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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타(śamatha, 止), 위빠사나(vipassana, 觀), 사마디(samadhi, 定)>
부처님 수행법 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두 가지밖에 없다.
여러 가지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디가니까야(長部)의 <다숫따라경(Dasuttara sutta)>에는
“수행해야만 할 두 가지 법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고 했다.
그리고 상응부의 <고요경(samatho sutta)>에도
“비구들이여, 열반으로 이끄는 도(道, magga)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고 했다.
이들 경전의 내용으로 볼 때,
사마타 위빠사나는 닦아야만 할 두 가지 수행방법이며,
열반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다.
사마타(śamatha)는 의역을 해 지(止), 적정(寂靜), 능멸(能滅)이라 하고,
집중명상을 말한다. 단 하나의 대상을 주제로 마음을 집중시키고 고정하는 방법이다.
즉, 어떤 대상에 고도로 몰입돼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집중명상은 다른 종교에도 행한다.
수행자가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는 동안 마음이 순화된다.
깊은 행복감, 기쁨, 고요함 등을 이룬다. 드물게 이런 상태에서 초능력이 개발될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마타란 모든 분별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허망함을 깨달아서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마음이 적정(寂靜)한 상태를 유지함을 말한다.
즉, 사념망상(邪念妄想)이 일어남을 막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이다.
쉽게 말하면, 정신집중을 위해 어떤 한 대상을 정해 거기에 몰입하면,
그 몰입의 상태가 심화돼 무심의 경지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무심의 상태에 들어가면 온갖 번뇌 망상이 그치므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이에 유사어가 적정(寂靜)이다.
이와 같이 사마타 바와나(Bhavana:마음닦는 수행)는 대상 하나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마음을 통제해 다른 대상 다 무시하고 대상 하나에 집중하면 그것은 모두 사마타이다.
사마타는 오직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야만 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서 벗어나서 한 생각이라도 일어난다면 삼매에 들어갈 수 없다.
아비담마에서 사마타는 8가지 선정의 경지(samapatti, 等持),
즉 네 가지 색계 선(禪)과 네 가지 무색계 선(禪)에서 마음의 집중(心一境)으로 정의한다.
이런 경지들은 마음이 한끝으로 집중돼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 집중명상으로 부족한 것이 뭣일까?
집중 명상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다. 진리를 구하려면 위빠사나 명상이 필요하다.
위빠사나 수행법은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정신집중수행법으로,
사마타와는 다르게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찰나마다 변하는 다수가 대상이 된다.
위빠사나는 대상을 가리거나 정해놓지 않는다. 위빠사나는 집중이 목적이 아니라 지혜가 목적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사마타와 달리 깨어있되 대상에 몰입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몰입되면 움직임을
관찰할 수 없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순간 집중해야 한다.
이는 본삼매에 들기 전 단계인 근접삼매와 같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근본삼매(본삼매)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근접삼매와 유사한 순간삼매에서 하는 것이다. 이를 카니까사마디(khaṇikasamādhi)라고 한다.
움직이는 대상을 순간 포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찰나찰나 예리한 집중을 요구한다.
위빠사나는 어떤 대상이든 상관없다.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대상이 관찰대상이다.
특히 대상을 관찰하는 것보다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상에 대한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주된 위빠사나 바와나의 목적이다.
나아가서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는 일시적인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집착할 것이 못되고, ‘나’라고 믿고 있는 관념이 실체가 없다는 인식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신ㆍ수ㆍ심ㆍ법(身受心法) 사념처(四念處)를 주제로 해서
「무상, 고, 무아」 삼특상을 아는 지혜를 개발함이 이 수행의 목적이다.
위빠사나(vipassana)는 그냥 보는 것(sight)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관(觀)으로 옮겼고,
요즘은 어원에 더 충실해 ‘내관(內觀)’으로 옮기기도 한다. 영어로는 in-sight로 정착돼 있다.
맛지마니까야(중부, Majjhima Nikaya)의 131번경부터 134번경까지
네 경은 부처님이 읊으신
‘경사스런 하나에의 몰입(bhaddekaratta)'이라 부르는 게송에 대한 설명과 관계된 것이다.
이 게송의 핵심은,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말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法]을 [매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통찰하라’로 옮긴 원문은 위빠사띠(vipassati)인데,
위빠사나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동사이다.
