을 쪼아 올리도 못 하거니와 / 만호보다 노란 눈깔은 유전을 원망한들 무엇하랴 // 서러운 呪交 일사 못 외일 고심의 이빨을 갈며 / 종족과 홰를 잃어도 갈 곳조차 없는 / 가엾은 박쥐여! 영원한 ‘보헤미안’의 넋이여! // 제 정열에 못이겨 타서 죽는 불사조는 아닐망정 / 空山 잠긴 달에 울어 새는 두견새 흘리는 피는 / 그래도 사람의 심금을 흔들어 눈물을 짜내지 않은가! / 날카로운 발톱이 암사슴의 연한 간을 노려도 봤을 / 너의 머-ㄴ 조선의 영화롭던 한 시절 역사도 / 가엾은 박쥐여 멸망하는 겨래여! // 운명의 제단에 가늘게 타는 향불마저 꺼졌거든 / 그 많은 새 짐승에 빌붙일 애교라도 가졌단 말가? / 相琴鳥처럼 고운 빰을 채롱에 팔지도 못하는 너는 / 한 토막 꿈조차 못꾸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거니 / 가엾은 박쥐여! 검은 화석의 요정이여!(1956. 유고 『육사시집』)
이제 우리 시인들의 친필 작품들이 국가의 문화재로 등록되는 쾌거를 보면서 우리 시인들은 자신의 시세계를 더욱 고차원으로 정립하고 작품도 문학성이 출중(出衆)한 시의 위의(威儀)가 되도록 절대적인 열정을 모아져야 할 것이다.
지난 여름호의 작품들은 김민수가 ‘살기가 시시하면 시를 쓴다 / 무엇을 해 봐야 더 시시하니 / 시를 쓰면서 시름이 시가 되고 / 시시함도 시가 된다 / 웃음 뒤 울적함이 눈물을 쓰고 / 거울 속에 서 있는 거짓을 닦고 / 시를 쓰면 시시함이 시원해 진다 / 딱지 앉은 가슴 / 응어리 한 꺼풀 벗겨져 / 불그래 새살이 돋고.’라는 작품 「시를 쓴다 2」가 우선 눈길을 흡인시킨다.
김민수는 시인이 시를 쓰면서 스스로 내뱉는 시인의 독백이다. 시인들은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봄직도 한 일이다. 그는 ‘웃음 뒤 울적함이 눈물을 쓰고’ 이미지를 재생시키고 있다. 그것이 ‘시를 쓰면 시시함이 시원해 진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유(思惟)의 중심에는 왜 시를 써야 하는지를 진솔하게 적시하고 있다.
본의 아니게 연(緣)이 닿은 개똥밭 / 누구나 혼자 머물다 바다로 간다 / 외로이 / 다들 그래도 저승보다 이승타령 / 왜냐고 / 사랑 때문에, 돈 때문에 / 사랑은 고독의 문신 / 돈은 육신의 문서 /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일 없다면 / 사랑 아니, 고독이 문제겠지-중략-히말라야 밤하늘 무수한 별 / 홀로 떨어져 있는 별이 더욱 빛나지 / 곧 그렇게 될 거야.
--김민수의 「고독의 독백」 중에서
한편 그의 독백은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사랑’과 ‘돈’이라는 실재(實在)의 인간적인 고뇌를 분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당면한 ‘홀로 떨어져 있는 별’이라는 시적 정황이 ‘고독’의 깊은 심연으로 흡인시키고 있다. 그것이 ‘개똥밭’이라는 인간세의 ‘연’과 그에게 내재한 휴머니즘적인 정서와 교감할 때 ‘사랑 아니, 고독이 문제’라는 결론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무거우니 여유조차 묵직하여 감당하기 버거우이 // 가슴 뛸 때 / 눈빛 강렬할 때 / 향기 뿜어줄 때 / 환희를 안겼을 때 / 아집을 세웠다는 사실이 창피하구려 // 행운의 여신은 거치적거릴 만큼 / 널려 있을 거란 착시현상이 자만이었다는 걸 / 겨우 알아가려는데 / 근육은 몽창시리 빠져 버렸수다 // 그래서 / 보이는 앞의 만물에 / 이제라도 새뭇새뭇 하다보면 / 느슨했던 맥박이 / 퉁퉁 살아주려나 / 변명을 반성처럼 하려하오.
--이철희의 「성찰」 전문
또한 이철희는 ‘성찰’에서 ‘버거우이’, ‘버렸수다’, ‘새뭇새뭇’ 등의 익숙치 않은 단어가 새로운 시적 상황과 결합하고 있는데 어조의 실감을 유로하는 특징을 이해하게 한다. 어찌보면 북한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나이’라는 인생의 연륜에서 응시해보는 자아가 이제 ‘행운의 여신은 거치적거릴 만큼 / 널려 있을 거란 착시현상이 자만이었다는 걸 / 겨우 알아가려는데’라는 어조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그의 ‘성찰’은 ‘변명을 반성처럼 하려하오’라는 그의 진실이 분사하고 있다.
한편 그는 ‘초승달빛이 차다 // 사방이 비수처럼 시퍼렇게 차다 / 살을 에는 삭풍으로 온몸이 차다 / 매몰찬 사내놈의 비웃음이 차다 // 소녀가 고개를 야멸스레 떨구고 / 산부인과병원 계단을 내려오다가 / 후들후들 떨리는 발목을 잔뜩 긴장하고 / 흔들리는 초점으로 / 밤하늘을 쳐다보기에 / 멀찍이서 나도 / 넌지시 올려다보았더니.(「냉소」 전문)’와 같은 어조로 그가 착목(着目)한 사물들이 모두가 ‘차다’는 체감(體感)으로 시적 상황을 전개하면서 긴장(후들후들 떨리는 발목을 잔뜩 긴장하고)과 관망(넌지시 올려다보았더니)이라는 심적 변화를 통해서 결국 ‘냉소’라는 메시지를 유로하고 있다.
이처럼 이철희는 ‘성찰’이나 ‘냉소’라는 그의 내면 정서에서 시적으로 투영시킨 관념이미지는 자신의 가치관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을 이해하게 한다. 우리 인간이 시적대상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함으로써 미적 예술이 성립되는 시법을 잘 활용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가을이 그리워 / 산골 여울목에는 / 찬바람 노을에 걸려 / 경이로운 그림으로 피어난다 // 바람소리 / 숲속을 지나 / 산기슭 언덕 움막 뜰에 / 오동잎에 / 새겨진 사연마다 / 소리 없는 아픔의 방황 서러움이 / 응결돼 고독이 시려온다.
--공정식의 「가을 명상」 전문
여기 공정식은 어떠한가. 공정식의 가을도 ‘고독’이다. ‘그리움=고독’이라는 등식을 성립하여 ‘아픔’과 ‘서러움’으로 그의 ‘명상’은 시작된다. 그는 시각(산골 여울목, 노을, 산기슭 언덕 움막, 오동잎)뿐만 아니라, 청각(바람소리)적 이미지까지 복합적으로 공감각적 혹은 절대 심상으로 그의 시혼을 ‘고독’으로 응결시키고 있다.
또한 그는 함께 발표한 ‘인생은 / 잠깐 머무는 듯 / 선회(旋回)하는 날개를 달아 / 과거도 / 현재도 / 미래도 / 모두 함께하는 / 세월이 / 흐르는 듯 가고 / 고여 있는 듯 / 흐르고 간다 // 또 흐르고 가는 인생이란다 참!( 「흐르는 인생이여!」 전문)’과 같이 ‘가을’이라는 시간성에서 추출한 ‘고독’이 바로 ‘세월(과거, 현재, 미래)’에서 재생한 이미지가 그의 인생론(인생이란다)으로 명징하게 적시하고 있다.
코앞에 두고도 / 단 한 번을 만나지 못해 / 그리움만 키웠다 // 그리워 그리워서 / 헐벗은 몸이 되어 / 휘파람 소리만 냈다 // 눈물은 눈(雪)이 대신하고 / 한숨은 바람이 대신했다 // 사랑이란 / 꽃짐을 지고 사는 것 / 무겁지만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 일기장 같은 것 // 겨울나무 / 바람소리 빌려 눈물 닦는다.
--김민정의 「겨울나무」 전문
김민정은 ‘겨울나무’로 의인화하여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로 심연의 진실을 토로하는 화법으로 시를 전개하고 있다. 앞에서 보아온 화자 ‘나’보다는 ‘겨울나무’라는 사물을 통해서 자신의 정감을 동화(同化-assimilation)하거나 투사(投射-project)하는 시법은 우리들의 공감을 확대하고 있다.
