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가문 고부 이씨 - 제주 입도조 ( 入道祖 ) >
-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우리의 소중한 뿌리를 찾아서
- 고매(高邁)한 지절(志節), 돈후(敦厚)한 품성(品性))
- 숭조상문 (崇祖尙門), 명공거경 (名公巨卿)의 배출
제주 입도조 ( 入道祖 )
벽동공파 ( 碧潼公派 ) 파조 ( 派祖 )인 李公 정(精)의
차자(次子)로서 도사공(都事公) 의
호는 백산(白山), 휘는 세번 (世蕃)이다.
제주 입도조인 백산(白山) 세번 (世蕃) 公께서는 ,
1514년(중종 8)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과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1519년(중종 14) 위훈(僞勳) 삭제사건을 계기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어진 선비들이 화를 입자 앞장서 무죄함을 탄원하다가 조광조 일당으로 몰려 1520년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제주에 입향한 公은 적거지 대정현에서 흥학교화(興學敎化)에 힘쓰다 7년째인 1526년(중종 21) 대정의 배소(配所)에서 별세하였다.
백산(白山) 세번 (世蕃) 公은 고부이씨 입도조이다. 부인의 묘는 회수동에 있다. 公은 신도포구(둔포)로 내려서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돌아가시고 자식이나 부인이 모두 제주에 남아 있었다.
기묘사화 이후에도 신진 사림들이 억울하게 투옥되자, 당시 의금부도사(義禁莩事) 백산(白山) 세번 (世蕃) 公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광화문 밖에 모여 연일 조광조 등이 무죄임을 변호하는 데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국문 끝에 제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인들이 제주도로 들어오는 길목은 대부분 조천이나 화북이었는데
백산(白山) 세번 (世蕃) 公의 경우는 풍랑 때문에 신도포구로 들어오면서 대정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公은 학자였으므로 유배오면서 경서 등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독서와 한학으로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면서 지방 자제들에게 학문과 예절을 가르쳤다. 그러나 귀양살이의 고독과 인생의 덧없음, 고향에 대한 향수, 권력의 무상함 등은 항상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유배온 지 7년만인 1526년(중종 21년) 적소에서 병사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아들 이충현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고산리에 안장하니 지방민들이 줄을 이었다. 이충현은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 유생으로 수학중이었지만 부친을 돌보기 위해 같이 따라왔었다.
한편 백산(白山) 세번 (世蕃) 公의 부인 석씨는 남편이 유배된 뒤로는 잠을 잘 때 이불을 덮지 않았고 추워도 속옷을 입지 않았으며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묻게 하고 밤마다 사면되어 돌아오기를 기원하였다. 부인께서는 남편이 큰 병을 얻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병 간호를 하기 위해 두 아들과 함께 제주에 건너와
정성껏 간병하였으나 효험없이 돌아가시자 침통과 애도로 먼저 가신 남편을 추모하다 결국 병상에 누었다가 돌아가셨다. 두 아들은 모친을 장사지내고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학문에 정진하고 지방 자제들을 훈학하였다. 公께서 사망한 후 식구들이 아예 제주도에 정착함으로써 결국 백산(白山) 세번 (世蕃) 公은 고부 이씨(古阜 李氏) 벽동공파 제주 입도조가 된다.(증보 제주통사 P134)
인종대에 들어 백산(白山) 세번 (世蕃) 公께서는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복권되고 특히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 유생으로 수학중이던 아들 이충현이 제주 교수로 천거되었고 후손들은 대대로 대정 향교의 훈도를 역임하였다. (양진건 저,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
김봉현의 제주유인전(濟州流人傳)에는 公에 대해 조광조와 더불어 김굉필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경서와 史書에 투철했다. 1514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기묘사화 이듬해인 중종15년(1520)에 장을 맞고 제주 대정현 둔개(신도리)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 후 병상에 눕게 되어 중종21년(1526)에 타계했다.
1962년 월성 김종가가 쓴 都事公行狀에 의하면 백산(白山) 세번 (世蕃) 公은 어릴 때부터 매우 특이하여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모시면서 훈계를 들어도 기뻐했고 배움에 게을리 하지 않아 스스로 일과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17~18세에 道에 뜻을 두어 '하늘이 나를 미물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고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나게 한 것이 행복이다'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백산(白山) 세번 (世蕃) 公께서는 조광조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사화가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 李若水 등 수백인과 함께 문을 박차고 나아가 상소를 올리면서 조광조의 무고함을 호소했다. 사람들이 그런 公에게 신변의 위태로움을 알리자 ' 군자는 화(禍)도 같이 하고 복(福)은 오래 전에 선택되었다'고 웃으면서 답했다고 한다
< 제주 입도의 역사적배경 >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鄕約)실시를 강행하고,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현량과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7가지 항목을 종합하여
인재를 천거하고 그들을 궁궐 뜰에 모아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책(對策)으로 시험보고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별시로 치러졌다. 이를 통해 28명의 신진 사림들이 등용되었다.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문인의 사장(詞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였고,
특히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쳤다.
중종반정 공신 117명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 없이 공훈을 남수(濫授)하였으니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귀속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을 야기시켰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백성들은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환영하였지만
중종은 임금의 권위마저 압박해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신진 사류와의 알력과 반목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
走 ·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 ·심정(沈貞) ·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중종은 점차 신진 사류의 급진적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위훈삭제 사건이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중종은 결국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