이처럼 위빠사나는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물(物)ㆍ심(心)의 현상에 대해
「무상ㆍ고ㆍ무아」의 세 특상을 꿰뚫는 것(洞察)을 뜻한다.
이것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향하는 통찰지(panna)의 기능이다.
이처럼 위빠사나가 아비담마요, 아비담마가 위빠사나인 것이다.
즉, 지(止)는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움직이지 않고
한 대상에 머물러[止] 있어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관(觀)은 이 상태에서 바른 지혜로써 제법을 관조하는 것을 이른다.
이와 같이 지와 관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므로 이 둘을 별개로 분리할 수는 없다.
이는 천태종(天台宗)의 근본교리이기도 하며, 불교사상적으로도 대단히 중시된다.
이와 같이 지(止, samatha,
奢摩他)와 관(觀, vipassana)에는 차이가 있다.
사마타가 지수행법(止修行法)이라면
위빠사나는 관수행법(觀修行法)이다.
이를 합쳐 지관(止觀)이라 한다.
지(止)와 관(觀)은 흔히 병칭되기도 하고,
또 동일하게 보기도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부터 이 양자는 구별됐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직설이며,
사마타는 정신집중이고,
위빠사나는 통찰지와 연결돼 있다.
사마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고,
위빠사나는 법을 대상으로 한다. 이렇게 다르다.
사마타는 집중이고,
위빠사나는 지혜이다.
사마타는 삼매를 성취하기 위해 닦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통찰지, 즉 지혜를 개발해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 닦는 것이다.
'선정과 지혜' 계발수행의 세계적 권위자
미얀마의 파욱 아친나(Pa-Auk Achinna) 사야도(스승) 비구는
“사마타(선정 계발수행ㆍ止)를 하지 않고서 위빠사나(지혜 계발수행ㆍ觀)를 하면
산란함이 더욱 커질 뿐이다. 깊고 강한 삼매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사마타 수행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초기불전에 등장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바로 현재 남방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대중화된 수행법의 뿌리이다.
그래서 남방 상좌부(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사마타(止)의 개발과
위빠사나(觀)의 구별이 잘 돼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선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사마타에 의해 자아몰입에 들어간 후,
지혜를 끌어내 대상을 관하는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마타는 위빠사나 수행의 준비 단계이자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사마타와 위빠사나,
즉 지(止)와 관(觀)은 떨어질 수 없다.
집중과 관찰은 불도수행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마타는 정(定)에 해당되고,
위빠사나는 혜(慧)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지관불이(止觀不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관쌍운(止觀雙運),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고도 한다.
마음이 지(止) 상태에 이르면
오락가락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지혜가 나온다.
이처럼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해 모든 것이 변화와 관계 속에 있음을 알게 되는데,
중생은 변화와 관계를 거부한 채 끊임없이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관계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자기 자신을 봄으로써 근본관계를 볼 수 있다.
사마타는 집중위주의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관찰위주의 수행이다.
사마타는 마음을 정해진 대상에 집중하고 안주해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ㆍ혼침, 들뜸ㆍ후회, 의심으로 대표되는 마음의 장애(오개)들을 끊는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법의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이다.
아비담마적으로 볼 때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다른 차이점은 그 대상이다.
사마타 수행은 닮은 표상이라는 개념(빤냣띠)에 집중하는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72가지로 분류되는 법(담마)들의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이다.
마음의 안정을 이루는 것, 마음의 혼란 상태나 흐트러짐이 없어지는 것,
그것이 사마타(samatha)이다.
한편 위빠사나(vipassanā)는「본다(觀)」라는 의미이고,
지혜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실천하는 수행방법이다.
명확하게 보는 ― 관(觀)하는, 명확하게 관찰하는 방법이다.
위빠사나는 6감의 지식 레벨을 초월한 지혜가 열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명상방법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위빠사나(vipassanā)명상은 불교에서만 추천하는 명상이다.
따라서 불교를 공부하며 명상에 힘쓰는 사람들은
사마타가 아닌 위빠사나 명상에 도전해야 한다.
사마타(samatha)는 집중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명상법이다.
어떤 명상 대상을 하나 선정하고, 그것만을 철저하게 집중하는 훈련을 한다.