그는 ‘겨울’의 시간성에서 생성시킨 이미지는 ‘그리움’이다. 여기에는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겨울나무’의 이미지나 상징은 대체적으로 계절(시간성)을 통해서 긴 휴식을 취하면서 도래할 내년 봄의 이미지, 즉 새생명의 탄생 등을 꿈꾸면서 새로운 세상을 그리워하는 상상과 관념으로 나타나는데 그의 명민한 감정이 잘 투사되어 ‘그리움’과 ‘사랑’을 복합적으로 흡인하는 의식의 흐름으로 사물의 의인화에 기여하고 있다. 함께 발표한 「내님」에서는 ‘불보다 뜨거운 심장을 / 호수보다 푸른 새날을 / 끝없이 내어주는 / 그는 바로 / 사랑을 주기에 충분한 사람’이라는 사랑의 대상이 애절하게 현현되고 있어서 ‘겨울나무’의 이미지는 더욱 명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의인화(personification)는 사물이나 추상적인 개념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언어 표현의 한 방식으로서 우리 시에서 많이 응용하여 독자들에게 생동감 있게 다가가는 시창작법이다. 모든 자연물(사물)들이 우리 인간의 존재양식과 연결하여 생명력을 형상화하는 특징이 있다.
할아버지 지게에 올라앉아 / 보물 대접 받으며 / 봄바람과 함께 / 밭으로 외출을 했네 // 가로다지 볼록한 배불뚝이 / 좁은 아가리의 생김새 / 생활 속 숨결이 묻어나는 멋과 / 소박함을 느낄 수 있네—중략-풍요로운 수확 안겨주려 / 지독한 냄새도 마다 않고 / 새 새명 지키려고 밭으로 / 씩씩하게 나가는 장군, 똥장군.
--박수여의 「똥장군」 중에서
박수여는 옛 할아버지 시대의 우리 농촌 정경을 재생함으로써 잊혀져가는 순박한 정서가 ‘새 새명’과 교감함으로써 시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요즘 시법에는 어떤 이야기를 도입해서 그 과정이나 상황을 전개하면서 주제를 창출하고 그 시인의 진실을 결론으로 적시하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시인들을 많이 대할 수 있게 한다.
그는 함께 발표한 「연꽃차」는 짙은 서정성이 가미된 안온한 작품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 / 진한 그리움으로 배어 있는 / 은은한 향기 선물로 주어 / 모난 마음 어루만져 준다.’는 심리적인 안정을 유로하고 있어서 ‘연꽃차’가 갖는 이미지가 돋보인다. 특히 ‘극락정토’, ‘윤회의 설법’, ‘연화교 계단’, ‘아미타불’, ‘삼라만상 중생’, ‘극락세계 관문’ 등의 불교적인 용어가 시어로 장식되는 ‘은은한 향기’가 넘치고 있다.
나여, / 한번 그득하도록 담어보고 싶은 / 항아리 / 나여, / 고독한 이여 / 못견디게 가슴 위에 부비고 싶은 / 아아, 국화 위에 지는 / 나래의 그늘 같은 자여 / 끝내 둥그렇게 맺히우고 싶고나.
--『한국시원』 제9호 장윤우의 「자화상」 전문
장윤우 원로시인의 작품을 오랜만에 읽는다. ‘자화상’이란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나여,’하고 나에게 몇 마디 말을 전하려 하고 있다. 그는 하나의 기원이나 욕망같은 어조로 자신을 몰아세우면서 ‘고독’함을 독백처럼 분사하고 있다. 그는 ‘담어보고 싶은’, ‘부비고 싶은’, ‘맺히우고 싶’다는 여망의 의식으로 형상화하는 ‘나’를 새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함께 발표한 「1+1」에서는 ‘하라하라 하지말거라 / 평생 서울내기인데 / 나는 영혼을 떠다니는 자칭 연금술사이다 / 미끄러진 채 흙탕물 속에서 / 진흙은 비집고 올라서다 / 곡선과 기체(氣體)로 엮은 자화상이다.’라는 어조로 노년의 ‘자화상’을 반추하고 있다.(『문학미디어』 2008. 가을)
‘나’와 서정적 자아의 성찰 인식
지난 봄에는 사회적으로 많은 현상들이 생성하여 우리들의 이목을 집중한 사례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남녀간에 성희롱이나 성폭행이라는 불미스러운 행위가 특정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서 자행되었음에 분노를 느낀 일부 여성들이 Mee too라는 운동을 시작하면서 검사, 도지사, 정치인, 예술인 등등 특권층들이 줄줄이 고소고발로 이어지는 수치스러운 행태가 뉴스로 매일 떠들어대고 있다.
우리는 자고(自古)로 ‘남녀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유교의 전통적인 교훈에 따라서 남녀가 유별(有別)한 사회생활이 습관화되었으나 사회의 대변혁으로 남녀평등이니 여성상위니 하는 새로운 풍조가 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여성들이 당당하게 사회의 모든 분야에 진출하여 실력을 발휘하여 오히려 남성보다도 더 훌륭한 직위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근면으로 우뚝 서고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생활의 변천에 잘도 적응하면서 남녀가 대등한 위치에서 동행하여 여성의 권익은 향상되고 남녀의 자유로운 생활패턴에서 자유롭게 상면(相面)과 교제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지나치게 여성을 희롱하거나 때로는 폭행에까지 이르러서 Mee too라는 불명예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 문단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 당시「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우리 시인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회자(膾炙) 되었던 최영미 시인이 지난 2017년 12월에 발행된 『황해문화』에 수록된 작품 「괴물」 이 뉴스면을 온통 도배질하고 있어서 지금도 그 귀추를 헤아릴 수가 없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 Me too /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 불쌍한 대중들. //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 이 나라를 떠나야지 /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 괴물을 잡아야 하나.
그렇다. 시라고 단정하기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다.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라는 약간 비꼬는 듯한 어조에서 볼 수 있듯이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는 신성한 영역에서 조망해본다면 ’En‘이라는 화자를 누구나 눈치챌 수 있다는 점과 전개가 너무 적나라하다는 점에 우선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으로 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실제 인물 고은(85) 시인라는 것이 판명되면서 그에 대한 거부운동은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직 미확인된 보도이지만 전국에 세워진 그의 시비를 모두 철거하고 각종 교과서에 실린 그의 작품을 모두 삭제한다는 것. 그리고 수원시에서 제공한 그의 집(문화향수의 집)에서도 퇴거해야하는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글도 시가 될까. 시 맞다. 이런 글도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로 썼다. 그저 평범한 일기장이나 고발문인 것처럼 읽히지만, 제목 ‘괴물’이 우선 풍자적이고 내용 또한 풍자로 가득 차 있다. ‘풍자 = 고발’이다. 실크 정장이 구겨지고 검정색 조끼에 얼룩이 묻는 것은 순수에 때가 묻는 것이다. 은유다. 게다가 마지막 두 행은 이 시가 ‘고발문학’ 혹은 풍자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략>-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도 그리고 문단권력이 만들어낸 성추행과 성희롱. 시 한 편을 통해서라도 나를 포함한 모든 남성문인들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최영미 시인 - 참 멋진 시로 더 멋진 고발을 했다. 박수로 응원한다.’ 라는 글을 어떤 사람이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노털문학상’ 후보자를 더욱 당황하게 하고 있다.
각설하고 지난 봄호 『문학미디어』에서는 ‘나’를 사유의 중심축으로 창작한 작품들을 많이 대할 수가 있었다. ‘나’라는 화자는 바로 자아에 대한 인식이다. 그 인식은 나를 회상하면서 다양한 체험에서 창출된 이미지가 한 편의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전개과정을 살펴볼 수가 있다.
곱지 않은 거울 속의 낯 / 곱지 않은 내 안의 낯 / 이름이 반쯤 비어간다 // 무엇에 대한 무엇 / 확인해 보는 존재, 낯 / 현실은 나에게 선물이다 // 일상 속에 나는 부재중 / 고장난 나그네 길에 / 누군가 속도를 낸다.
--곽종례의 「살며 살아간다」 전문
우선 곽종례는 삶의 방식에서 인식하는 사유의 방향이 성찰의 관념적 내면에서 발현하는 존재의 문제에 심각한 가치관을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상황의 배경과 그 전개양상은 시작 담화의 진정성이 바로 곽종례의 인생관과 융합하고 있어서 그가 지향하는 ‘살며 살아’가는 인생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대체로 화자(persona)는 연극용어로서 가면이라는 말로 시적 담화 중에서 그 시인 자신이거나 ‘대리인’의 역할로 현현하고 있다. 우리들 자아의 내부에서 잠재해 있는 자아(ego) 또는 초자아(super-ego)가 어떤 현실상황과 부딪혀서 생성하는 진실이 주제로 현현되는 것이다. 곽종례의 진실은 바로 ‘반쯤 비어가는 이름’과 ‘일상 속에 나는 부재중’이라는 그의 인생관에서 창조된 인생론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확인해보는 존재’라는 자아의 인식과 성찰이 동시에 적시되는 시법을 이해하게 된다.
욕망의 진흙먼지를 / 어른스런 아이의 웃음처럼 웃으며 털어내니 / 파란 하늘에 적셔 해맑게 흔들리는 / 풀꽃을 닮은 / 나를 보네.
--정순영의 「해탈」 전문
정순영도 마지막 결어 ‘나를 보네’라는 어조는 ‘나’라는 중심축에서 ‘욕망의 진흙먼지를’ 털어내는 비움의 미학이 간명(簡明)하게 현현되고 있다. 그는 화사한 ‘풀꽃을 닮은 / 나’라고 시적 진실을 적시함으로써 ‘해탈’이라는 대명제에 대한 시적 담론을 정리하고 있다. 다시 그는 ‘나의 눈은 / 해맑은 햇빛이 찰랑거리는 아침에 / 눈을 부비는 / 시간 위에서 / 조잘거리는 시냇물과 새의 노래와 / 부드럽게 휘감는 바람소리를 / 보는 창입니다( 「나의 눈은」 중에서 )’라는 어조로 ‘나의 눈’에 대한 시각적인 형상과 함께 이 세상과 삶의 양태를 조감하는 자아의 인식을 발현하고 있다.
