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과 함께 하는 불교 이야기일장 고관철(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상임대표)
일상의 모습-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 담
오래된 사찰의 법당 처마를 따라서 뒤로 돌아가다 보면 벽면에 그려진 여러 가지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글을 모르는 이들을 깨우치고자, 혹은 언어가 주는 추상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알기 쉽게 그린 사실적 그림들인데, 중요한 것은 그 그림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이다.
이 그림은 제목이 보여주듯이, 언덕 위 커다란 나무에서 아랫녘 우물까지 뻗은 나무뿌리에 매달린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래 이 이야기는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이란 경전에서 수록된 비유담으로,
부처님이 파세나디왕에게 열심히 정진해야 함을 일깨우고자 설한 내용이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넓은 들판에서 노닐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커다란 코끼리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사내는 언덕 위에 있는 커다란 나무로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하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언덕에 오른 사내는 나무 옆으로 깊숙이 파인 우물을 발견했다.
마침 나무뿌리 하나가 우물 속으로 밧줄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사내는 코앞까지 다가온 코끼리를 피해 뿌리덩굴을 잡고 황급히 우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위쪽을 쳐다보았다.
한데, 사내의 머리위로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사내가 잡고 있는 뿌리덩굴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급한 마음에 더 아래로 내려가고자 밑을 바라보았다.
아뿔싸, 우물 아래에선 네 마리의 커다란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공격태세를 잡고 있었다.
하물며 더 아래 우물 바닥에선 커다란 독룡이 아가리를 벌리고 독무를 뿜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다시 위를 보니, 코끼리의 포효 소리가 들리고 느닷없이 일어난 언덕의 불길이
나무를 태우고 있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고 있던 사내의 눈에, 나무 등걸에 자리한 벌통 하나가 보였다.
그 벌통에선 한 번에 다섯 방울씩의 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사내는 달콤한 꿀 향기의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달려들어 침을 쏘아댔지만,
사내는 아랑곳않고 혀를 내밀어 벌꿀의 맛을 보았다.
천하에 이런 맛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벌꿀에 취해, 꿀벌이 달려드는 것도, 혀를 날름거리는 네 마리의 독사도,
입을 한껏 벌린 채가 우물 바닥에 자리한 독룡도 모두 잊어버렸다.
머리위에선 자기가 잡고 있는 나무뿌리를 쥐들이 갉아 먹고 있다는 사실도,
밖에선 그 뿌리가 난 나무가 통째로 들불에 타고 있고,
아직도 커다란 코끼리가 날뛰고 있다는 사실도 다 잊어버렸다.
오직, 벌꿀을 받아먹으려 혀를 날름거리기에 혈안이 되 있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 부처님은 자세히 해설을 해주셨다.
사내가 노닐고 있던 언덕은 무명(無明)을 뜻한다.
즉, 갈 길도 방향도 모르는 채 어둠 속을 해매고 있다는 것이다. 코끼리는 무상, 즉 덧없음을 뜻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인간도 결국은 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는 것이다.
사내가 몸을 숨긴 우물은 현실의 삶, 생사를 말한다.
사내가 잡고 있는 나무와 뿌리덩굴은 목숨을, 그 목숨을 갉아먹는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즉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목숨이 다한다는 것이다.
목숨이 다하면 어떻게 될까?
밑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네 마리의 독사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서,
땅, 물, 불, 바람의 4요소는 그 당시 세계관의 네 가지 근본 구성요소이다.
다시 말해, 밧줄이 끊어지면 지수화풍 사대(四大)의 구성요소로 돌아가며,
이로서 독룡으로 비유된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들에 일어난 불은 늙음과 병듦을 말하는데, 이 불로서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도 이 모두를 잊고 사내가 취해있는 다섯 방울의 벌꿀은 오욕(五慾)을 말한다.
오욕이라 함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인지하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인 눈, 코, 귀, 입, 촉감을
즐겁게 하여 일어나는 욕심을 말한다.
인간은 좋은 것을 보고, 좋은 향을 맞고, 좋은 소리를 듣고,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감촉을 느끼는 것,
이 다섯 가지의 욕심을 채우고자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혹은 이 다섯 가지를 재물, 애욕, 음식, 명예, 수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벌들이 와서 쏘는 것은 삿된 생각이 끊임없이 수시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삿된 생각의 따끔거리는 아픔도 견디며 벌꿀에 취해있는 것이다.
그럼 결론이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불설비유경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셨다.
“생ㆍ노ㆍ병ㆍ사는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언제나 그것을 명심하고 오욕(五慾)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첫째, 생로병사를 두려워하고 명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석가모니가 출가한 이유이며, 모든 깨달음 추구의 원인이기도 하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생로병사의 두려움보다 더한 두려움이 어디 있겠는가? 허나 사람들은 생로병사를 잊고 산다.
그러다 자신이나 누군가가 늙거나 아프거나 죽는다면, 그때야 비로소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하여 해탈, 즉 생로병사의 흐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로병사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생로병사의 두려움을 인지하다면,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구,
혹은 재물과 애욕과 음식욕과 명예욕과 수면욕 등의 욕구에 집착하지 말고 끊임없이 해탈을 위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했을 때, 마침내 더 이상 생사윤회의 수레바퀴에 휩싸이지 않고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가끔씩 나를 돌아보고, 내가 매달려있는 상황은 어떠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를 위해 하루에 한번쯤은 책상에서 머리를 들고, 어깨를 펴고, 고개를 돌리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경전출처 :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