불교 이외에서도 이러한 명상을 추천하는 가르침은 많다.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은 우선 사마타 명상으로 집중력을 극한까지 높인 후에
위빠사나 명상으로 들어간다. 높은 레벨의 집중력이 없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위빠사나 명상에 도전해도 쉽사리 성공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명상 방법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이해해 두면
명상 실천이 매끄럽게 진행될 것이다. 사마타 명상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앞에서
언급했으나 그렇더라도 가능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생태적으로 정신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넘지 못하는 높은 뜀틀이 된다.
또한 정신병이 있거나 생태적으로 감정이 격해서 탐욕의 감정이나 성냄의 감정,
무지의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사마타 명상을 실천해도
바람직한 성과를 얻기 힘들다.간혹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감정이 격해서 이성이 아니고 감정으로 말한다.
이런 사람이 사회에서 실패하면, 정신세계나 종교세계에 몰입하고,
거기에서 성공하고자 하지만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감정이 이성을 우선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명상을 해도 성공할 가망이 없다.
명상 실천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감정은 장해(障害)이다.
인간으로서 성격이 어느 정도 정립돼 있는 사람들이
감정마저 제어한다면 사마타 명상은 가능하다.
위빠사나의 경우는 감정을 제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혜 개발이 필요하다.
지혜란 번뜩이는 능력이라고 이해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과학을 연구해 과학자가 돼 있는 분은 이 세상에 많이 있다. 그러나 세상을 놀라게 하는
발견을 해 노벨상 후보자가 되는 과학자는 소수이다. 붓다 시대에도 명상에 진력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해탈을 발견한 분은 석가모니 한 분 뿐이다. 그러므로 사마타 명상이라면 가능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위빠사나 명상에 성공해서 해탈에 이른 사람들은 극소수라고 말할 수 있다.
석가모니께서 발견하신 위빠사나 명상은 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모든 명상방법보다 단연코 뛰어나다고 단언적으로 말할 수 있다.
사마타(samatha)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마음의 안정을 얻는데 반해,
위빠사나는 번뇌를 해결해 지혜를 얻는 수행으로
열반에 이르는 필수적이고 유일한 수행이다.
한문으로는 사마타를 지(止)라고 하고
위빠사나를 관(觀)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자를 선정수행(禪定修行)이라고 하고,
후자를 지혜수행(智慧修行)이라고도 한다.
사마타는 고요함을 개발하는 불교의 명상법이다.
위빠사나가 관조, 관찰을 하는 명상법인 반면에,
사마타는 고요함, 적멸, 사마디(삼매)를 목표로 하는 명상이다.
사마타(奢摩他, śamatha)는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의 정(定)에 해당하며,
지관(止觀)에서 지(止)를 의미한다.
정(定)이나 지(止)는 인도어 사마타를 한역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마타는 집중명상이다.
집중명상은 주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고착시키는 것이다.
집중이 깊어지면 사마디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어떤 대상에 고도로 몰입돼 무심의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사마디(samadhi, 三昧)는 집중의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돼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대상이나 대상을 인지하는 의식마저도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집중 대상을 선택해야 하는데,
가령 음악명상일 경우에는 당연히 음악이 되고, 화두(話頭)일 경우엔 화두를 드는 것이다.
참선수행을 하면서 화두를 들 경우, 화두를 들고 선정(禪定)에 드는 것이 사마디이다.
다만 음악의 경우는 선율, 리듬, 화음 등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초보자인 경우에는
음악 자체에 고도로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사마타는 평온, 멈춤 등을 뜻하며,
주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일치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위빠사나와는 궁극적인 관점이 다르다.
하나의 대상을 집중하므로 주관적인 지혜를 갖는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여러 가지 대상의
성품을 보기 때문에 객관적인 견해를 갖는다.
사마타 수행은 어떤 대상을 선택해 깊은 집중을 통해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 선정(禪定)이라는
고요함을 얻고자 한다. 수행을 시작하려고 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다섯 가지 장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집중을 하는 것이 사마타이다.
참고로, 다섯 가지 장애는 다음과 같다.
① 감각적 욕망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이다. 좋은 것을 원하는 탐심이다.
② 악의(惡意)로 성을 내거나 대상을 없애려하고 가해를 하려고 하는 것.
③ 혼침과 게으름으로 졸리거나, 수행이 하기 싫어지거나, 나태해지는 것.
④ 들뜸과 회한으로 주저하며, 안정되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것.
⑤ 회의적 의심으로 자신이 없고 의심스러워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
사마타 수행은 이상과 같은 기본적인 장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깊은 집중을 요구한다. 그래서 고요함을 얻고자 하는 수행이다.