김민수도 ‘나를 본다’라는 어휘를 사용하면서 그가 감응하는 현실적인 양태를 발현하는 작품이 있는데 작품 「진짜 가짜」 중에서 ‘나의 눈은 앞에 있는 나를 본다 /호접몽! / 장자는 이것을 예언했던가 / 꿈이 진짜이고 가짜가 꿈인 세상 / 비트코인이 동전인 줄 아는 진짜는 / 테이터 편식에 시달리고 / 사람은 현기증에 시달린다.’라는 현실 비판적인 또다른 현상을 목도(目睹)하고 있다.
분별의 임계치 넘는 / 의식의 사각지대 / 불쑥 나타난 만리장성 / 적막은 밤의 언어 / 흐린 하늘같은 까다로운 귀로 /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 / 중력과 시간이 깨어진 공간 / 왼편으로 뛰고 있는 감정의 조각 / 냄새와 빛깔 허공을 떠다닌다 / 내 것이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 이상한 기관 / 창밖에 불던 바람을 그린다 / 문밖 어둠 소리에서 나의 나를 본다.
--김민수의 「관음」 전문
김민수도 역시 ‘나의 나를 본다’는 결론으로 자아를 승화하는 시법에서 ‘관음(觀音)’이라는 초월이나 해탈의 경지를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의식의 사각지대’라는 상황의 설정은 그가 정립하려는 진실이 ‘중력과 시간이 깨어진 공간’과 ‘내 것이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 이상한 기관’이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궁극적으로 탐색하는 인생론은 바로 ‘나의 나를’ 보는 인식의 정립이다.
이렇게 시적 화자를 ‘나’로 설정하는 것은 대체로 우리 시인들이 전유물처럼 사용하는 점을 간과(看過)하지 못하는데 이는 일인칭인 ‘나’는 앞에서 말한 퍼소나일 수도 있고 그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 문제는 ‘나’를 잘못 적용하면 실제 시인인 ‘나’가 담론으로 적시하는 고백이거나 독백(혹은 넋두리, 푸념)으로 표현되면 시적 묘미가 약해 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파스칼은 그의 「팡세」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비록 진리를 발견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하더라도 최소한 자기의 생활을 율(律)하는 데는 도움을 준다’는 말로써 자아의 인식이 작품의 창작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도 얼마나 소중한 중심축을 형성하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와 같은 어조는 이병비가 ‘열차는 앞으로 / 나는 뒤로 / 한참을 달려 멈춰선 곳(「교차로」 중에서)’, 손경희는 ‘지금 / 나는 / 차를 마신다(「너를 비운 채」 중에서)’, 박재경은 ‘된서리에 놀라 감빛으로 타들어간다 / 내 몸 아닌 당신 / 감이 멀다 아리다’(「늦가을의 무늬 아리다」 중에서)’, 김근이는 ‘시간과 세월이 / 앞뒤에서 / 나를 잡아챈다(「고독」 중에서)’ 그리고 최호림도 ‘내가 머문 이 해안의 달빛은 / 사랑이 떠난 뒷모습도 적시고(「그대의 바다」 중에서)’ 등으로 ‘나’를 시적으로 승화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일인칭 대명사인 ‘나’와 대칭되는 화자가 이인칭인 ‘너(혹은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가 시를 감상할 때 전적으로 감응으로 흡인시키는 화자들이 바로 ‘나와 너’ 등으로 현현하는 정감이 넘치는 담화를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우덕호가 ‘그러나 만남 후에 찾아오는 허전함은 / 너와 나의 울먹이는 표정만을 뒤로한 채 / 우리의 잡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묻히지(「우리가 벗이 되어」 중에서)’, 박성구의 ‘눈처럼 희어져 가는 / 그대와 나 / 여전히 / 손잡고 가고지고(「그대 있음에」 중에서)’ 역시 손경희도 ‘그대를 안고 / 그대를 품으며 / 살아갈 수만 있다면 // 어찌 외면만 하리오(「두루마리 화장지」 중에서)’와 같이 대칭의 시법도 묘미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 화자 ‘나와 너’ 등은 만유의 사물을 의인화하는 시법도 잘 적용하면 퍼소나(나의 대리인) 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적절하게 수행하는 대변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너 또는 그, 우리’라는 화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시인들도 많이 있다.
읽던 시 / 식은 찻잔에 붓는다 / 긴 숨 버릇대로 불어서 보내고 / 고개 저어 식힌다 / 뜨거워지는 눈시울 버석인다 / 어떻게 이 시인은 / 공감의 출렁임 너머 / 이런 공감각의 미로에 섰을까 / 어렴풋이 어리어 / 잠자리 날갯짓으로 꿈으로 / 별 하나 따고 있다.
--최인호의 「별을 따는 아이」 전문
그렇다. 최인호는 화자를 동원하지 않는다. 굳이 화자를 들추어낸다면 ‘시인’을 화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관망하거나 감응한 정서가 ‘시인’의 언어로 발현되고 있다. 이처럼 ‘나’ 등의 화자 없이도 이 시인의 담론이나 주제 등의 진실을 이해하면서 공감하게 된다.
한 번도 꽃망울 피운 적 없고 / 기대어 쓰러진 적 없이 / 바람소리 갈라지던 긴 회랑에서 / 무겁게 속울음 밟던 날 / 살별처럼 흐르는 작은 평온을 / 오랫동안 입상으로 마주하며 / 긴 침묵의 강가에 서 있네 / 흐르는 구름의 상처를 보듬으며.
--『한국시원』에서 이옥희의 「투시(透視) 1」 전문
부산대 고 김준오 교수의 『時論』에 보면 시인과 독자를 연결하는 텍스트(메시지)가 표현기능에 나타나는 감탄, 정조 등의 양상으로 그 어조가 상호 절대적인 공감을 흡인하는 시법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모른다. 위의 이옥희도 작품겉면에서는 나와 너라는 인칭 화자가 없는데도 그 시인의 진실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어서 그가 내면에서 분사하는 관점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자아(the ego)는 결국 자애(self love)에 해당하는 인생의 과정을 재생하는 심리적인 현상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던 것도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정신적인 메시지를 심어주기 위한 교훈으로써 우리 시창작에서도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는 것이다.(『문학미디어』 2018. 여름.)
삶의 방식과 사유의 지향점
무술년 새해를 맞았다. 연년유여(年年有餘)라고 써서 보내던 연하장도 언제부턴가 이메일로 혹은 문자로 간편하게 새해 안부를 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의 삶으로 전환한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혁명은 우리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정신세계까지도 많은 변화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들의 관심은 연초가 되면 각 신문사에서 실시하는 신춘문예 발표에 쏠린다. 문학지망생들의 최상의 관심이며 기대가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해마다 신춘문예의 열병을 앓아보지 않은 예비문인들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새해가 밝아지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신춘문예 당선작품들이고 보니 영하의 날씨에도 시내 신문가판대를 순회하면서 신문을 사고 이를 오려서 스크랩을 해서 읽고 음미하면서 나도 언젠가는 기필코 당선의 영광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던 옛날이 그립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부턴가 숭엄한 인간의 사유 영역을 변화시키고 있다. 신문 사는 일도 집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고 하는 조그마한 사실들은 아마도 경제발전과 과학도약의 영향이 아니겠나라고 생각해 보지만 딱히 그런 것만이 정서미숙의 영향이나 결과라고는 보지 않는다.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乖離)는 다양한 사유(思惟)의 지향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러한 편리한 삶의 추구로 인해서 삶의 방식도 단순하면서도 실리적인 패턴으로 바뀌어 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응하는 우리의 시정신이나 표현방법이 다양하게 변혁을 가져왔다.
유월의 제주 / 종다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 말해주고 싶어요 /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 발전에 끝이 없죠 /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L의 H일보 당선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전문
보라. H신문 신춘문예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신춘문예 당선작품이라는 선입견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은 왠일일까. 너무 쉽게 씌어졌다는 것일까. 아니면 특별한 주제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무튼 신춘문예를 위해서 열정을 결집한 고투(苦鬪)의 흔적은 느낄 수가 없다는 독자들의 후일담이겠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의 평을 들어보자. 읽게 만드는 시, 노래처럼 흐를 줄 아는 시, 특유의 리듬만으로 춤을 추게 하는 시,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천진의 시, 근육질의 단문으로 할 말은 다하고 보는 시, 무엇보다도 ‘내’가 있는 시,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 시란 강박 속에 도통 웅크려본 적이 없는 시, 어쨌거나 읽는 이들을 환히 웃게 하는 시, 웃는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예쁜 얼굴을 가져보게 만드는 시라고 온갖 여구(麗句)로 칭찬하면서 이를 당선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들 시인들이 시를 한 편 창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체험을 통한 인생의 근본을 먼저 대입하는 주제의 설정을 기초로 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한 하나의 일상적인 스토리가 평범한 표현에 의해서 탄생되었다면 평론가들이나 시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창작한 시인들에게서는 간단하게 잘 된 시 혹은 좋은 시라는 평을 획득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지난호 『문학미디어』에서는 열 한 분의 시인들이 작품을 발표하였다. 모두가 이 각박한 생활에서 감지(感知)하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조용한 이미지들을 재생하고 있다.
