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열전-신동문 2작성자페드라|작성시간09.05.30|조회수193목록댓글 1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신동문, 그가 바라본 하늘은 어떤 색깔이며 그 너머에 있는 산령은 얼마나 높을까. 그가 매일 관제탑에서 수신호를 보낼 때 비행기의 조종사는 그의 수신호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가 수신호를 하면서 풍성기를 쓴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수신호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는 신호사가 바람에 날리는 풍선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고 여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비행사는 신동문의 수신호에 무사히 이륙하고 착륙했다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수신호를 보내는 당자로서는 단 1초의 흐트러짐도 용서가 안 되는 참으로 찰나의 순간을 땀과 떨림과 초조와 절박함과 긴장감으로 보낼 것이다. 땅에서의 깃발과 하늘에서의 날갯짓은 분명 다른데도 그 날갯짓이 하나가될 때 하늘은 푸르고 지상엔 안도와 환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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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잡지가 귀한 세상이었다. 지금처럼 흔해빠진 게 잡지인데 예전에 왜 그리도 잡지가 귀했는지 모르겠다. 그거야 전쟁 탓이지, 아! 종이가 귀하다 보니 잡지는 언감생심이요 돈이 없으니 잡지를 창간할 꿈인들 꿀 수도 없고 그런 형편에 글을 쓴다한들 어디에 발표를 하겠으며 또한 제대로 한소리 하는 글을 쓰는 논객이 몇 명이나 되겠는지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그렇다. 글을 써도 발표할 지면이 모자라기도 했지만 잡지다운 잡지가 턱없이 부족한 시대에 글쟁이들은 글을 써왔고 주간이나 편집장들은 몇 안 되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글쟁이들에게 매달리던 시절이니 지금으로 보자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라고 해야겠다. 그래도 그 시절의 잡지엔 기개가 있었고 열정이 있었으며 패기가 있었다. 깡패들의 무시무시한 주먹과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던 자유당시절에도, 목에 총을 들이대고 공포와 협박을 일삼던 독재치하에서도 몇 십 명 안 되는 글쟁이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양 기개 넘치게 하고 싶은 얘기를 잘도 썼다.
그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의 잡지라야 문학지로는 현대문학과 자유문학이 유일했지만 시인 김광섭이 운영하는 자유문학은 항상 가난에 쪼들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문인들의 발걸음은 현대문학으로 향했다. 종합지로는 ‘새벽’ ‘사상계’ ‘세대’지가 유일무이했다. 물론 그 이후 몇 개의 문학지가 창간되었지만 별무신통,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쨌거나 신동문이 주간으로 있는 잡지 ‘새벽’은 1960년대를 발칵 뒤집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것도 50년이 흘러가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대단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사건, 사건으로 불리기보다는 현대사의 질곡이라 해야겠다. 그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물론 이 사건 이후로 이 잡지는 저물어갔지만 신동문은 전쟁이 남긴 후유증을 최인훈을 통해 고발했다.
광장, 광장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1960년 10월호에 실린 ‘광장’은 원고매수만도 600매에 달하는 무거운 중편소설이었다. 소설 ‘광장’이 발표되자 장안은 난리였다. 1950년대 문학은 장용학과 손창섭에 빚지고 짓눌려왔다. 그런데 최인훈의 등장으로 이제 그 빚을 갚고 새로운 문학사를 써나가게 했다. 한국문학사가 최인훈의 ‘광장’에 빚을 졌는지 아니면 신동문이나 새벽지에 빚을 졌는지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빚이라는 무게를 벗어버리면 한국문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봐야한다.
신동문, 그의 손길이 가는 곳엔 미다스의 빛이 열려있다. 새벽도 그렇게 한국문학에게 따뜻하고 화창한 태양을 선사했지만 ‘광장’을 끝으로 명멸하고 말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후일담은 신동문이 주간으로 있는 신구문화사에서 현대한국문학전집을 발간하면서 최인훈의 광장과 인연을 맺었다는 것이다. 18권으로 된 현대한국문학전집에 광장이 자리하는 건 참으로 묘한 우연이자 인연이었다. 당연히 최인훈이 한국문학사의 주요한 자리에 앉는 거지만 그 가운데엔 신동문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광장과 신동문, 최인훈과 신동문은 묘하게 한배를 타고 한국문학을 유영했다. 그런 광장도 1961년 정향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해 화제를 모으다가 다시 신구문화사를 거쳐 민음사로 회항하고 1970년대엔 문학과 지성사에 안착한다.
신동문, 그는 잡지의 생명이 일천하고 척박한 한국의 풍토에서 새로운 토양을 심어냈다. 그 시절, 논객이라야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미미했고 몇 개의 잡지에 그 얼굴이 그 얼굴일정도로 서로 바꿔가며 1~2개월 터울로 글을 게재했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신진을 발굴한다는 게 숙제였지만 그 또한 어려운 난제였다. 독재시절, 시퍼런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을 인물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보다는 속 시원하게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논객이 적었다는 사실이다.
새벽의 주간으로 있는 신동문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논객을 모셔올까 걱정하다가 1960년대 초까지 충청일보에서 함께 논설위원으로 있던 민병산을 모셔오기로 했다. 신동문과 민병산은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실로 막역한 사이였다. 물론 민병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민병산이 가세하므로 신동문은 큰 힘을 얻었지만 다른 한 사람의 논객을 누구로 하는가가 고민이었다. 신동문은 또 다른 필자를 발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논객을 찾는 건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다가 국제신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있는 이병주를 소개받았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논객이기에 서울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동문은 이병주를 소개 받고 생면부지인 그가 쓴 논설을 읽으며 논객으로서의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다. 민병산과 이병주의 가세로 쌍두체재를 구축한 신동문은 새벽의 논객으로써 두 사람이 명성을 떨치리라는 걸 확신했다.
신동문의 진취적이고 열정적이며 신사고로 무장한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훗날의 이병주야 소설가로 대단한 필명을 날렸지만 새벽의 논설위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전까진 그 누구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를 눈여겨보지 않음이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진보적 성향이 문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가 잡지 새벽에 민병산이 쓴 ‘5천년의 은자’에 대한 화답으로 ‘조국부재’를 쓴 게 문제였을까. 그보다는 진보적 성향의 이병주가 교원노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논설 ‘조국부재’를 박정희정권이 꼬투리를 잡아 자신들의 투명함을 과시하기 위해 그를 옭아맸다고 봐야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병주, 그는 새벽지의 필화사건으로 인해 독재정권으로부터 10년이라는 선고를 받고 복역을 해야 했다.
서슬 퍼런 독재치하에서 1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이병주는 1963년 2년형을 살고 사면이라는 특별은전을 받아 석방되었다. 특별은전, 말이 좋아 은전이지 이병주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만한 건더기가 없었다. 필화라고 했지만 ‘5천년의 은자’에 대한 ‘조국부재’는 결코 군사정부의 심기를 거스를 정도의 글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들의 사상적 투명성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이런 정황들로 인해 신동문은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우연과 필연, 신동문과 이병주에게는 우연으로 시작해서 필연으로 갈무리하는 수순으로 이어졌지만 그 과정을 두 사람 다 몰랐다. 아니 상상도 못했다. 설마 필화사건이 필연으로 이어지리라는 걸. 그렇다. 인생사는 필유곡절이 있지만 이 두 사람에겐 필유곡절보다도 더한 곡절이 자리했다. 이병주가 은전을 받아 출옥한다는 날을 하루 앞둔 경부선 열차 안에서 사단은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정말 시답잖은 일에서 우연은 기연으로 연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