위빠사나(毘婆舍那, 빠알리어 vipassana, 觀)는
하나의 대상만을 보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여러 가지 성품을 본다.
그래서 통찰명상(洞察瞑想)이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처음부터 자신의 신체(물질)와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다섯 가지 장애가 나타나면 그것들을 내치지 않고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신체)과 마음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아나가는 과정이다.
위빠사나란 법(法)을 사유(思惟)하는 것을 말한다.
법이란 결과가 있는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이치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혜를 이룰 수 있다. 사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사유하며,
또는 사유하며 관찰한다.
예를 들면, 분노, 성냄 같은 것은 단순히 믿음으로써 해결되지 않는다.
그 원인을 사유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를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장애가 나타났을 때,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대상에 깊게 집중하는 것은 사마타 수행이고,
오히려 이것을 알아차릴 대상인 법으로 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사마타를 하더라도 나중에는 위빠사나를 해야 된다.
그러니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두 가지를 모두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하고 있는 수행방법은 대개 처음부터 위빠사나를 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순수 위빠사나라고 한다. 하지만 순수 위빠사나를 하려고 해도
실상은 어느 정도 사마타로 집중이 얻어진 후 위빠사나로 전환한다.
아무튼 이 모든 수행이 철저하게 <대념처경(大念處經)>에 입각한 것이다.
모든 선(禪) 수행을 포괄하는 말로 지관(止觀)은 선정으로 달리 불리는 것처럼
위빠사사는 선정삼매와 불가분의 관계,
달리 말하면, 사마타에 바탕한 체험적 인식이 바로 위빠사나이다.
<삼매와 사마디>
수행은 일차적으로 사마디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고요한 집중에 들어가야 지혜가 나서「무상ㆍ고ㆍ무아」 삼특상(三特相)의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마디는 보통 삼매(三昧) 혹은 선정(禪定)이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세 용어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조금씩 다른 의미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마디를 삼매라고 하기보다는 ‘청정한 마음의 집중’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다. 부처님께서, “나는 세계를 정복했다”고 하셨는데, 이는 지구나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과 마음’을 정복했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 즉 오온(五蘊)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 청정함이고, 이를 통해서 얻어지는 고요함이 사마디이다.
삼매(三昧)란 용어는 오히려 선정(禪定)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삼매에는 세 가지가 있다.
깊은 삼매(根本定),
근접삼매(近行定),
찰나삼매(刹那定), 세 가지가 있는데,
깊은 삼매와 근접삼매는 사마타 수행에 필요한 것이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면 찰나삼매에 들어야 한다.
찰나삼매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대상들을 순간순간 알아차려서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깊이 들어가면 하나에 집중해 깊은 삼매에 빠진다.
이때는 대상의 성품을 알기보다 고요함에 머물게 된다.
선정(禪定)이라는 용어는 사마타 수행에서 고요함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데,
빠알리어로 쟈나(janna)라고 한다.
위빠사나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찰나삼매, 즉 순간적인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깊은 삼매가 되면 사마타 수행이 돼 선정을 얻게 된다. 부처님은 사마타 수행을 통해 사선정(四禪定)까지 가셨는데도 번뇌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극단적으로 고행을 하던 방법을 버리고 신(身), 수(受), 심(心), 법(法) ― 사념처(四念處)를 관(觀)하는 위빠사나를 통해 해답을 얻으셨다.
삼매(三昧)라고도 불리는 사마디는 위에서 보듯이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것은 사마타 수행에서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나 모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타 수행에서는 고요함에 머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이때에 얻어지는 삼매는 깊은 삼매다. 이것을 선정(禪定) 또는 빠알리어 쟈나(janna)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선정과 사마디의 개념이 유사하면서도 쓰임에서는 다르게 표현된다. 그런데 우리는 삼매와 사마디 혹은 선정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관(觀. 통찰. 지혜)수행이다. 무엇을 관하는가 하면 현재의 몸과 마음(오온)이다. 그래서 오온의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과 일반적 특성(무상, 고, 무아)을 통찰하는 수행이다. 즉, 수행자가 현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대해 어떤 번뇌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해,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얻는 해탈은 모든 번뇌(탐ㆍ진ㆍ치)를 지혜로 해탈한다 해서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처음에는 오온의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을 알고, 더욱 발전해 오온의 「무상ㆍ고ㆍ무아」를 체험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열반을 얻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① 먼저 사마타를 닦고 색계선정(色界禪定) 상태에서 위빠사나로 넘어와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
② 먼저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가 마지막에 깊은 집중으로 사마타 수행을 해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
③ 먼저 사마타를 닦고, 위빠사나를 닦고, 다시 그 다음 단계의 사마타를 닦고,
그 다음 단계의 위빠사나를 닦는 방법으로, 두 수행법을 병행해 열반에 이르는 방법.