움막 창가 인적 없는 / 차 한 잔 없이 외로워도 / 소슬한 바람소리가 정겹다 // 담소할 사람 없어도 / 넓은 책속에 진인眞人들의 숨소리에 / 담뿍 담을 영혼이 있어 좋습니다 // 이제는 / 모든 망상 내려놓고 / 내 즐거운 꿈과 이상세계를 / 한 올 한 올 엮어....// 이렇게 이 터 이 움막이 즐겁습니다.
--공정식의 「혼자 사는 법」 전문
먼저 공정식이 전하는 삶의 방식이나 지향점은 그가 설정한 시적 상황으로 보아서 ‘움막’이라는 공간의 고독감을 형상화하는 주변의 여건들이지만 ‘소슬한 바람소리가 정겹다’거나 ‘넓은 책속에 진인眞人들의 숨소리에 / 담뿍 담을 영혼이 있어 좋습니다’라는 어조는 바로 그의 담담한 인생적인 사유의 단정을 분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미 ‘혼자 사는 법’을 익히 터득하였기 때문에 움막생활의 외로움 같은 것은 없다. 이는 그가 단정하는 ‘이제는 / 모든 망상 내려놓고’라는 체념과 성찰의 심원(深源)만이 그와 동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시법(詩法)에는 강심원의 작품 「내려놓는다는 것」 중에서도 다음과 같이 현현되고 있어서 이들이 간직한 시심의 원류에는 인생의 문제가 너무나도 진지하게 가득차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내려놓으니 / 마음이 편하다는 말은 / 그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 치매로 시작하여 / 폐렴으로 집 떠나 병원을 전전하며 / 요양병원에서 삶을 내려놓을 때까지 /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그렇다. 우리 인간들의 내면에는 누구에게서나 선(善)이나 무아(無我)의 경지를 꿈꾸고 있다. 더구나 시인들에게서는 인본주의의 탐구라는 시적 대명제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주제의 창출은 인간의 고통을 제거하고 활달한 인격체로서의 삶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삶을 영위하는데는 몇 갈래의 지향점이 있는데 물론 사람의 교양과 지혜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대체로 살펴보면 한생을 그냥 지각없이 오욕칠정의 탐구에만 매달려서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진실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으면서 침착하게 살아가는 진정한 인간미를 감응(感應)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 길도 모르며 / 두 가지 길을 찾다가 / 잃어버린 길 // 가장 높은 길 / 가장 낮은 길 / 멀고도 먼 길 / 가장 가까운 길 // 비어 있는 길 / 오직 한 길 / 내가 가는 길 // 오솔길로 접어들어 경사진 길을 걷는 / 헤쳐가는 인생길
--안관석의 「길」 전문
안광석의 ‘길’은 어떠한가. 이처럼 삶의 길에서 만난 진정한 자신만의 ‘길’, ‘헤쳐가는 인생길’은 바로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여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련과 고통이 상존하지만 그가 ‘오직 한 길 / 내가 가는 길’은 오로지 오솔길, 경사진 길 등을 헤쳐나가야하는 운명이다.
가을은 / 집을 나서게 한다 // 먼 푸른 하늘이 그렇고 / 단풍 물드는 나무들이 그렇고 / 옷깃에 스미는 바람결이 그렇게 한다 // 먼 옛날 고향이 생각나고 /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 /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 삼라만상이 기도 속에 머무는 / 아름다운 가을 // 그 분위기 속에서 / 가을을 음미하며 / 시를 쓰리라 // 한 생애 돌아보며 / 소중했던 인연들에게 / 감사한 마음으로 두 손 모은다.
--신미철의 「가을엔」 전문
한편 신미철은 계절적으로 풍요로운 가을이 되면 무조건 ‘집을 나세게’ 된다. 그를 유혹하는 것은 푸른 하늘과 단풍 물든 나무와 옷깃에 스미는 바람결이다. 어쩌면 누구나 훌훌 틀어버리고 대자연 속으로 묻히고픈 계절의 향훈이다. 거기에는 고향과 추억이 함께 되살아나는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래서 그는 가을이 되면 그 분위기를 음미하면서 ‘詩를 쓰’게 되는 삶의 활력을 집중시킨다. 그는 이러한 시작(詩作)을 통해서 ‘한 생애를 돌아보’는 소중한 인생관을 재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는 그 시인의 체험을 가장 중시하는 연유도 그가 감응하는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한 생애를 통해서 어떠한 체험, 즉 인생의 칠정(七情-喜怒哀樂 愛惡慾)에서 가장 깊게 상관하는 체험이 바로 이미지로 재생하는 시의 모티브가 되고 주제로 승화하는 것은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남해 / 한려수도 / 눈에 밟혀 // 다시 찾은 암자 향한 / 절험(絶險)한 오름 / 숨 가쁘다 // 오묘한 벼랑 끝자리 / 자비품은 부처님 시선 / 내리 머문 그 곳 // 해무(海霧) 잠긴 드넓은 바다 위로 / 머리만 솟아 보이는 섬, 섬들이 / 오순도순 죽순처럼 몽롱하다.
--정광지의 「향일암」 전문
정광지도 그가 찾아가는 방향은 ‘다시 찾은 암자 향한 / 절험(絶險)한 오름 / 숨 가쁘다’고 토로하면서 ‘향일암’을 오르고 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아니면 무엇을 위하여 숨가쁘게 ‘오묘한 벼랑 끝자리’를 오르고 있는가. 그는 오르다가 ‘자비품은 부처님 시선 / 내리 머문 그 곳’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응시(凝視)하는 삶의 길을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암병준의 「핀랜더 보살」 중에서도 ‘은근과 끈기의 민족성 / 닮은 코리언과 핀랜더 / 우랄알타이 고향으로 / 함께 가는 길 // 妙行無住 無住無想’라는 어조로 삶의 방식과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산에 올라 / 시원한 바람 다니는 길에 편안히 앉아 / 지난날의 싱거운 부스러기를 파낸다 / 각시풀 곱게 땋아 / 철쭉꽃대 다듬어 비녀를 꽂아 / 양지바른 길섶에 누이면 // 낮에 핀 노란 달맞이꽃 / 부끄러워 눈 가리고 / 언제 왔는지 기억 없는 추억이 / 웃음 배시시 // 오르는 만큼 / 내려가야하는 / 덧셈과 뺄샘이 / 정직하기만한 산 / 이렇게 오르고 내리며 하루를 살아간다.
-- 강신기의 「산이 있기에」 전문
강신기도 동일한 심원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산’이라는 절대공간에서 펼쳐져야 하는 삶의 범위나 그 무게가 시간성과 동시에 분사하고 있다. 아련한 추억이 샘솟는 양지바른 길섶에서 잠시 회상하는 삶의 중심이 마지막 연에서 결론지었듯이 ‘오르는 만큼 / 내려가야하는 / 덧셈과 뺄샘이’ 확연하게 현현된 인생길이다. 이것을 그는 ‘정직하기만한 산’이라고 했다. 이 정직한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그의 삶의 ‘하루’이다. 단순하다. 그러나 그가 유유자적(悠悠自適)으로 일관하는 사유의 원류에는 이미 그만큼 살아온 인생연륜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지금까지 훑어보았지만 시와 인생(혹은 삶)과 불가분의 상관성은 재론할 필요도 없이 끝날 때까지 동행해야 하는 숙명적인 존재이다. 삶이 있고 인생이 있고 시가 있는 삶의 해법은 바로 인생과 모든 현실이 서로 화해하고 인생의 절대적인 가치관과 인생관이 철저하게 시로 형상화할 때 우리는 좋은 작품을 창작하게 될 것이다. 요즘 시들은 흔히들 아픔이 없다고 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들이 칠정중에서 애(哀)와 노(怒)를 멀리하고 절망과 갈등을 경험하지 못한 채 생활과 인생을 안주(安住)하려는 안일한 생활방식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삶에의 절망 없이 삶에의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삶에는 절망과 분노와 질투와 경쟁이 있게 마련이다. 일찍이 박목월 시인께서도 한 말씀 하셨다. ‘삶도 시와 같다. 왜 사느냐? 즐겁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 삶의 본질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삶의 속성을 어느 면에서 일부 풀이한 것이다.’ 지금 현재의 삶이 더욱 소중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문학미디어』 2018. 봄. )
삶과 동행하는 시간성의 이미지
지난 계절 가을에는 우리 시단(詩壇)에서 한국시인협회가 주관한 ‘2017 평창 한중일 시인축제’가 ‘평화平和へいわPeace, 환경環境かんきょうEnvironment, 치유治癒ちゆHealing’를 주제로 하여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행사의 일환으로 강원도 평창에서 시인 300여명이 참가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날 주제에는 한국의 오세영 시인(「삶의 지표종(指標種)으로서의 시」)과 중국의 뤼진 시인(「시는 사람들의 친화력과 사회성을 키워 줍니다」) 그리고 일본의 이시카와 이쓰코 시인(「시의 힘을 믿으며」)이 진지하게 시의 문제를 발표하여 참가자들의 공감을 가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낭독한 나태주 시인은 ‘마당을 쓸었습니다 /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 지구 한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 마음속에서 시 하나 싹 떴습니다 /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 아름다워졌습니다(「시」전문)’라고 시를 정리하고 있었다.
지난 가을호 『문학미디어』의 시를 읽으면서 문득 우리가 살아가는 행로에는 언제나 평화와 환경 그리고 치유라는 대명제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거기에는 시간성(혹은 세월)이 동행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삶에서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시간과 공존하면서 모든 생활의 행위와 사유의 지향점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의 사상가이며 시인인 R.W. 에머슨은 삶은 실험이다. 많은 실험을 할수록 좋다고 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일생동란 얼마나 많은 실험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가늠하면서 그 많은 실험에서 추출한 진실과 진리는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삶이 바로 진정한 인생일 것이다. 이러한 삶의 진행도 T.S. 엘리엇의 말대로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있을 것이며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이 담고 있을 것이라는 시간과 삶의 상관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품들을 일별해보면 우선 삶과 세월의 화해를 탐구하는 시적 진실을 구명(究明)하여 하나의 인생을 정리하려는 정서의 응집(凝集)을 엿보게 하고 있다.
나무는 하늘을 향해 포효도 합니다 / 그러나 서로가 지혜롭게 상생하며 /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살아갑니다 // 나무는 마음을 비우고 삽니다 / 보낼 것 보내고 비울 것 비우며 / 수행하며 세월을 맞이합니다 // 나는 청맹과니 / 나무가 지닌 미덕을 제대로 못 보지만 / 나무처럼 반듯하게 살고 싶습니다.
--안광석의 「나무처럼」 중에서
안광석에게서 이러한 정서가 삶의 방식이라면 ‘나무처럼 반듯하게 살고 싶다’는 안광석의 소망이 명징(明澄)하게 현현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기원을 위해서 ‘마음을 비우고’ 살거나 ‘보낼 것 보내고 비울 것 비우며’ 살아야한다는 메시지를 적시하고 있어서 그의 ‘수행’은 아직도 진행중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삶의 ‘지혜’이며 ‘미덕’임을 그는 이미 그의 인생의 가치관으로 정착시키고 있지만 나무는 ‘사람 사는 세상과 다르게 / 묵상만 하고 있을 뿐’ 잡다한 우리 인간들과 같이 소란럽지 않게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허(空虛)의식을 ‘수행’의 지표로 세우면서 어느 도인(道人)처럼 살아가려는 그가 진정한 삶의(혹은 인생의) 가치가 존재의 이유로 정립하기 위한 하나의 결단으로 허심(虛心)을 궁극적으로 갈망하고 있다.
또한 작품 「가을과 바람」에서도 이 ‘나무’에 대한 정담(情談)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떠나는 것들은 때가 되면 / 반드시 떠나게 되어 있다고 일침하며 / 내 머리 위에 있는 나무가 내려다 본다’는 어조(語調)로 인식을 단정하면서 비움과 떠남과의 상징성을 우리들의 삶에서 시간성(가을)과 상관으로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불꽃 사르는 / 저 뜨거운 몸짓을 보라 / 얼마나 눈부신 삶의 모습인가 // 저 가풀막 헤치는 은어들을 닮아 / 나도 목숨 다하는 날까지 / 아름답게 열매 맺는 내일을 향해 / 삶의 영토를 꾸며 가꾸리라
--우덕호의 「저 은어들처럼」 중에서
우덕호는 앞의 작품과 같이 ‘처럼’이라는 직유법으로 시적 상황을 설정하고 ‘눈부신 삶’과 ‘목숨’의 대비는 그가 여망하는 ‘삶의 영토를 꾸며 가꾸리라’는 너무나 당위적인 인생의 진실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다시 그가 착목(着目)한 지점에는 ‘산란 앞둔 치열한 몸짓의 은어떼 / 그 생명의 불꽃 뜨겁다’는 ‘은어’들의 생존이 바로 우리들 인간의 삶과 유사한 상황으로 전개시키고 있어서 우리들의 시 읽기는 더욱 공감을 흡인하게 된다.
곱지 않은 거울 속의 낯 / 곱지 않은 내안의 낯 / 이름이 반쯤 비어간다 // 무엇에 대한 무엇 / 확인해 보는 존재. 낯 / 현실은 나에게 선물이다 // 일상 속에 나는 부재중 / 고장난 나그네 길에 / 누군가 속도를 낸다
--곽종례의 「살며 살아간다」 전문
곽종례의 삶에 대한 사유(思惟)는 평범하면서도 비범성을 확인하게 한다. 대체로 시창작에는 시인들의 체험을 가장 중시하면서 거기에서 창출된 이미지가 작품의 중요한 소재나 주제로 정립하게 되는데 이 체험은 바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성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처럼 ‘무엇에 대한 무엇 / 확인해 보는 존재. 낯 / 현실은 나에게 선물이다’라는 어조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이러한 우리들의 삶이 포괄하는 이미지는 보편적으로 갈등과 고뇌, 분노 그리고 다양한 사유의 방식이 칠정(七情)의 성정(性情)에서 발현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이것이 종내에는 인식을 통해서 인내하고 화해하면서 극복하는 인간들의 심중(心中)을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곽종례의 경우는 ‘존재’와 ‘확인’이라는 심충구조에서 ‘고장난 나그네 길’에 서서 ‘부재중’임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작품 「항암처방을 받으며」 마지막 연에서도 ‘하루살이 짜증나 / 얼른 내일이 보고 싶다’는 어조에서 삶에 대한 번민이 잠재해 있어서 그는 ‘싶다’라는 보조형용사로 어떤 간절한 희망이나 기원을 토로하고 있다.
한 해의 허리 / 유월에는 / 중간점검이 필요한 계절 // 더 이상 짙을 수 없는 초록으로 / 가슴 설레던 유월은 / 하루살이의 삶조차 /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 이제는 / 신기할 것도 놀랄 것도 없는, 단지 / 지나온 얘기들만 홀연히 / 담았다 쏟았다 반복할 뿐 / 낡은 언어들로 잡다하다 // 더 이상 푸를 수 없이 / 푸르른 세상에서 / 황량한 겨울 속을 걷는 듯 / 팔다리가 무겁대 // 이제는 / 중간점검하고 가야겠다 / 버릴 것은 버리고 / 털어낼 것은 털고 가야겠다 // 온전한 나로 / 남은 길 가기 위해 / 중간점검해야겠다
--이병비의 「중간점검」전문
이병비는 어떠한가. 한 해의 중간 허리 ‘유월’쯤에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점검이 필요하다고 진술한다. 이처럼 시간성(유월)과 동행하는 삶의 애환에서 그가 창출한 이미지는 ‘하루살이의 삶’이라는 비유에서 그는 ‘담았다 쏟았다 반복’하는 ‘낡은 언어’, 그것은 바로 ‘더 이상 푸를 수 없이 / 푸르른 세상에서 / 황량한 겨울 속을 걷는 듯’한 잡다한 일상뿐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의미 없이 황량하기만 한 삶의 편린에서 그는 단정한다. ‘온전한 나’를 지향하는 성찰의 의지가 분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심도있게 톤을 높이는 ‘버릴 것은 버리고 / 털어낼 것은 털고 가야겠다’고 명징하게 토로하면서 ‘남은 길 가기 위해 / 중간점검해야겠다’는 어조로 시법을 정리하고 있다.
나이 들어 허름한 노숙 / 구겨진 인생이 대낮부터 잠들어 있다 / 상행선 하행선 / 기차는 때맞추어 출발하지만 / 재고로 남은 인생들은 가지도 못하고 / 오지도 못한다 //-중략-// 인생은 잠시 잠깐인데 / 지옥 같은 이 세상 뭣 때문에 고생하느냐며 / 같이 가자고 천국으로 같이 가자고 / 종 주먹을 대는 예수꾼도 있다
--송준용의「수원역에 가면」중에서
송준용은 수원역에서 목도한 노숙자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이것은 ‘구겨진 인생’이며 ‘재고로 남은 인생’이다. 시에는 언제나 삶의 이야기 있고 삶의 현장(공간)이 있고 삶의 시간이 있다. 거기에는 인식이 있고 성찰이 있으며 나아가서는 희구(希求)나 기원이 있다. 여기에서 그는 ‘허름한 노숙’이라는 상황 설정에서 이미 우리들은 눈치를 챘지만 인생이나 삶의 애환은 밤이 무섭고 독수공방이 무섭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아도 쓸쓸한 세상 / 수원역은 이대로 좋으냐고 물으며 / 나에게 낮술 한 잔 건네며 히죽이 웃는다’는 어조로 삶에 대한 심각한 넋두리를 풀어내고 있다.