④ 처음부터 사마타 수행 없이 위빠사나 수행으로 열반에 이르는 방법. 이 방법은 순수 위빠사나라고 한다.
①과 ③의 경우는 사마타 수행으로 마음에 다섯 장애가 없는 사마디(집중. 선정) 상태에서는 현재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쉽고, 그래서 오온의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할 수 있다.
이것은 사마타 수행을 먼저 닦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넘어와 수행대상과 집중 방법을 달리해 그 결과로 정(定)에서 혜(慧)를 얻는 것이다. 이런 수행방법으로 해탈에 이르신 분은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다 구족하신 분으로 양면 해탈이라고 한다.
④의 수행법은 순수 위빠사나 수행으로,
사마타 수행단계가 없으므로 처음 수행을 할 때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섯 장애들과 부딪친다. 그러면 이 다섯 장애를 다 알아차릴
대상인 법으로 받아들여 반응하지 않고 그들의 성품을 본다.
그들은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가 알아차림이라는 조건에 의해 소멸한다는
법의 성질을 본다. 이렇게 다섯 장애를 친구 삼아 스승 삼아 알아차려가다
보면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고,
그래서 매사에 탐ㆍ진ㆍ치를 덜 일으키고,
그 결과로 마음의 안정과 오온의 생멸을 볼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위빠사나는 오직 현재의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쌍으로 생멸하면서 이어지는
찰나삼매(찰나집중)를 유지해 다섯 장애를 극복한다.
그런 뒤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12처를 알아차리고,
7각지(七覺支)를 알아차리고, 사성제(四聖諦)를 알아차려, 열반에 이른다.
이렇게 ④의 방법으로 열반에 이른 경우에는 혜해탈자라고 부른다.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이나 처음에는
모두 다섯 장애가 일어나므로 그들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단 극복을 하면 선정을 얻거나, 지혜를 얻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마하시(Mahasi Sayadaw) 방법은
사마타 수행 없이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하는 순수 위빠사나 방법으로 지도한다.
이 방법이 현대생활에 잘 접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고,
법이며, 생활 속에서 번뇌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키우는 수행법이 ④번의 순수 위빠사나이다.
그리고 사띠(sati, 염/念)와 사마타, 위빠사나의 차이점과 상호관계에 대해서 보면,
사띠(念)는 판단 없이 현재의 순간순간에 주시하는 자각이다.
사마타(止)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마음이 머무른 상태로서 집중을 의미하고,
위빠사나는 대상의 변화를 지켜봄으로써 그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이들의 관계는 사띠에 의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개발된다.
그래서 사띠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기반이면서 이들 양 속성을 모두 가진다.
그런데 이런 정신집중과
통찰수행은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고 이론적인 설명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이다.
알음알이의 경계가 아니라 실행의 경계이다. 사마타, 위빠사나, 사마디의 관계를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사마타(samatha)란 안으로 마음을 고정시키고 안정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고,
위빠사나(vipassana)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자아가 아니라고 아는 것이며,
사마디(samādhi)는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이다.
사마디는 초선(初禪), 제2선(二禪), 제3선(三禪), 제4선(四禪),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8단계가 있다.
사마디는 마음의 구족이다. 사마디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아야 한다.
이상이 사마타(samatha),
위빠사나(vipassana),
사마디(samādhi), 이들 셋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럴 설명하면서 느낀 것은 언어의 한계이다. 말로는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 실제 사마타, 위빠사나, 사마디에 들어갈 수는 없다.
이것이야 말로 전문가에게 지도를 받아가면서 수행에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대충 “아! 이런 것이 있구나” 하는 정도만 이해하면 된다.
다만 이런 글들을 읽고 이런 수행에 관심이 생겼다면
실제로 전문가를 찾아 명상센터 같은 곳에 들어가서 지도를 받으며 실수(實修)를 해야 한다.