이렇게 시간성과 삶의 대칭은 송준용이 ‘언제쯤 끝이 날까 / 그날이 언제일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 이 시대가 가고 다음 시대가 와도 / 퇴색되지 않은 양심의 피켓 하나 / 광화문 네거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일인 시위」중에서)’라거나 우덕호도 ‘아, 저 바람 뒤에는 / 무더운 여름을 딛고 찾아온 가을이 /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어가겠지(「가람 뜰에 이는 바람」중에서)’, 이 샘은 ‘시계 바늘이 한 바퀴 돌아 / 하나 될 때까지 / 문 여는 소리에 / 해바라기처럼 긴 하루가 / 숨을 쉰다(「하루놀이 . 1」중에서)’ 또한 ‘보일 것 같은데 /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 푸성귀 같은 시간들을 꺼내어 / 추억들을 올린다(「하루놀이 . 3」중에서)’라는 시간과의 동행을 통해서 삶의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
늦은 저녁 동네 골목을 돌아본다 / 어귀를 돌아 돌다 보면 / 골목은 골목을 맞이하고 / 내가 중년에 이른 시간만큼 / 이 작은 길도 많은 시간을 살아왔겠거니 / 종종거리며 살아가는 식구들 모습은 / 누구보다 이 길은 다 기억하고 있으려나
--이수견의「골목연가」중에서
집을 나서면 / 작은 골목을 지나면서부터 / 느긋함을 갖지 못하는 조급한 하루를 / 무엇으로부터 위안 받고 싶다
--이수견의「짧은 명상」중에서
그렇다. 이수견도 이 시간성과 삶의 동행에서 창출하는 이미지는 ‘동네 골목’에서부터 발현되고 있다. 그 골목에 질펀하게 깔려있는 인간들의 행태가 아련한 기억 속에 어른거리고 있다. 이제 ‘내가 중년에 이른 시간만큼’ 많은 시간과 삶의 행보가 동행해온 회억(回憶)이 체험의 한 대목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애환을 이제는 ‘느긋함을 갖지 못하는 조급한 하루를 / 무엇으로부터 위안 받고 싶다’는 심중의 진실을 기원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표상이며 시간이 남겨준 삶의 확인이다.
우리들은 이렇게 시간과 삶의 대칭을 통한 회상과 인식은 다양한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 상상력은 곧 이미지를 창출하는 원류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능력이 있다. 보고 듣고 겪었던 일을 돌이킨다거나 현재의 갈등 그리고 미래의 아름답고 활기찬 일들을 꿈꾸는 상상의 활동이 전개되는 것이다. 우리 시인들은 자신의 삶의 궤적(軌跡)에서 생성된 체험의 일단을 이미지화하고 거기에서 형상화한 의식의 흐름이 한 편의 작품으로 창조되는 그 시인의 시적 진실을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작품 「여백시편 . 10」에서도 ‘시간과 공간 / 그 합치점에는 / 언제나 희망과 절망이 / 교차하고 있다 / 그 교차지점을 지울 수도 없고 / 훌쩍 뛰어 넘을 수도 없다 / 시간, / 그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 인간을 연약하게 만들지만 / 공간, / 그는 허공에 가능성의 깃발을 달아놓고 / 인간을 방황하게 하고 있다’는 삶에서 상관하는 시간과 공간의 접맥(接脈)은 시법의 영원한 하나의 방편인지도 모를 일이다.(『문학미디어』 2017. 겨울.)
상상력의 재생과 이미지의 창출
올해에 우리 시단의 거성(巨星) 두 분이 세상을 떠났다. 김종길 시인이 91세로 후백 황금찬 시인이 99세로 별세하여 우리 시인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김종길 시인의 그 유명한 작품 「성탄제」가 우리 귀에 익숙하다.
어두운 방 안에 / 바알간 숯불이 피고,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 이윽고 눈 속을 /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 이따끔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 어느새 나도 /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 옛 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1926~2017.4.1.) 시인은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영문학자, 문학이론가, 번역자였으며(본명 김치규) 고려대 영문과 명예교수로 한국시인협회와 한국현대영미시학회, 한국 T.S. 엘리어트학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등을 지냈다. 목월문학상, 인촌상, 청마문학상, 육사시문학상과 이설주문학상을 수상했고 국민훈장 동백장,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시집으로 『성탄제』(1969년) 『황사현상』(1986) 『해가 많이 짧아졌다』(2004) 『해거름 이삭줍기』(2008) 등이 있다. 그는 부인 강신향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으로 힘들어 했으며 10일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황금찬 시인은 백수(白壽)를 누리면서도 먼저 떠나간 딸 애리를 사랑하는 애절한 작품「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를 우리들은 애송하고 있다. 그는 어느 글에서 ‘딸을 잃은 것과 부인을 사별한 것과 어느 편이 더 슬픕니까’라는 질문에 ‘슬프기야 아내를 사별한 것보다 딸을 잃은 것이 더 슬프지요. 그렇지만 아내와 사별한 것은 더 무섭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밤하늘에 별빛만 / 네 눈빛처럼 박혀 있구나 / 새벽녘 / 너의 창 앞을 지날라치면 / 언제나 애처롭게 들리던 / 너의 앓음 소리 / 그 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 그 어느 땐가 / 네가 건강한 날을 / 향유하였을 때 / 그 창 앞에서 /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 나비부인 중의 어떤 개인 날이 / 조용히 들리기도 했었다 // 네가 그 창 앞에서 / 마지막 숨을 걷어갈 때 / 한 개의 유성이 / 긴 꼬리를 끌고 / 창 저 쪽으로 흘러갔다 // 다 잠든 밤 / 내 홀로 네 창 앞에 서서 / 네 이름을 불러 본다 / 애리야! 애리야! 애리야! 하고 / 부르는 소리만 들려올 뿐 / 대답이 없구나 // 네가 죽은 것이 아니다 / 진정 너의 창이 잠들었구나 / 네 창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나 / 부질없구나
황금찬 시인(1918~2017.4.8.)은 강원도 속에서 출생하여「문예」와 「현대문학」을 통해서 문단에 나와 시동인 ‘청포도’를 결성하고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장과 추계예술대 강사를 역임하였다.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서울시문화상과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였으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시집으로는 「현장」(1965)「별과 꽃과 그리움」(2017) 등 39권이 있다.
이렇게 원로시인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원로 서정태시인(94)은 작품「이제부터」(『월간문학』)에서 ‘나보고 좀더 있다 가라 하네.’라는 어조로 건강하게 시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궂은 일도 보며 살만큼 살았으니 / 그만 떠날까 하고 / 신발 신고 바깥에 나와 보았더니 // 우거진 숲 나무는 가지마다 / 꽃을 맺어 촛불시위하네 // 머언 산엔 아른아른 아지랑이 / 공중에선 새들의 노래 / 따스한 햇빛은 사랑으로 내리고 // 천지가 함께하는 봄이 눈앞에 와서 / 이제부터 살맛나는 세상일 터/ 나보고 좀더 있다 가라 하네.
이처럼 시의 공유(共有)의 미덕은 아무래도 독자와 감동적으로 교감하는 것이다. 각설하고 지난 계절에 발표된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그 시인이 메시지로 현현하고 있는 주제가 어떤 정감으로 다가오고 있는지를 살펴봐야겠다.
작은 암자의 목탁소리 / 바람에 창들이 서로 붙들고 있다 / 창의 격자무늬, 비구니 스님의 불경소리를 담고 있다. / 파르르 떨리는 문풍지가 / 창을 바라보며 울상이다 / 편안하게 앉아있는 대웅전의 좌불상 /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고 있다 / 창너머 넘겨보던 짓돗개가 / 염불소리에 마루 밑에서 졸고 있다 / 창의 경계에 살금살금 몸을 내미는 목탁소리 / 창밖의 배롱나무에 안겨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 경계 속과 밖을 바라보는 / 격자무늬 창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먼저 『문학미디어』 여름호에 발표한 이연주의 「격자무늬 창」전문에서는 ‘작은 암자의 목탁소리 / 바람에 창들이 서로 붙들고 있다’는 시적 상황설정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 암자의 창틀에서 응시한 ‘격자무늬’에서는 ‘목탁소리’와 ‘바람’ 소리로 청각적인 이미지가 창출되고 있다. 또한 ‘비구니 스님의 불경소리’와 ‘파르르 떨리는 문풍지’ 소리까지 동시에 감응(感應)할 수 있는 상황은 시적 발상에서 가장 중시하는 이미지의 투영이 우리 오관(五官)을 통해서 재생할 수 있다는 시적 원리를 적절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안도감에 흡인(吸引)되고 있는 것이다.
이연주 시인은 ‘대웅전의 좌불상’이 온화한 참선의 경지에서 조용히 접하는 청각의 다양한 음미에서 ‘경계 속과 밖을 바라보는 / 격자무늬 창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그의 시적 진실을 착목(着目) 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작은 암자’의 ‘대웅전의 좌불상’이 우리 중생들에게 적시하는 메시지는 이 ‘격자무늬 창의 마음’은 미지의 시법(詩法)으로 남겨지는 현실적인 고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짙은 어둠 속에 깔린 모래알 같은 수많은 말들 / 창작은 모험 / 어둠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 희미한 빛이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 한 줄 한 줄이 문장이 되어 가다 / 어둠의 벽에 부딪쳐 / 출렁이는 수평선의 밤바다에 가라앉습니다 / 쓰고 지우는 것은 반복하는 침묵의 바다 / 아침 해가 솟구치는 그 곳 / 마침내 우주를 다독이며 / 기다리고 있는 사랑의 힘.
--이연주의 「따듯한 침묵」 전문
또 다시 이연주 시인은 ‘창작의 모험’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어둠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 희미한 빛이 마음으로 들어옵니다’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어둠의 벽’에서 창출하는 ‘한 줄 한 줄’의 ‘문장’은 경이롭지만 ‘어둠 속에 깔린 모래알’과 ‘수평선의 밤바다’ 그리고 ‘침묵의 바다’와의 대칭은 ‘마침내 우주를 다독이며 / 기다리고 있는 사랑의 힘.’으로 현현하는 ‘문장’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마법(魔法)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따뜻한 침묵’이라는 제재에서도 직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시적 실험의 실체 내면에는 그가 구현하려는 ‘침묵’의 이미지가 ‘우주’에 까지 형상화할 수 있다는 시인의 명민(明敏)한 상상력이 활화산으로 타오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하듯이 시창작에서 우리가 중시하는 이미지는 『시학사전』에 따르면 ‘신체적 지각에서 일어난 감각이 마음속에 재생된 것이다... 한 때 지각되었으나 지각되지 않는 어떤 것을 기억하려고 하는 경우나 체험상 마음의 무방황적 표류의 경우나 상상력에 의해서 지각내용을 결합하는 경우나 꿈과 열병에서 나타나는 환각 등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신체적 지각이 아니라도 마음은 이미지를 역시 생산할 수 있다. 한층 특수한 문학적 용법으로서의 이미저리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된 이미지군(群)을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대 맨홀뚜껑을 열고 / 下水道관을 내려다 본적이 있는가 / 용암처럼 뜨거운 피가 흐른다 / 아직 혈기가 있어 입에서는 하얀김을 내어 뿜는다 / 몇 날 며칠 어깨를 부딪치며 흘러온 것일까 / 집집마다 사람들이 외면한 것들이 모여 / 저렇게 힘찬 노래를 부른다.
--이문연의 「下水道」 전문
여기 이문연 시인도 ‘하수도’를 통해서 우리 인간사에서 하찮은 것들(‘집집마다 사람들이 외면한 것들’)이 모여 ‘저렇게 힘찬 노래를 부른다.’는 애환을 ‘下水道관’에서 발견하는 시인의 예리한 감성의 발현을 읽을 수 있다.
우리 시인들의 감성(感性-sensility)은 일반적으로 감각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오히려 감각을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다. 감각적 인식이나 감성적 인식이라고 하는데 철학자 칸트에 따르면 오성(悟性)과 감성은 지식을 구성하는 독립된 표상 능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오성은 판단을 행하는 자연적 사유 능력이지만, 감성은 대상에 촉발되어 표상을 낳는 능동적 능력을 말한다.
이처럼 시인의 감성은 시인이 현실 세계로부터 받는 일체의 감각적인 인식이며 현실 세계가 지니고 있는 모순과 진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시인으로서의 감정을 타오르게 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늘그막에 우리는 시를 쓴다 / 말이 없는 시와 말을 하는 시 / 농축된 생각의 무게들 / 그리고 쓰는 / 응축된 삶을 퍼올리는 놀이 / --중략-- / 햇살이 노를 젓는 오후 / 무말랭이를 말레시아라고 헛디딘 말도 / 시가 되고 그림이 되는 / 주름 많은 솥단지에 / 진하고 고소하게 끓여내는 오후.
남정혜 시인도 「사골국물」한 부분에서 ‘농축된 생각의 무게’와 ‘응축된 삶’이 화해하는 감성의 지향점은 ‘시와 말’이라는 근원적인 사유(思惟)의 궁극적인 도달의 환희를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골국물’을 우려내듯이 한 편의 시를 위해서 감성에서 탐색하는 이미지의 진의(眞意)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문학미디어』 2017. 가
을.)
삶과 성찰의 인생론적 진실 탐구
2019년, 기해해(己亥年)을 맞이하면서 모두들 한 해의 행복을 기원하는데 우리 문단에서는 신춘문예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만큼 문단적으로나 문학적으로 관심도가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문학잡지가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난립하면서 등단제도가 약간 쉬워지고 발표지면이 확대되니까 그 관심도 일부 문창과생들의 전유물로 바뀌고 말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중앙지는 물론이고 지방지까지도 신춘문예 당선작을 발표하고 있다. 옛날에는 가판대를 헤매면서 신문을 사서 모았으나 지금은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집안에서 편히 볼 수 있는 문명이기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당선작품들이 너무 난해하다는 수군거림들이다. 도무지 어법(語法)이나 문장 자체가 안된다는 평에서부터 주제가 없다는, 말하자면 일반 산문보다도 그 표현력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어느 신문 당선작의 마지막부분인데 ‘당신은 항상 깊이를 알 수 없어. 두근대는 소에서 산다. 꿈 속에 당신의 아비는 칼을 들고 쫓아오고, 또 하나 당신의 아비는 발목이 부러진 당신을 부축하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은 당신 어깨를 감싸고, 파도가 되었다가 호수가 되었다가 그저 무지개 장화를 신은 아이들의 퐁당거리는 빗물이 되었다가, 당신마저 발을 담그면 세숫대야 물은 심층을 알 수 없었다.’는 산문시를 보면 무슨 이야기를 또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당신은 항상 깊이를 알 수 없’거나 ‘당신마저 발을 담그면 세숫대야 물은 심층을 알 수 없었다’는 표현처럼
이해하기가 정말로 난삽(難澁)하다.
자, 그럼 지난 겨울호 『문학미디어』 수록 작품을 읽어보기로 하자.
몇 줄 / 어설픈 글 써놓고 / 오늘도 나는 / 시인인 척했다 // 백지장을 메워내길 / 60여성상 / 꿈속의 바람 같은 / 바람 속의 인연 같은 / 시업(詩業)을 붙들고 // 시란 대체 무엇이길래 / 시인이란 또한 무엇이길래 / 이토록 내가 / 내 목을 조이고 있는 것인가 // 따끈따끈한 / 아랫목 같은 온기의 // 아늑한 생애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 시인이길 바랐지만 / 갈수록 길은 / 보일 듯 말 듯 / 멀기만 하다 // 글밭에다 삶을 얹어 놓고.....
김시철 원로시인의 작품 「자문자답」 전문이 우선 눈에 띈다. 60년을 넘게 시를 써온 ‘시’와 ‘시인’에 대한 자성론이다. ‘시란 대체 무엇이길래 / 시인이란 또한 무엇이길래’ 스스로 자문하고 있어서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시를 쓴다는 일은 무엇이냐는 해법을 탐색하고 있는 듯하다.
이 원로 시인은 시인에 대한 원대한 여망은 ‘따끄따끈한 / 아랫목 같은 온기의 // 아늑한 생애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 시인이길 바랐’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여의치 않음을 안타가워하고 있다. 그는 한평생을 ‘글밭에다 삶을 얹어 놓고‘ 혹은 ’몇 줄 / 어설픈 글 써놓고‘ ’시인인 척했다‘는 스스로 뉘우침으로써 깨달음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성찰의 내면에는 우리들이 시를 사랑하고 즐겨 읽는 목적과도 상통한다. 시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거기에서 자신의 정갈한 인생을 구현하면서 지적인 만족을 획득하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는 아주 평범한 시의 목적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한 시인이란 M, 레이몽의 말처럼 시인은 그가 감각의 세계에서 붙잡는 것을 가지고 자신과 자신의 꿈에 대한 상징적으로 투시된 초상(肖像)을 단련해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시인이 자신을 인식하면서 성철하고 감응하면서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는 거룩한 삶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는 작품 「완행열차」 전문에서 ‘마음먹고 오늘은 / 여기도 서고 저기도 섰다가 / 떠나는 / 완행열차를 탔소 // 빨리빨리 / 급하게 달려온 인생이라 // 못본 것도 많고 / 흘린 것도 많이 / 놓친 것투성이로 달려온 / 급행열차 // 내 나이를 앞세워 / 미수(米壽)에다가 / 날 부려놓고 말았소 // 때는 늦었지만 오늘은 / 간이역에라도 잠시 / 섰다가 갔으면 했소.’라고 ‘급하게 달려온 인생’을 ‘급행열차’에 비유하면서 후회와 성찰의 저변에는 ‘미수(米壽)’에서 다시 기원의 의식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인생의 정리가 포괄하고 있다.
이처럼 인생의 현장에는 삶의 회억(回憶)을 통해서 너무 빨리 달려가는 세월에 대한 원망(怨望)이 동시에 현현되고 있어서 좀더 느리지만 자연을 관조하고 사유를 정돈할 수 있는 여유를 구현하려는 안온한 정감을 불러오고 있다.
옹달샘에서 / 실개천으로 천진난만하게 흐르다가 // 강 되어 / 산맥의 정기와 이치를 깨달아 누리더니 // 어느새 황혼의 금비늘 번뜩이는 / 바다에 스미어 // 가 닿은 하늘 // 영원으로 / 망망한 미로의 항해를 하나니.
--정순영의 「인생」 전문
정순영의 ‘인생’도 ‘어느새 황혼의 금비늘 번뜩이는 / 바다에 스’미는 지점에서 자신을 회상하는 잔잔한 사유의 중심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영원으로 / 망망한 미로의 항해하’고 있는 현재의 실재(實在)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흐르다가’ ‘정기와 이치를 깨달아 누리더니’ 이제 어쩔 수 없이 무상(無常)의 세계로 들어가는 성찰의 숭엄한 단계에서 정립하고 있다.
늙는 일만 남았는데 이렇게 좋다 // 잘게 부서지는 일만 남았는데 이렇게 좋다 // 방아깨비처럼 한세월 끄덕거리다가 // 비슬산 은사시나무 이파리떼처럼 // 일제히 하얀배를 내 밀었다가 // 허공에서 간혹 자맥질하다가 // 가을이 되어 누군가에게 거름이 된다는 거 // 누군가에게 숙성된 노래가 된다는 거
--이문연의 「퇴직」 전문
이문연의 인생은 어떠한가. ‘늙는 일만 남았는데 이렇게 좋다’는 ‘퇴직’ 이후의 인생이 약간 역설적으로 현현되고 있다. 이처럼 ‘퇴직’이란 삶을 통해서 인생을 영위하고 거기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생업(生業)을 이제 마무리하고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거나 새로운 인생관을 탐구하는 시간(혹은 세월)을 만끽(滿喫)하는 여유에서 그는 ‘좋다’라는 형용사로 어조를 조절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법(paradox)은 통념적인 믿음을 뒤집거나 상식을 뒤엎은 표현으로써 언뜻 보기에는 진리와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내면에는 진정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아깨비처럼 한세월 끄덕거리’던 지난 세월들이 ‘허공에서 간혹 자맥질하다가’ 이젠 ‘가을이 되어’ 숙성의 계절에서 그는 ‘좋다’‘좋다’라는 정감에 흡인되고 있다.
마지막 햇살 등에 업고 돌아서는 모습 / 황홀했던 축제도 이젠 부질없구나 //멀리서 날아온 연하장 한 장 손에 들고 / 기억의 빈 칸을 조심스레 메꿔가며 / 흘러가는 세월의 그림자를 읽는다 // 집착으로 살아온 나날 / 솟구치는 욕망으로 불태운 꿈이 / 해돋이인 줄 알았더니 / 어느새 비틀거리는 해넘이로구나 // 눈물도 아쉬운 시간 / 붉게 타는 저녁노을이 될 수 없다면 / 나는 차라리 돌돌돌 혼자서 울고가는 / 한 줄기 개울물이 되리라.
--이영식의 「세모의 해넘이」 전문
이영식은 ‘세모’라는 시간성에서 회억하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공유하는 어조가 성찰적인 심저(心底)에서 ‘마지막 햇살’과 ‘황홀했던 축체’, ‘흘러가는 세월’, ‘집착으로 살아온 나날’ 그리고 ‘눈물도 아쉬운 시간’이라는 어쩌면 황혼 인생에 대한 작은 소망이 흐르고 있다.
일찍이 소포클라테스가 ‘생각하면, 모든 우리들 생명에 한정이 있는 자는 환상이든가 공허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로 우리들의 삶과 생명에서 지각하는 인생의 의미를 다시 회상하게 한다. 그래서 이영식은 ‘나는 차라리 돌돌돌 혼자서 울고가는 / 한 줄기 개울물이 되리라.’는 결론으로 인생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함께 발표한 「찻잔 속의 힐링」 중에서도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며 / 마음을 다독이는 차 한 잔의 위로 /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 그 짜릿하고 향긋한 느낌이 / 나를 포근히 감사 안는다’는 어조로 삶의 진정한 의미와 현존(現存)에 대한 감응을 적절하게 현현하고 있다.
시간은 흰 머리카락만 남았다 / 해는 여전히 뜨고 져서 / 제자리로 돌아가고 / 아직도 마땅한 땅을 만들지 못해 / 삶의 흔적들을 화선지에 그려 본다 // 푸른 별 하나 끌어안기 위해 / 욕망의 나무를 많이도 심었다 / 뿌리 사이에 땀구멍과 피멍을 감추기도 / 생각, 독백, 고독, 슬픔들 / 구조물은 쉽게 무너지고 //-중략-// 삶의 두루마리를 거꾸로 읽다가 / 지울 수 없는 얼룩들 / 다림질로 펼 수 없는 주름들 / 반성은 힘을 잃고 / 가로등에 이마를 부딪힌다 // 시간은 / 희 머리카락 사이에서 춤추며 / 뿌리 깊은 치아마저 흔들어대고 / 무거운 지렁이 주름 길 위에서 꿈틀 댄다.
-- 박태만의 「거울」 중에서
박태만은 단순한 사물 ‘거울’에서 자각하는 관념적인 흐름의 의식은 바로 ‘시간’과 동시에 엄습(掩襲)하는 ‘삶의 흔적’들이 그의 뇌리에서 재생되려 한다. 그러나 그가 지각하고 인지한 구조물, 그러니까 ‘생각, 독백, 고독, 기쁨, 슬픔들’ 그리고 ‘욕망의 나무’는 어디론가 ‘쉽게 무너지고’ 텅 비어 있다.
그의 성찰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거울’에 비추인 것은 ‘삶의 두루마리를 거꾸로 읽다가’ 어느날 갑자기 ‘지울 수 없는 얼룩들’과 ‘다림질로 펼 수 없는 주름들’을 발견하게 되고 ‘시간’의 고통을 맞아도 ‘반성은 힘을 잃고’ 생의 허전함을 자각하게 된다.
저녁쌀을 씻다가 너의 / 죽음을 듣는다 / 팽개치고 달려가는 길 / 멀고도 멀다 // 캄캄한 아수라장 / 이미 삶을 기억할 수 없다 / 지난 추석에 다녀간 얼굴 / 은빛 침대에 얼어 있다 // 남겨진 엄마 사진과 명함 한 장 / 떠난 말소리 사연이 사라진다 / 어떤 꽃가지 따려다 버리고 / 인사도 없이 // 후회는 먼저 오는 법이 없다 / 하많은 벚꽃 하얗게 지는 세상 / 누나야 / 바짝 자른 발톱이 아프다.
---- 박재경의 「막내동생을 보내며」 중에서
박재경은 ‘막내동생’의 부움을 듣고 달려가면서 재생시키는 삶의 행로(혹은 인생의 행로)에서 허무를 상기하는 삶의 성찰이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고전 「제망매가」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작품상황을 도입하고 있는데 ‘생사로는 예 있으매 두렵고 / ’나는 간다‘ 말도 / 못다 이르고 가느닛고 / 이에 제에 떨어질 잎같이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온져!’의 전개가 바로 생사에 관한 그의 진지하고 내밀(內密)한 인생관이 흐르고 있다.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삶은 죽음의 시작이다. 삶은 죽음 때문에 존재한다. 죽음은 종국임과 함께 발단이며 분리인 동시에 밀접한 스스로의 결합인 것이다. 죽음에 의해서 환원(還元)이 완성된다.’는 명언과 같이 생사의 인생론이 ‘제망매가’나 ‘막내동생’의 죽음에서 ‘하많은 벚꽃 하얗게 지는 세상’의 비극적인 현실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 활처럼 허리를 휘고 구부려 놓아 / 보는 사람 가슴을 얼얼하고 맵게 해 // 오리처럼 뒤뚱뒤뚱 / 지팡이 의지하고 / 가을 가득한 파란 하늘 아래 서서 // 바람에 흰머리카락 날리며 / 서로 비비며 속울음 우는 억새처럼 / 달리는 세월 쫒기다가 길 잃고 / 해 저무는 서쪽 바라보는 / 쓸쓸한 그림 한 점.
---- 강신기의 「쓸쓸한 그림 한 점」 전문
강신기의 인생관도 다른 작품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달리는 세월 쫒기다가 길 잃’은 정황이나 ‘해 저무는 서쪽 바라보는’ 시적 상황이 모두 황혼에 이르는 인생 후반기의 심적인 정돈이 다양한 사물과 교감하는 이미지로 형상화고 있다. 그것은 허리가 휘고 ‘지팡이 의지하고’ 또 ‘바람에 흰머리카락 날리’는 모습이 그는 ‘쓸쓸한 그림 한 점’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공감을 흡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연의 끈」에서도 ‘미워하기를 노래 부르듯한 / 그 사람 / 평소 버거운 짐이 되어 / 세상을 어렵고 주변을 힘들게 하더니 / 모진 끈을 놓고 인연을 떼어낸다 ’는 이승 떠난 ‘그 사람’을 통해서 생명의 소멸에 대한 안타까움이 처절하게 적시되고 있다. 그는 ‘하얀 국화가 올려보고 / 빙그레 웃는 사진’ 그 영정아래에서 ‘허허한 세상사 끈 놓으니 한가로운가’라는 어조로 우리들의 허허한 삶과 무언(無言)의 대화로 인생을 회억하는 시법에 공감하게 된다.
이렇게 생사와 동행하는 인생론이 결국 삶에 대한 자성이라는 시적 진실을 이해하게 되는데 앞의 원로시인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자문이 곧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성찰의 해법을 적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미디어] 2019.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